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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제명천황(斉明天皇) 2년 조 말미에는 그 발생 날짜를 특정하기는 힘들어 '시세(是歲)'라는 표지 아래 다음과 같은 비조강본궁(飛鳥岡本宮) 터 확정과 그 궁궐 완성한 사건을 기술했다. 


飛鳥岡本更定宮地。時、高麗・百濟・新羅並遣使進調、爲張紺幕於此宮地而饗焉。遂起宮室、天皇乃遷、號曰後飛鳥岡本宮。於田身嶺、冠以周垣(田身山名、此云大務)、復於嶺上兩槻樹邊起觀、號爲兩槻宮、亦曰天宮。


飛鳥의 岡本에다가 궁을 세울 자리를 다시 정했다. 이때 高麗・百濟・新羅가 모두 사신을 보내 調를 받치자 이들을 위해 이 궁 자리에다가 감색紺色 장막을 치고는 그들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나중에 궁실이 완성되자 天皇이 그곳으로 옮기고는 이름하기를 後飛鳥岡本宮이라 했다。전신령田身嶺에다 그 봉우리를 빙 두른 담을 쳐서 마치 갓처럼 만들고(전신田身이란 산 이름인데 대무大務라도도 한다), 다시 이 산 꼭대기 느티나무 두 그루 근처에다가 觀을 세우고는 이를 이름하기를 양규궁兩槻宮이라 했는데, 천궁天宮이라고도 불렀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거미줄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모든 역사 기록에는 시간과 장소가 빠질 수 없다. 시간을 어디까지 기록해야 하는가? 이는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전근대 역사는 대개 해[年] 달[月] 날짜[日]을 밝히거니와, 이를 통해 그것이 발생한 때를 특정한다. '시세(是歲)'란 이렇게 시간을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그 해에 일어난 일이 확실할 때 쓰는 표현이거니와, 이 비조강본궁(飛鳥岡本宮) 건립 건은 전후사정을 볼 적에 그럴 만한 곡절이 없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이런 궁을 세울 때는 그 터를 확정해야 하며, 나아가 그렇게 해서 막상 공사에 들어가서 그것을 완공하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순차로,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련의 공정을 《일본서기》는 그해 한 해 동안에 죽 계속한 것으로 보고는 '시세(是歲)', 다시 말해 '이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술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일본서기》가 말하는 모습이 어땠는지 대강 머리에 떠오른다. 무엇보다 그 궁이 위치하는 모습을 대강 그린다면, 테뫼식 산성을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시 말해, 봉긋한 산봉우리 정상 가운데를 두고, 그 아래쪽 어딘가를 빙둘러가며 담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에는 마침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 그 쪽에다가 '기관(起觀)', 즉, 관(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보면 이 비조강본궁은 볼짝없이 산상 궁전이다. 


하긴 이는 궁전 명칭에서도 이런 지정학적 특징은 고스란하다. '비조강본궁(飛鳥岡本宮)'이라는 말은 비조 지역 어떤 언덕에 세운 오야붕 궁전이라는 뜻이거니와, 이 궁전이 여타 궁전에 대해 본산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비조(飛鳥), 즉, 아스카는 이 무렵 왕경 이름이니, '강(岡)'이란 흔히 '언덕 강'으로 새기거니와,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를 "산 줄기다. 山이 뜻이며, 网이 소리인 형성자다.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은 모양을 취했다(山脊也。从网从山,取上銳下廣形)"고 하고, 《이아爾雅·석산釋山》에서도 "산 허리를 강(岡)이라 한다"면서, 그 예문으로는 《시詩·주남周南》 편에 보이는 "저 높은 산을 오르네(陟彼高岡)"라는 구절을 들었다. 이 글자는 "阬"이라고도 쓰기도 하며, 《운회韻會》에서는 "속세에서는 뫼 산(山)자를 덧붙여 "崗이라 쓰기도 하지만 잘못이다"고 했으니, 어떻든 이 글자는 그 기본 의미가 평지에 불뚝 솟은 언덕 혹은 산임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궁전인가? 이 궁을 세운 일을 《일본서기》에서는 '기관(起觀)'이라 했다. 이는 이 宮이 觀의 일종임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觀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관점(觀點)'이라든가 '관광(觀光)' 같은 요즘 말에서도 흔히 쓰이거니와, 동사로 눈으로 보는 인지 작용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서 비롯되어 觀은 명사로서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돌출한 기념물로 발전한다. 고대 중국 이래 주로 전승대첩을 기념해, 그렇게 죽인 적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기념물을 '경관(京觀)'이라 하거니와, 이 경우 京은 크다는 뜻이고, 觀은 동사보다는 명사로서 볼거리가 되는 건축물 기념물을 의미한다. 한데 이 觀이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불교의 사찰에 대비되어 흔히 도교의 사찰을 의미한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궁전을 산상에다가 세웠겠는가? 이런 곳은 삼척동자도 왕자가 상거(常居)하면서 왕국을 통치하는 공간이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宮인가? 말할 것도 없이 神을 위한 궁전이다. 산상은 천상과 가까운 곳이라 해서, 흔히 천상에서 강림하는 신을 맞이하는 시설을 설치했다. 비조강본궁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종교제의 시설이다. 


그렇다면 이 궁에서 맞이하는 신은 누구인가? 그것이 천신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이 궁전을 달리 천궁(天宮)이라 불렀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다만 조심할 대목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천신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였다는 사실이다. 천상 역시 인간세계와 마찬가지로 그 최고신격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무지막지 많은 신이 존재했다. 아무튼 비조강본궁은 천신을 대접하기 위한 접대 시설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 신을 모실 공간으로 세운 건물을 觀이라 했으니, 이건 볼짝없이 도관(道觀)이다. 도관이란 무엇인가? 도교 사원이다.  이는 그것을 天宮이라 불렀다는 점에서 명명백백하다.


그렇다면 이 비조강본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틀림없이 그 평면도가 팔각이었을 것으로 본다. 팔각형 궁륭 건물이었을 것이다. 그 궁륭 꼭대기에는 틀림없이 이슬을 받치기 위한 승로반(承露盤)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꼭대기에는 봉황 장식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내가 아는 도관의 상식이며 가장 비근한 보기가 박혁거세 탄강지 나정에서 확인한 신라시대 팔각형 건물(첨부사진)이 그것이다. 작금 일본 고고학계가 비조궁(飛鳥宮)이라 해서 발굴해 놓은 곳은, 후대 천황이라 일컫는 자의 궁전을 말하는 것이요, 비조강본궁은 결코 아니다. 비조강본궁은 틀림없이 이 궁궐 인근 산상, 혹은 주변 언덕 어딘가에 세웠을 것이다.  


이것이 도관이라는 사실은 일본 도교학계에서는 일찍이 지적됐다. 특히 후쿠나가 미쓰지(福永光司)는 이 기록을 중대하게 받아들였으니, 일본열도에 이미 이 무렵에 도교는 도관을 지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실로 막강했다는 표징 중 하나로 삼았다. 나 역시 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처럼 이 비조강본궁은 삼척동자가 봐도 도교 사원인데, 막상 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는 무엇이 두려운지 이를 "높은 망루"라 옮기고는 그것을 주석하기를 "외부나 먼 곳을 보기 위해 궁문의 좌우에 설치한 높은 대이다. 觀을 도관, 즉 도교의 사원으로 보기도 한다"고 했다. 


비록 도관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이는 불상을 보고도 불상이라는 견해도 있다는 식의 실로 안이하기 짝이 없는 견해거니와, 이런 것들을 보면 명백히 한일 고대사학계에는 도교에 대한 그 어떤 격렬한 저항정신이 있음을 알아챈다. 도교라고 하면 덮어놓고 배척하고, 도교라고 하면 덮어놓고 의심하며, 도교라 하면 덮어놓고 일단 아니라고 지랄발광부터 떠는 모습을 내가 너무 자주 봤다. 


