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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말왕. 기자의 41세손으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을 세웠다.


제왕운기 권下 후조선기(後朝鮮紀) : (기자의) 41대 손자 되는 준왕님은/ 남에게 나라 잃고 백성마져 빼앗겼도다/ 928년이라는 오랜 세월 다스리니/ 기자의 남긴 유풍 찬연히 전했도다/ 나라 잃은 준왕 금마군(金馬郡)에 옮겨 앉아/도읍 이뤄 또 다시 임금이 되었도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마한(馬韓) :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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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시조. 연나라 도망민으로 조선에 들어와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사기 열전 


한서 열전 


제왕운기 권下 후조선기(後朝鮮紀) : 한나라 장수 위만은 연나라에서 태어나서/고제(高帝) 12년 병오년에/준을 내쫒고 그 나라 앗았도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위만조선(衛滿朝鮮) : 연왕(燕王) 노관(盧관)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마한(馬韓) :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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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건국시조(?~936). 재위 900~935년.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본기 : 6년(892)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그 주에 근거하여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 칭하였는데,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과 현이 항복하여 소속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효공왕본기 : 5년(901) ...가을 8월에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금성(錦城)의 남쪽으로 옮겨 연변(沿邊)의 마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11년(907)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이 모두 견훤에게 빼앗겼다. 14년(910) 견훤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나주성(羅州城)을 에워싸고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궁예가 수군을 내어 그들을 습격하자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신덕왕본기 : 5년(916) 가을 8월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경명왕본기 : 4년(920) ...겨울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進禮)에까지 진군하였으므로,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듣고서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애왕본기 : 2년(925)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잡혔다. 왕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이르기를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거짓이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렇게 여겼다.3년(926) 여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이 일부러 죽였다.” 하고는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에 진군하였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나오지 말도록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은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번 북을 쳐서 위세를 떨친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태조가 사신에게 일렀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악(惡)이 가득 차서 스스로 쓰러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4년(927) 봄 정월에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했는데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하여 굳센 군사 1만 명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갔다.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어, 적의 군사가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의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군사들을 풀어 놓아 공·사(公私)의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대의 진영에 이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제10 견훤 전 :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키어 장군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크고 우뚝 뛰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커서 보통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안을 지키러 갔을 때에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그의 용기는 항상 병졸보다 앞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892) 즉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에 왕의 총애를 받던 아이들이 [왕의] 옆에 있으면서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하여졌고, 그 위에 기근까지 겹쳐 백성이 떠돌아다니고 뭇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저으기 왕위를 엿보는 마음을 가져 무리를 불러 모아 왕경의 서남쪽 주·현(州縣)을 치자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한 달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자 드디어 무진주(武珍州)[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스스로 칭하였다.이 때에 북원(北原)[현재의 강원도 원주시]의 도적 양길(良吉)이 가장 강성하여 궁예가 스스로 투항하여 그 부하가 되었는데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현재의 전북 전주시]에 이르니 그 백성들이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였다.“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따라서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어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을 들어 장군 소정방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 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잃은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내 이제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묵은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마련하니 이 때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900)이고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오월왕이 답하는 사신을 보내 검교태보(檢校太保)의 직을 덧붙여 주었고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았다.