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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말하기를 좋은 논문 쓰고 싶거덜랑 논문을 읽지 말라고 한다. 논문 쓰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항용 말하기를 남들 논문 읽고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라 하며, 실제 무수한 교육현장, 특히 석·박사를 배출하는 대학원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져 그 교육 내용을 볼짝시면, 남들이 써제낀 논문 읽기와 그것을 토대로 삼은 논문 발표가 무한반복한다.  




말하거니와,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한다 해서 좋은 논문 나오는 법 결코 없다. 내 열 손가락 다 지져도 좋다. 이런 공부 혹은 교육 방법을 탈피하지 못하니 매양 논문이라는 것들을 보면, 남들 무슨 얘기했다 잔뜩 나열 정리하고는 그에 대한 비판이랍시며, 자기 말 한두 마디 보태고는 그걸 논문이랍시며 제출하곤 한다. 논문이 논문을 쓴다는 말은 이렇게 해서 언제나 적어도 국내 학계에서는 정당하다. 그런 까닭에 그리 제출된 논문을 볼짝시면 제아무리 뛰어난 논문이라 해도, 그 전체 중 음미할 만한 곳은 10%도 되지 않는다. 걸러내고 나면 남은 대목이 없다.


좋은 글, 좋은 논문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어야 한다. 그 첫마디부터 마지막말까지 단 한 마디도 버릴 것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목이 아프도록 지적했듯이, 지금 우리네 글쓰기 논문쓰기를 보면 같은 영화를 무한 반복하는 영화전문채널 OCN이다. 언제나 성탄절을 장식하는 《나홀로 집에》다. 그것도 같은 말 무한 반복이라, 국문초록과 영문초록이 같은 말이요, 국문초록과 서문이 같은 말이요, 국문초록과 서문과 결론이 같은 말이요, 국문초록과 서문과 결론과 요약이 같은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잘쓴 글이란 이 네 가지가 모두 달라야 한다. 그 요지는 같다 해도, 그 표현이 달라야 하고, 그 전거가 달라야 하고, 그 문체가 달라야 한다. 논리 전개도 달라야 한다. A라는 주제에 대해 이전 어떤 선행 연구자가 B라고 말하고, C가 D라고 말하고, E가 F라고 말했는데 나는 G라고 생각한다는 논리 전개 구조를 언제까지 고집할 것인가? 


논문을 읽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에 얽매여서는 결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언론계 속어를 빌리건대 우라까이에 지나지 않는다. 선행연구성과를 제대로 검토한 다음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표출해야 한다는 주입은 제 아무리 그 글이 훌륭해도 언제나 선행 연구자 따라지를 양산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선생이라는 자들도 개중 소위 열린 자들이 매양 하는 말이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하지만, 이 말이 언뜻 보면 훌륭하기 짝이 없는 듯하지만, 그 속내를 따져보고, 실제로 요구하는 글쓰기 스타일은 물론이요, 그 논리 전개 구조도 자기 연구를 토대로 해서 그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한계를 그 선생이 인정하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해서 받아들이는 선생을 태어나서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선행연구성과를 제대로 음미해야 자기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리 해서는 결코 새로운 목소리는 나올 수 없고 가지치기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선생은 학생을 구속하고 차꼬에 가둘 뿐이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사를 갈파한 말을 빌린다면 영원한 플라톤 각주달기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를 쓸 것인가 새로운 원전을 쓸 것인가, 이제 그것을 글 쓰는 이는 결단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이 없어 각주나 쓰겠는가? 

  1. yisabu 2018.09.19 13:36 신고

    이 글은 에세이 꼭지 아래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2. 한량 taeshik.kim 2018.09.19 19:31 신고

    그래야겠군요

곡성 설산 일대 풍경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하지만 이 구절이 들어간 애국가 가사와 곡조가 등장할 적에 한반도 삼천리는 화려한 강산과는 거리가 전연 멀어, 온통 천둥벌거숭이였으니, 그리하여 매양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곳곳은 사태(沙汰)로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고, 그것이 초래한 매몰에 인적·물적 희생이 다대했다. 사태는 강바닥 상승을 부르기 마련이라, 그만큼 물난리에 고통이 더 컸던 것이다. 김동인이 말한 '붉은산'이 그 무렵을 우뚝히 증언하는 말이었다.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70년대 온 산하가 그렇게 붉었으니, 산허리는 곳곳이 여드름 자국 잔뜩한 곰보 같았다. 


