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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김태식의 考古野談 | 마지막 회 |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일제에 납치돼 청와대에 갇힌 ‘미남 석불’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입력
2017-08-21 13:14:01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오세윤 작가 제공]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일간 매일신보는 1934년 3월 29일자에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의 미남석불(美男石佛),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대수하(大樹下)에’라는 제목을 내건 기사 하나를 싣는다. 이런 큰 제목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인지, 이에는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博物館)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았다. 

80년 전 문체여서인지 우선 큰 제목과 작은 제목에 들어간 몇 단어가 생경하다. 즐풍욕우(櫛風浴雨)란 글자 그대로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는다는 뜻이니, 간단히 말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라는 의미다. 대수하(大樹下)란 큰 나무 아래라는 뜻이요, 수연만장(垂涎萬丈)이란 침을 만 길이나 흘린다는 뜻이니, 어떤 것을 제 소유로 만들고 싶어서 몹시 탐낸다는 비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풀어보자. 석가여래를 표현한, 잘생긴 돌로 만든 부처가 어쩌다가 경주를 떠나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졌지만, 그곳 정원 큰 나무 아래서 별다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비바람에 노출돼 있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이제 이 불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이 기사를 통해 찬찬히 살펴본다. 현대에 익숙지 않은 표기법만 약간 손질하는 선에서 당시 표현을 최대한살린다.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美男石佛)이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에 자최(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얼마 후에야 미남석불이 어디로 도피한 줄을 안 총독부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그의 간 곳을 찾아오다가, 작(昨·지난) 27일에야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뒤 언덕 큰 나무 아래에 천연스럽게 좌정(坐定)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관힐소란 경비 초소다. 이 무렵 총독 관사 위치를 왜성대(倭城臺)라 하거니와, 이곳은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 일대 남산 기슭이다. 이곳 총독 관저로 가서 문제의 불상을 조사했다는 ‘비목(榧木) 촉탁’이란 총독부박물관 촉탁(일종의 전문위원)이던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를 말한다. 이 대목으로 보면 문제의 경주 남산 불상은 이전에 존재는 알려졌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다가 이때 와서 재발견됐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이 돌부처를 ‘미남석불’이라 한다. 부처가 잘생겨서 얻은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일까? 기사의 불상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극찬이다.  

“이 미남석불은 시가(時價)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 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좌신(座身·앉은 자세의 몸)의 높이가 3척 6촌, 슬폭(膝幅·양쪽 무릎 끝까지의 폭)이 2척 9촌이오, 또 연좌대(蓮座臺·연꽃 모양 받침대)에는 천녀(天女)를 아로새긴 엄청난 것으로 신라의 유물로서 석불과 함께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이 불상을 좌신(座身)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부처 중에서도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이른바 좌불(坐佛)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1척이 대략 30.3㎝요, 1촌은 약 3.33㎝니, 이 좌상(坐像)은 받침대를 제외한 불상만으로 볼 때, 기사에서 말한 높이는 110.88㎝다. 양쪽 무릎 간 폭은 90.63㎝다. 대략 앉은키와 무릎 높이가 1대 1 가까운 비율을 이룬다. 나아가 이 불상을 신라 작품으로 본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어찌하여 총독 관저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신문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의미 불명)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  


조선총독의 포로 된 ‘미남 석불’

기자도 이 불상이 옮겨진 구체적인 사연을 더는 캐지 못하고 있다. 다만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재임하던 시절(1919~1927)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총독부박물관 측의 발언을 전달만 한다. 아마도 이 발언은 이를 조사한 가야모토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아가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이 불상이 당시 그곳에 전시 중인 약사여래상과 같이 경주의 골짜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 중인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 약사여래 좌상’을 말할 것이다. 이 약사여래상은 1915년 무렵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지시로 남산을 떠나 경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총독부박물관이 인수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 서쪽에 위치하는 계곡 중 하나인 삼릉곡 작은 절터에 있었다. 이로써 본다면, 총독부박물관에서는 비록 단순 추정이라는 범위를 넘지는 못하지만, 문제의 ‘미남 석불’ 역시 이곳에서 봉안하던 것으로 본 셈이다. 

이런 보도를 하면서 기사는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垂涎萬丈)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끝을 맺는다. 하기야 박물관으로서는 그것을 옮겨오고 싶었겠지만, 다름 아닌 총독 관저에 있는 것이라 섣불리 말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저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적어도 1934년 3월 현재에는 ‘미남 불상’이 조선총독에게 사로잡힌 포로 신세 비슷함을 확인한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총독 관저의 장식물 중 하나로 전락한 바로 그 불상이 83년이 흐른 지금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이자 사저가 있는 청와대 구중심처에서 여전히 일반과는 유리된 채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있다니?  

필자가 문화재 담당 기자 시절, 아마 박근혜 정부 초창기였다고 기억하거니와, 청와대 출입 사진기자를 통해 ‘미남 불상’ 촬영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실에 이를 문의했더니, 예상한 대로 그곳은 접근 불가라 보여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변인실의 정확한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청와대 관내 사람도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대통령 경호상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미남 불상’이 광복 이후 청와대로 넘어가게 된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선총독을 대체한 대한민국 권력이 대통령이고, 그가 집무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청와대이니, 인수인계 차원에서 그리되었다고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경주가 출처임이 확실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져, 서울시에서는 이미 1974년 1월 15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했다. 이를 지정하기 위해서는 기초 조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다.  


소유자도, 관리자도 없는 석불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지도 제공 : 네이버 ] 

문화재청이 2017년 7월 현재 제공하는 이 불상에 대한 정보를 보면 간략하기 짝이 없다. 우선 그 명칭부터가 아주 어정쩡해서 그냥 ‘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석불좌상이 한두 점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꽤 많은데 이런 명패만 덜렁 달아, 다른 석불좌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데 지정 당시 명칭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었다. 서울시는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정 명칭 변경 방침을 수용해 2009년 6월 4일, 서울시 고시 제2009-221호를 통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문화재청 제공 정보에 의하면, 이 불상 소재지는 당연히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1 (세종로) 청와대’이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표시했다. 한데 놀랍게도 ‘소유자(소유단체)’와 ‘관리자(관리단체)’ 칸이 비어있다. 당연히 청와대여야 하겠지만, 이 불상은 주인도 없고, 관리자도 없다. 이 불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이 전부다. 나아가 이런 정보에는 불상 크기가 빠질 수 없지만, 이 ‘미남 불상’은 그 내력이 빠져 있다. 청와대 구중심처에 있는 까닭에 실측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놓았으며, 풍만한 얼굴은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고 두툼한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입은 옷에는 주름이 소매 끝과 발목까지 표현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이 불상은 유덕사(有德寺) 석가여래좌상으로 불리어왔는데, 유덕사는 신라시대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의 집을 기부하여 지었다는 절이다. 그의 후손인 삼한공신 최언위(崔彦撝)가 최유덕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모시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며 절터는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다.” 

1989년 1월 1일자로 경주와 통폐합된 도시임에도, 문화재청은 여전히 소재지를 ‘월성군’이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 불상을 경주에서 총독 관저로 옮겨왔다는 문구다. 무엇을 근거로 이리 확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최근의 연구 성과를 보면,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현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는 유덕사가 아니라, 이거사(移車寺)라는 경주 지역 한 절터였음이 거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거사의 위치는 약사여래 좌상이 있던 경주 남산 서쪽이 아니라 남산 동쪽으로 추정된다. 

한데 이 불상을 이제는 제자리로 옮기거나, 청와대가 아닌 다른 곳,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 같은 데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대 정권마다, 특히 대통령의 종교성향에 따라 이 불상은 자주 괴담의 주인공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지금 이 불상은 대통령 관저를 내려다보는 녹지원 경내 보호각 시설 안에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100m가량 후퇴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 불상을 특별히 생각했는지는 흔적이 없다. 하지만 청와대 경내에서의 불상 이전은 기독교계가 반발하는 빌미가 됐다. 불교신자 대통령 등장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기독교계는 “청와대에 불상이 들어섰다”며 대통령의 종교 편향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신교 장로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미남 불상’은 전연 반대의 위치로 내몰린다. 집권 초창기, 하나회 숙청과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와 같은 전격적인 개혁 정치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벌이던 김영삼 정부는 구포역 열차 탈선이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규모 참사에 휘말리게 되고 그러자, 불교계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것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무리 봐도, 대통령의 친기독교 성향을 견제하기 위한 심리전 성격이 강했지만, 참위설(讖緯說)의 힘은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세지기 마련이다. 할 수 없이 청와대는 ‘미남 불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조계종단 승려들을 초청해 현장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청와대 경내의 석조여래좌상(미남 불상).[청와대 제공]

대통령 종교 따라 구설 휘말려

같은 기독교 장로 출신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불상이 다시 문제가 됐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터진 숭례문 화재와 집권 뒤 발생한 용산 화재 참사와 같은 악재가 겹치자, 이번에도 불교계는 청와대가 문제의 불상을 홀대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을 했다 해서 구설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작용 측면도 컸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독교 성향 혹은 정책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전략들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불교계가 그 반대급부의 일정 부분을 챙긴 흔적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이명박 정부는 불교계를 달래기 위한 각종 정책을 폈으며, 취임 첫해인 2008년 5월 9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는 문제의 불상을 출입기자단과 조계종에 공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종교 성향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 시절 역시 불교계 달래기 차원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미남 불상’을 활용한 흔적이 보인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5월 16일, 최상화 춘추관장을 비롯한 청와대 불자 모임인 청불회(靑佛會) 소속 일부 신자가 미남 불상을 참배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 일이 비공식이라 했지만, 그 일정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음을 볼 때, 대외용 행사로 기획했음을 엿볼 수 있다.  

불상을 둘러싼 이런 정치 역학의 움직임은 당연히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아가야 할 불상의 이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앞서 보았듯 이 불상은 그 과정이 석연치는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불법적 방법을 통해 경주를 벗어나 서울로 이송되고, 더구나 조선총독 관저에 장식물로 비치됐다. 더구나 그것을 이어받은 청와대는 소유권도 없고, 관리권자도 아니다. 당연히 불상은 청와대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경주 사람들은 더는 불상을 볼모로 삼지 말고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불교계와 자주 대척점을 형성하는 기독교계에서도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당연히 내 보내라고 요구한다. 언뜻 보면 당장 경주로 내려보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모든 여건이 경주 귀환을 충족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상을 둘러싼 그간의 일들은 불교계를 곤혹스러운처지로 내몰리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당연히 경주 귀환을 바라겠지만, 그런 일이 자칫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 불상이 청와대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우려해서다. 
불상은 이제 제자리로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한테 ‘진상’된 성보문화재를 언제까지 청와대가 볼모로 잡아둘 수는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제는 당당히, 그리고 자랑스럽게 불상을 제자리로 돌려야 할 때다.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아래는 2018년 6월에 발간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식지 《박물관신문》 562호 기고 전문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내가 만난 박물관인들을 이런 식으로나마 정리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리 붙여봤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단발성이라 아쉽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역대 관장 - 한병삼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장 


역대 국립박물관장 혹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중에 무게감만으로는 아마 한병삼 선생을 최고로 치지 않나 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지만, 이런 그와 나는 이렇다 할 인연이 실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98년 12월, 정기 인사에서 내가 사회부를 떠나 문화부에 안착해 문화재 분야를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는 관장직에서 물러난 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거니와 그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라든가 발굴현장에서 가끔 마주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더러 목격한 모습이지만, 각종 발굴현장에 지도위원 등의 자격으로 드러낸 그의 남다른 특징이 있으니, 우선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해당 발굴단이 조사한 유적‧유물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 않았다. 이를 직접 조사한 조사원보다 지도위원이 더 많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신념 같은 것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 매양 조사단을 향해 “무엇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가”를 물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자신이 원했건 하지 않았건, 그런 까닭에 해결사를 자임하는 일이 많았다고 안다. 발굴현장에서 조사단이 부닥치는 문제가 오죽이나 많은가? 이를 염두에 둔 자문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예컨대 모든 유적 유물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장광설을 펴기 좋아하는 다른 지도위원보다는 조사단에서는 매우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커렁커렁했다. 키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 연배로는 큰 편이었으며, 몸집은 거대했다. 달변이라는 느낌까지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눌변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 많지는 않았으되, 꼭 필요한 말한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외모 때문인지, 그리고 신선을 방불하는 온통 허연 머리카락 때문인지 연배에 견주어 뿜어내는 ‘포스’는 더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는 분명 박물관에서는 적어도 고고학 분야에서는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에서는 늘 이른바 주류였다. 그는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기 전에 그곳 사학과를 다닌 까닭에 체계적인 고고학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기 힘들다. 실제 자신이 직접 조사에 참여한 발굴현장은 나로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박물관 고고학의 대부로 통한다. 그를 꼭짓점으로 삼는 박물관 고고학 흐름에서 소위 주류로 분류하는 인물들을 뽑아보면 고고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느닷없는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 감사 여파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암으로 타계한 한영희와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을 역임하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다가 얼마 전 퇴임한 이영훈 등이 꼽힌다고 안다.