천복(天復) 원년(효공왕 5: 901) 견훤이 대야성[현재의 경북 합천군 합천읍]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910) 견훤이 금성(錦城)[현재의 전남 나주시]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써 포위 공격하여 10여 일이 지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912)에 견훤이 궁예[의 군대]와 덕진포(德津浦)에서 싸웠다.정명(貞明) 4년(918) 무인(戊寅)에 수도 철원의 뭇 사람의 마음이 문득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閔)을 보내 축하하고 이어서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또 오월에 사신을 보내 말을 보내니 오월왕이 답례의 사신을 보내었고 중대부(中大夫)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으며, 다른 관직은 이전과 같았다. 6년(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켰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견훤은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동광(同光) 2년(924)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현재의 경북 의성군 금성면]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의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지키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8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푸른 말[馬]을 바쳤다. 3년(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니 태조도 또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승패를 겨루었다. 그때 견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쌔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우선 화친하여 그 군사를 늙히고자 하여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었더니 견훤도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거창 등 20여 성을 공격하여 취하였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 제후국을 칭하였다. 후당에서 검교태위(檢校太尉) 겸 시중(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의 직을 책봉하여 주고 그전대로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 백제왕 식읍 이천오백호 직으로 하였다. 4년(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이를 듣고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곧바로 왕신을 감옥에 가두고 또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낸 푸른 말을 돌려달라고 청하자 태조가 웃으며 이를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진격하여 신라 고울부(高鬱府)[현재의 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 수도 교외에 가까이 이르니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군사를 출동시켜 원조하였는데 견훤이 별안간 신라 서울에 들어갔다. 그때 신라왕은 부인과 궁녀를 데리고 포석정에 놀러 나와 술을 마시고 즐기고 있었는데 적병이 이르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을 데리고 성 남쪽의 별궁으로 돌아왔고 여러 시종하던 신료와 궁녀, 악사들은 모두 침략군에 잡혔다. 견훤이 군대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왕을 잡아오게 하여 앞에 이르자 왕을 죽이고 문득 궁중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부인[왕비]을 강제로 끌어내 능욕하고 왕의 집안 동생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국가 창고의 진귀한 보물과 무기를 취하고, [귀족의] 자녀, 백공 중 기예가 뛰어난 자 등은 스스로 따르게 하여 돌아왔다. 태조는 정예의 기병 5천 명으로써 견훤을 공산(公山)[현재의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현재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 등 35명이 왔으므로 견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시켜 마돌 등을 동반하여 보냈는데 바다로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나라 등주에 도착하였다가 모두 살륙당하였다.당시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도 쇠퇴해진 국운을 다시 일으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견훤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가졌는데 태조가 먼저 취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왕도에 들어와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12월 어느 날에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지난번에 재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게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울음을 따라 모이는 것 같고 이는 종달새가 날개를 헤친 것을 보고 새매의 날개로 착각한 것이니 반드시 산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묘 사직을 폐허로 만들 것이므로 제가 먼저 조적(祖)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둘러 뭇 신료에게 밝은 해를 두고 서약하고, 6부[경주]를 올바른 법도로써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들은 도망을 치고 임금은 변을 당하여 죽었으므로 드디어 경명왕의 외사촌이고, 헌강왕(獻康王)의 외손을 받들어 권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재생시켜 주었으며, 임금을 잃은 나라에 임금을 갖게 한 것이 이번 걸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대는 충고를 살피지 않고 한갓 떠도는 말을 듣고 온갖 계책으로 틈을 엿보며, 여러 방향으로 침입하였으나 아직 저의 말머리를 보지 못하였고, 저의 소 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소. 초겨울에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현재의 경남 성주군]의 군대에게 체포되었고 한 달이 안되어 좌장(左將) 김락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처참히 죽었으며, 죽은[殺獲] 자도 많거니와 사로잡힌 자도 적지 않으니 강하고 약함이 이러하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는 분명하여졌습니다. [제가] 목적하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班) 상서가 와서 오월왕의 조칙을 전하였습니다. 그 글에 「경은 고려와 오래토록 화친하여 이웃 맹방으로 함께 약속할 줄 알고 있는데 요즈음 인질들이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의 옛 우호를 잃고 서로 영토를 침략하여 전쟁을 쉬지 않으니 지금 이 문제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 경의 본국[本道]에 다다르게 하고 또 고려에도 서신을 보냈으니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 영원토록 복을 누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의리에 충실하게 [신라] 왕실을 높이고 마음속 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는데 [오월왕의] 타이르는 조칙을 받고 곧 바로 이에 따르고자 합니다. 항상 염려함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조칙을 베끼어 올리니 청컨대 유의하여 상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서로 피곤하여지면 마침내 남의 조롱을 받을 것이고, 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도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천성] 3년(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엎드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상서(尙書) 반(班)씨가 전한 바의 조서 한 통과 아울러 족하의 사정을 서술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중국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왔고, 흰 비단에 쓴 좋은 편지에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을 더하였으나 그대의 편지를 뜯어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제 뜻을 펴 전하려 하오. 