나아가 저 비조강본궁을 더욱 보탠다면 이는 볼짝없이 곤륜산 혹은 봉래산은 흉내낸 기념물이다. 그곳에는 서왕모가 상거하면서 천신이 강림하는 곳이다. 도교는 북위시대 구겸지 이래 등장한 종교 흐름 중 하나로, 그 이전에도 道敎라는 명칭이 보이기는 하나,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도교를 명확히 지칭하게 되기는 구겸지에서 비롯한다. 그 이전 혹은 도교라는 명칭 등장 이후에도 도교는 귀신을 섬기는 종교라 해서 귀도神道라고도 하고, 신도神道라고도 했다. 지금의 독특한 일본 종교사상을 지칭하는 용어 신도는 실은 도교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神이 강림하는 산을 흔히 천주(天柱)라고도 했다. 그런 대표적인 곳으로 곤륜산이나 봉래산, 혹은 태산 등이 있으니, 천주란 곧 천궁(天宮)의 별칭이기도 했다. 



<명활성...김유신은 이곳을 근거지로 반란한 비담 일당을 일망타진하면서 절대권력자로 등장한다>


서기 654년 음력 3월, 신라 제28대 왕 김승만(金勝曼)이 재위 8년 만에 죽으니, 이를 흔히 진덕왕(眞德王)이라 한다.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서는 그가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는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고, 진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3백 필을 내려주었다"고 하거니와, 이제 문제는 차기 대권이 누구한테 가느냐였다. 그의 죽음이 실로 묘한 까닭은 죽음에 대비한 후사 문제를 전연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곡절을 따지면 그럴 만한 사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승만의 죽음으로 신라에는 이제 신분으로 보면, 그때까지 왕위를 독점한 성골(聖骨)이 씨가 마른 까닭이다. 이런 사정을 같은 진덕왕본기에서는 "나라 사람들이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했다"고 했으니, 이젠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는 왕위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신라 스스로를 속박한 악재였다. 왕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고 그 범위가 넓을수록 왕위를 꿈꾸는 자가 준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민에 봉착한 신라는 모든 관위를 초월하는 절대의 존재로써 성골이라는 신분을 상정하고, 그것을 개념화하고는 적어도 왕위만큼은 성골이 독점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독점은 언제나 무너지지 마련이며, 더구나 그 폐쇄성은 언제건 성골 자체의 씨를 마르게 할 우려가 있었으니, 마침내 그런 사태가 초래한 것이다. 


이제 문제는 차기 대권을 누가 거머쥐느냐였으니, 나아가 그와 더불어 그런 대권을 누가 결정하느냐로 모아졌다. 이때 신라 조정 권력 분포도를 보면, 절대의 강자가 김유신이었다. 그는 진덕왕시대 내내 군부의 실력자였을뿐만 아니라, 정권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진덕이 막 즉위하던 그때, 또 다시 여자 군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담(毗曇) 일당이 명활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은 그 진압 총사령관이 되어 비담 일당을 일망타진했으니, 《삼국사기》에서는 그에 연루되어 비담을 비롯해 물경 30명이 목베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는 공포정치가 막이 올랐으며, 그 정점에서 김유신이 위치했다. 김유신은 진덕왕시대 보안사령관이었고 수도방위사령관이었다. 절대권력자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영리했던 까닭은 적어도 권력을 겉으로는 분점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원로 대신 알천을 상대등으로 내세워 권력을 독점한다는 화살을 교묘하게 피해갔으며, 그 자신은 외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진덕왕시대 그가 차지한 외직은 중앙과 뗄 수가 없었다. 진덕왕 재위 초반기에는 계림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압독주 군주로 나간 그는 백제와 전투가 날로 격렬해지자, 이내 상주를 관장하는 대총관이 되어 백제전을 진두지휘한다. 이 무렵 김유신은 그야말로 계림 집에 들를 겨를이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야전으로 철저히 단절된 군인이 79세로 장수했다는 사실도 실은 경이롭기만 하다. 


김승만이 죽었을 때, 신라의 절대권력자는 김유신이었다. 따라서 왕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실은 김유신이었다. 학계에서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을 침소봉대해서, 나아가 신라 하대 몇 명이 상대등으로 바로 왕이 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당시 상대등 알천의 권력을 침소봉대해서, 그가 권력자였다느니, 귀족회의 대표였다느니, 혹은 진덕왕 사망 직후 그를 섭정으로 추대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알천이야말로 김유신 김춘추로 대표하는 신진 권력에 대항하는 귀족회의 대표자였다는 식의 주장이 버젓이 횡행하나,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알천은 김유신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그 방패막이로 내세운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권력은 김유신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승만 이후 왕위는 당연히 김유신의 의중이 결정적이었다. 김유신이 누굴 찍느냐에 따라 후계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 즉위년 조에서는 "진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가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했지만,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묵직하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만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고 하니,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고 했거니와, 이는 김유신이 기획한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젊은시절 그 누이를 시집보냄으로써 처남매부 사이가 된 이래, 그의 후견인이 된 김유신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절대권력자 김유신의 힘은 여러 군데서 뒷받침되거니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에서는 당 고종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眞德大王)이 薨하자 "유신이 재상인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해 이찬 춘추(春秋)를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태종대왕(太宗大王)이다(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飡謀 迎春秋伊飡 卽位 是爲太宗大王)"고 했으니, 김춘추를 왕위로 밀어올린 이가 김유신임을 폭로한다. 알천은 그런 김유신 독단의 결정을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추인하는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삼국유사》 기이편 '진덕왕(眞德王)' 조에서도 왕이 즉위한 시대에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다)·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어 이들이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이란 곳에 모여 국사를 논의했거니와, 이 논의에서 호랑이도 맨손에 때려잡은 알천은 "완력이 이처럼 세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지만 모든 이는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고 했거니와, 이 역시 이 모임을 주도한 절대권력이 김유신임을 폭로한다. 알천을 윗자리에 앉힌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이들 중에서도 최고 연로자였기 때문이지, 그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견주건대 김유신은 12.12사태 직후 보안사령과 전두환이요, 알천은 최규하였다. 


이제 다음호에서는 신라 진덕왕본기가 실은 김유신본기임을 보고자 한다. 



군사 분야에서 단연 압도적 두각을 드러낸 김유신은 선덕왕 말년에 발발한 비담의 난까지 계엄총사령관으로써 진압하는 한편, 그 작당 30명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최고실력자로 등극했으니, 진덕왕 재위기간(647~654)은 그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진덕이 과연 여주(女主)로서 어느 정도 지도력을 발휘했는지는 미지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는지, 아니면 바로 앞선 시대 그의 사촌언니 선덕이 그랬듯이 주체로써 국정 운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진덕왕 시대 신라는 소위 집단지도체제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는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음 《삼국유사》 기이편 '진덕왕(眞德王)' 다음 증언에서 비롯한다. 

 

왕이 즉위한 시대에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다)·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사람이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는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은 완력이 이처럼 세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모든 이는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 신라에는 네 곳 신령스런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 네 곳 중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 금강산(金剛山)이다. 