다호리 유적 감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일 일화가 있다. 이 독특한 인물은 공직 부침이 극심하거니와, 그 꼬장꼬장한 성격과 장거리 여행이 힘든 신체 특징과도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투서에서 시작했는지 어떤지 모르나, 국립박물관 고고부가 오래도록 연차 발굴을 벌인 다호리 유적 발굴에 비리 혐의가 있다 해서 문화부인지 감사원인지 감사를 받게 되었거니와, 담당 학예직들은 그야말로 불려가서 혼쭐이 났다. 그에서 한영희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거니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장래의 박물관장감이라는 평이 자자하던 한영희는 유명을 달리한다. 한영희는 내 기억에 1999년인가 타계했으니, 나랑은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 이 감사에서 임학종은 발굴야장을 제출했다. 한데 이 야장을 보던 감사관이 학을 떼고 말았다. 언제 어느 때 껌 한 통 구입한 기록까지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야장을 보고 감사관이 경악하고 말았다. 


한병삼을 이쪽 업계, 특히 박물관 주변에서는 대체로 ‘경배’에 가까운 존경을 바쳤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홀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며, 어디까지나 나는 기자였으니깐 말이다.  


 내가 한병삼을 마지막으로 본 곳은 2000년 한양대박물관이 발굴 중이던 경기 하남 이성산성 현장에서였다. 그 몇 달 뒤인가 갑자기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마지막 현장에서 조사단에서 마련한 스포티지 차량에서 내리는 그를 보니 거둥이 아주 좋지는 않았다. 물었더니 허리 디스크 수술 여파라 했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이성산성 현장에서 그를 부축해 오른 이가 나중에 서강대 총장까지 하는 서강대 이종욱 교수였다. 내가 당시 현장에서 이종욱 선생한테 한 관장과는 어떤 인연이 있냐고 물었더니 영남대 교수로 재직할 때 경주를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며 당신 연구를 격려했다 한다.


그의 공직 혹은 그 주변 이력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박물관과 더불어 문화재위원으로서의 행적이다. 그는 1985~2001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위원은 2년마다 새로 위촉되니 8번이나 거푸 한 것이다. 1997~2001년에는 제6분과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무렵 문화재 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경우 더러 문화재청과 박물관 충돌이 불가피한 일이 있기도 한다. 이때마다 그는 박물관 편을 노골적으로 들었다고 기억한다. 대표적으로 문화재청이 지금의 분황사 인근에 추진한 황룡사지전시관을 무산시킨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전시관 공사를 앞두고 그 예정지인 분황사 인근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했으니, 그 발굴설명회(당시에는 아마 지도위원회라 했을 것이다)에서 그는 “여기다가 전시관을 지으면 경주박물관엔 누가 오겠느냐”고 한 말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박물관 한병삼을 논할 때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그의 친구들이다. 그의 서울대 사학과 동기생으로 같은 박물관에 생평을 투신한 인물로 미술사학도로서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 선생이 있고, 박물관계의 대모로 통하며 최종 공직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는 이난영 선생이 있다. 이 세 사람 사이에는 묘한 라이벌 의식도 적지 않았던 듯하지만, 늘 선두주자는 한 선생이었다. 한병삼 관장 시절 정양모 선생은 이 조직 넘버 투인 학예실장이었으며, 미술사학도인 이난영 선생은 경주에 있었다. 한 선생이 물러난 뒤 정 선생이 후임 관장이 된다. 정양모 관장 시설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다. 


한 선생이 타계한지 벌써 18년이라니, 질풍의 세월이 믿기지 않는다. 그의 이력을 보면 서른여섯에 박물관 고고과장이 되고, 마흔에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임명되어 무려 9년을 재직했다. “나이 50에도 달항아리 들고 다니게 생겼다”고 자조하는 지금의 학예직들이 보기엔 그가 비록 느닷없이 떠났다고 하지만 어쩌면 낙원천국을 살다간 다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 다음은 (재)만해사상 실천선양회가 발간하는 잡지 《불교평론》 36호(2008년 10월 10일)에 투고한 글이다. 


불교문화재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김태식  taeshik@yna.co.kr


1. 잘못된 진단과 처방 


이 글을 쓰는 7월 20일은 일요일임에도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분쇄하고자 정부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그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보도에 따르면 독도 수호를 위해 해저 광물질 조사단 구성, 운영과 국민에 대한 독도 접근권 보장, 해양호텔 건립을 비롯한 독도 관광상품 개발 등의 ‘독도 유인도화(有人島化)’가 그 핵심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당ㆍ정은 현재 독도에 주둔한 전투경찰을 철수시키는 대신, 해병대를 투입하는 방안도 오갔다는 말도 들려온다. 다만 해병대 투입 문제는 우리 스스로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대외에 선전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이런 독도 대응을 볼 때면, 진단과 처방 모두, 아니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진단은 차치하고라도 처방만 보건대, 저런 논의처럼 과연 우리가 ‘독도 유인도화’로 골자를 잡을 수 있는 실효적 지배 조치로 독도 정책을 선회한다고 해서 과연 일본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분쇄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담하거니와 설혹 우리가 독도에다가 해병대를 항시 주둔시킨다고 해서, 나아가 그 주변 일대를 매립하여 일본 오사카의 간사이 공항, 나아가 인천공항 같은 시설을 만든다 해도, 결코 일본은 독도가 그네들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거나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열 손가락 다 장을 지져도 좋다.


그러면서 나는 적어도 1945년 이후 독도를 우리가 점유 중이며, 그렇기에 그에는 한국 경찰력이 상시 주둔 중이며, 나아가 독도 전체 18만 7554㎡는 ‘독도 천연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11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실효적 지배’의 증거 아닌가, 이보다 더한 ‘실효적 지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되묻기도 한다.


결론은 하나다. 진단이 잘못되니까 처방도 잘못일 수밖에 없다.


이 비슷한 사례는 같은 일본이 개입한 소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있다. 이 또한 독도 문제처럼 주기를 방불하면서 재현하거니와, 그때마다 그 대증(對症) 요법으로 항용 내세우는 것이 역사교육 강화이다. 이 역사교육 강화는 마침 소위 ‘인문학 위기’와 맞물리면서 그것을 선전하는 역사학계와 언론, 시민단체, 심지어 정부까지 주동이 되어 정말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우리의 역사교육이 강화되지 않은 데서 말미암았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한답시고, 대입 수능시험이나 각종 공무원 시험, 혹은 입사시험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한다거나, 일선 교육현장에서 역사 수업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연결되곤 한다. 이번과 같은 독도 사태를 정부 외교력의 무능으로 치부하는 여론은 급기야 독도 대책본부가 신정부로 권력이 이양하면서 대책 없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끄집어내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었더라면 이번과 같은 독도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거나, 혹은 그에 기민하게, 그리고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호도된 결론까지 도출하고 마는 것과 비슷하다. 여담이지만 이런 ‘조작된 여론’은 조만간 국책 독도문제연구소 비슷한 기구를 출범하는 데 일조하리라.


장담하거니와, 우리가 역사교육을 강화한다 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른 자리를 빌려 내가 누누이 강조한 말을 여기서 되풀이하자면 우리의 역사교육 강화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전혀 무관계하다. 진단도 잘못되고 처방도 잘못되었다. 탈이 난 맹장을 고쳐야 할 판인데 뇌종양을 제거하는 꼴이 벌어진 셈이다. 


2. 남대문이 닫은 성균관 


화마(火魔)에 휩싸인 남대문(사진...생략) 


진단과 처방, 그 잘못된 만남은 문화유산이라고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하기야 독도 또한 그 일종인 천연기념물이니, 문화재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거니와, 작금 문화유산계 최대 사건이라 할 만한 남대문 방화 또한 그런 사례에 속한다. 이 남대문이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불에 타던 그 시점 나는 테헤란발(發) 인천행(行)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약 9시간이 걸린 이 비행시간 직전, 테헤란공항에서 적어도 내가 몸담은 문화유산계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 출발한 내가 인천에 발을 디뎠을 때 날아든 소식은 남대문이 간밤에 불탔다는 벽력이었다. 나는 그 대상이 ‘남대문’이란 소식을 집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남대문 시장을 말하는 줄로 알았다. 그것은 ‘숭례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덜 익숙해서가 아니라,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국보 제1호라는 남대문이 불타 내릴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나 서울 시민도 그랬으리라. 그럼에도 엄연히 불타 내린 대상은 서울 성곽 4대문의 정문(正門)인 남대문이었다. 더욱 정확히는 내려앉은 것은 남대문의 문루(門樓)였지만, 그것이 문루건, 아니면 그것을 포함한 남대문 전체건 무에 중요하랴. 다만 중요한 것은 남대문이 불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인으로서 문화유산계에 꼬박 10년을 채운 나에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직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어디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들이 문화유산 애호가를 자처해 등장하는 현상은 곰곰 생각하면 문화유산 그 자체를 위해서는 그리 나쁠 것도 없으리라. 나아가 그런 ‘냄비 현상’이 때로는 문화유산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남대문이 난데없이 정쟁(政爭)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남대문은 그 관리권이 서울시, 더욱 정확히는 서울 중구청에 위임됐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대통령 취임을 눈앞에 둔 대통령 당선자는 서울시장 출신이었고, 더구나 그가 서울 도심 무인도처럼 남은 그것을 시민에게 돌려놓은 주인공이었으며, 현재의 서울시장 또한 조만간 집권당이 될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이에 더해 서울 중구청장 또한 한나라당 소속이다.


그래서인지 예비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예비여당 세력들은 집요하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무분별한 남대문 개방이 이와 같은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친정부 성향을 유지하던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 또한 이에 가세해 공세를 가중했다.


이에 맞서 예비여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측은 한편으로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그 맞대응 카드로 현 정부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남대문과 같은 국가 지정 문화재 최종 관리권은 중앙정부에 있고, 더욱 구체적으로는 문화재청장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 이들은 조만간 물러날 노무현 대통령 대신에 유홍준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당시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마침 남대문 화재 기간에 단행한 해외 유럽 여행이 외부 찬조를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부각됨으로써, 불타 내린 남대문을 안고서 한때는 부총리급 차관급 청장으로 불리던 유홍준은 낙마했다. 그의 낙마는 한국 문화유산 정책의 총체적 부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일련의 사태 전개를 목도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낙담하곤 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개방과 방화는 직접 관계가 전혀 없으며, 나아가 이번 사건에 유홍준이 책임질 일이라고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강조하거니와 남대문이 방화의 대상이 된 것은 그것이 무분별한 개방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니다.