저는 위로는 천명을 받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맡고,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 번에 삼한이 액운을 당하여 전국[九土]이 흉년으로 황폐해져 백성들이 많이 도적에 속하였고, 모든 농토는 농작물이 말라 붉은 땅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변고를 막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기 바랐습니다. 이에 스스로 선린을 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수천 리의 농토가 편안히 농사지어지고, 7∼8년간 병졸이 쉴 수 있었습니다. 을유년(925) 10월에 이르러 문득 일을 일으켜 교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대는 처음 적을 가볍게 보고 직진하였으니 마치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는 것과 같았고, 마침내 어려운 줄을 알고 용감히 퇴각하였으니 마치 모기가 산을 등진 것처럼 신중한 조처였습니다. 손을 모으고 말하기를 하늘을 두고 맹서하여 금일 후에는 길이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진실로 혹 맹서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창을 씀을 멈추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드디어 겹겹으로 포위한 것을 풀어주고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보냄을 사양하지 않아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제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맹서하면서 바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음흉함이 다시 발작하여 벌과 전갈의 독을 생민에게 침해하며,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경주]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급박하여지고, 어가가 놀라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의리를 지켜 주(周)나라[여기서는 신라를 지칭]를 높임이 누가 [제나라] 환공(桓公), [진나라] 문공(文公)의 패업과 비슷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漢)나라 전복을 도모한 사람으로 오직 왕망과 동탁의 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왕의 지존한 분으로 하여금 굽혀 그대에게 자식으로 칭하게 하여, 높고 낮은 상하의 질서를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상하가 함께 걱정하기를 큰 보필자의 충순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에 악을 숨기지 않았고, 뜻이 왕을 높임에 간절하다고 하여 장차 조정에 끌어들여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게 한 것입니다.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기 위하여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임금을 목베고 궁궐을 불질렀으며, 신료들을 죽여 젖을 담고, 관료와 백성을 도륙하였으며, 종실의 여자를 취하여 같은 수레에 태우고 보물을 바리에 실어갔으니 큰 죄악은 걸왕 주왕보다 더하고, 불인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합니다. 왕의 죽음에 대한 저의 원한은 극도에 달하여 해를 우러러 매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犬馬)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참으로 길이 서약했습니다. 다시 방패와 창을 들은 후 느티나무와 버들 잎이 두 번 바뀌는 사이에 육지의 공격에서는 우뢰같이 달리고 번개같이 공격하였고, 수전의 공격에서는 호랑이가 뛰고 용이 날 듯하여, 움직였다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활을 들었다 하면 빗나감이 없었습니다. 해안에서 윤빈(尹)을 쫓을 때에는 빼앗은 갑옷이 산처럼 쌓였고, 성 언저리에서 추조(鄒造)를 사로잡을 때에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현재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 앞에서 길환(吉奐)을 목베었고, 마리성(馬利城)[현재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 언저리에서 수오(隨)를 군기 앞에서 죽였으며, 임존성[현재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함락하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의 목숨이 버려졌고, 청주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直心) 등 네 다섯 명이 머리를 바쳤으며, 동수(桐藪)[현재의 대구 팔공산 동화사 부근]에서는 깃발을 바라다보고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현재의 경북 성주군 성주읍]에서 입에 구슬을 물고[銜璧] 투항하였고, 강주(康州)[현재의 경남 진주시]의 경우 남쪽에서 귀부하였고, 나부(羅府)[현재의 전남 나주시]의 경우 서쪽에서 복속해 왔습니다. 치고 공격함이 이와 같으니 [전국을] 수복할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沚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의 천 갈래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가에서 한왕(漢王)이 한 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천하를 길이 맑게 하기를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운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이 넉넉하여 먼 곳까지 포용하며, 어짊이 깊어 작은 나라를 사랑하여 궁성[丹禁]에서 조서를 내어 청구(靑丘)의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고, 이미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공경스럽게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해동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지만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보내 강주(康州)[현재의 경남 진주시]를 습격하여 3백여 인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有文)이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려 양산(陽山)[현재의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성을 쌓게 하니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자 물러나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견훤이 굳센 군사를 뽑아 부곡성(缶谷城)[현재의 경북 군위군 부계면]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지키던 군사 1천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양지(楊志)와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천성] 4년(929) 가을 7월에 견훤이 무장한 군사 5천 명으로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여 성주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통곡하면서 “나는 좌우의 손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견훤이 대군을 출동시켜 고창군(古昌郡)[현재의 경북 안동시]의 병산 아래에 머물면서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전사자가 8천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견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장군 원봉이 막아내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달아났다. 