이로 보아 진덕은 야심 넘친 앞선 선덕과는 분명히 결이 달라,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국가 상징으로 시종일관한 재위 기간을 보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해 본다. 그 자리를 이들 대신이 짊어졌으니, 이 시대를 호령한 중신으로 알천(閼川)·림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렴장(廉長)·유신(庾信)의 여섯 명을 들었다. 이들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고, 국가중대사는 이들의 회의를 거쳐 결정한 듯하다. 이 그룹에 김춘추가 왜 들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들거니와, 나는 이 일이 진덕왕 초반기 사정을 증언하는 것으로 본다. 김춘추는 이때만 해도 정국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서서히 차기 주자로 떠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나서다. 이런 의문이 《화랑세기》에는 더욱 명백히 보이거니와, 폐위된 왕의 아들로 정우성 뺨치는 잘생긴 얼굴 빼고는 이렇다 할 이력이 없던 김춘추한테 김유신은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우지 못한다"면서 전폭적으로 밀어준다. 김춘추가 권력을 장악한 힘은 바로 군사력이었다. 풍월주가 됨으로써 그를 추종하는 군사집단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그에서 김유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데 《삼국유사》 저 대목이 《화랑세기》에도 14세 호림공(虎林公) 전에도 다음과 같이 보이니, 


(호림공은) 조정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렴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보종공(宝宗公)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노니니, 통일의 기초가 공 등에게서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고 한 증언이 그것이라, 《삼국유사》와 비교할 때 《화랑세기》에는 보종(宝宗)이 추가되고, 더구나 이들 일곱명이 북두칠성에 견주어 칠성우(七星友)를 결성했다는 점이 새롭다. 둘을 비교할 때 《화랑세기》가 더 생생하고 구체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데 우리네 역사학도, 특히 신라사학도들은 앞서 인용한 저 구절을 전연 엉뚱하게 해석하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저 회의체를 소위 화백회의로 보아, 신라사상을 왜곡확대 재생산하는 근거로 삼는가 하면, 등신이 아니고서는 저 구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을 알 터인데도 유독 저 친구들만 그것을 몰라 알천 중심으로 이해한다. 알천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완력이 셌고, 그가 저 회의를 주재했다 해서, 저 시대 최고 실력자로 알천을 거론한다. 


이는 마침 《삼국사기》 신라 무열왕본기 즉위년 조 다음 대목, 곧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가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는 구절과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켜, 알천이 진짜로 실력자였던 줄로 안다. 하지만 등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역사를 이리도 호도할 수 있는가? 


왕이 되라 권했는데도 "난 안 되니 춘추공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거 각본이란 사실 삼척동자도 안다. 김춘추로 정해진 마당에 쇼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  《삼국유사》에 뭐라 했는가? 알천이 힘이 세고, 아마도 가장 연장자라 회장을 했지만, 하지만 모든 이가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지 않는가 말이다. 알천은 꿔다논 보릿자루였고, 실제 권력은 이미 김유신한테 급격히 기울었던 것이다.  

<영화 황산벌 한 장면> 


영화 황산벌 이 한 장면(유투브 링크...1분20초 부분 이후)이야말로 나는 김유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낸 명대사로 본다.  



신라 최초 여왕이라 해서 즉위 과정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빚었을 김덕만(金德曼)도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순간에 도달했으니,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는 이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이미 즉위할 무렵 제법 나이가 들었을 그가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재위 16년(647) 새해가 개막하면서 몸져 눕자, 차기 왕위계승권자를 중심으로 권력 재편에 들어갔다. 신라 조정은 선덕과 같은 전철, 곧 또 한 명의 여주(女主)를 피하고자, 선덕에게서 후사를 생산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 이젠 성골로는 남녀를 통털어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사촌동생 김승만(金勝曼)을 후계자로 정한 상태였으니, 이제 대권은 승만에게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한데 분란이 생겼다. 이제나저제나 국상 치를 일에 뒤숭숭한 신라 조정에 칼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여자 임금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서 지난 15년을 숨죽여 기다린 자들이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고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말년 조에서는 "봄 정월,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여주(女主)로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반역을 꾀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8일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다 장사지냈다(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고 하고, 선덕의 죽음과 더불어 그 관앞에서 즉위했을 진덕왕본기 원년 조에다가 "정월 17일에 비담을 목 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고 했을 뿐이다. 실로 간단히 언급했지만, 세상 모든 기전체 본기는 저와 같아 5.16군사쿠데타나 12.12사태 역시 그에 맞추어 쓴다면, '장군 박정희가 모반을 꾀해 정권을 전복했다'거나 '장군 전두환이 하극상을 일으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 구금했다"고 했으리라. 


<반란군 진원지 명활성>


그럼에도 우리는 이 허심, 혹은 지극히 불친절한 듯한 이 기술에서 이 군사쿠데타가 미친 여파가 자못 어떠했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물경 30명이라는 사실이다. 쿠데타는 모두에게 기회였을 것이나, 비담과 염종 편에 붙은 자들에게 유일한 비극은 그들이 졌다는 사실이다. 이겼더라면? 역사가 바뀌어 그들이 권력 정점에 섰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 사건이 미친 적지 않은 파장에 대한 논급을 삼국사기는 다른 곳으로 미루었으니, 그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최고사령관이 김유신이요, 더구나 그런 김유신은 김부식이 생각하기에 인간 이상의 롤 모델이라 해서, 삼국사기 전체 50권 중 3권을, 그것도 10권에 지나지 않는 열전 중 초반부 3권을 몽땅 그와 그의 후손 얘기로 채운 김유신 열전을 배열하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왕조차도 이런 대접을 받은 이가 없다. 재위 기간 일통삼한을 이룩했다 해서 그 위대한 군주라는 문무왕 김법민만 해도 고작 본기가 상·하 두 권이요, 태종무열왕은 다른 왕들과 뭉뚱거려 꼴랑 한 권인데다, 백제 의자왕과 고구려 보장왕은 나름 파격이 있어 본기 두 권씩을 배치했지만, 이는 700년 거목들이 각기 쓰러지는 시대에 마침 재위한 왕들이었던 까닭이었지, 그가 특별히 의자와 보장을 높게 친 이유는 아니었다. 


595년 생인 김유신은 쿠데타 발발 당시 이젠 53살, 노장 반열에 접어들었으며, 그가 차차기 대권 후보자로 점찍은 김춘추는 44살이었다. 이 무렵 김유신 직책은 확인이 쉽지 않다. 본기와 열전을 보면 선덕왕은 재위 11년(642), 대야성 전투 대패라는 충격파와 그에 따른 백제의 서쪽 변경을 통한 백제 침탈에 대비하고자, 김유신을 수도 서부 지역 방어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압량주 도독으로 삼는다. 그는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라 군사권까지 틀어쥔 도독이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동왕 13년(644) 가을 9월에는 대장군이 되어 백제 정벌에 나서 일곱 성을 탈취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대장군은 중국과는 달리 상설직이 아니라 신라사를 보건대 임시직이지만, 이로써 보건대 이미 김유신이 중앙무대로 복귀했음을 본다. 이 전쟁은 볼짝없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를 허심히 보아넘길 수 없는 까닭은 이미 전쟁을 김유신 일파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신호탄인 까닭이다. 629년 낭비성 전투 영웅으로 떠오른 김유신은 출세가도를 달려 이젠 선덕왕 시대가 중기를 넘어 말년으로 치달으면서, 군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으니, 역사는 그를 기다린 것이었다. 