남대문은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당시 개방이 이뤄지기 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실제도 그러했다. 80년대 한국사회를 풍미한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1984)>을 보아도 남대문은 부랑인의 소굴로 등장하며, 이곳에서 심지어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도 등장한다.


나아가 남대문 관리책임자는 서울 중구청장이다. 문화재청장은 그에게 그런 관리권을 위임했을 뿐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감독권이라는 문제가 남기는 하나, 그래도 남대문 방화에 책임을 진다면, 그것은 중구청장이지 서울시장도 아니며, 대통령도 아니며, 문화재청장도 더더구나 아니다. 이것이 현행법이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개방’이라는 슬로건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암암리에 남대문 방화사건은 정말로 그로 인한 것인 줄 모두가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나는 몇몇 자리를 빌려 개방과 방화는 관계가 없고, 나아가 이로 말미암아서 개방이 대세인 문화유산이 국민과 시민에서는 더욱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애초에 종묘도 범행 대상으로 생각했으나 그곳은 경비가 삼엄하고 접근도 어려워 남대문을 골랐다.”라는 70대 방화범의 경찰 진술은 위력이 그만큼 컸다. 강조하거니와 남대문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근다 해서 저와 같은 방화에서 남대문을 구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남대문 사태는 무엇을 불러왔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두 가지 새로운 풍경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성균관 문을 닫아 버렸다는 사실이다. ‘무분별한 개방’이 방화 혹은 화재를 부른다는 이 논리가 먹혀들었음인지 남대문으로 인근 중구청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을 목도한 종로구청은 그 이전에는 개방하던 성균관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조차 담그지 못한 셈이다.


녹아내린 낙산사 동종 남대문이 낳은 또 다른 풍경은 소방 물대포를 든 스님들을 등장케 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찰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킨다 해서, 언론매체를 불러놓고 소방훈련을 실시하는 풍경이 어느덧 낯설지 않게 되었다. 


3. 낙산사 화재 


이런 말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 달라. 구경거리 중에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 하는데, 그 여하(如何)한 실상을 나는 2005년 낙산사에서 보았다. 비록 남대문 화재 순간은 이란에 있는 바람에 놓쳤으나, 낙산사가 불타는 ‘장관’을 나는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때는 4월5일, 공교롭게도 식목일이었다. 지금은 공휴일에서 제외됐으나 그때만 해도 공휴일이었는데,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회사에 출근해 있었다. 양양 일대 산불이 나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라, 담당 기자들은 고생하겠구나 하고 조금은 ‘느긋하게’ 산불 진행 과정을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시청’하던 나는 그 불길이 갑자기 낙산사로 덮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았다.


낙산사가 불타 내리는 광경은 그 자체만큼은 ‘장관’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문화유산계 투신 이후 문화유산에 대한 내 신념이랄까 생각이 확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문화유산이라면 무엇보다 ‘보존’이라고 입에 달고 다녔으며, 그래서 훼멸 일보 직전에 처한 문화유산의 ‘구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그 일환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파괴 일보 직전에 처한 서울 풍납토성을 지킨답시고 나름대로는 부산을 떨었지만, 이 낙산사 화재는 어쩌면 그것이 일순간에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으며, 그렇기에 그렇게 구출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나에게 얼마나 충격파를 주었는지는 몰라도,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문화유산 현장을 가면, 반드시 방재시설이 어디에 어떻게 구비되어 있는가를 적어도 한 번쯤은 따지게 되었다. 나아가 발굴현장에 가서도 그에서 무슨 새로운 성과가 나왔는지, 그리고 그에 더불어 이제 그렇게 나온 유적과 유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조금은 진지하게 묻게 되었다.


낙산사 화재는 다른 무엇보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을 녹아내린 엿가락 같은 앙상한 잔해로 남겼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왕이 그의 아버지인 세조(수양대군)를 위해 제작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해서 만들었다는 높이 158㎝, 입지름 98㎝인 이 범종 잔해는 화재 6일 뒤인 4월 11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공개됐거니와 그 처참한 몰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아가 화재 당시에는 현장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그 얼마 뒤 낙산사 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 황량함이란 형언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이 낙산사 화재는 문화유산, 특히 그 태반을 점거하는 불교 문화유산이 처한 상황을 재점검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은 남대문 화재로 재발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미 낙산사 화재 때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 애호가가 양산되었던가. 평소에는 어디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열렬한 문화유산 애호가로 돌변해 각종 언론매체에 등장해 사자후를 토하면서 문화유산을 이 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염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2005년 낙산사는 남대문과 결합하면서 그 위력을 배가했다. 예컨대 낙산사 때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 ‘문화재 방재의 날’을 탄생케 했는가 하면, 속내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건축 문화유산만큼은 방재시스템 전반에 대한 실태 점검과 관련 설비 구축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4. 성보 문화유산의 수난 


내가 알기로 불교계 일부에서는(전체인지도 모른다.)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 개념에 알레르기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그것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 이른바 ‘성보(聖寶)문화재’다. 문화재이기 이전에 신앙 대상물이라는 대목을 강조한 개념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문화유산에서 불교 성보문화재가 차지하는 나름의 독특한 위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성보문화재 대다수는 그 자체의 희귀성과 골동성, 나아가 재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여타 일반 문화유산과 결코 유리할 수 없는 공통점을 아울러 지닌다. 더불어 ‘성보문화재’라는 개념은 불교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그리고 그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곧잘 여타 문화유산과는 사뭇 다른 충돌을 야기하곤 한다. 특히 이 후자의 논란은 성보문화재를 사찰 대웅전과 같은 성보의 공간에서 박물관과 같은 보다 안전한 공간으로 이치(移置)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논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불교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거대한 고민은 다른 문화유산과의 공통성과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아울러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해 보라는 자리가 지금 이 순간, 이 지면을 통해 주어졌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방안을 나는 낼 수 없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제대로 된 진단이 있고서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대한 단견(短見)을 덧붙이는 한편, 내가 실제 현장에서 본 두어 가지를 소개함으로써 갈음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확실히 할 것은 ‘불교문화재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거나,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훼손, 인멸(湮滅) 등의 위험에 처한다는 절박감을 전제로 한다. 이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따라서 우선 진단이라는 측면에서 불교 문화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훼손, 인멸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진단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크게 천재지변과 인재의 두 가지로 나눈다면 전자로는 지진이나 벼락, 산불과 같은 화산 폭발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 외 홍수가 있을 터이고 요즘 특히 석조문화재에 문제가 되는 산성비도 있으며 목조문화재에는 치명적인 흰개미도 있다. 황룡사 목탑은 이미 신라시대 창건 이후 지진이나 벼락으로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몽골 침략의 병화에 결국 잿더미로 변했으며, 최근 석가탑 중수기 공개로 드러났듯이 석가탑과 불국사 또한 11세기에 빈발한 지진으로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은 이젠 하늘 탓만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반도는 지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땅이라 치부되었으나,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미 신라 문무왕 시대에 경주 토함산이 갈라져 불길을 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한반도는 지진 피해가 빈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즘은 내진 설계와 같은 공법으로 그 피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조처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실제 문화유산 복원 현장에서 이런 공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낙산사를 삼킨 산불을 볼 때, 이에서 성보 문화유산, 특히 일단 유사시에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부동산’ 성보문화재는 여전히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


더불어 적어도 ‘동산’ 성보 문화유산만 해도 일을 만나서야 허겁지겁 등에 메고 안전장소로 대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법당을 떠나 더욱 안전한 공간으로 모시는 결단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화마의 위험에서 대웅전 부처님을 업고 정신없이 뛰었다는 불교계 무용담은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보 문화유산은 문화재이기에 앞서 신앙의 대상이라는 ‘성보(聖寶)'라는 개념과 곧잘 충돌한다. 하지만 최근 큰 사찰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성보박물관’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성소(聖所) 아닌가? 왜 이런 공간에 ‘성보’를 모시는 행위를 ‘퇴출’로만 접근하려 하는지 나는 의아스럽기만 하다.


내 짧은 불교에 대한 상식으로 사찰 자체가 적멸보궁(寂滅寶宮) 아닌가? ‘성보박물관’을 이 적멸보궁 그 자체, 나아가 그 일부로 인식하는 일은 다름 아닌 불교계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들 성보박물관을 비롯한 성보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공간이 불교계 내부에서는 당당한 불교 건축의 일부로 인정하는 느낌을 주는 데 실패했다.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일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이들 또 다른 적멸보궁을 성소화(聖所化)하는 데 주력해 봄이 어떨까 제안해 본다. 성보박물관이 대웅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나아가 누전으로 인한 화재 또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지만 화재 원인의 절반은 방화이며, 그 나머지는 이 누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누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사찰 주요 성보 문화유산에 설치된 전기설비는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첩첩산중 중턱에 똬리를 튼 우리의 여느 사찰을 볼 때마다, 주변의 치렁치렁한 전깃줄에 경악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그다지 현지 사정에 밝은 것은 아니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적어도 지정 성보 문화유산에서 전기 설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컴컴하면 어떤가? 추우면 어떤가? 시방세계 어느 부처님이나 신통방통하다는 어떤 보살님도 한밤을 항상 대낮처럼 밝힐 것이며, 한겨울은 여름처럼 뜨겁게 달구라는 사자후를 토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천재지변만큼이나 문화유산, 특히 성보문화재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는 각종 인재가 있다. 남대문 방화는 분명 이에 속하지만, 도굴로 인한 피해 규모 또한 막대해 예컨대 불상의 복장(腹藏)은 남아 있는 게 외려 신기할 정도인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도굴 실태에서 불교계 내부 또한 썩 자유롭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요즘에는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불교계 자체의 각종 통제 시스템이 워낙 강해져 안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불교에 반대하는 신념이나 다른 종교에 의한 탄압 또한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 회교 원리주의로 무장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의한 바미안 석불 파괴 사건은 우리에게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인천국제공항 입국로를 따라 얼마 전부터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모조품을 설치해 놓았지만, 이것이 우상숭배라며 철거하라는 협박성 편지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공항 당국자에게 날아들고 있으며, 그 옆을 장식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 또한 퇴출 위기에 몰려 있다. 더불어 최근에는 특정 종교 성직자가 태백산 천신단을 무단 훼손한 일도 있었다. 신념을 무기로 장착한 이런 배타적 행위는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데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부디 그들에게 자비(慈悲)와 화융(和融)이란 선근(善根)이 자라나길 빌 뿐이다.