70년대를 회고하는 사람들한테 익숙한 다른 우리 주변 풍경에 백사장(白沙場)이 있다. 당장 내 고향 김천만 해도,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감천이라는 지류가 있어, 그것이 관통하는 김천 시내 그 강안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발달해, 소장이 섰는가 하면, 오일장에 즈음해서는 씨름대회가 열리곤 했으니, 그 시대 최고 씨름꾼 김성률은 바로 이런 김천이 낳은 스포츠스타였다. 


낭만으로 점철하는 그 백사장. 하지만 단군조선 이래 우리 산하가 줄곧 이런 백사장이 펼쳐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산림파괴가 준 선물이었으니, 직접으로는 헐벗을 대로 헐벗은 산에서 빗물에 씻긴 모래 사태가 준 환경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정겨운 고향 운운하며 백사장을 오버랩할지 모르나, 백사장은 홍수를 부르는 직접 동인이었다. 한강 역시 그러해, 지금이야 전두환 정권 최대 치적으로 꼽는 한강 치수사업이 마침내 성공하면서, 한강에 의한 직접 범람이 요새는 먼나라 얘기로 변해버렸지만,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강은 걸핏하면 범람을 일삼았으니, 그 범람이 부른 선물이 바로 드넓은 한강 백사장이었다. 


80년대 중반 김천 아포의 한 백사장



애국가 얘기 나온 김에, 나로서는 참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구절로 그 가사가 첨절하거니와, 당장 저 '화려강산'은 차치하고라도,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 했지만, 애국가 등장 무렵 남산에 소나무가 있기라도 했는지 적이 의뭉스럽다. 지금의 서울 시내 중심을 걸터앉은 남산 중에서도 한쪽 구역에 아름드리에 가까운 소나무 군락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애국가에 맞춘 남산 경관 조성 사업 일환으로 나중에 심고 가꾼 모습이다. 더불어 지금이야말로 온산이 수목으로 울창하니, 진짜로 애국가가 말한 금수강산이다. 


다만, 그 수식어 '삼천리'는 반토막이라, 휴전선을 건너면 전연 딴판인 경관이 펼쳐지니, 저 북녘 온국토는 우리가 70년대까지 익숙한 그 풍경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남북협력 사업이 본격화하거니와,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철도건설과 산림 녹화라는 사실은 삼림이 얼마나 중요한 당면 사업인지를 역설한다. 당장 내일 개막하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 평양편에 우리 정부 수행단으로 산림청장이 들어간 이유다. 


지금의 북한, 70년대 이전까지의 남한 산하, 다시 말해 백사장과 민둥산이 대표하는 그 경관은 흔적을 추적하면, 대체로 17세기 중반 이래 조선의 산림이 급격하게 황폐화하면서 생성된 것임을 짐작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대로 산림이 우거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불과 60~70년대 이전만 해도 화전(火田)이 광범위해서, 지금 우리가 보는 풍광과는 사뭇 달랐음이 틀림없다.


부여 능산리 절터



경관...랜스케입landscape은 자명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요 인위가 개입한 결과물임을 나는 여러 번 말했거니와, 이런 간단한 이해를만 있어도, 우리가 쉽게 말하는 자연(自然)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나 하는지, 나는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인위와 대비하는 의미에서 자연은 어쩌면 매우 폭력적이다. 그 폭력을 다스리고자 하는 인간의 간섭 행위를 인위라 한다면, 경관이란 자연히 주어지는 그 무엇도 있겠지만, 한반도에서 그 자연은 어쩌면 단군조선 이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그만큼 자연과 인위가 빚어내는 교향곡인 경관의 중요성이 새삼 중요해진다고 나는 본다. 