<명활성>  


하지만, 대야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로서는 사활을 건 전쟁의 시대를 예고했으니, 그에 대한 저 응징에 백제 역시 가만 있을 리 없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변경을 치고 들어왔으니, 선덕왕본기 14년(645) 조에서는 이해 봄 정월에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못했을 때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니, 임금이 (다시) 유신에게 명하여 막게 하므로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정벌하러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전쟁 출전과 승리, 그리고 귀환이 대략 2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듯하거니와, 신라 왕경에서는 대대적인 전승 환영식 개최를 준비했지만, 귀환한 김유신을 기다린 것은 화려한 환대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침략 급보를 알리는 봉수 파발이었다. 다만, 이때는 선덕을 뵙고 전공을 보고하기는 했으니, 같은 해 3월 조 선덕왕본기에서는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아뢰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을 때, 백제가 또다시 침공했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임금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존망이 그대 한 몸에 달렸으니 노고를 꺼리지 말고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하니, 유신이 또다시 집에도 들르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하고는 서쪽으로 행군하는 길에 자기 집 문앞을 지나게 되어 온 집안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고 했으니, 이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 혹은 김유신 미화 과정에서 생겨난 우화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김유신으로는 집에서 편안한 잠 하루 자 본 적 없는 전장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과들이 이미 그 당대에 김유신 신화를 구축하는 밑거름이었으니, 김유신으로서도 결코 손해볼 것 없는 게임이었다. 


백제와 사투를 벌이는 이 해 겨울 11월, 선덕은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는다. 상대등은 아무리 내가 잘봐주려 해도 꿔다논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아 문재인 정부 아래 이낙연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정세균 정도에 지나지 않는 명예직이라, 대체로 나이가 70 안팎 뇐네 중신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설치한 관직이다. 그 자리에서 이렇다 할 사고 치지 말고, 편안히 국가 원로 대접받고, 높은 연봉이나 꼬박꼬박 챙겨가시오라 해서 마련한 명예직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상대등이 그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거니와, 다름 아니라, 태종무열왕 시대에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결코 이럴 수가 없어, 이후 계속 권력의 정점에 섰다. 김유신이 함유한 여러 역사적 의의 가운데 허울뿐인 상대등을 실질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명활성>


비담은 그 계보라든가 다른 행적을 엿볼 자료가 없어, 그가 쿠데타를 감행한 진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자 했는지, 혹은 그 자신이 옹립하고자 하는 왕위계승권자가 따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와 결탁한 다른 이로 염종(廉宗)이 있는데, 이 염종 역시 그렇다. 대체로 이런 쿠데타는 두 번째 주모자로 등장하는 이가 실질적인 기획자인 일이 많으니, 나는 아마 이 쿠데타 역시 염종이 비담을 앞세워 일으킨 정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이 본질을 들여다 보는 핵심 키워드가 염종이라 보지만, 그걸 추적할 만한 단서가 현재로선 남아있지 않으니, 환장할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상대등이 된 비담이 선덕이 드러눕고 다시는 회생할 기미가 없자, 마침내 반란의 기치를 내거니, 이를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으로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려 했다.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했으며,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 무렵 저 유명한 별똥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월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만다. 같은 김유신 열전 증언이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이 사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가 패할 징조이다." 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에 유신이 왕을 뵙고 아뢰었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구족(族)을 죽였다. 


<명활성>


김유신은 이 점이 아직 제대로 부각하지 않으나, 병가(兵家)의 대가였으며, 천문(天文) 역시 일가를 이룩한 전문가였다. 유신을 단순한 무장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는 책을 팽개치고 무술만 익힌 사람이 아니었으니, 전두환의 결기에다가 박정희의 머리를 얹힌 인물이다. 그의 어린시절, 혹은 젊은시절은 입산수도만이 전부였던 듯하나, 천관녀 설화가 증언하듯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읽었고, 누구보다 그렇게 습득한 탁상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이 증언에서 유의할 점은 김유신이 아뢴 왕이 선덕이 아니라 진덕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렵 선덕은 이미 사망했거나, 살아있다 해도 보고를 받을 형편이 아니었으니, 신주(新主)였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 때 그 진압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으로서 그 진압을 이끌었으니, 이제 신라 사회에서 그 어떤 누구도 김유신을 능가하는 권력을 쥔 사람이 없었다. 낭비성 전투 이래 20년 만에, 마침내 김유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덧붙이건대 이 사건이 화랑세기에도 편린을 드러내니, 24세 천광공(天光公) 전 다음 대목이 주목을 끌거니와, 


그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郞頭)가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기를 익혔는데, 모인 자들 중에서 뽑아서 병부에서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善德帝)가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했다. 유신공(庾信公)이 신주(新主·진덕)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했다. 그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해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니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이에) 풍월주 지위를 부제(副弟)인 춘장(春長)한테 전해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증흥 28장(二十八將)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난세를 영웅을 부르는 법이다. 이 난세가 김유신에게는 권력의 정점이라는 자리를 앉혔으며, 천광 역시 낭도들을 동원해 공을 세움으로써 출세가도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말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진덕왕 시대 김유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만나러 우리는 남산 오지암이라는 곳으로 행차하고자 한다.  


<명활성>


 

  1. 연건동거사 2018.04.15 10:14 신고

    저 삼국시대의 잘 짜여진 석성을 보노라면 저 시대의 백성동원 능력에 대해 경악합니다. 적어도 저 시대는 왕국내의 사람들 모두를 정확히 파악하는 행정수준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시대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라고 할수 있는데.. 한반도 남부 일대에 저시대에 고구려 신라 성들 보면 대단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해요.

  2.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5 신고

    얼마나 후달렸겠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군대가는거보다 노동력 징발이 더 두렵지요

  4.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왜? 밥을 안주자나요

  5. 연건동거사 2018.04.15 14:40 신고

    성 하나만 봐도 정말 저 시대는 이전과 다른 시대에요.. 고려시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저렇게 단단히 못쌓았을거에요. 성의 짜임새를 보면 임란 이후의 일본성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을 정도입니다.

  6. 연건동거사 2018.04.15 14:41 신고

    저 시대가 얼마나 긴장에 찬 시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7. 연건동거사 2018.04.18 22:23 신고

    한 사람 열전을 권을 나누어 쓰는 경우는 제 기억으로 중국에서도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김샘께선 보신적 있으세요.

  8. 연건동거사 2018.04.18 22:24 신고

    제왕의 본기를 권을 나누는 경우는 많이 본것 같습니다. 상지상, 상지중, 이런식으로.. 하지만 신하의 경우는... 제 기억에 권이 바뀌는 경우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과문한 탓인지?

김유신이 신라의 미래 동량으로 두각을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시종 전운이 감도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단 한 해도 전쟁이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서 그 흔적을 추려보면, 38년(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쳤는가 하면, 40년(618)에는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해론(奚論)이 전사했다.


45년(623)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더니 이듬해 46년(624)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속함(速含)ㆍ앵잠(櫻岑)ㆍ기잠(歧暫)ㆍ봉잠(烽岑)ㆍ기현(旗縣)ㆍ혈책(穴柵)  여섯 성을 포위한 결과 세 성이 함락되고 급찬 눌최(訥催)가 전사하는 대패를 기록했다. 


시종 백제 공세에 시달린 신라는 47년(625) 겨울 11월에는 당에 보낸 사신 편을 통해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주 자기네 국경을 침입한다고 호소했다. 48년(626) 가을 7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같은 호소를 하니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와 화친을 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장 그 다음달에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해 성주 동소(東所)를 전사케 했다. 


49년(627) 가을 7월에는 장군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방 성 두 곳을 함락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50년(628) 봄 2월에는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 기상재해도 빈발해 이해 가을에는 백성들이 주려서 자식들을 파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협공에 내내 시달리던 신라는 당에 호소해 외교력으로 그들의 예봉을 피하고자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런 신라가 마침내 선제 공격으로 전환을 선언한다. 