이 인재라는 측면에서 최근 새롭게 부각한 사안이 이른바 문화유산에 대한 테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 세력에 의한 성보문화재 자체에 대한 파괴 행위도 있지만,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일은 그런 공격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다른 의지를 관철하고자 애꿎은 문화유산을 선택하는 사례가 급증한다는 사실이다. 남대문 방화 용의자가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웃 일본에서는 이런 사례가 더욱 빈발해, 천황제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과거 천황 왕실이 건립한 불교 사원에 폭탄을 설치한 일도 있었다. 이에서는 한국사회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치부되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5. 방재시스템, 일본의 경우 


외국의 문화유산 방재시스템만을 둘러보기 위한 기회가 나에게는 지금까지 두 번이 주어졌다. 한 번은 낙산사 산불이 준 ‘선물’이고 나머지 한 번은 남대문 화재가 쥐여 준 자리였다. 두 번 모두 일본을 택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네들의 문화유산 태반이 우리처럼 목조물이며, 나아가 우리의 방재시스템이 일본의 그것을 모델로 삼고자 하며, 실제 일본에서 시도한 그 일부가 우리 문화유산 현장에서도 구동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일본 또한 문화유산 태반은 불교의 유산이었다. 물론 일본의 그것이 우리의 탈출구가 될 수는 없다. 그에 더불어 일본과 우리가 처한 문화유산 현실이 상통하는 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 입지조건이 현격히 다른 데가 많고 무엇보다 기후가 다르고, 지진과 같은 지리적 조건도 현저히 다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요성을 나름대로는 체득하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2005년 첫 번째 탐방은 대한불교조계종 문화부가 기획한 와카야마현 진언종(眞言宗) 총본산 고야산(高野山) 일대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2008년 탐방은 명지대 건축문화연구소가 기획한 교토 일대를 둘러봤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국가가 지정하는 문화재들인 국보(國寶)나 중요문화재에 일본 고야산 고카와지(粉河寺) 본당 방재시스템 에 대한 방재시설 설치는 일본 문화재보호법이 규정하는 정책과 이에 의한 보조금 교부제도에 의해 시행됨을 확인했다. 그 일환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에 대한 사업비는 국고보조금으로 충당된다. 전체 사업비 중 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게는 50%, 많게는 80%에 이른다. 재정이 상대적으로 튼튼한 사찰이나 문화유산 소유자에 대해서는 보조금이 적은 반면, 그럴 만한 자체 여력이 없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국고보조금이 나온다고 했다.


2005년 현재 일본은 약 2,600건에 달하는 문화재가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이를 포함한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연간 2천억 원(한화) 가량의 예산이 책정되고 있다고 전했다. 국고보조금 지원사업 대상은 설계도와 관련 예산서 등을 첨부한 신청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해 그 심사에서 합격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건조물 문화재 방재시설로는 경보 설비와 소화 설비, 피뢰침 설비로 나뉜다.


이 중 화재 발생 사실 혹은 그 가능성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경보 설비는 소방법에 의해 설치가 강제화해 있다. 다른 설비는 강제되지 않는다.


실제 문화유산 방재현장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인 설비가 물대포였다. 2005년 고야산 일대 탐방에서 일본 현지 방재업체가 중요문화재인 고카와지(粉河寺) 본당(本堂, 대웅전)에서 그 실제 사용 상황을 재현했다. 남쪽을 바라보는 이 목조 기와 건축물은 두 개 건물을 마치 2층처럼 포갠 형식인데 전면 33m, 뒷면 25m에 높이는 33m에 이른다. 사찰 기록에 의하면 정덕(正德) 3년(1713)에 중건한 건물이다.


열 감지기는 건물 외부에서 발생하는 화재에는 대처가 곤란하다. 하지만 이곳에 설비된 열 감지기는 빛 센서를 이용해 옥내와 옥외를 막론하고 약 0.3㎡의 불꽃을 감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다른 조명에 감지기가 오작동하지 않도록 적외선과 자외선의 두 가지 파장의 흔들림을 동시에 검출해 작동하도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고카와지 본당 외곽 주변에서 시행된 실험 결과 작은 불꽃에도 건물에 장치된 화재경보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서는 충분한 물과 그 저장을 위한 물탱크 시설이 확보돼야 하며, 이에 더해 그러한 물을 충분한 압력을 가해 적재적소에 쏟아 부어야 한다. 방재에는 맑은 물을 사용한다. 그 까닭은 문화재에 대한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 했다.


‘방수총’이라 일컫는 물대포가 바로 시설을 쏘아 버린다면 막대한 손상을 낼 수 있으므로, 방수총은 방수 대상 건물에서 일정 거리에 떨어져 설치된다. 사정거리는 25m이며, 1기당 방수용량은 0.7파스칼 압력으로 분당 500~600ℓ를 쏟아내게 된다. 건물 주위를 돌아가며 배치된 방수총은 화재가 난 건물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에워싸며 물을 쏘아 댄다. 고카와지 본당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일본 고야산 부동당 방재시스템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20m 이상을 하늘로 치솟아 마치 아치형 대문을 만드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면서 본당 지붕으로 떨어졌다. 치솟는 물길에 무지개가 형성됐다. 1분이 채 안 돼 본당 처마 끝에는 굵은 물줄기가 뚝뚝 떨어졌다. 이 장면 자체가 장관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문화유산 현장에서는 이 방수총 출수를 관광상품화할 정도다.


이와 비슷한 방재시스템은 산 전체가 불교성지라 할 고야산 중심지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곳에는 일본 국보 21건, 중요문화재 137건, 지방문화재 13건이 포진해 있으며, 이 중 건축물은 국보가 2건, 중요문화재가 18건을 헤아린다. 일본 국가지정 문화재 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고야산 구역 중 단상가람(壇上伽藍)에 자리한 부동당(不動堂)과 그 인근 어영당(御影堂)에서 소방 방재시설 시연이 있었다. 부동당 주변에는 모두 5개에 이르는 물대포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본당과는 달리 지붕 마감재가 히노키 껍질이어서 화재에 더욱 취약하기 때문에 지붕 곳곳에 직접 물을 분사하는 시설을 장착했다. 방재용 스위치를 틀자마자 부동당은 온통 하얀 물 연기를 뿜어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용마루 양쪽 끝에 몇 개나 되는 수도꼭지 같은 시설이 있어 연방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붕 전체에 걸쳐 10여 개는 족히 될 만한 수도꼭지가 일시에 뿜어내면서 연출한 광경은 일대 장관을 방불했다. 이런 시설은 40년 전인 1965년에 설치됐다가 10년 전에 개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붕에 직접 방재시설을 설치한 이런 예는 일본에서도 이곳 부동당이 유일하다고 한다. 기술상 굉장히 까다로운 데다 설치에 따른 문화재 원형 훼손과 누수라든가 동파에 의한 건축물 훼손 가능성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장관은 어영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檜)나무 껍질로 지붕을 마감한 이 목조건물은 평면 형태가 5칸 4면의 정사각형으로 단상가람 구역에서는 부동당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평가된다. 이곳 방재시스템은 고카와지 본당과 흡사하게 건물 주변에 물대포를 설치했지만 ‘상향식 스프링클러’ 비슷한 별도 설비가 따로 있었다. 사각 건물 주변 바깥을 돌아가며 촘촘히 설치된 노즐을 틀어 대니 폭포수가 분출하는 듯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런 시스템이 이미 1965년에 설치됐다고 하니 부럽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림 1 일본 고야산 어영당 방재시스템(그림 생략)


올해 교토 탐방에서 진언종 총본산 고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닌나지(仁和寺)는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종무실을 중심으로 사찰 경내 세 군데에 마련한 화재경보실에는 모두 96개에 이르는 화재경보기 버튼이 있었다. 무려 96개소에 이르는 곳곳에 열 감지기를 설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벽면에는 소방서를 비롯한 관계 당국과 직통인 비상 전화기나 비상벨도 설치돼 있으며, 소화기도 다섯 대가 구비돼 있었다.


물론 열 감지기가 더러 오작동을 빚기도 하나 화재 경보 시 2~3분 안에 소방차가 출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더욱 부러운 점은 관할 소방서와 합동으로 매년 두 차례 실시하는 정기 훈련 외에도 사찰 자율의 방재훈련을 매년 10회 이상씩 한다는 말이었다. 이곳에서도 주요 건축물에는 물대포는 기본이었다. 이곳에서 인상적인 곳은 금당이다. 대낮인 데도 법당 안은 캄캄했다. 금당 어디에도 전깃줄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닌나지가 이토록 철저하게 방재시스템으로 무장한 데는 아픈 역사도 한몫을 했다. 1993년 4월에 폭탄 테러와 1995년 고베 대지진 또한 그중 하나였다. 특히 닌나지에 대한 폭탄 테러는 일본 사회 전체에 충격이었다. 천황제 반대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닌자지 주요 목조문화재 세 곳에 대해 폭탄테러를 시도했다. 금당과 오중탑 등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아 시간에 맞춰 터지도록 폭탄을 장치한 것이다. 일본 황실에서 세운 사찰이라 해서 이곳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폭탄은 터졌지만, 초기 진압에 성공함으로써 화마의 손길에서 문화재를 극적으로 건져 냈다. 


6. 두어 가지 제언


일본의 방재시스템이 우리보다 ‘선진’(先進)의 영역에 돌입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한국의 문화유산, 특히 불교 성보 문화유산에 그대로 통용될 수 없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방수총이니, 물탱크니, 스프링클러니 하는 시스템만 해도 주로 산간벽지에 자리한 우리의 사찰에는 맞지 않는 측면이 많다. 더구나 아무리 소방시스템이 철저하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남대문은 웅변으로 증명했다.


전통건축물 특유의 특성으로 인해 폭포수 같은 물을 퍼부어도 소용없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저런 설비는 있어야 한다. 나아가 제아무리 저런 시설이 우리의 지형적 조건에 맞지 않다고 해도 현대의 과학기술은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이에 관계 당국에서 낙산사와 남대문을 거울삼아 다양한 방재 매뉴얼이 마련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내가 무슨 말을 보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관계 당국이나 불교계에 두어 가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있다. 첫째, 방재를 책임져야 할 원초적 책임자는 불교계라는 사실이다. 성보 문화유산은 모든 국민이 향유하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해당 불교계의 자산이기도 하다. 공공성을 띤 자산은 그 법률적 소유주가 우선 관리를 책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계 자체의 노력은 어느 정도인가 자문해 보건대 그다지 후한 점수를 매기기 곤란하다.


돌이켜 보면 낙산사와 남대문 사태에 불교계는 정부 당국을 향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는 결이 다양하지만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 방재시스템 구축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예산 투입을 요구한다. 이에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낙산사 이전에, 남대문 이전에 그런 방재 설비 구축을 위해 불교계 자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적어도 지정 문화유산만큼은 공공성을 띠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그 보존 관리에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함은 부인할 수 없지만, 혹여 이것만을 빌미 삼아 그 모든 책임을 국가에만 전가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책임지라는 말은 어쩌면 국민에 대한 협박이다. 정부 예산은 국민 세금이 원천이다. 정부 예산을 투입하라는 것은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에서 대두하는 역설은 종교는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면세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여타 국민이 국민의 의무 중 하나로 책임지는 납세의 의무에서 대체로 불교를 포함한 종교계는 면탈 대상이다. 정부와 국민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기 전에, 아니 그와 더불어 불교계 자체의 이를 위한 몸부림을 우리는 보고 싶다. 정부가 먼저 예산을 줘야 불교계도 그에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 불가능하다. 왜 불교계 자체가 방재시스템을 구비할 수는 없는가?


둘째, 전깃줄은 뽑아 버려야 한다. 적어도 지정 문화재 혹은 그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성보 문화유산에 설치된 전깃줄은 철거되어야 한다.


