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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논문이랍시며 이곳저곳에 한창 싸지르던 시절,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의 책성(柵城) 순수(巡狩)와 봉선(封禪)〉이란 제목의 글 한 편을 탈조한 일이 있으니, 한민족학회라는 곳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한민족연구》 제3집(2007년 6월 발간)에 수록됐다.(동 기관지 45~69쪽에 실렸다.)


이 글은 나로서는 적지 않은 공을 들인 것이었으나, 이것이 어찌하여 저 잡지에 기고되기에 이르렀는지는 자세한 내막을 지금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회장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저 학술지나 학회 모두 그 명칭에서 소위 말하는 '국뽕' 냄새가 짙기 마련이거니와, 실제 그것이 표방하는 정신도 그랬다고 기억한다. 


저 무렵 정 교수가 저 학회가 주최하는 어떤 자리에서 논문 발표를 하나 부탁했거니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내가 거절치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저 논문 토대가 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그것을 저 논문집에 실어야 한다기에 투고한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저 학술단체와 저 학회지가 워낙 존재감 미미한 까닭인지, 나 역시도 저 논문을 쉽사리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소위 말하는 등재지에다가 글을 실어 점수를 따야 하는 처지가 아니기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내 논문을 봐야 내가 말하고자 한 논지가 다시금 정리가 되겠지만, 해당 잡지는 발간 직후 내가 정 교수한테서 받은 간행본 2부 정도가 있어 그것이 서재 어딘가에서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겠거니와, 지금 그것을 참조하지 못하는 내가 이 자리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본기 46년(AD 98)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봄 3월, 임금이 동쪽 책성(柵城)에 가는 도중 책성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2년이 지난 동왕 50년(102)에는 이해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다(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는 대목이 있다. 


내가 저 글에서 천착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태조왕은 책성에는 왜 갔으며, 그 순수가 어떤 의미를 지느냐였으니, 결론은 이것이 동아시아 전통시대 군주가 더러 행하는 전국 순례 행사인 순수(巡狩)에서 한발 더 나아간 봉선(封禪)이라는 사실이었다. 봉선이란 무엇인가? 


역대 중국의 제왕이 태산과 그 인근 상대적으로 작은 산에 올라 각각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을 각각 제사하는 광세(曠世)의 제전(祭典)이다. 이는 광의로 보면 종묘사직 제사의 일종이지만, 그 어떤 국가 단위 제사도 그 위용과 권위, 그리고 그 비용에서 봉선을 뛰어넘을 자가 없었다. 그만큼 봉선은 돈이 많이 들었고, 그 조건 역시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봉선을 하고자 오가는 황제의 행차 자체가 순수였다. 나아가 중국을 견주건대 그 제장(祭場)인 태산은 언제나 서안이나 낙양에 견주어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동쪽으로 순수한다는 뜻에서 봉선을 거행하기 위한 황제의 행차를 동순(東巡)이라 했다. 


더불어 모든 봉선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절대의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하태평이었다. 황제가 이끄는 지상에서 황제가 지상의 천국을 건설했음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제사가 봉선이다. 하지만 말로만 천하태평일 수는 없으니, 하늘은 그에 대한 징표를 보여주어야 했으니, 이를 일러 서징(瑞徵)이라 한다. 


이 서징으로 태조왕의 책성 순수에 등장한 것이 바로 백록(白鹿)이다. 이 백록은 하필 태조왕이 계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잡은 것이니,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다. 왜 백록을 잡고 나서 책성에 이르러 태조왕은 뭇 신하와 백성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였겠는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계산이라는 산에 올라서 봉선을 지내고 난 다음 그 위로연이었던 것이다. 


모든 봉선은 기공각석(紀功刻石)이 따르기 마련이거니와, 이는 황제가 지상에 태평성대를 이룩했으며, 이에 천신과 지기에 감사한다는 뜻을 돌에 새겨 기록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왜 돌에 새기는가? 그것이 영원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봉선은 워낙 규모가 큰 행사였기에 이를 한번 치루면 국가 재정이 휘청댔다. 특히나 그 제장이 되는 주변과 황제가 지나는 길에 위치한 군현들은 출혈이 극심했다. 그래서 언제나 봉선을 치르고 난 직후에는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면세조치를 내리기 마련이다. 태조왕 역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어, 책성을 다녀온 다음 곧바로 해당 지역에 대한 면세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들로 볼 때 태조왕이 즉위 49년째에 행한 책성 방문은 봉선이었음이 명백하다는 결론을 나는 도출한 것이다. 허심하게 넘기기만 한 저 간단한 기록에다가 나는 봉선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힘들인 글이었다. 혹 내 컴퓨터와 외장하드를 뒤져 그 글을 발견한다면, 기회를 보아 공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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