진평왕 51년(629) 가을 8월, 신라는 대병을 일으켜 고구려 공략에 나서니, 점령 대상지는 낭비성(娘臂城)이었다. 왜 낭비성인가? 이를 엿볼 직접 자료가 현재 우리한테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낭비성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취하는 한편, 이곳을 점령하고자 한 신라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하겠지만, 이를 알아낼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신라가 이 전쟁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투입했는지는 이때 신라군 진용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한다. 이와 관련해 진평왕본기에서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고 하지만, 같은 사건을 전하는 김유신 열전(上)을 보면, 이 전쟁이 신라로서는 훨씬 더 심대한 사안이라, 그야말로 국운을 걸다시피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건복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ㆍ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ㆍ서현 등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케 했다. 


고 했고, 이에서 김유신은 "중당 당주(主)"라 했으니, 신라 정벌군 예하 부대 하나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김유신은 35살, 군인으로서는 한창 혈기방장하던 때라, 아마 요즈음으로 치자면 영관급 대대장 정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평왕본기에 견주어 김유신 열전 기록이 훨씬 더 상세하며, 이를 통해 신라군 진용 편성도 더 확연히 드러난다. 이에서 총사령관은 임말리였으니, 그의 관위가 17단계 중 넘버 투인 이찬이었다. 재상이었다. 나아가 그 예하 각 부대를 이끈 장군들을 보면 대인과 서현이 3등 소판이었고, 용춘과 백룡은 4등 파진찬이었다. 이런 군부대 편성은 이보다 대략 30년 뒤, 신라가 대대적인 백제 정벌 전쟁을 일으킨 그때 신라군 진용에 견줄 만하다. 


임말리는 아마도 총사령관으로서 중앙군을 맡았을 수도 있고, 혹은 총사령관으로서 각 군단을 지휘하기만 했을 수도 있다. 이에 김유신이 예하 부대장으로 참전한 것이다. 나머지 소현과 대인, 용춘과 백룡은 각기 군단을 거느렸을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신라군은 아마도 4군, 혹은 5군으로 편성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 전쟁에 투입된 신라군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만명 이상을 헤아리는 대군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신라로서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런 대상지로 낭비성을 고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이 바로 신라로 진격하는 고구려 남방 전진기지의 최중심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점령하면, 당분간은 고구려의 예봉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신라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전개된 전투는 신라군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고구려군 반격에 신라군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김유신 열전에 이르기를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 대목이 그런 사정을 웅변한다. 


이 전투가 공성전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 사정을 전하는 진평왕본기에서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후 전개된 전투 양상을 봐도 양국 군대는 평야 혹은 구릉지대에서 싸웠다. 


패배가 목전에 다가온 이때 김유신이 나선다. 이 대목을 열전에서는 "유신이 이때 중당 당주였는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고 하고, 진평왕본기에서는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세 번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고 했다. 이를 통해 이 전투가 평야전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외우 서영일 박사는 낭비성을 파주 칠중성으로 지목했거니와, 낭비성이 칠중성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투지는 칠중성 자체가 아니었고, 그 근처 평야지대였다. 


나아가 이 전투가 얼마나 규모가 컸던지, 고구려군 전사자가 5천 명에 달했다. 신라로서는 명운을 건 전투에서, 다름 아닌 김유신이 대전과를 올렸으니, 그의 명성은 이젠 누구도 넘볼 수 있는 정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낭비성 전투는 만호태후와 미실궁주가 후원한 미래의 동량 김유신이 역사의 전면에, 이제는 최고 실력자로, 그것도 본인 실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엔 김유신이라는 깃발이 마침내 펄럭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낭비성 전투는 김서현과 김용춘 시대가 이제는 막을 내렸음을 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들이 비록 승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제는 늙어 뒷방으로 물러날 시대가 온 것이다. 장강 물길을 밀어내는 것은 뒷물이다. 그렇게 서현과 용춘은 김유신이라는 뒷물에 떠밀려 조용히 물러났다. 

정치는 바터 


만호태후 뜻을 알고는 미리 물러난 미실. 그리하여 자기 아들 보종을 내리고, 그 자리에 만호태후가 점 찍은 15살 꼬맹이 유신을 풍월주에 앉힌 미실한테 만호 역시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했다. 역시 정치는 주고받기라, 노회한 정치가 만호는 또 다른 노회한 정치가 미실을 보답할 방법을 생각한다. 미실로서도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호가 내민 선물이 블루칩이고 가상화폐였기 때문이다. 


11세 풍월주가 하종(夏宗)이다. 갑신년(564)에 태어났으니, 아버지가 세종(世宗)이요, 어머니가 바로 미실(美室)이었다. 화랑세기 하종공 전에 의하면 15살에 화랑에 들어간 그는 역사를 사다함 형인 토함한테서 배우고, 노래는 이화공에게 배웠으며, 검술은 문노에게 터득했으며, 춤은 미실 동생인 미생(美生)을 스승으로 섬겨 습득했다. 


하종은 설원공 딸인 미모(美毛)를 배필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과 두 딸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를 두었다. 두 딸 중 맞이인 유모는 14세 풍월주를 역임하는 호림(虎林)한테로 시집가니,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선종(善宗)이라, 훗날 출가해서 자장이라는 일컫게 되는 대고승이다. 자장율사가 다름 아닌 미실의 증손이었다. 


문제는 영모를 어찌할 것인가? 그의 배필로 누굴 삼을 것인가? 만호태후가 바로 영모 카드를 미실한테 제시했다. 손녀 영모 배필로 유신을 삼았으면 하는데 어떠신가? 화해 제스처를 미실이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15세 유신공 전 기술이다. 


(유신이 중악에서 비결을 받고)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공이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만호)태후가 하종공 딸 영모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美室宮主)를 위로 하려 했다. 영모는 곧 유모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때는 건복 29년 임신년(612)이었다.


이렇게 되어 만호태후 손자인 김유신은 당대 또 다른 권력자 미실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김유신은 595년 생이니, 612년 결혼할 때 나이는 18세였다. 김유신 혼인 관련 기록은 나중에 환갑이 된 시점인 655년인가에 김춘추와 문희 소생인 지소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사건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그는 18살에 영모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판본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그의 장남 삼광(三光)은 바로 영모 소생이고, 우리가 잘 아는 원술 이하는 지소부인 소생이다. 김유신과 지소의 결혼 역시 삼촌과 조카딸간 근친혼이었다. 


미실은 왜 저 카드를 받아들였을까? 그로서도 이렇다 할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도 했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가치로 김유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유신 정도라면, 나중에 어찌될 지 알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블루칩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김유신이 시종 미실에 맞선 것으로 묘사했지만, 역사는 전연 딴판이라, 그는 미실의 손녀사위로서, 그 후광 역시 등에 업고 서서히 정계의 중심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가 김유신으로서는 주어진 후광이라면, 이젠 그런 후광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시종일관 군인 전략가의 길을 모색했다. 마침 그 시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때라, 그 능력을 보여줄 환경이 무르익은 상태였고, 그 기회를 김유신은 여지없이 농락해갔다.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가의 정통 후손임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그의 증조부가 바로 금관가야를 통째로 들어 신라로 귀부한 구형왕이라, 그의 세 아들 중 김무력이 아비와 더불어 투항하매, 진흥은 사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적통 공주 아양을 배필로 주니, 이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김서현이다. 따라서 부계로 보면 김유신은 금관가야만이 아니라, 진흥왕의 증손이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혈통은 이것으로 끝인가? 이것만이 그의 벼락출세를 보장하는가? 이에서 우리가 쳐다보아야 할 곳이 바로 그의 모계 혈통이니, 그의 어머니는 만명(萬明)이었으니, 실은 그의 출세를 보장한 것은 바로 이 모계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만명을 일러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라 했거니와, 이리 되면 골 때리는 현상이 벌어지거니와, 부계는 물론이고, 모계로도 김유신은 진흥과 직접 닿는다. 입종은 말할 것도 없이 지증왕과 연제 부인 사이에서 난 두 번째 적통왕자이니, 그의 형이 바로 법흥왕이다. 