셋째, 같은 맥락으로 불상을 비롯한 ‘동산’ 성보문화재는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 자리엔 21세기 부처님을 모시고 기존 부처님이 옮겨간 자리는 새로운 법당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성보박물관과 같은 시설은 ‘폼’만 내라고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이런 점에서 중국 측 문화유산 관리체계에서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적어도 내가 다닌 중국 고찰은 예외 없이 우리의 사적이나 지방문화재에 해당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나 성급(省級), 혹은 현급(縣級) 등의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있었다. 우리의 문화유산 관리체계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물론 불국사나 송광사처럼 일부는 명승지구와 같은 개념으로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긴 하지만, 이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문화재보호법을 손질할 이유는 그다지 없을 것으로 본다. ‘명승’이란 개념을 더욱 확대 적용하면 된다. 사찰 전체가 성보 문화유산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학술ㆍ문화재 전문기자.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연합뉴스 입사. 체육부, 사회부 등을 거쳐 1998년 이후 동(同) 문화부에서 학술ㆍ문화재 전문기자로 활동 중. 저서로 《풍납토성》(김영 사, 2001)과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 등이 있고, <봉선대전 (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 순수비>(《백산학보》68, 2004)를 비롯한 논 문 다수가 있음.

《시사IN》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제484호


황룡사 터에서 고고학이 일어섰다

황룡사 터 발굴은 신라 문화재 조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2만5000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고고학계 중진 중에는 황룡사 터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이 많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7년 01월 10일 화요일 제486호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당시, 드넓은 경주평야 한가운데에 건축되었던 거대한 사찰이다. 규모로나 위계에서 신라 제일의 절이었다. 진흥왕은 당초(재위 14년째인 553년) 그 자리에 새로운 대궐을 지으려 했다. 돌연 황룡이 출현하는 바람에 대궐을 사찰로 바꿔 건설했다. 세월이 흘러 선덕여왕 시대(재위 12년째인 643년)에 승려 자장율사가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우자고 제안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 유학 시절 자장 앞에 출현한 신인(神人)이 ‘황룡사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거나 조공하게 되어 왕업이 태평할 것이라며 권했다고 한다. 이처럼 황룡사가 건설되고 그 중심에 구층 목탑이 우뚝 설 때까지 무려 90년이 걸렸다. 대역사였다. 하지만 고려 고종 당시인 1238년, 경주까지 진격한 몽골군이 황룡사를 깡그리 불태워버린다. 이후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버린 ‘황룡사 터’에는 민가와 논밭이 들어차면서 세월이 무심히 흘렀다.

박정희 정권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서 황룡사 터 발굴은 문화재 조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발굴 조사단은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안압지 조사에 착수하는데, 거의 동시기인 1976년 4월 황룡사 터에도 발을 디디게 되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8년 7월28일, 황룡사지 구층 목탑 터에서 30t에 이르는 심초석을 포항제철에서 빌린 크레인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당초에는 황룡사의 규모도 몰랐다. 3년 정도면 발굴 조사를 완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파기 시작하면서 발굴 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황룡사가 외곽 담장 기준으로만 무려 8만2500㎡(약 2만5000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발굴 계획 기간이 8년으로 늘어나 전두환 정권 중반기인 1983년에야 겨우 주요 부분에 대한 조사를 완료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를 위해 정부가 사들인 민가만 100여 채였다. 매입 사유지는 대략 18만5000㎡(약 5만6000평)에 달한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이전에도 황룡사 터, 특히 구층 목탑에 대한 조사가 시도된 바 있다. 문화재위원회가 1964년, 황룡사 터 내부의 민가 한 채를 철거했던 것이다. 몽골군이 이미 700여 년 전에 불태워버렸지만 이 목탑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탑의 뿌리로 깔려 있는 ‘받침돌(초석)’들이다. 지름 1m 내외인 초석은, 사각형 형태인 목탑 바닥의 각 변에 8개씩 모두 64개가 배치되어 있다. 한 변이 22.2m로 면적으로는 약 490㎡(150평) 규모다. 탑의 높이는 80m로 추정된다. 이 사각형의 중앙에 ‘심초석(心礎石·중심 받침돌)’이 놓여 있었다. 목탑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의 뿌리다. 1964년 당시 문화재위원회가 철거한 민가 한 채는 이 심초석 위에 세워져 있었다. 민가를 치우고 나니 비로소 집채에 묻혀 있던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랬더니 도굴꾼이 몰려들었다. 심초석이 드러난 이듬해(1965년) 말, 도굴꾼 일당이 심초석 주변에 묻혀 있던 각종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 주로 옛 탑들을 넘어뜨린 뒤 그 내부에 봉안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담는 병과 그릇, 함께 봉안된 각종 공양품 등)을 빼돌리던 자들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굴꾼 일당은 무게 30t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심초석을 잭으로 들어 올린 뒤 그 안의 보물을 빼냈다. 당국도 해당 시점에는 도굴 사실 자체를 몰랐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도굴꾼들은 이듬해(1966년) 9월, 불국사 석가탑을 도굴하려다 검거되었다.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구층 목탑의 도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도굴단 부두목인 윤 아무개씨는 10년가량 국립경주박물관의 수위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병각 당시 삼강유지 사장이, 도굴한 유물을 사들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의 형이다.

ⓒ시사IN 자료
경주 황룡사 터. 진흥왕이 절을 지었고 선덕여왕은 구층 목탑을 세웠다.

이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른 황룡사 터 조사가 진행되던 당시에도 가장 난제는 구층 목탑의 심초석이었다. 1978년 1월부터 구층 목탑 자리의 발굴이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심초석 주변의 토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동제 팔찌와 그릇을 파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목탑을 세울 때 신도들이 공양품으로 넣은 유물로 추정되었다. 현장의 미술사학자들(당시 황수영 동국대 교수, 진홍섭 이화여대 교수,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회의에서 심초석을 들어내면 더 많은 유적을 출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심초석의 무게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30t의 돌을 움직이기 힘들다. 더욱이 오직 유물 탈취를 목표로 삼은 도굴꾼과 달리 정식 발굴조사단은 ‘안전한’ 방법으로 심초석을 꺼내야 했다.

도굴꾼 몰려들어 보물 훔쳐 달아나기도 

발굴단은 결국 포항제철에 요청해서 100t 크레인을 동원했다. 이에 앞서 크레인을 구층 목탑 자리까지 운행하기 위한 논길을 만들기도 했다. 1978년 7월28일, 크레인으로 심초석을 꺼내 내부를 조사하고 9월9일에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지금도 현장에 가보면, 구층 목탑 자리의 중앙에 놓인 심초석을 볼 수 있다. 당시 크레인을 위해 닦았던 논길은, 현재도 황룡사 터로 접근하는 주요 통로다.

황룡사 터는 그 넓은 면적만큼이나 각종 발굴 기록을 갈아치웠다. 불확실하게 기록된 연도를 제외하고 7년 동안 동원된 발굴 인부만 연인원 6만2483명에 달한다. 고용효과로 봐도 엄청난 발굴 사업이었다. 그런 까닭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가운데 문화재 발굴을 경기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명하는 이도 없지 않다. 당시 작업반장 4명 가운데 김용만·최태환씨가 생존해 있다. 이들은 발굴 작업으로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황룡사 터는 한국 고고학계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발굴 대상 면적이 워낙 넓고 작업 기간도 길어서 고고학도를 키워내는 사관학교 같은 구실을 했다. 지금 고미술 혹은 고건축학계 중진 가운데 경주의 현장들에 가보지 않은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백제 고고학 전공인 최완규 원광대 교수도 ‘아르바이트 발굴생’으로 안압지와 황룡사 터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발굴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경주고적발굴단에서 파카를 나눠줬다. 그 파카에 경주고적발굴단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면 술도 외상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발굴하는 사람들이 신뢰받았다. 나 스스로도 ‘고고학 발굴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현장이었다. 실측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모두 거기서 배웠으니까….”


당시 대학들에도 고고학 관련 학과는 설치되어 있었지만 ‘고고학 꿈나무’들을 노련한 고고학자로 키운 것은 바로 경주였다. 


※이번 호로 ‘권력이 사랑한 문화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시사IN》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제484호


연못에서 물을 빼자 신라가 드러났다

안압지는 674년에 건설한 신라시대 연못이다. 1974년 안압지 준설공사를 했는데 발굴 조사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급히 발굴 조사를 벌였다. 신라시대 목선도 나왔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제484호



신라시대 천년 왕성 월성의 동쪽에 자리 잡은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 건설한 연못이다. 당시에는 월지(月池)라 불렀다. 안압지 주변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가 거주하는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군신이 함께 연회를 즐겼을 임해전도 있었다.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어 왕국의 영화가 사라진 뒤 안압지는 황량한 연못으로 방치되어왔다. 못을 둘러싼 테두리도 세월의 더께에 묻혀 온데간데없었다.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던 당시 안압지는 주요 개발 대상 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경주사적관리사무소(당시 문화재관리국 산하) 측은 발굴 조사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1974년 11월부터 곧바로 안압지에 대한 준설 작업(물속의 토사를 파내는 일)에 돌입했다. 대신 사적관리사무소는 직원 고경희씨를 준설 현장에 파견해 유물이 나오는지 여부를 지켜보도록 했다. 요즘 발굴 현장에서 쓰는 용어로, 소위 ‘입회 조사’ 방식이다.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 정재훈의 증언이다.

“처음에 사적관리사무소가 준설사업을 했다. 요즘 같으면 ‘간이 지표조사’ 같은 걸로 (발굴 조사 작업을) 끝내려고 한 거지. 실제로 그땐 호안(연못 테두리)도 안 보이는 상태였거든. 처음에 우리가 물을 빼고 안압지를 준설할 때는 (현장에 고경희 등 사적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 직원들로는 안압지 발굴 조사를 감당 못하겠더라고. 지금도 안압지 발굴에 대해 나는 미안한 점이 많다.”

ⓒ연합뉴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문무왕 14년(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다. 못 가운데에 3개 섬을 만들었고 못 주변에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


사적관리사무소가 작업 초기 단계에서는 안압지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준설을 하다 보니 엄중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보상화문전(꽃문양을 넣은 벽돌), 난간 등의 건물 부자재, 토기 같은 중요한 유물이 마구 나왔기 때문이다. 그제야 안압지에 고인 물을 모두 뺐다. 당시 황남대총 발굴이 한창이었는데, 그곳의 조사단 일부를 안압지 쪽으로 긴급 차출했다. 발굴 조사를 다시 실시하는 등 ‘안압지 사업’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을 문화재관리국의 <안압지 발굴 조사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준설 작업 중 예상외의 유물이 출토·수습되어 준설에 앞선 발굴 조사의 필요성을 느껴 일단 준설 작업을 중지하고 금일(1975년 3월25일)부터 98호 고분(황남대총) 발굴조사단(단장 김정기 박사)의 단원 중 별도로 차출하여 안압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이에 앞서 관계관이 참석한 가운데 개토제(開土祭·발굴을 고하는 의식)를 올렸다. 호안석축(護岸石築·연못가를 돌린 돌벽)을 확인키 위하여 4개 처의 위치에 따라 다소 융통성을 주어 동으로 6~8m의 탐색 갱(유물 확인을 위해 파는 구덩이)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주 안압지 발굴은 대략 1년9개월 만인 1976년 12월30일 완료된다. 발굴 조사는 안압지를 연못 자체와 주변 건물터 등 두 군데로 나누어 실시했다. 연못에 대한 조사에만 연인원 2만8903명이 투입됐다. 그 결과 드러난 안압지의 둘레(호안석축으로 경계 지어진)는 1005m로 면적 역시 1만3908㎡(4238평)에 달했다. 또한 연못 위에 작은 섬 세 개가 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압지는 완전히 보존된 것으로만 유물 1만5023점을 토해냈다. 그중 일부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서 전시 중이다. 안압지 유물은 대부분이 연못 진흙에서 발굴된 것들이라 보존 상태가 좋다. 더욱이 상당수가 ‘생활 유물’이라 신라 당대의 생활사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물로 평가된다.