이런 경관으로 나는 우리 대표 고도들인 경주와 부여, 그리고 공주 세 곳을 들어 비교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경주가 여타 두 고도와 확연히 다른 점은 전자가 비교적 평화로운 왕권 교체 속에서 전 왕조 유산이 비교적 온전하게 살아남은데 견주어 후자 두 고도는 전자에 거점을 둔 왕조에 궤멸에 가까운 막대한 훼손을 보았다. 신라는 무력으로 백제를 정벌한 까닭에 그것을 멸할 무렵에 제1 수도 사비 부여와 제2 도읍 웅진 공주를 초토화했다. 그것이 멀리는 비슷한 고도임에도 작금에 이르는 왕청난 랜스케입 차이로 빚어지는 한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원초의 자산 차이와 관계없이 고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인위의 개입이 얼마나 경주되었는가는 두 지역 왕도의 랜스케입까지 왕청나게 갈라놓았다. 물론 공주와 부여에 이런 인위가 개입되지 않았다 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시대가 국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오늘날 우리한테 익숙한 경주를 만드는 바탕이요 남상이었다. 


경주 대릉원



공주를 보라. 공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는 공주 시내에서 백제 고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 유산을 대표한다는 무령왕릉도 규모가 코딱지인 데다, 동시대 신라무덤과는 달리 산중턱을 까고 들어가 무덤방을 만들고 이렇다 할 봉분 시설을 마련하지 않는 데다 철문까지 꽝꽝 닫아놓아 적어도 외양으로는 볼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무령왕릉 개방을 줄곧 주장하기도 한다. 


부여는 정림사지, 더욱 정확히는 그 석탑이 아니면 백제라고 느낄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여타 낙화암이며, 능산리고분이며, 부여나성을 들기도 하겠지만, 휑뎅그레한 기분은 씻을 길 없다. 


그런 공주와 부여가 최근 들어 급변하는 중이다. 공주의 경우 주로 제민천 일대 도시재생산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이 사업을 따라 도시 면모가 바뀌는 중이다. 부여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와 맞물려 이미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읍내에서는 전봇대가 사라졌으며, 곳곳에서 백제 고도 맛을 내는 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물론 그 내용 하나하나가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실제 그렇기도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경관은 인위가 개입한 결과이지, 결코 소위 자연 그대로 놔두어서는 주어질 수가 없다. 나는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연이 오직 숭고하기만 하다는 소위 원초론적 환경보호주의에 찬동하지 않는다. 민둥산을 없애고 수풀을 만들었듯이, 강바닥을 준설하고 둔치를 건설함으로써 백사장을 없앰으로써 범람을 퇴출했듯이, 그런 적극적인 인위가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공주 석장리박물관



랜스케입, 혹은 그 일환으로서의 고도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마른 하늘 제우스가 각중에 내리는 벼락은 아니다. 


  1. 2018.09.17 15:29

    비밀댓글입니다

아래는 2010년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가 공간하는 잡지 <<일본공간>> 8호에 투고한 내 논문 '한일간 문화재 반환, 우리를 반추한다' 중 말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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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우리 안의 반환 청구 문화재


이 글 첫 머리에서 필자는 경복궁 경내에 있는 異質의 석조문화재 2건을 언급했다. 그 중에서도 필자 또한 열렬히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열망한 한 사람으로서, 경복궁 경내에 선 그 복제비를 보면서 이제 5년이 흐른 지금은 그런 열정이 상당 부분 식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은 “차라리 북관대첩비를 반환받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북관대첩비가 반환되어 북한으로 돌아감으로써 이제 그것이 대표하는 제국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을 생생히 증언하는 실물 하나가 줄어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북관대첩비가 일본에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는 흔적은 기록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 복제비를 보는 지금은 마음 한 켠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와 나란한 지광국사 현묘탑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의 폭격에 워낙 산산조각이 났다는 이력을 고려한다고 해도, 왜 현묘탑은 그 일란성 쌍둥이라 할 지광국사 현묘탑비와는 여전히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제자리를 떠나 遊離 생활을 하는 ‘우리 안의 문화재’가 현묘탑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또 다른 비극이 숨어있다고 필자는 본다. 