입종은 법흥왕 적통 공주인 지소를 배필로 맞아 훗날의 진흥왕인 왕자 삼맥부를 생산하니, 숙흘종 역시 어머니는 이 단계에서는 확인되지 아니하나, 입종의 아들이다. 이로 보아 숙흘종은 진흥왕과는 아버지가 같은 형제다. 


하지만 부계와 모계 모두 신라 적통 왕실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만으로, 김유신의 출세를 자동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제아무리 혈통이 고귀하다 해도, 당대 정치 상황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배제되는 일이 흔하디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명은 아버지가 숙흘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그 아버지가 딸 만명이 서현과 결합하는 일을 극렬 반대하는 바람에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고 하거니와, 이를 대체 어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한다. 


이와 관련해 화랑세기는 전체 맥락은 같으나, 세부로 들어가서는 전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뒤에서 자연히 밝혀지겠지만, 기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는 좀체, 혹은 아예 해명하지 못한 문제들을 명쾌히 풀어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만명은 아버지가 숙흘종이라는 사실만 드러날 뿐, 그 어머니가 누군지 밝히지 아니한다. 화랑세기에는 이 대목이 명확히 드러난다. 누구인가? 


만호태후였다. 만호는 누구인가?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 이르기를 진평은 "이름이 백정(白淨)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라 했으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를 기술하기를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아버지는 동륜태자(銅輪太子)인데 혹은 동륜태자(東輪太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인데, 만녕부인(萬寧夫人)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행의(行義)다"고 했다. 


다시 말해 만호는 아버지가 입종 갈문왕이면서, 진흥왕 아들인 동륜태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아들 진평을 낳았다. 


뭔가 콩가루 같은 냄새가 난다. 입종 갈문왕 딸인 만호가 같은 입종 갈문왕 아들인 숙흘종에게서 딸 만명을 낳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능성으로 이런 것이 있다. 만호는 동륜에게 출가해서 아들 진평을 낳았지만,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로 지내다가 어머니가 다른 오빠 혹은 동생인 숙흘종과 눈이 맞아 씌웅씌웅해서 만명이라는 딸을 낳았다. 이것이 이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건 전개 시나리오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편 동륜이 일찍 죽었는데, 그 마누라 만호가 이후 생평을 과부로 지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어떻든 이리 되면, 김서현과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한 만명은 다름 아닌 진평왕과는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는 같은 오빠 누이가 된다. 나이는 틀림없이 진평이 많았으리라. 진평이 만호의 원래 혹은 첫 남편 동륜 소생인 까닭이다. 또 이리 되면 김서현은 진평과는 처남매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호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다. 화랑세기와 그 자매편인 계보도 상장돈장을 합쳐서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증왕과 그 정비 연제부인 사이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법흥 입종 외에도 또 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진종(眞宗)이라, 그의 이름은 조선후기 경주김씨 족보에서 흔히 등장한다. 이런 진종은 틀림없이 남편이자 삼촌인 입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로 지냈을 지소와 결합해 딸을 두니 그가 바로 만호다. 요컨대 지소는 삼촌으로 입종만이 아니라 또 다른 막내 삼촌 진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라 왕실 정통 피를 받은 만호는 애초 남편이 동륜태자가 아니라, 진흥왕 제1대 정비인 숙명공주 사이에서 난 정숙(貞肅) 태자였다. 이 정숙태자는 동륜에 앞선 태자였지만, 그 어머니가 그만 이화랑과 바람이 나는 바람에 그에 휘말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여하튼 만호는 정숙태자에게 시집가서 딸 만룡(萬龍)을 둔다. 이런 만룡이 나중에 보리와 혼인해서는 아들 체원(體元)과 딸 보룡(寶龍)을 둔다. 


나아가 이런 만호가 나중에는 정숙태자가 쫓겨나면서 동륜태자의 부인이 되어 진평 말고도 국반(國飯)과 백반(伯飯) 두 아들을 두니, 이들은 진평이 왕이 되자, 나란히 왕의 적통 형제라 해서 나란히 갈문왕에 책봉된다. 


하지만 만호는 남편 운이 없었다. 동륜 역시 요절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자 만호는 이번에는 숙흘종과 결합해 만명(萬明)이라는 딸을 두니, 그가 바로 김유신과 김흠순 형제, 그리고 보희-문희 자매의 어머니다. 


그렇다면 숙흘종은 누구인가? 그가 갈문왕 입종 아들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거니와, 화랑세기에 의하면 어머니는 바로 금진(金珍)이다. 입종은 정식 부인 지소에게서 아들 진흥을 낳고, 후궁인 金珍에게서 서자 숙흘종을 낳은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김유신이 출세하는 발판은 바로 외할머니 만호였다! 


나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만명이 서현과 결합하는 일을 아버지 숙흘종이 반대했고, 이것이 결국 둘의 야반도주를 불렀다고 했지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후대 부계 중심주의 시각이라, 화랑세기에 의하면 뜻밖에도 이를 반대하고 나선 이는 숙흘종이 아니라 만명 어머니인 만호였다. 


둘이 야합해서 김유신을 생산한 때가 595년 진평왕 시대였다. 이때 만호는 왕의 어머니로서 태후였다. 단순히 태후였을 뿐만 아니라, 진평 즉위 초반기에는 수렴청정하면서 신라를 좌지우지했다. 아들이 18살 성년이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만호는 최고권력자였고, 특히 여성 영향력이 절대적인 화랑 행정에는 절대의 권력자였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전에 의하면, 진골정통인 만호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이라 해서,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혼인을 반대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에 의한 신라 지배계층 붕당을 결정한 양대 혈통이니, 남자는 한 대에 한해서만 그 혈통 혹은 인통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 서슬퍼런 만호태후조차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딸 만명에 대한 노여움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문제는 손자였다. 남편 서현을 따라 지금의 충북 진천 촌구석으로 도망간 만명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금성으로 날아들기 시작하고 만호태후 귀에도 들어갔다.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유신이라는 손자가 그리 잘 생기고, 그리 똑똑하다고 한다. 


손자는 역시 권력욕에 찌든 할머니조차도 흔들어댔다. 할머니는 손자가 보고 싶어 미치다시피 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왕국의 절대 강자 태후가 명령을 내린다. "만노로 가서 내 손자를 데려오느라." 이 대목을 화랑세기 유신공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신) 공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보고 싶어해서 돌아올 것을 허락하니, 그리하여 막상 (손자를)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놈은 참으로 내 손자이니라." 이로써 가야파가 마침내 (유신공을) 받들었다.    


유신은 이렇게 해서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절대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한데 그 출세의 기반 중 다른 한 축이 바로 가야파였다는 점이다. 이는 가야계 혈통이 그의 출세를 가로막는 핸디캡이었다는 단재 이래 오랜 주장을 묵살, 무효화하는 대목이다. 새로운 중심의 출현을 갈망한 가야파 앞에 나타난 김유신은 그에 더불어 만호태후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으니, 이는 당대 신라 왕실 권력의 한 축을 분점한 미실 역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시 차기 풍월주는 그 넘버2인 부제(副弟) 자리에 있던 보종이라는 인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보종은 바로 미실의 아들이었다. 보종은 김유신보다 나이도 10살가량이나 많았다. 하지만 미실은 역시 처신의 달인이었다. 만호태후가 손자를 끼고 도는 모습을 보고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아들 보종을 불렀다. "네가 유신이한테 풍월주를 양보해야겠다. 다음 기회를 보자꾸나." 