신라 목선 부서지자 발굴 책임자가 사표 써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안압지로 차출되었던 윤근일(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이런 유물을 보존하느라 고충이 컸다. 가장 어려운 일은 발굴 인부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하루 200명 이상의 발굴 인부가 그 넓은 안압지 터에 투입됐으니, 기껏 수습한 유물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그런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퇴근하는 인부들 도시락까지 검사했다”라고 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목선을 인부들이 옮기고 있다.

당시 안압지 발굴단장 격이었던 김동현 역시 위기를 겪었다. 안압지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20일 정도 지난 1975년 4월16일, 연못 밑바닥에서 드러난 6.2m 길이의 목선 한 척 때문이었다. 발견 당시 이 배는 “연못 동안(東岸) 임해정(臨海亭)으로부터 20m 서쪽 지점에 석축 밑 수중 지하 바닥층에서 동서로 전도된 상태로 선두(船頭·뱃머리)를 동, 선미(船尾·배꼬리)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굴단은 습기 보존 차원에서 목선을 비닐과 가마니로 덮은 채 기초 조사를 시행했다. 발견 시점으로부터 9일 뒤인 7월25일에는, 목선을 현장에서 들어내 인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작업은 취재진에게도 완전히 공개되었다. 그날의 발굴 일지만 보면, 목선의 이동 과정은 꽤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보습 처리했던 비닐을 벗기고 깨끗이 세척한 다음 목선 밑에 받침목을 넣고 인부 수십명이 살짝 들어서 연못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동된 목선을 세 부분으로 해체하면서 움직이지 않게 솜으로 잘 싼 다음 박물관 지하실에 트럭으로 서서히 옮겨 갔다. 옮긴 목선을 다시 조립하여 맞춘 다음에 비닐 상자로 곽을 짜서 보존처리하여 두었다.”

실제로는 매우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발굴단 처지에서, 부서지기 쉬운 재질에 어느 정도 이상의 무게와 크기가 있는 유물을 옮기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다. 자칫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서 견뎌온 유물이 이동 과정에서 파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압지 밑에서 발견된 목선도 그럴 위험이 컸다. 안압지 발굴 책임자인 김동현도 이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름 묘안을 짜냈다. 그의 증언을 풀어보면, 우선 목선 중간 부분의 밑에 깔린 토사를 파냈다. 다음엔 그 빈 공간에 지지대를 만들어넣고 목선을 받친 뒤 선미와 선두 밑의 토사를 다시 야금야금 걷어냈다. 이런 작업을 끝내고 나니, 목선은 중간 부분만 지지대로 받쳐진 채 공중에 뜬 꼴이 되었다. 이제 받침대를 목선 아래로 넣어 들어올리면 된다.


그러나 받침대에 목선을 얹어 안압지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경사진 곳을 오르는 도중에, 위에서 끄는 사람들과 밑에서 미는 사람들이 힘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받침대 자체가 휘어져버린 것이다. 결국 목선은 부러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기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동현은 심정이 어땠을까? “그 자리에서 사표를 작성했다. ‘발굴 중에 귀중한 목선을 파괴시켜서 책임을 지고 본직을 사직함’이라 써서 우편물로 직원을 시켜서 부쳤다.” 하지만 김동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까지 맡게 된다. 

《시사IN》 2016년 12월 15일 목요일 제482호


박정희가 물었다 “금관이 나올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금관에 집착했다. ‘고분 발굴’ 관련 보고 때도 금관 출토 가능성을 가장 먼저 물었다. 천마총에서 금관이 나오고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2월 15일 목요일 제482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금관을 매우 좋아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 실무단 측이 박 전 대통령의 이런 성향을 자극해서 고분 발굴 작업을 좀 더 용이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한창 수립 중이던 1971년 6월 말~7월 초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경주 개발 실무단의 일원인 정재훈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이 청와대 상황실에서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한 부문은 ‘고분 발굴’이었다. 고분 관련 인력은 물론 고고학 전문가 자체가 희귀했고 발굴 노하우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매우 ‘담대한’ 계획이었다. 또한 정재훈은 당시 이미 경주 불국사 복원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던 김정기 박사 등의 인력(‘불국사 팀’)을 고분 발굴에도 동원하겠다고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질문했다. “금관이 나올까?”

고분을 파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금관의 유무를 알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정재훈은 호기롭게 답변해버렸다. “금관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렇게 저돌적이고 어떻게 보면 무모하게 말한 이유를 생전의 정재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실 발굴을 해봐야 알지. ‘금관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해도 괜찮았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 책임성 없고, 그 일에 대한 (박정희의) 열의를 식게 만드는 것 같았어. 이런 연유로 98호분(황남대총), 엄청 큰 고분을 (발굴 대상지로) 선정하게 되거든.”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973년 7월 시작한 황남대총 발굴은 1975년 10월 종료되었다. 북분에는 금관이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답변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한반도의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을 파기로 결정했다. 또한 황남대총 발굴을 위한 일종의 훈련으로 천마총을 먼저 파게 되는데(1971년 하반기), 여기서 덜컥 금관이 출토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천마총 금관은 당시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편이었다. 어쨌든 박정희는 천마총 금관의 출현 덕분에 ‘금관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관이 나올 거라고 무턱대고 약속한 정재훈도 어깨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천마총보다 훨씬 큰 고분이니 더 화려한 금관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1973년 7월, 김정기 박사가 이끄는 조사단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봉분 두 개를 이어붙인 고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착수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황남동 98호분’으로 불리던 황남대총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표주박을 닮아서, 표형분(瓢形墳)으로 분류된다. 황남대총의 봉분 중 북쪽의 것을 북분(北墳), 남쪽의 것은 남분(南墳)이라 불렀다.

두 봉분에 대한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2년쯤 뒤인 1975년 10월8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남대총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덩치에 어울리게 무수한 유물을 쏟아낸 것이다. 둥근밑항아리·굽다리접시 등 토기류를 비롯해 안장 등의 말갖춤, 무엇보다 금관·은관·목걸이·허리띠 등의 장신구도 다수 출토되었다.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황남대총 북분의 목관 내부에서 금관과 금허리띠가 출토되었다.

박정희가 애타게 기다리던 금관은 1974년 북분에서 나왔다. 흔히 신라를 일컬어 ‘황금의 나라’라고 부른다. 신라를 이렇게 불리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한국 고고학은 황남대총 발굴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황남대총의 주인이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마립간 시대(제17대 ‘내물’에서 22대 ‘지증’까지 6대의 임금을 부르는 명칭) 신라왕 부부의 무덤이라는 것밖에 없다. 북분의 경우,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적힌 은제 허리띠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왕비의 무덤으로 보인다. 남분이, 왕비의 남편(마립간)이 묻혔을 북분보다 늦게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황남대총을 파기 위한 훈련용으로 천마총을 발굴한 보람은 있었을까? 당시 조사 보조원으로 천마총·황남대총 발굴에 모두 참여한 최병현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물론이다”라고 단언한다. 최병현에 따르면, 발굴단은 천마총 조사에서 “아! 신라 고분이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지식을 얻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둘 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시신과 장신구 등을 넣은 목관(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은 형태의 무덤이란 의미다. 천마총을 통해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굴단은 황남대총에서도 어느 정도를 파내려 가면 적석부(積石部:나무 덧널 위에 쌓은 돌무더기)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천마총 발굴 이전의 한국 고고학계는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무덤의 핵심인 목관이 지하에 묻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천마총을 발굴해보니 목관이 지상에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황남대총의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나오지도 않은 금관을 사진까지 붙여 보도하기도

다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천마총의 경험으로 인해 낭패를 본 측면도 있다고 최병현은 말했다. “황남대총에서는 봉분 반쯤 내려가면 적석부가 나올 걸 미리 알았으니, 그만 봉토 조사를 소홀히 한 거야. 봉분 절반을 툭 잘라서 북쪽 부분만 먼저 파고 내려갔지. 그랬더니 흙이 무너져 내리고 난리가 아니었어. 당연히 토층 조사도 제대로 못했지.”

황남대총 발굴에서도 언론들은 특종 경쟁을 벌이며 에피소드를 남겼다. 희대의 오보가 양산되었다. 정치권력이 ‘유신헌법’이란 철퇴로 언론을 다스리던 암울한 시대, 어쩌면 업적을 과시하고픈 권력과 자유로운 보도에 굶주렸던 언론이 고고학에 열광하면서 이해관계를 일치시킨 드문 경우인지도 모른다. 신라 고분 조사연구원 출신인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회상이다. 

“(황남대총) 남분을 조사하던 1975년 6월30일 오후에 마침내 목관 내부 유물 노출에 들어갔어. 고분 주위에 둘러친 철조망 울타리 밖에서는 이미 며칠 전부터 진을 친 기자들이 정보를 캐내려고 아우성이었어. 그때는 워낙 보도 통제가 심했으니까. 정식 발표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기자들이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어. 할 수 없이 북분 조사 때는 목관 내부 조사를 밤에 몰래 했다니까. 그랬더니 현장 불빛을 본 기자들이 각종 추측 기사를 쏟아낸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한테 박살나고, 상부 기관에서는 ‘우리도 모르는 기사가 어떻게 났느냐’라고 닦달을 해댔어.”


이런 와중인 1975년 7월1일자 조간신문을 받아든 황남대총 조사단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또 금관 출토’라는 1면 머리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1974년 북분에서의 금관 출토에 이어 남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오보였다. 그러나 해당 기사엔 남분에서 출토되었다는 금관 사진까지 턱하니 붙어 있었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출토된 다른 금관을 찍은 것이었다. 남분에서 금관이 아니라 금동관(청동으로 만든 왕관을 금으로 도금한 유물)이, 그것도 극히 훼손된 상태로 나온 것은 이로부터 몇 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시사IN》 2016년 12월 08일 목요일 제481호


‘황남대총 파라’고 한 간 큰 사람은?

경주 발굴단은 황남대총 발굴 작업을 꺼렸다. 규모가 너무 커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 거대한 고분을 파라고 누가 처음으로 주장했는지는 아직까지도 고고학계의 미스터리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2월 08일 목요일 제481호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황남대총은 너비가 동서 80m, 남북 120m에 이르는 한반도 최대 고분이다. 위는 발굴 당시 작업 모습.

황남대총은 경주시의 신라 시대 고분 가운데 가장 큰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한반도를 통틀어 최대 고분이기도 하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너비가 동서 80m, 남북 120m에 달한다. 높이는 남쪽 봉분이 23m, 북쪽 봉분은 24m다. 적석목곽분은, 시신과 장신구 등을 넣은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은 형태의 무덤을 이르는 명칭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마총 역시 적석목곽분이다.

워낙 거대한 고분이었기 때문에, 관련 기술이 미숙했던 1970년대 초반 당시 ‘경주 발굴단’은 황남대총 발굴 작업을 몹시 꺼렸다. 특히 자신의 지휘와 책임 아래 황남대총을 파야 했던 김정기 단장은 내내 미온적이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어떻게 발굴해야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을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피해갈 궁리만 하던 김정기 단장이 낸 묘안이 바로, 주변의 작은 무덤을 먼저 파본 뒤 그 성과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 여부를 결정하자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했던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황금 유물이 쏟아지고 천마도까지 나와버렸다. 발굴단으로서는 더 이상 ‘황남대총만은 손댈 수 없다’고 버틸 근거가 사라졌다.

작업 주체인 발굴단이 이토록 회의적이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황남대총을 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 틀림없다. 그랬기에 발굴 작업이 이뤄졌을 것이다. 이 거대한 고분을 파자고 누가 처음으로 주장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주를 지나다 황남대총을 보고 ‘저걸 파라’ 하고 지시했다고 말한다. 국사학계 거두로 꼽히는 두계 이병도 박사가 제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도 ‘팩트’로 확정할 만한 결정적 근거는 없다. 다만 박정희 정부 내에 ‘적극적인 발굴론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정재훈 사무관이었다.