2005년 개관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적지 않은 석조문화재가 있다. 개중에는 필자의 고향인 경북 김천 갈항사 터에서 실어 나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한 쌍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야외 석조물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이들 석조물 앞에 반드시 있는 문화재 안내판과 그 내력을 추가로 조사해 보면, 그 대부분이 식민지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해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빛내기 위해 긁어모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왜 아직 이곳에다 눌러 놓느냐고 윽박지르는 식으로 따질 수만은 없다.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박물관에 수장되고, 국가와 국민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그것이 지금처럼 보존되게끔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일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떠난 저들 석조물을 국립박물관 뜰에다가 세워놓을 수는 없다. 저들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 박물관 측은 “현지에서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흔히 댄다. 하지만 저런 논리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피식민지 국가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한 반대논리와 대단히 흡사하다. 문화재를 약탈하고, 그것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논리에는 어쩌면 또 다른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강남 세곡동 일대에 임대주택이 들어설 무렵이었다. 

재개발 예정지는 나중에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지금은 아마 아파트가 서 있을 것이다. 

한데 그 개발이 추진되는 와중에 인근 주민대표들들이 당시 문화재 담당 기자인 나를 찾아왔다.  이른바 좀 있는 사람들이다. 

그네들 이야기인즉, 세곡동 임대주택 개발 계획을 막아달란 얘기였다. 

이야기인즉, 이곳에는 문화재가 많으니 개발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다녀간 뒤 다른 곳에 알아보니, 임대주택이 들어오면 인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함을 염려한 데서 나온 도움 요청일 가능성이 컸다. 

내가 알기로 그네들이 그 개발을 막고자 마지막으로 찾아낸 것이 문화재였다. 

그때 내가 실감했다. 

"아, 시대가 변했다. 문화재가 방패막으로 나서는 시대가 되었구나"


비슷한 시기.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다 나가 떨어지고 마지막에 오직 문화재만이 남았다. 

난 문화재가 그리 힘이 있는 방패막이가 되는 줄 미쳐 몰랐다.


다시 비슷한 시기 

사대강 사업이 논란이었다. 

그것을 막고자 하는 방패막이 최전선에 문화재가 동원되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보다 좀 이른 시기

등록문화재가 도입된 초창기였다. 

지금은 제도도 바뀌고, 지원 방안도 좀 보강되었지만 초창기에는 그러지 않아 등록은 말 그대로 등록일 뿐이라, 소유주 꼴리는대로였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때라 등록문화재라고 하니, 예고된 그날 소유주는 포크레인 동원해서 그 건물을 부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해안 소금창고는 일거에 사라졌고, 명동 어느 건물도 폭삭 폭파됐다.

이 등록문화재 초창기 시대가 내가 보는 문화재에 대한 반항의 마지막 발악시기다. 

이후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 급속도로 방패막이로 나서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투자대상으로 변했다. 


여전히 문화재를 향한 저항이 만만치는 않으나 전국에 걸쳐 이곳저곳 문화재 못만들어 환장하는 시대에 돌입했다. 내가 정확한 통계치는 없지만 지금 문화재위에 사적 지정해달라고 올라온 건수가 300건이 넘는다고 안다.

격세지감이다. 

문화재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던 시대가 불과 엇그제인데 이제는 너도 나도 문화재 만들어달라 아우성인 시대다. 


왜인가?

문화재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그에 덩달아 조금은 제도와 지원 방안도 좀 바뀌었기 때문이다.

설악산?

이거 세계유산 만들겠다 했더니 안된다 데모하고 지랄한게 1995년 1996년이다. 

요새는 세계유산 못만들어 환장한다.

부여 공주 익산은 세계유산되고 나서 지금 혁명이 일어났다. 

그 주변 가봐라. 

작년에 알던 그 부여 공주 익산은 선캄브리아 후기로 벌써 사라지고 없다. 

천지개벽이다.

문화재가 돈이 되는 시대다. 


나아가 문화재 지정되기만 하면 소유주는 손도 안대고 코푸는 시대가 돌입했다. 