견훤이 백성을 포로로 잡아 전주로 데리고 갔다. 태조는 원봉이 이전에 세운 공을 고려하여 용서하여 주고, 순주를 개칭하여 하지현(下枝縣)으로 불렀다.  장흥(長興) 3년(932) 견훤의 신하 공직(直)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항복하자 견훤이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딸을 거두어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이 일길찬 상귀(相貴)를 보내 수병으로 고려 예성강에 들어가 3일을 머무르면서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삼 주의 선박 100척을 불태우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는 말 300필을 잡아갔다.  청태(淸泰) 원년(934) 봄 정월에 견훤이 태조가 운주(運州) [현재의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르니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굳센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3천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웅진 이북 30여 성이 소문만 듣고 스스로 항복하니 견훤의 휘하 술사 종훈(宗訓), 의사 훈겸(訓謙), 용감한 장수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 10여 사람이 있었는데 네째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해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자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알고서 걱정과 번민을 하였다. 당시 양검은 강주(康州)도독, 용검은 무주(武州)도독으로 나가 있었고, 신검만이 왕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 무주에 보내 양검 등과 더불어 몰래 모의하였고, 청태(淸泰) 2년(935) 봄 3월에 이르러 파진찬 신덕(新德)·영순(英順)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살해하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면서, 국내에 대 사면령을 내리었는데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를 입었으나 혜제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건성(建成)이 외람되이 세자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태종이 일어나 즉위하였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고 임금자리는 돌아갈 곳이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의 신령스런 무예는 뭇 사람을 훨씬 뛰어 넘었으며, 영특한 꾀는 옛날에 비추어도 우뚝하였다. 쇠퇴기에 태어나 세상을 다스림을 자임하고 삼한 땅을 순회하여 백제를 부흥하고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였으므로 즐거워 북치고 춤추는 것이 바람과 번개처럼 나타났고, 멀리와 가까이에서 발 빠르게 달려와 이룬 업적이 거의 중흥에 이르렀다. 지혜롭고 사려가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을 편애하고 간신들이 권력을 조롱하고 대왕을 진(晉)나라 혜제(惠帝)의 어두움으로 인도하여 어진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의혹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어리석은 아이에게 거의 줄 뻔하였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진실한 마음을 내리시어 군자에게 허물을 고치게 하시고 맏아들인 나에게 명하여 이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 돌아다보건대, 나는 뛰어난 재목이 아니니 어찌 임금에 앉을 지혜가 있으리오마는 조심하고 조심하여 마치 얼음이 언 연못을 밟고 건너는 듯하다. 마땅히 특별한 은혜[不次之恩]를 실시하여 새로운 정치[維新之政]를 펼쳐 보이고자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935) 시월 17일 새벽을 시점으로 하여 이미 발각된 일이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일, 그리고 이미 처분된 것이나 처분되지 않은 것이나 큰 죄(大) 이하의 모든 죄는 다 용서하여 사면하니 맡은 자는 이대로 시행하라!』견훤이 금산에 있은 지 3개월 만인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총애하는 첩 고비 등과 더불어 금성으로 도주하여 사람을 시켜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 만세(萬歲) 등을 보내 수로(水路)를 거쳐가서 위로하고 도착함에 이르러 두터운 예로서 대접하였다. 견훤이 10년 연장자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尙父)로 삼고 남쪽 궁궐을 주어 유숙하게 하였다. 지위는 백관의 최상위로 하였다.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과 비단, 장식품, 노(奴)와 비(婢) 각각 40구, 내구마(內馬) 10필을 주었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가 그의 부인에게 은밀히 말했다.“대왕께서 부지런히 힘쓴 지 40여 년에 공들인 업적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로 인하여 설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였다. 대저 정조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만약 자기의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으리오? 하물며 고려의 왕공께서는 마음이 어질고 후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듣고 있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인도하여 도와주는 것으로서 반드시 삼한(三韓)의 주인이 될 것이니 편지를 보내 우리 왕을 문안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도 겸손하고 정중함을 보여 장래의 복을 어찌 도모하지 않으리오?”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 말이 곧 제 뜻과 꼭 부합합니다”고 했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936) 2월에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뜻을 고하기를 “만약 정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대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신에게 후하게 물건을 주어 보내면서 겸하여 영규에게 사례하면서 말하였다.“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쳐지고 도로의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 뵙고 인사드리고 그런 후에 집에 들려 부인을 배알하고 형처럼 섬기고 누나처럼 받들겠으며 반드시 끝내 두터이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여름 6월에 견훤이 아뢰었다. “늙은 이 신하가 전하에게 몸을 바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을 목베기를 바래서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신령스러운 군사를 빌려주어 그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태조가 이에 따랐다.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를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나가게 하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삼군을 통솔하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一善)[현재의 경북 선산]에 진군하였다. 