ⓒ연합뉴스
201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황남대총 유물 특별전.

박정희 시대가 배출한 민간 부문의 ‘문화재 스타’가 김정기였다면, 정재훈은 행정 부문에서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1963년 총무처 특별채용(요즘으로 치면 9급 공무원)으로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간 정재훈은 1970년대 초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사업에 따라 공무원 인생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일개 사무관으로서 박정희 앞에 당당히 나가 문화재 현안에 대해 설명하게 된 것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한 사람도 그였다. 이런 인연과 업적 때문인지 정재훈은 문화재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수장 자리인 문화재관리국장까지 오른다. 

다만 박정희 시대에 워낙 빨리 승진을 거듭한 탓인지 장년기에는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93년, 문화재관리국장이던 정재훈이 느닷없이 문화체육부 생활체육국장으로 발령 났다. 문화재 전문 행정가인 그에게 생면부지의 체육국장 자리는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문화부장관실은 썰렁하기만 한데, 문화재관리국장 방에는 항상 민원인으로 넘쳐나는 일을 장관이 용납할 수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이런 이력을 보면 정재훈은 마치 ‘박정희에게 잘 보여서 잘나갔던 공무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재훈은 자질을 인정받은 대단한 학자이기도 했다. 독학으로 한국 전통조경학(환경 및 경관의 계획·설계·시공·관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해서, 지금은 이 부문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본인 스스로도 조경학도임을 자처했다. 박정희 정권 내내 추진된 경주 개발 계획 역시 정재훈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정재훈은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기에 누구보다 발언권이 셌는데, 이를 발판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재 정책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정재훈 자신의 증언이므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전의 그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가운데 문화재 분야의 얼개는 내가 잡았다”고 말하곤 했다.

“신라무덤 내부 공개하고 관리 재원 확보하자”

경주 개발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재 정책은 개별 유적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이런 문화재 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 바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다. 도시계획 용어를 빌려 설명한다면, 특정 지역을 지구 단위로 나눈 다음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경주 개발에서 처음으로 채택했다. 예컨대 경주 일대에 포진된 문화재의 경우, 13개 사적지구로 나눠 종합적인 보수·정비를 한다. 정재훈은 이 같은 ‘문화재 지구로 범주화한 보수·정비 계획’을 사무관 시절인 1968년에 구상했고,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기관지인 <문화재> 제5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발표 시점인 1970년은, 박정희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시기(1971년)보다 1년 빠르다. 이런 정황을 따져보면, 경주 개발 계획 가운데 적어도 문화재 부문의 골격을 잡은 사람은 정재훈이 맞는 듯하다.

정재훈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적극적으로 황남대총의 발굴 필요성을 ‘진언’한 사람도 자신이다. “경주의 신라문화사를 밝히려면 대형 고분을 학술적으로 개척하고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대통령께 보고했어요.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경주 발굴에서 고분(만) 발굴하는 발굴팀을 얘기했어요.” ‘발굴 전단팀’을 만들어달라고 박정희에게 건의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재훈은 단순히 발굴 자체의 성공에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문화 유적의 관리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대통령께 발굴조사를 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예산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 표형분(瓢形墳·표주박 모양으로 봉분 두 개를 붙인 무덤)을 발굴조사하여 공개 전시하면 일제가 왜곡시킨 신라문화사를 바로 밝히고, 그 입장료 수입으로 경주 문화 유적의 관리 재원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고했어요. 황룡사지와 월성 등의 시가지화한 지역을 매입하고 발굴조사 및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한반도에서 가장 큰 신라 무덤을 파서 내부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여기서 나오는 관람료 수입을 경주 지역의 문화재 보존·관리에 활용하자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요즘엔 지방자치단체들이 그 고장의 유적지나 심지어 전설을 수익 사업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는 사업을 30대 젊은 사무관이 겁 없이 대통령한테 직접 보고하고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으니, 정재훈의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정재훈이 주목한 것은 황남대총의 규모였다. “그 고분을 열면 한 200명 들어가도 충분히 수용 가능할 것 같았다.” 관람객을 많이 수용할 수 있다면 관람료 수입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남대총에 대한 정재훈의 당초 계획이 완전히 달성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황남대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없다. 황남대총 대신 그 직전 발굴된 천마총 내부를 공개하는 것으로 타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마총을 통해서나마 신라 적석목곽분의 내부 공개가 실현된 만큼 정재훈의 꿈이 어느 정도는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시사IN》 2016년 12월 01일 목요일 제480호


낮은 포복으로 기자들이 기어왔다

정부가 보도 통제를 했지만 천마총 발굴과 황남대총 발굴 과정에는 기자들의 특종 경쟁도 심했다. 전화국 교환수를 동원해 정보를 빼내기도 하고, 기록영화 촬영기사들을 접대하며 발굴 정보를 듣기도 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2월 01일 목요일 제480호



경주관광개발계획이 시행 중이던 1970년대 중반, 발굴단원들만큼이나 바쁘고 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들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우병익 기자(현재 83세)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특종 경쟁을 벌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경주 주재 기자와는 사생결단 수준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지. (박정희) 정권은 정국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고고학 발굴을 이용했고, 언론은 언론대로 문화재 특종 경쟁에 휩싸였다. 그러다 보니 오보(誤報)도 엄청나게 쏟아졌어.” 

당시 <한국일보>는 문화재 취재 부문에서 다른 언론사들을 압도하던 신문사였다. 경주 개발 이전인 1971년,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을 때도, 이 신문은 연일 특종을 이어갔다. 문화재 기사는,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회장이 직접 챙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신문의 경주 주재 기자가 우병익이었으니 그의 부담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린이들이 1973년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살펴보고 있다.

경주 발굴 서막을 알린 1973년의 155호분(천마총), 98호분(황남대총) 발굴 등에서 우병익 당시 기자는 단독 기사를 연이어 쏟아냈다. 천마총에서 금관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기자도 그였다. “금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리던 시절이었거든.”

이렇게 천마총 관련 보도를 선도하던 우병익 기자에게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특종’ 거리를 잡는 경우 일단 전화로 서울 본사에 보고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 추가 취재를 통해 기사를 작성해서 송고했다. 이제 다음 날 조간에 게재될 기사를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내 ‘단독 보도’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 거야.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어떻게 된 것일까? 이후, 한국 ‘고고학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진상이 밝혀진다. <조선일보> 측이 전화국 교환수를 동원해 정보를 빼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경주 주재 기자인 황 아무개씨의 아내가 공교롭게도 경주전화국 교환수 책임자였다. 천마총 발굴 때 조사보조원을 맡았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엔 시외 전화를 하려면 전화국 교환을 통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황 기자 부인이 전화국 교환수란 사실을 몰랐던 거야. 천마총 발굴 성과는 매일 문화재관리국이나 청와대로 보고되고 있었어. 황 기자가 그 보고 내용을 전화국에서 부인을 통해 캐치해서 기사를 쓴 거지.”

ⓒ경주포커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 당시 특종 기사를 많이 썼던 우병익 전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는 경쟁 언론사 기자들의 동태도 ‘취재’하고 있었나 보다. 기자들 역시 취재 내용을 일단 전화로 서울 본사에 보고하기 때문에 그 단계에서 정보를 빼낼 수 있다. 우병익 기자의 단독 취재 내용이 흘러나간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다. 이후 우병익 기자는 “포항으로 가서 서울 본사에 보고한 뒤 밤새 기사를 써서 보내야 했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도청 취재’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는 세세히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천마총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금관·천마도 발견) 가운데 ‘금관 특종’의 영광은 <한국일보> 우병익 기자에게 돌아갔지만, 천마도 발견은 <조선일보>의 특종으로 남았다. 번번이 <한국일보>에 밀리던 <조선일보>가 천마총 발굴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특별한 방법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박정희 정부도 문화재 관련 보도를 통제하고 있었다. 정권에 유용한 시기에 보도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발굴단에서 ‘언론 접촉 창구(요즘 용어로는 홍보 담당)’를 맡았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에 따르면, “포항에서 나온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천마총 발굴 현장에 아예 상주했는데, 봉분 정상에 의자를 갖다놓고 턱하니 앉아서 모든 발굴을 통제했다”. 발굴단도 언론을 경계했다. 김동현 부단장의 경우, 천마총 등의 조사 내용을 서울에 보고할 때 발굴단 숙소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걸었다. 

그랬는데도 발굴 정보가 계속 언론으로 새어나갔다.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민망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조사단원을 모두 불러놓고 눈을 감으라 하시더니 ‘누가 (발굴) 정보를 흘렸는지, 조용히 손을 들면 내가 봐주겠다. 혹시 피치 못할 인연으로 정보를 흘린 사람은 손을 들어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지.” 

중앙정보부 정보관이 봉분 위에 앉아서 감시 

당시 조사보조원 윤근일에게는 더욱 아픈 기억이다. 발굴단원들 사이에서 ‘유출자’로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술도 잘해서 조사원들 사이에서 많은 의심을 받았는데, 그때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기자들로서는 보도 통제가 심하다고 취재를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발굴단원들이 입을 다문다고 취재가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어떤 기자들은 현장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윤근일이 털어놓은 일화. 

“하루는 어떤 기자가 (천마총 인근) 황남대총 쪽에서 망원렌즈로 천마총 발굴 현장 보존처리 작업을 촬영하다가 여의치 않자 발굴 현장 안으로 낮은 포복으로 몰래 들어왔다. 우리가 (천마도 장니가 들어 있는) 부장품 수장궤(나무상자)를 약품으로 처리하는 장면을 촬영해서 기사로 내버렸지. 그때 우리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기자가 현장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니까.” 

기록영화 촬영기사들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 사상 처음으로 기록영화로 제작되었다. 촬영은 국립영화제작소가 맡았다. 정권 차원에서 고고학 발굴을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연히 영화제작소 촬영기사들은 발굴 현장을 생생히 접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발굴단원들이 입이 봉쇄된 반면 촬영기사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기자들은 촬영기사들로부터 깨알 같은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다음은 우병익 기자의 말이다. 

“<조선일보>가 특히 나한테 ‘물을 많이 먹었어(다른 회사에 특종을 빼앗겼다는 의미의 언론계 속어).’ (조선일보는) 그걸 만회하겠다고 국립영화제작소 촬영기사들에게 거의 매일 밤 술을 사다시피 했지. 결국에는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며 찾아왔어. 월급 두 배로 줄 테니까 <조선일보>로 오라더군.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과의 의리도 있고 해서 안 갔어.” 


천마총 발굴은 이처럼 언론계에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출처 : 《시사IN》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제478호


나오지 말았어야 할 유물’을 수습하는 방법

천마총은 보존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장에 도입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 현장이다. 발굴단은 천마도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김정기 당시 단장은 “백발이 된 게 천마총 발굴 때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제478호


<시사IN> 제476호에서 1973년 8월 경주의 발굴단이 천마총 내부의 목곽에서 무덤 주인의 ‘장니(障泥)’를 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장니란,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려 놓은 판이다. 당연히 좌우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의 장니에는 각각 천마도가 그려져 있었다. 좌우로 한 쌍인 장니 두 세트가 아래위로 포개졌으니, 발굴단은 모두 네 점의 천마도를 발굴해야 했다. 발굴단은 먼저 가장 위에 있던 천마도 장니를 “숨죽여” 걷어내 수납함에 넣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한숨을 돌렸지만, 천마도 장니 세 점이 더 남아 있었다.


