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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마지막 왕. 창업주인 아버지 견훤을 폐위 유폐하고는 즉위해 나라를 다스렸지만, 고려에 패해 포로가 되고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사기 열전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있어 모양이 몹시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곤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하니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다. 이때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의 세 아들, 즉, 신검(神劒)·룡검(龍劒)·량검(良劒)이 즉위해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서 패하니 후백제(後百濟)는 아주 없어졌다....병신(丙申; 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룡검(龍劍)·량검(良劍)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견휜(甄萱)이 임자년에 광주(光州)에 도읍했다. 을미년에 훤(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스스로 즉위했다. 이해에 나라가 없어졌다. 임자년 이후 이때까지 44년만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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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 국선의 시초인 설원랑(설화랑)을 일컫는 존칭.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540)에 즉위했다. 백부(伯父)인 법흥왕(法興王) 뜻을 사모해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 처녀로 아름다운 이를 뽑아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는 무리를 모아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니,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두 원화를 뽑으니, 이에 모인 사람이 300~400여 명이 되었다. 교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는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 무리가 듣고는 그 시체를 북천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이 령을 내려 원화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령을 내려 양가(良家) 남자 중에 덕행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다. 그런 까닭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 때에 이르러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정자貞慈라고도 한다)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하기를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 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웅천(熊天)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가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가 올라가 읍(揖)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저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 중들에게 지난밤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면서 또 이르기를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라고 하니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봄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고 하니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가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다”고 했다. 그가 나가 묻기를 “낭(郎)은 댁이 어디시며 성(姓)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며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고 했다. 이에 진자가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자제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풍류(風流)가 빛남이 거의 7년이나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명하는 이가 말했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재배함이 한결같았네. 문득 봄 되돌아가고 찾을 곳 영영 없으니, 누가 알았으랴, 상림(上林)의 一時春을”   

미시(未尸)설원랑(薛原郞) ☞설화랑(薛花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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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 백성으로, 고구려에서 온 불교 승려 묵호자(墨胡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포교토록 한 인물. 곳에 따라 모례(毛禮)라 표기한 데도 있다. 그의 성별은 전연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보통 남자로 간주되지만, 여성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권 제3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간혹 믿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하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렇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아<我>는 성이다)굴마(堀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녕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가 그를 출가케 하니, 나이 16세에 위(魏)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다. 금교<金橋>는 서천(西川)의 다리지만, 솔다리[松橋]라 잘못 부른다.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해졌다가 법흥왕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고 을묘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歧)(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니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 계유년<553>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년<634>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尾(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 을미년<635>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天王寺>로 문무왕 기묘년<679>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다)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시대 절터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彡麽>라 불렀다. 삼마<彡麽>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해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했다. 그때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기(三川歧)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녕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cf. 모례(毛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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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3대 왕. 재위기간은 514~540년.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서 난 첫아들로, 부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본명은 모진(募秦), 모즉지 등으로 등장한다. 재위기간 율령을 반시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했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신라사 획기를 이루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정비인 보도부인에게서 진흥왕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낳았다. 적통 아들이 없어 조카이자 외손인 진흥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화랑세기(발췌본) 서문 :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함이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해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를 원화(源花)로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에게 받들도록 했다. 