이걸 이미 민감하게 알던 곳이 불교계가 대표하는 종교집단과 문중집단이었다. 

이들은 이미 알았다. 

문화재로 지정되기만 하면 불사 국가 돈으로 하고 문중 일 국가돈으로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자체 역시 마찬가지라. 일단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면 중앙정부 7, 지방정부 3 비율로 부담하되, 다시 지방정부 부담률은 광역자치단체 5, 기초자치단체 5 비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돈 거의 안들어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잊어먹기 전에 내 시대에 일어난 문화재의 드라마틱한 변모를 기록해둔다. 

그렇다고 내가 저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거나 아니면 긍정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주로 오지 혹은 저개발국가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성향 중 하나는 꼬질꼬질하고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이들에게서 순진무구를 창안한다는 점이다.

구질구질 농촌에서 도시문명과 견주어 때묻지 않았다고 칭송하곤 한다.

이르노라

꼬질꼬질에 순진무구는 없다.

그것은 낙후이며 가난이며 질병이고 고통이다.

그것은 박멸해야 할 과오요 퇴출해야 할 미개다.

배 부른 소리 걷어치워라.

  1. 역문팬 2018.01.21 17:42 신고

    맞는 말씀이에요. 여행지는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인듯 합니다.

  2. 한량 taeshik.kim 2018.01.21 17:49 신고

    그렇겠지요

역사 산업 history industry

요새 유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근자에 구미 유대계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를 빌미로 사실상의 사업을 벌이는 역사학계를 갈파한 홀로코스트 인더스트리를 낸 모양이다.

실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사회가 한국역사학계다.

동북공정이며 전후청산이니 해서 각종 사태 만들어 그에 대항한다며 국민과 국회를 겁박해 각종 조직을 만들고 프로젝트 급조하고는 돈을 따낸다.

더불어 마침내 교육계를 겁박 겁탈하고는 역사교육강화라는 미명 아래 역사를 필수과목화하고 고시과목에도 필수를 추가했다.

이것이 새로운 수법이라면 고전적 역사산업이 국가보훈사학이다.

한국근현대사는 실은 역사학의 본령이랄수 있는 자기성찰이었던 적이 결코 없이 남 탓하기에 얼이 빠져 일제라는 타자와 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타자를 설정하고는 우리가 이 모양인 까닭은 니들 때문이었노라 두들겨패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그 칼날이 내부를 향하여 자신은 배제한채 오로지 우리가 이 모양인 것은 니들 친일파 친미파 탓이라고 돌림으로써 자신은 순고한 피해자가 되고 심판관이 되고 저항운동가가 되었다.

나쁜 놈을 색출하고는 그것이 역사학의 본령이라 호도하니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민주투사가 남발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미명 아래 정부기관 빌붙어 프로젝트 수행하고는 영웅을 만들어내고는 그것을 빛나게 할 타자로써 친일파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논문 하나 책 하나 나올 때마다 그것을 근거로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냈으니, 그런 독립운동가가 탄생한 길을 따라 기념사업회가 출현하고 그 기념사업회에는 어김없이 그를 독립운동가로 주물한 역사학자가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했다.

말한다.

한국에 역사학이 있느뇨?

역사업계 장사꾼만 난무한다.

<강릉 선교장 송림(松林)>


<기자수첩> 소나무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2014/01/03 18:05 송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화재 보수 현장을 소재로 하는 사건마다 거의 늘 빠지지 않는 논리가 국수주의다. 우리 것이 마냥 최고로 좋다는 믿음이 지나쳐 우리의 문화재 현장에 들어가는 재료는 반드시 국산이어야만 한다는 믿음은 외국산에 대한 혐오로 발전하곤 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본다.


그런 극명한 보기가 단청 훼손으로 촉발한 숭례문 복구 부실논란 사건이다. 총체적 복구 부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로 외국산, 특히 일본산 아교나 안료 사용을 들었다. 국보 1호인 우리의 자존심 숭례문을 복구하는데 어찌 일본산을 쓸 수가 있느냐는 질타가 쏟아진 것이다.