1500년 동안이나 육중한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천마도가 한 점씩 깨어나는 연속적 과정들은 한마디로 “찬란했다”. 지건길 당시 학예연구사(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았다)는 모두 네 점 가운데 가장 밑에 깔려 있던 마지막 천마도 장니가 드러나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무리 땅속이라고 하지만 연약한 자작나무 판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마지막 장니에 그려진) 천마와 그 둘레를 에워싼 사실적 도형들에는 바로 이제 막 화공이 붓을 놓은 듯한 생생함이 묻어 있었다.”

ⓒ김태식 제공
1973년 천마도 발굴 현장. 당시 백마의 극채색 그림이 선명히 보존돼 있었다.

김정기 단장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유물”이라 표현했던 이 천마도를 조사단원들은 ‘채화판(彩畵板)’이라 불렀다. 원색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림판이라는 뜻이다. 당시까지는 그처럼 생동하는 색채가 고스란히 보존된 신라시대 회화 작품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생전의 김정기 단장은 ‘마지막 천마도’에 대해 “가는 균열이 많았으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주위에 보상화문대(寶相花紋帶:연꽃을 모체로 꽃잎을 층층이 겹쳐놓은 문양)를 두른 채 하늘을 나는 백마의 극채색 그림도 선명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가장 아래 위치한 덕분에 그림 상태가 완벽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발굴단은 해당 천마도가 생생한 만큼 오히려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수습할 수 있을까? 발굴단은 먼저 붓으로 천마도에 낀 먼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고, 촬영과 실측을 마쳤다. 다음 순서는 그 ‘마지막 천마도’를 가급적 실물과 가깝게 모사(模寫)하는 작업이었다. ‘(그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정기 단장에 따르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잠시 후 (마지막 천마도의) 가늘었던 균열이 눈에 보이게 굵어졌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함께 현장에 있던 지건길 연구사 역시 장니 곳곳의 균열이 커질 뿐 아니라 심지어 색채까지 퇴색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나만의 착시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림 색채의) 생생함이 공기에 닿으면서 눈에 띄게 퇴색이 진행되었다. (천마도가) 현재와 같은 색조(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천마도의 색채는 그리 생생하지 않다)로 변모하기까지 순식간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합뉴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천마도의 적외선 촬영 사진을 공개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은 발굴 41년 만인 2014년 진본 천마도 두 세트(4점)를 모두 공개했다.

마지막 천마도의 색이 거무튀튀하게 변하기 시작하자 김정기 단장이 결단을 내렸다. 모든 작업을 중단시키고 곧바로 수습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대칼 여러 개를 장니 밑으로 끼워넣었다. 다음 순서는 여러 사람이 그 대칼을 나눠 잡고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작업이다. 그런데 잘 들리지 않았다. 무리하게 장니를 꺼내다가 파손해버릴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김 단장은 다른 수습 방식을 강구한다. 일단 천마도 장니를 비닐로 덮어 가습 조치를 한 뒤 발굴단원들에게 함석판 20장을 구해오라고 했다. 경주시내로 헐레벌떡 달려간 조사단원들이 30분가량 지나 구해온 함석판들을 장니 밑으로 되도록 깊이 쑤셔넣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수습된 장니가 바로 역사 교과서 등에 수록된 그 천마도다. 천마도 발굴 당시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던지, 김정기 단장은 ‘천마총 발굴 회상기’에서 “내 머리카락이 지금과 같이 희게 된 것도 아마 이 시기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천마총은 보존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장에 도입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단원들도 천마도 진본 41년 동안 못 봐

이렇게 모든 천마도를 수습한 날이 1973년 8월23일. 천마도는 그다음 날 곧바로 서울로 수송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지건길 연구사와 최병현 숭실대 교수가 천마도 장니들을 상자 두 개에 나눠 담아 경주사적공원관리사무소의 관용 승용차에 싣고 상경했던 것이다. 최병현 교수의 회상이다. “오후 5시,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경복궁 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천마도 장니 상자는 박물관 2층 관장실 옆 부속실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김유선 박사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고,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의 사무관이 부속실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관장실 옆 부속실은 급히 천마도 장니의 응급처리실로 꾸며졌다.”

천마도를 보존하려면 방(급히 꾸며진 응급처리실)의 온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당시는 에어컨이 귀할 때였다. 문화재관리국 전체에서 에어컨이라곤 국장실에 달랑 한 대가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 에어컨을 떼어내 응급처리실로 옮겼다. 천마도의 퇴색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 커튼을 내리고 자외선 차단 전구도 급히 사다가 끼웠다. 최 교수에 따르면, 원자력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이 큰 역할을 했다. “(김유선은) 처리실 내부에 일정한 상태의 습도가 유지되어야 한다며, 물을 담은 비커들을 배치한 가운데 30분간 (보존) 작업을 했다. (그다음엔) 다시 천마도 장니를 한지로 덮고 처리실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가습한 상태로 불을 끄고 30분 동안 처리실을 비웠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게 했다.” 어찌나 통제가 심했던지, 당시 보존처리 예산 집행을 담당하던 문화재관리국 직원도 필요 물품만 연방 운반했을 뿐 응급처리실에 들어가 천마도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정작 발굴단원들도 이후 오랜 세월 천마도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도라고 전시한 유물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천마도’는 진본을 모사한 가짜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진본 천마도 두 세트 4점을 모두 공개한 것은 2014년이다. 발굴단원들에게는 41년 만의 재회였던 셈이다.


5~6세기에 선조가 남긴 유물이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분말로 변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줄곧 시달렸던 김정기 단장은 모든 조치가 끝난 뒤에야 이렇게 말했다. “장니에 그려진 하늘을 날 듯한 천마, 그 천마는 우리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지 않았다. 오늘도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더 큰 비상을 꿈꾸고 있다.” 

출처 : 《시사IN》 2016년 11월 03일 목요일 제476호


나와서는 안 될 유물 천마도가 나와버렸다

천마도는 하늘로 비상하는 ‘천마’를 호쾌하게 표현했다. 신라 시대의 회화 작품으로 매우 진귀한 유물이다. 천마총 발굴조사단은 발굴 당시 현기증을 느낄 만큼 거대한 공포와 환희를 경험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1월 03일 목요일 제476호


“청와대가 천마도(天馬圖)엔 통 관심을 안 보였나요?”

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윤근일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대답은 비슷했다. 최 교수는 “에이, 그 사람들이야 번쩍번쩍한 걸 좋아하잖아? 금관 말고는 관심이 없었어. 천마도는 솔직히 학자들이나 좋아하고 관심을 보였지, (청와대가) 금붙이 아닌 건 관심도 없었어”라고 말했다.

좀 뜻밖이었다. 천마도 발굴이야말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6일, 위령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100일을 훌쩍 넘긴 7월25일, 드디어 금관을 수습했다. 당시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화려한 유물이었다. 천마총 발굴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학수고대한 것이 금관이었다. 

청와대의 관심도 지대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금관이 나오자마자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실제로, 수습된 금관은 그다음 날 곧바로 청와대로 수송되어 박정희 앞에 놓였다. 이처럼 천마총은 금관을 토해냄으로써 권력이 기대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굉장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천마도 발굴이었다.

ⓒ김태식 제공
대나무 살을 엮어 안감을 만든 말다래(장니)에 금동으로 장식한 천마도 무늬.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비상하는 ‘어떤 동물’을 호쾌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그 동물이 백마처럼 보이기 때문에 ‘천마(天馬)도’라 불리게 됐다.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신라 시대의 회화 작품으로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천마도는 장니(障泥)에 그려져 있다. 장니란,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차단하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다. 순우리말로는 ‘말다래’다. 장니는 낙마 같은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발걸이인 등자로부터 말을 보호한다. 나아가 장식성도 있어서 중요한 행사나 행렬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림은 물론 그림이 그려진 판도 중요한 유물이기 때문에 천마도와 장니를 합쳐서 ‘천마도 장니’라 부른다.

천마도 장니는 모두 두 세트 4점이다. 발견 당시, 아래위로 포개져 있었다. 역사 교과서 등에 자주 실리는 천마도는 아래쪽에 있던 것이다. 위쪽 천마도는 훼손이 상대적으로 심한 편이라서 최근에야 실물이 공개됐다. 천마총 발굴보고서를 보면 이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는 천마도가 발견된 시점은 1973년 8월22일이다. 금관 발굴로부터 한 달쯤 뒤다. 그날 일지엔 “맑음.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문(天馬文) 장니 발견”이라고 적혀 있다. 천마도를 실제로 수습한 것은 이튿날이었다.

천마총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으로 분류된다. 무덤 중심부의 목관(木棺:시신이 안치되어 있다)을 목곽(木槨:목관을 넣기 위해 나무로 짜 맞춘 매장 시설)으로 감싼 뒤 그 위와 주변에 강돌을 가득 쌓는다. 그리고 다시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킨 금관은 물론이고 금동 관·허리띠·금동 신발·귀걸이·팔찌 등 시신을 직접 장식한 유물들은 당연히 목관 안에 놓였다. 그런데 천마총의 목곽 내에는 시신을 안치한 목관 외에, 무덤 주인의 부장품을 담아둔 나무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발굴보고서에는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로 적혀 있다. 그 안에서 천마도 장니가 발견되었다.

ⓒ김태식 제공
세계적인 대발굴이라 할 만한 천마도 발굴 현장. 1973년 천마도 장니를 수습하는 장면을 조사단이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다.

“세계적인 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도” 

그러나 천마도 발견 당시 발굴단이 느낀 감정은 환희만이 아니었다. 김정기 발굴단장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일종의 공포라고도 할 수 있는 불안, 그리고 깊은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심지어 천마도 장니를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왜 그랬는지 김정기 단장의 술회를 들어보면 당시 절박했던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천마도를 담은 나무 상자에는 옻칠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모서리에 금판이나 금박이 붙어서 내부에 귀중한 물건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었다. 거의 부식된 상태인 상자 덮개를 열었더니 ‘투조금동판식 죽제장니(透彫金銅板飾竹製障泥)’가 보였다. 대나무 살을 엮어 안감을 만든 뒤 그 위에 ‘뚫음 무늬 금동 판(금동 판의 일부를 도려내어 무늬를 드러냄)’을 놓은 말다래란 뜻이다.

김정기 단장은 생전에 ‘어떤 놀라운 일에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흥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런 김정기도 천마도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신라 유물로는 처음 본 극채색의 본격적인 그림”을 엿보고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대발굴이었다. 신라의 예술혼이 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 있었구나. 그 기쁨도 잠시, 환희의 절정에 달한 순간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천마도를 무사히 발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발굴 과정에서 형태를 지니고 있던, 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돼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감쪽같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분명한 사진으로 남겨질 것이고 실측도도 공개될 것이지만, 이 실물이 사라져버린다면 누가 믿을까? 역사 앞에 저지른 그 큰 잘못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나의 긴장과 불안을 조사원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애써 태연한 체 조사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굴단은 일단 포개진 채 놓여 있던 천마도 장니 주변의 썩은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촬영했다. 드디어 위에 있는 장니를 들어 올릴 차례였다. 그 장니는 이미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들어 올리는 순간 파손될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발굴단은 우선 겹쳐진 장니 사이로 여러 개의 대칼을 조심스럽게 꽂아넣었다. 다음 단계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대칼을 들어 올리면서 그 밑으로 켄트지를 끼워넣었다. “숨죽인 순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일단 위에 있던 천마도 장니를 무사히 걷어내는 데 성공하고는 “미리 준비한 소독된 화선지로 포장하고 수납함에 넣어 가습 장치를 했다.” 한숨 돌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천마도 장니 한 점이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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