이렇게 해서 김유신은 미실의 아들 보종을 제끼고 일약 15살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 출세의 절대 후원자는 외할머니 만호태후였다. 절대 권력자의 절대 비호 아래 15살 애송이가 차기 신라를 이끌어갈 청년세대의 선두주자로 등단했다. 이는 김유신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의 등장으로 한반도 역사는 흐름을 바꾸었다.  

항용 김유신 가문을 논할 때, 단재 신채호 이래 협작설 혹은 공작설이 대세이거니와,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음험취한한 김유신은 본디 금관가야 혈통인 까닭에 엄격한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는, 그것을 혼인을 통해 돌파하려 했으니, 그런 일환으로 교묘한 공작으로 자기 누이동생과 떠오르는 신라 본래의 청춘스타 김춘추를 결혼시킴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작설이 지닌 결정적인 하자가 한둘이 아님은 내가 여러 번 지적했고, 근자에 이런 내 주장과 흐름을 같이하는 글도 나오기 시작했으니, 그런 기존 논의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거나, 혹은 아예 누락한 중대한 사건 하나를 논하려 한다. 


신라에 화랑이라는 독특한 군사 혹은 종교 결사체가 있었고, 이것이 적어도 진흥왕 이래 신라가 삼한을 일통하기까지 신라사 여러 국면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거니와, 이 단체를 이끈 이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많지는 않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진흥왕 시대 사다함과 진평왕 시대 김유신은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이미 15세 무렵에 이미 화랑을 대표하는 화랑이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김유신과 관련해 이를 증언하는 대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공히 발견되거니와,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그 권제 41, 열전 제1 김유신 상(金庾信上)에 이르기를, 먼저 그가 15세 때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한다. 이 용화향도가 어떤 지향점이 있는지는 자세치 않으나, 오야붕 명령 하나에 죽음을 불사하는 전사 조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어 김유신은 17세가 된 진평왕 건복 28년(611) 신미년에는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자주 침범함에 비분강개해 저들을 쳐부시겠다는 뜻을 품고는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며 기도한지 나흘만에 난승(難勝)이라는 신인을 접신해 비결을 받았다고 한다. 


한데 이듬해인 건복 29년(612)에는 적국들의 침탈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보검을 차고 홀로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중악에서 한 것과 같은 기도를 한 결과 천관(天官)이 빛을 내려 그의 보검이 흔들리는 접신을 또 한 번 경험한다. 


이와 같은 신이한 행적이 의외로 괴력난신을 주무기로 내세운 삼국유사에는 잘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아마도 삼국사기에 이와 관련한 언급이 충분하다 해서 그리 처리한 느낌이 짙다. 그 기이紀異)편 '김유신(金庾信) 조에는 그가 "진평왕 17년 을묘(595)에 태어났다.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은 까닭에 등에 칠성 무늬가 있었으며 신이한 일이 많았다"고 간단히 처리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가 18세가 된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 무렵 일화로 백석(白石)이라는 구려 간첩을 나림(奈林)ㆍ혈례(穴禮)ㆍ골화(骨火) 세 곳의 호국신 도움을 받아 적발한 사건을 든다. 


이를 보면 김유신이 화랑을 대표하는 우두머리가 된 시점은 그의 나이 15세(삼국사기)와 18세(삼국유사)로 대별함을 안다. 다만 유의할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15세에 김유신이 '화랑'이 되었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에는 18세에 '국선'이 되었다고 해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시기도 다르고, 명칭도 다르다. 이 중대한 차이는 다음 호로 논의를 미룬다. 


어떻든 김유신은 십대 중후반에 일약 화랑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김유신이 이렇게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힘은 무엇인가? 종래의 가야계 혈통 핸디캡에 기반한 공작설 혹은 협작설이 이곳에서도 설 땅이 없다. 


강조한다. 김유신은 이미 15세에 신라를 대표하는 청년스타로 우뚝 섰다. 김유신이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결코 김춘추와 혼인을 통해 처남 매부로 연결되어서가 아니었다.  

삼국사기 제38권 잡지 제7(三國史記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직관 상(職官上) 서두에서는 신라 직관 체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개술한다. 


신라는 벼슬 호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그 이름이 같지는 않다. 이에는 중국과 동이 명칭이 뒤섞였으니[唐夷相雜], 예컨대 시중(侍中)이나 낭중(郞中)과 같은 것은 모두 중국[唐]의 벼슬로 그 의미를 고찰할 수 있지만, 이벌찬(伊伐飡)이나 이찬(伊飡)과 같은 것은 모두 동이의 말로써 그렇게 이름하게 된 연유를 알 수가 없다. 


처음 이들 벼슬을 두었을 때는 틀림없이 관직마다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위계에 따라 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 높음과 낮음을 변별하고 그 능력의 크고 낮음에 따라 대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문헌이 사라져 밝혀내거나 자세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살피건대 제2대 남해왕(南解王)이 나라 일을 대신에게 위임하고는 그를 대보(大輔)라 일컬었고, 3대 유리왕(儒理王)이 17개 관위를 두었음을 안다. 이후 그 이름이 복잡해졌으니 이제 밝혀낼 수 있는 것들만 모아 이 편을 엮는다.


新羅官號 因時沿革 不同其名言 唐夷相雜 其曰侍中郞中等者 皆唐官名 其義若可考 曰伊伐飡伊飡等者 皆夷言 不知所以言之之意 當初之施設 必也職有常守 位有定員 所以辨其尊卑 待其人才之大小 世久 文記缺落 不可得覈考而周詳 觀其第二南解王 以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 第三儒理王 設位十七等 自是之後 其名目繁多 今採其可考者 以著于篇


여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로 국가 역시 통치 운영에는 관료가 필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그런 관료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엄격한 직제와 직급을 구분하기 마련이거니와, 그런 사정을 저 직관지 역시 그런 사정을 "관직마다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위계에 따라 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 조직은 그 활동 무대에 따라 대개 크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뉘니,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개 관료조직은 피라미드형이거니와, 그 정점에 국왕이 위치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서 효율적인 관료제를 결정하는 관건은 관직과 관위다. 직(職)이 관장하는 업무 영역이라면, 관위는 관료가 결정하는 권한의 크기를 결정한다. 


바로 이에서 관료제는 관직과 관위를 정하기 마련인데, 말할 것도 없이 관위가 높을수록 그가 커버하는 업무영역과 결정권한은 클 수밖에 없다. 


신라 역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어,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들은 크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누는 이원제를 실시했으며, 관위 역시 17개 등급을 정했다. 이 17개 등급은 같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벌찬이니 잡찬이니 대아찬이니 사찬이니 급벌찬이며 대나마 혹은 나마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관료들 등급을 나누는 관위다. 이에 따라 이벌찬이라고 하면 제1품을 말하고, 소판이라고도 하는 잡찬은 제3품, 대아찬은 제5품품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정1품이며 종1품이니, 정2품이니, 종2품이니 하는 식으로, 그 명확한 등급을 말하는 명칭을 선호 혹은 병용하기도 해서, 지금의 우리가 그 등급의 크기와 높이를 아는 데는 상대적으로 신라시대에 견주어서는 편리하다. 


신라사람들이 이벌찬을 제1품, 잡찬을 제3품 등으로 표현한 사례는 거의 접한 적이 없다. 


관직과 관위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직관지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점에서 조금은, 아니 더 정확히는 아주 불편해 관직과 관위가 뒤섞이는 듯한 양상도 연출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은 아마도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살지 않기에 그 시대에 상대적으로 익숙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관료들이 하는 일을 분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바로 관부(官府)가 출현하니, 지금의 외교부니 국방부니 문화부니 하는 것들이 바로 관부에 해당한다. 관부는 중앙정부의 그것이 있고, 지방정부의 그것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계가 생각보다는 아주 묘해서, 특히 전자의 후자에 대한 침해가 언제나 발생하거니와, 이를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묘한 대립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것이 마침내 폭발할 때는 우리는 그것을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의 반란이라 부른다. 