신검이 군사로 막으니 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맞서 진을 쳤는데 태조와 상보(尙父) 견훤이 군사를 사열하고,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진을 치게 하고, 대상 김철(金鐵), 홍유(洪儒), 수향(守鄕), 장군 왕순(王順), 준량(俊良) 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으로 진을 치게 하고, 대광(大匡) 순식(順式), 대상 긍준(兢俊), 왕겸(王謙), 왕예(王乂), 금필(黔弼), 장군 정순(貞順), 종희(宗熙) 등으로 하여금 철기(鐵騎) 2만과 보병 3천 및 흑수(黑水), 철리(鐵利) 여러 도(道)의 날랜 기병 9천5백 명을 중군으로 삼고, 대장군 공훤(公萱), 장군 왕함윤(王含允)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 명을 인솔하여 선봉으로 삼아 북을 치며 진격하니 백제 장군 효봉(孝奉), 덕술(德述), 명길(明吉) 등이 군세가 대단하고 정비된 것을 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진 앞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태조가 위로하고 백제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원수(元帥)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에게 명하여 중군을 곧바로 치게 하여 전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협공하니 백제 군대가 붕괴되어 도망했다. 신검 및 두 동생과 장군 부달(富達), 소달(小達), 능환(能奐)등 40여인이 항복해오자 태조는 항복을 받고 능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은 위로하고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서울에 와 살도록 허락하였다. 능환을 심문하기를 “처음 양검 등과 몰래 모의할 때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우자고 한 것은 너의 꾀이다. 신하된 의리상 이럴 수 있는가?” 하니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자 드디어 명하여 목을 베었다.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또 목숨을 바쳐 처벌을 청했으므로 특별히 사형을 면제시켜 주었다.<또는 삼형제가 모두 목베어졌다고도 하였다.> 견훤은 근심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 태조가 군령을 엄하게 밝혀 사졸들이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주현(州縣) 백성의 생활이 편안하게 여겼고, 노인으로부터 어린이까지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이에 [백제의] 장군과 군졸들을 위문하고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니 가난한 백성이 자기 직업에 편안히 종사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각하여 그에게 관위를 내려주고, 그 두 동생과 능환의 죄는 같다고 여겨 드디어 진주(眞州)에 유배보냈다가 곧 얼마 아니 되어 죽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이르기를 “앞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신하들 중에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그대의 부부가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전하였고, 겸하여 나에게 귀부하였으니 그 의로움은 잊을 수가 없다!” 하고는 그에게 좌승 벼슬을 내려주고 토지 1천 경(頃)을 내려주었다. 역마 2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들을 맞이하게 하였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려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일으켜 후진(後晉) 천복 원년(935)에 이르기까지 45년만에 멸망하였다. 사론(史論):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를 잃어 하늘이 돕는 바가 없고 백성이 돌아갈 바가 없었다. 이에 뭇 도적이 틈을 타서 일어나기를 마치 고슴도치 털 같았다. 그 중에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디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종국(宗國)을 원수로 삼아 섬멸하고자 하여 선조의 화상을 칼로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 출신으로서 신라의 관록을 먹으면서 반역의 마음을 품어[包藏禍心]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수도를 쳐들어가 임금과 신하를 도륙하기를 마치 새잡듯, 풀베듯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元惡大]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의 신하에게 버림을 받았고, 견훤은 자기 자식에게서 재앙을 받았으니 이는 스스로 취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비록 항우와 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일어남을 대적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궁예와 견훤의 흉악한 사람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겨룰 수 있겠는가? [이들은] 단지 [태조에게] 백성을 몰아다주는 일을 한 사람들[歐民者]이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 고울부(高蔚府)에 이르자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께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해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 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어 적병이 오는 줄도 모르다가 삽시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 거처했다.  이에 좌우를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케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와 함께 통곡했다.


제왕운기 권 下 신라기 : 연면(連綿)하고 오랜 세월 차차로 쇠해지며/민심은 어지럽고 돌아갈 곳 어디메인가"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견휜(甄萱)이 임자년에 광주(光州)에 도읍했다. 을미년에 훤(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스스로 즉위했다. 이 해에 나라가 없어졌다. 임자년  이후 이 때까지 44년만에 망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마한(馬韓) :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삼국사기 권제46(열전 제6) 최승우 : 최승우(崔承祐)는 당나라 소종(昭宗) 용기(龍紀) 2년(眞聖王 4: 890)에 당나라에 가서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시랑(侍郞) 양섭(楊涉) 아래에서 급제했다. 그가 지은 사륙문(四六文)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本集)이라 했다. 후에 견훤을 위해 격문을 지어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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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건국자인 견훤의 아버지로 신라인. 가은현 출신으로 농사를 짓다가 뒤에 장군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경명왕 : 2년(918) ...가을 7월에 상주(尙州)의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제10)  견훤(甄萱) 열전 :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키어 장군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이제가기(李碑家記)》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비(眞興大王妃) 사도(思刀)는 시호가 백융부인(白駥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阿慈개)이다. 아자개 첫째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그 맏아들이 상부(尙父)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아들이 장군 룡개(龍盖)요, 넷째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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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成.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해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의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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