숭례문 복원에 쓰인 목재 중에서도 기둥이나 들보처럼 덩치가 큰 주축 건축 소재인 대경목(大梗木)이 국산이 아니라 러시아산이라는 의혹에도 이런 국수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물론 애초에 사용하기로 한 삼척 준경묘의 이른바 금강송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이보다 헐값이라는 러시아산을 썼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믿음을 배신한 중대 범죄 행위이며, 그에 대한 중벌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 알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 관련해 만약에 러시아산을 썼다면 지금의 숭례문을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느니, 국산 금강송은 잘 건조하면 균열 현상도 발생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소나무이며, 러시아산을 비롯한 여타 외국산 소나무에 견주어 가장 훌륭한 건축 소재라는 주장이 나오고, 더구나 그런 말이 정답인 것처럼 통용되는 현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국내에서 흔히 '금강송'으로 통하는 소나무는 동해안 일대 백두대간을 따라 자라는 육송을 지칭하는 비학술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금강송이 좋은 목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세계 최고의 목재일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금강송은 좋은 목재 중 하나인 것이다.


그것과 바꿔치기했다는 의혹이 이는 러시아산 소나무만 해도 유라시아 대륙을 걸치는 그 광활한 대륙의 어느 곳에서 생산된 소나무인지에 따라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소나무가 혹여 두만강 건너편 연해주산이라면 그 소나무 역시 이른바 금강송의 일종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경주 경덕왕릉 솔숲>


그리고 설혹 러시아 다른 지역 소나무라 해서, 그리고 그 가격이 국내산 금강송보다 훨씬 싸다 해서 품질 또한 국산보다 저급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이 분야 전문가들은 코웃음을 친다. 나아가 금강송은 충분히 건조하면 건물을 세워도 갈라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적어도 고건축학자나 식물학자들에게는 비웃음을 산다.


우리 소나무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전통건축에서 그런 소나무만 썼다면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해 적어도 수백 년을 버틴 전통건축물의 기둥과 들보가 곳곳에서 균열이 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금강송이라 해서 갈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산 소나무 중에서도 전문가들은‘더글러스 소나무’라 불리는 캐나다산 소나무는 건축재료로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실제로 이 소나무는 광화문 복원에도 쓰였다. 하지만 광화문에 캐나다산 소나무가 쓰였다고 해서 그것이 부끄럽다고 저 건물을 헐어내고 국산 소나무로만 채운 새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설혹 숭례문에 러시아산 소나무가 쓰인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하자. 그것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므로 그 행위가 범죄행위가 될지언정, 그렇기에 그것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논리는 될 수가 없다.


숭례문, 광화문이 대한민국 문화유산이라는 국적이 부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무가 국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아래는 2012년 7월 11일, 내 페이스북 포스팅인데 시대 추이를 감안해 한 구절을 첨가하고, 몇 군데 단어는 교정했다. 


이른바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 그리고 명박산성으로 시끄러운 서울광장 주변을 내가 유심히 살핀 적 있다. 그 인근 맥주집은 태연히 맥주를 즐기는 인파로 미어터졌다. 

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길거리로 나섰다. 물경 백만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거기엔 나도 있었고, 이른바 넥타이 부대도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전부인줄 안다. 그때 대한민국 전부가 그랬을 줄로 안다. 두 사건에 나로서 차이가 있다면 한번은 관찰자요 한번은 참가자였다는 점이다.

내가 요즘와서 절감하는건 이 요란한 잔치에도 그것과는 전연 아랑곳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요, 그 숫자가 외려 절대다수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자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그랬다고 주장한다.

아무도 그렇지 않은 절대다수가 뒤켠에 담담히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보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내가 본것이기에 사실일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온 역사가 그리했다고 증언하며 그렇게 기록한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하며,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를 부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였다고 말한 것은 명백한 역사조작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리 기록하고 증언한 자들이 실제 그러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그것과는 전연 아랑곳없던 무수한 사람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전부가 몰명화해서 끌려들어간다. 