앞서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면서,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주로 했으나 국공(國公)들이 줄을 지어 행한 뒤에 선도는 도의(道義)에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빼어났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花郞者 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太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花郞)之名始此 古者仙徒只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爾義相勉 於是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不可不知也)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법흥왕(法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지증왕 맏아들로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保刀夫人).3년(516) 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용이 양산(楊山) 우물 안에 나타났다. 4년(517) 여름 4월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년(518) 봄 2월에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7년(520) 봄 정월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과 붉은 색,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8년(521)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9년(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11년(524)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12년(525) 봄 2월에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 군주로 삼았다. 15년(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하였다.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더니, 왕의 딸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궁궐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였는데 신봉자가 가끔 있었다. 이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난처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자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왕이 말하였다. “뭇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16년(529) 영을 내려 살생을 금지시켰다. 18년(531) 봄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의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으니, 지금[고려]의 재상(宰相)과 같다.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1년(534) 상대등 철부(哲夫)가 죽었다. 23년(536)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25년(538) 봄 정월에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27년(540)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 승려 법운은 속명을 삼맥종(彡麥宗)이라 하며,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3대 법흥왕(法興王)은 이름이 원종(原宗)이다. 김씨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이르기를 성은 모(募)이며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아버지는 지정(智訂)이며 어머니는 영제부인(迎帝夫人)이다. 법흥(法興)은 시호다. 시호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갑오년에 즉위해 26년을 다스렸다. 능은 애공사(哀公寺) 북쪽에 있다. 비는 파도부인(巴刀夫人)인데 출가해서 법류(法流)라 하고는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 처음으로 율령을 행했다, 처음으로 十齋日을 행하고 살생을 금했다. 사람을 헤아려 승니(僧尼)가 되게 했다. 건원(建元)은 丙辰년이이 이 해에 처음으로 두었고 연호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삼국사기 권 제34(잡지 제3) 지리 : 함안군(咸安郡)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량국(阿尸良國)<또는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하였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현무현(玄武縣)은 본래 소삼현(召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소삼부곡(召部曲)이다. 의령현(宜寧縣)은 본래 장함현(獐含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삼국사기는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즉위년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다<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그때 나이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서 법흥왕 딸이며,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이름이 삼맥종(彡麥宗)인데 심◎(深◎)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법흥(法興)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다. 어머니는 지소부인(只召夫人)인데,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라고도 하며, 모량리(牟梁里) 영실(英失) 각간(角干) 딸이다. 생을 마칠 때 역시 머리를 깎고 갔다. 경신년에 즉위해 37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진흥왕(眞興王) :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즉위할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했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 딸로서 립종갈문왕(立宗葛文王) 비(妃)이다. 진흥왕이 임종(臨終)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 제32(잡지 제1) 악 :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 때 지었고,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 지었으며,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 때 지었다. 사내악(思內樂)<사내(思內)는 시뇌(詩惱)라고도 한다>은 나해왕 때 지었고, 가무(舞)는 나밀왕(奈密王) 때 지었으며,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 때 지었다.  대악(樂)은 자비왕 때 사람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지었으며, 우인(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 사람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 때 지었고,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 때 지었으며,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淡水)가 지었고,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지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 음악이고,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 음악이며,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 음악이다. 석남사내(石南思內)는 도동벌군(道同伐郡) 음악이고,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郡) 음악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운 까닭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악기의 수효와 가무의 모습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33(잡지 제2) 색복 : 신라 초기의 의복 제도는 색채를 상고할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의 복색의 존비(尊卑) 제도를 정하였지만, 아직도 오랑캐[夷]의 풍속 그대로였다....법흥왕의 제도에서는, 태대각간(太大角干)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주색 옷[紫衣]이고, 아찬부터 급찬까지는 다홍색 옷[緋衣]인데, 모두 아홀(牙笏)을 쥐며, 대나마ㆍ나마는 푸른 옷[靑衣]이고, 대사부터 선저지까지는 누른 옷[黃衣]이었다. 이찬ㆍ잡찬은 비단관[錦冠]이고, 파진찬ㆍ대아찬 금하(衿荷)는 다홍관[緋冠]이고, 상당 대나마(上堂大奈麻)와 적위 대사(赤位大舍)는 갓끈[組纓]을 매었다.