나는 앞으로의 역사는 이런 선택적 기억의 폭력에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간 사람들의 구출과 호명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그 역사 어디에도 갈곳없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할아버지 내 할머니를 건져내는 일이라고 본다. 친일도 독립투쟁도 아니했음에도 오직 민족의 피해자라는 무책임한 기술로 몰명화한 아버지를 불러내고자 한다. 


2015.7.10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약간 손질했다. 


- 세계유산 삭제 드레스덴 엘베계곡을 덧붙여 논함-

역사유산으로 먹고 사는 애들, 예컨대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도 여전히 세계유산 신규 등재에 열을 올립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 관광을 접목한 지역경제 활성화와는 전연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물론 서구유럽이라고 해서 그런 곳이 없겠습니까만은, 이번에 등재된 터키 에페수스만 해도 세계유산이 되건 말건, 이미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곳입니다. 예컨대 루브르박물관을 프랑스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고 치죠. 프랑스가 왜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하겠습니까?

관광?

그거 아니라도 미어터지는데???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중국 같은 데는 접근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계유산 등재를 통한 역사도시 이미지 확보와 그를 통한 관광객 끌어들이기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도 이런 목적에서 추진했으며, 실제 경주 양동마을은 등재 이전과 이후는 천지개벽입니다.


이 차이점은 세계유산 등재 현장을 가 보시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네 세계유산지역은 우선 그 입구에 이곳이 세계유산임을 요란스럽게 선전하는 광고판으로 넘쳐나고,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하지만 서유럽 세계유산 현장 가 보세요. 이곳이 세계유산임을 광고하는 안내판은 어디에 쳐박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숨어 있습니다. 아주 없는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구 세계는 세계유산을 등재하는 가장 큰 목적이 그 유산의 보존 관리 체계 확립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라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목적이 관광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이 2009년에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건설 문제로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습니다. 이 일을 국내에서는 무슨 대사건이 되는양 침소봉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세운상가 개발했다가는 종묘가 세계유산에서 삭제된다...이건 큰 일이요 국제 망신이다는 논리로 공격을 해대지요. 


하지만 드레스덴 현지에서는 아무도 세계유산 삭제를 굴욕이라거나 치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삭제 과정에서 찬반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네들한테는 교량 건설이 더 중요했습니다. 실제 이 교량이란 것도 기존 세계유산 경관에 전연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려 도시활성화 차원에서 드레스덴에는 이 교량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어찌되었는가?


드레스덴 관광객은 세계유산 등재 때보다 삭제 이후에 외려 늘었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입니다. 세계유산을 등재하는 목적과 효과는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논문박사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다면 시정을 바란다. 자기가 이전에 발표한 논문을 묶어서 박사학위를 받는 제도다. 일본에서는 확실히 있고, 다른 나라에는 어떤 지 모른다. 국내에는 이 제도가 없다. 

왜?

교수 혹은 대학 때문이다. (모든 교수가 그렇다는 뜻이 아니니 곡해마라)

교육부가, 학교가 정한 코스를 밟아야만 석박사 자격을 준다고 강제한다. 

왜? 

그래야만 대학은 수업료라는 돈을 챙기고, 교수는 대학원생을 노예 부리듯 하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는 대학과 교수라는 틀과 과정을 통해서야만 주물해야 하는가?

현재의 대학원 제도의 폐습 중 상당수는 이런 제도에서 말미암는다. 

나는 일본식 논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안다. 논박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논박제도는 적어도 병행은 해야 한다. 


논박이 필요한 이유는 현 대학원 제도 아래서 각종 비인권적 폭압에 대한 대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제도에서 교수는 대학원생에 대해 절대 군주이며 태양이며 하늘이며 야훼다. 제 맘에 안든다고, 제가 생각하는 논지와 다른 논문을 제출했다고 심사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고분고분 말 안듣는다고 심사를 반려하는 비인권적 폭력은 방축되어야 한다. 이런 억압체제가 각종 폐습을 낳는다. 


근자 이런 말 들었다. 논문 제출하려 했더니 지도교수가 거부했다고 한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논문을 낼 생각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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