해동고승 권1 승려 : 법공(法空)은 신라 제23대 법흥왕이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원자(元子)이니,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키가 7척이며 너그럽고 덕이 있어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신령스럽고 거룩해서 만백성이 밝게 믿었다. 3년(516)에는 용이 양정(楊井) 안에서 나타났고 4년(517)에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고, 7년(520)에는 율령을 반시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주자지질(朱紫之秩)을 정했다. 즉위한 이후 항상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므로 왕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도(阿道)의 지극한 바람을 생각해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성조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 하셨지만 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이후로) 능인(能仁. 석가-역주)의 묘한 교화가 막히어 행해지지 못했으니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하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다시 상(像)을 조성해 선왕의 공적을 따라 좇으려 하는데 그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했다. 대신 공알(恭謁) 등이 간하기를 "근자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다 이웃 나라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해 전쟁이 쉼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을 괴롭히는 공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집을 지으려 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왕은 좌우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며 이르기를 "과인이 부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왕위를 이어 받으니 음양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치 못한 것 같소이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도 (내 뜻을) 거슬러 따르지 않으니, 누가 능히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16년(529)에 이르러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 이차돈<異次頓이라고도 하며 거차돈<居次頓>이라도고 한다)은 나이 26세이니 정직한 사람으로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깊어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몰래 아뢰기를 "왕께서 만일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신은 청하옵건대 거짓을 왕명이라 속여 유사(有司)에 전하기를 '왕께서 불사(佛事)을 창건하려 하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할 것이니 (이 때 왕께서) 바로 칙령을 내리셔서 '나는 그런 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댔는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신의 죄를 추궁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그들은 이미 완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그대를 죽인다 한들 어찌 복종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아뢰기를 "대성(大聖)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것이오니 만일 소신을 베시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오만스럽게 거역하겠습니가"라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본디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려 하거늘 도리어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몸을 희생해서 인(仁)을 이룸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이거늘 하물며 불법이 영원히 빛나고 왕조의 영원한 결속을 위해서라면사 죽는 날이 바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베옷을 입엇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라고 하며 이에 염촉과 함께 큰 서원을 깊게 맺었다.드디어 그 뜻을 전해 말하기를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니 집사들은 칙령을 받들어  일을 일으키라"고 했다. 조정 신하들이 과연 면전에서 그 일에 관해 쟁론했다. 왕은  이르기를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적이 없노라"라고 했다. 염촉이 이에 크게 외치기를 "신이 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참으로 경제에 유익함이 있다면 비록 거짓으로 국령을 꾸며냈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모두 이르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아이 머리에 누더기 옷을 입고 괴기한 의론을 일삼으니 정상의 도가 아닙니다. 만일 경솔히 그 말을 따른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죽을 죄를 범할지라도 감히 칙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염촉은 분명히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대개 비상한 사람이 있는 연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불교는 심오하다 하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완강해 거절할 수가 없고 경이 혼자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말을 다 들을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형리에게 넘겨 목을 베라고  했다. (염)촉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나는 법을 위해 형벌을 받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 만일 신령함이 있으시다면 신이 죽을  때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고 했다. 마침내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욧솟음쳐서 높이 수십길로 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선느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임금과 신하 백성 할 것없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유체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하고 예배했다. 그 때 임금과 신하들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밝으신 신령은 우리를 죽이소서"라고 했다. 군자는 이르기를 "대성인은 천 백년만에  만나게 된다. 인(仁)은 길상을 발하고 의는 상서를 움직인다. 천지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일월에까지 뻗쳤으며 귀신을 감동시켰거늘 하물며 사람들에게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스스로 도를 믿는다면 천지도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을 이룩함을 귀히 여기고, 업은 넓힘을 귀히 여기나니, 그러므로 진실로 큰 원이 있으면 태산도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게 된다. 장하구나 그의 죽음은 그것을  얻었도다"고 했다. 이 해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했다(국사 및 여러 옛 전기를 참고하여 생각하며 술한다).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내가 동도(東都)에 가서 놀 때 금강산 마루에 올라 외로운 무덤과 짤막한 비석을 보고는 슬피 울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날 산인들이  회식하려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오늘이 바로 우리 사인의 기일이라 했다. 또한 떠남이 오래일 수록 생각은 더욱 깊은 것이라 하겠다. 아도비를 살펴보면, 법흥왕은 출가하여 법명은 법운, 자는 법공이라 했다고 돼 있지만, 지금은 국사와 수이전을  참고하여 두 개의 전기로 나누었으니, 옛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찬하여 말한다. 대개 나라 임금이 아랫 일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이루어 놓은 일을  지킬 수는 있어도 시작하기를 우려하는 일은 꾀하기 어렵다. 더구나 시기가 이롭지 못함과 믿고 믿지 않음에 달려 있음이랴. 원종은 비록 불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본원력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또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에 힘입어 능히 미리(美利)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여 마침내 한나라 명제와 수레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대하고 위대함이여. 여기에 무슨 잔말이 있겠는가. 양나라 무제에게 그를 비교함은 잘못이다. 무제는 임금의 몸으로 대동사(大同寺)의 사노(寺奴)가 되어 제왕으로서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지만 법공은 이미 왕위를 사양하여 그 후사를 튼튼히 해놓고  자기 스스로 사문이 되었으니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염촉의) 경력은 소위 왕과 비구는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음을 (보여주었다). (왕이) 환상의 구름을 쓸어 헤치고 본성이 공한 부처님의 지혜의 빛을 발하면서 그것을 품고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염촉의 힘이었다.


삼국유사 권1 왕력 : 제24대 진흥왕은 이름이 삼맥종(彡麥宗)이니, 심●(深●)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곧 법흥왕 동생 입종(立宗)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지소(只召)부인으로, 식도부인(息道夫人)이라고도 하니, 박씨로 모량리 영실(英失) 각간의 딸이다. (第二十四代眞興王名彡麥宗 一作深●, 金氏, 父卽法興之弟立宗葛文王 母只召夫人 一作 息道夫人 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염촉멸신(厭觸滅身) : 상고하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朴氏)는 모량리(牟梁里) 영실 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필경 진자(眞字)를 마땅히 법자(法字)로 고친다면 이것은 법흥왕의 비(妃) 파조부인(巴刁夫人)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는 그가 절을 이룩하고 불상(佛像)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5대 기림니질금(基臨尼叱今)은 기립왕(基立王)이라도고 한다. 석씨다. 제분왕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무오년에 즉위해 12년을 다스렸다. 정묘년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니, 신(新)이라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德業日新)는 뜻이요, 라(羅)란 사방 백성을 망라한다(綱羅四方之民)는 뜻이라고 한다. 혹자는 지증(智證) 법흥(法興) 때 일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婆娑石塔) :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인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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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이 재위 말년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얻었다는 법호. 하지만 그 역사적 진실성을 두고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37년(576)…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 승려 법운은 속명을 삼맥종(彡麥宗)이라 하며,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 법흥왕 동생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다. 태어나 7세에 즉위하니 매우 관대하고 인자했다. 일을 공경히 다스려 신뢰를 받았으며, 착한 일을 들으면 놀란 듯이 (포상했고) 악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7년(546)에 흥륜사가 완성되니 사람들에게 출가해 승니가 됨을 허락했다. 8년(547)에는 대아찬 칠부(柒夫) 등에게 명해 문사(文士)를 널리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케 했다. 10년(549)에는 양에서 사신과 입학승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부처님 사리도 함께 보내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흥륜사 앞 길까지 나아가 받들어 맞이하게 했다. 14년(553)에는 유사(有司)에 명하여 월동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하니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나므로 왕은 이를 의아히 여겨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黃龍)이라 이름지었다. 26년(565)에는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불교 경론 700여 권을 보내왔다. 27년(566)에는 기원(祈園).실제(實際) 두 절이 창건되고 황용사 또한 완공되었다. 33년(572) 10월에는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외사(外寺)에 팔관재회(八關齋會)를 베풀었는데 7일만에 마쳤다. 35년(574)에는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였다. 혹 전하기를 아육왕(阿育王)이 띄운 배가 황금을 싣고 사포(絲浦)로 들어왔으므로 (그것을) 가져와 주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자장전(慈藏傳)에 있다. 36년(575)에는 장륙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일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다가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법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했다. 금지해야 할 계율을 받아 지니고 세 가지 업을 청정히 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마치셨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예의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해에 안함법사(安含法師)가 수나라에서 왔으니 안함전에서 말하겠다. 찬하여 말한다. 풍속은 사람과 관계됨이 크다 할 것이다. 왕이 당시 풍속을 고치고자 하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았으니 그 패연함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진흥이 이미 불교를 숭상해 화랑들의 놀이를 베푸시니 나라사람들이 즐거이 좇아 본받기를 마치 보물의 집으로 달려가고 봄의 누각에 오르듯 했다. 그 귀추를 요약하면 선으로 옮기고 의로 옮겨 점차 대도로 나아가게 하는데 있을 뿐이다. 저 한나라 애제는 부질없이 색만 좋아했기에 반고가 이르기를 "보드랍고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쏠리게 함은 비단 여자만이 아니라 남색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이것을 평하여 (화랑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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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26년(565) 가을 8월에 아찬 춘부(春賦)를 가게 해서 국원(國原)을 지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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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19년(558) 봄 2월에 귀문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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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18년(557)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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