각 관부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직급이 있기 마련이거니와, 지방정부에 견주어 중앙정부 직급이 대체로 높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는 지방정부를 통치대상으로 간주한 까닭이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해 언제나 손아귀에 묶어두려 하며,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로의 권한 침탈 혹은 반란 혹은 독립을 겨냥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를 효과적으로 관철하고자, 인류 역사를 통털어 국가 권력이 가장 애용한 방식은 지방정부 관료들을 중앙정부가 직접 선발해, 지방정부에 파견하는 시스템이니, 이것이 이른바 군현제라 해서,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제하고는 적어도 그 군수 혹은 현령만큼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하고, 그들을 일정한 주기를 통해 교체하곤 한다. 


이 교체 시스템은 결국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현지 토호 세력화를 견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나온 것이다. 


한데 인류 역사를 통해 보면, 의외로 현재의 지방자치제와 비슷한 자율형 지방정부 시스템도 간단없이 존재했으니, 소위 말하는 봉건제가 그것이다. 한국사에서는 이 봉건제가 좀체 눈에 띠지 않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봉건제적 특징이 유별나게 한국 문화와는 달리 강하다. 


문재인 정부가 얼마전, 어쩌면 미합중국 州制와 비슷한 정도의 지방자치체 구현을 표방했는데, 이렇게 되면 광역자치단체장은 미합중국 주지사에 버금가는 권능을 소유하게 되니, 외교권만을 제외한 모든 중앙정부 권능을 지닐 가능성이 크다. 미국 주지사는 국방권도 있다고 아는데, 주방위군이 그것이다.  


이런 현대 관료제 혹은 지방행정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왜 필요한가 하면, 신라라고 해서 그런 관료제와 지방행정 조직이 없었다고는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외려 현대 국민국가 못지 않은 치밀한 관료제와 행정조직을 자랑했다. 


문제는 삼국사기 직관지가 지적했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저간 사정을 관련 기록 민멸(泯滅)로 좀체 들여다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록에 안 보인다 해서, 그들이 그런 제도 혹은 조직을 운영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유독 신라사에 대해서는 저런 하급 수준의 역사인식이 팽배한 실정이라, 신라사를 볼진댄, 적어도 진흥왕 시대 이전 신라사는 원시미개적인 조직으로 운용되었을 것이라는 통념이 널리 자리잡고 있다. 


역사학도 몇몇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악다구니를 쓰겠지만, 웃기는 소리다.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금석문 같은 자료 하나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새로운 신라사가 드러났다고 호들갑 뜨는 행위야말로 그네들이 바라보는 신라가 어떤 수준인지를 절감케 한다. (續)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4년 庚午(1570·선조 3) 3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임천(林川)에 임금님 태(胎)를 묻었다.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 조정 공론이 선대 전례에 따라 땅을 골라 태를 묻고자 하여 잠저(潛邸)에다가 태의 소재를 물어 그 동산 북편 숲 사이에서 찾아서는 그것을 묻을 곳을 가렸다. 강원도 춘천 땅에 묻으려고 산역(山役)을 거의 끝내고 정혈(正穴)을 살폈더니 그곳은 옛날 무덤이었다. 그래서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 지금의 금천(金川))으로 옮겨 터를 닦으니 정혈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힌 것을 발견해, 그곳도 옛날 무덤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이는 정혈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단지 작은 항아리뿐이요 다른 것은 없으니 이것 때문에 대역(大役)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고, 의논한 결과 그곳에 태를 묻기로 했다. 산역을 거의 마칠 무렵 조정에 이 소식이 알려져 헌부(憲府)에서는 구사맹을 아뢰지 아니한 죄로 논핵하여 파면하고, 또 대신들이 더럽혀진 곳에다 태를 묻을 수 없다 해서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긴 것이다. 그때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는데, 돌을 운반하느라 고생했다. 한번 임금의 태를 묻는 일로 세 도(道)가 피해를 보았으니 식자들이 탄식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그 숭고함이 이미 극에 이르러 있다. 때문에 신하된 이는 임금의 뜻대로 받들기만 하는 것을 존경이라 여기지 않고 좋은 일을 실행하도록 책망하는 것을 공손으로 여겨야 한다. 흉년을 당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진 때에 대신과 대간(臺諫)이 임금을 바로잡아 민생을 구제하는 데 급급하지 못하고, 태경(胎經)의 설(說)에 현혹되어 누차 임금의 태를 옮겨 삼도의 민력을 다하고도 가엾게 생각하지 않으니, 무어라 해야 하겠는가. 산릉(山陵)을 택하는 일이 태를 묻는 일보다 더 중요한데도 오히려 옛날 무덤을 피하지 않고 남의 분묘(墳墓)를 파내기까지 하는데, 태를 묻는 데만 옛 무덤을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국내의 봉만(峯巒)은 수효가 한정되고 임금의 역대(歷代)는 무궁할 것이니, 태 묻는 곳을 두 번 쓰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태 묻을 곳을 국외(國外)에서 구할 것인가, 이는 계승해 나갈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 藏胎於臨川。初 上卽位。朝議欲依 祖宗例擇地藏聖胎。求於潛邸。得之園北松間。乃擇地。將藏于江原之春川地。功役垂畢。審其正穴。是古藏也。乃移于黃海之江陰。開基之際。去正穴數十步外。有埋小甖者。或疑其古藏。觀察使具思孟曰。此非正穴。且只有小甖無他物。不可以此輕廢大役。衆議乃定。功役亦垂畢。朝廷聞其事。憲府論思孟不啓稟之罪罷之。大臣以爲不當藏于汙穢之處。仍移于忠州之林川。于時百姓飢饉。勞於運石。一藏聖胎。害遍三道。識者嘆之。

謹按。人君崇高已極。故人臣不以承奉爲敬。以責難爲恭。當凶荒生民塗炭之際。大臣臺諫不汲汲於匡 上救民。而惑於胎經之說。屢移聖胎。竭三道民力。而莫之恤。謂之何哉。山陵卜兆。重於藏胎。而猶不避古藏。至於掘人墳墓。而藏胎獨避古藏何歟。且國內峰巒。只有此數歷世無窮。藏胎不可再用。則抑求之境外乎。其非可繼之道明矣。


태를 묻는 일을 안태(安胎)라고 한다. 이에서 안은 안장 혹은 매장한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율곡의 증언이 아니라 해도, 그 행위는 여러 모로 임금님 시체를 묻는 매장 행위와 계속 비교되곤 했다. 선조는 독특하다. 그 내력이 도저히 임금이 될 자격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느닷없이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각중에 왕이 되어 용상에 앉았다. 그 이전 왕들은 장자가 아닌 일이 많았지만, 예외 없이 적통 왕자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왕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자마자 왕자의 예로써 태를 안장했다. 하지만 선조는 달랐으니, 자격이 없는 왕실 떨거지 상태에서 느닷없이 왕이 되니, 그 태를 도로 찾아내어 이젠 왕에 걸맞는 안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율곡은 이에서 그 과정을 정리한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듯, 초반기 두 군데 안태할 장소로 택한 곳이 묘하게도 이전에 쓴 무덤이 있던 곳이었다. 그것이 불길하고 불결하다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데 율곡은 이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폐를 백성들에게 끼쳤기 때문이다. 안태보다 더 중요한 의식인 왕릉 조성에는 남의 무덤이라 해서 자리를 피하지 않는데, 그보다 덜 중요한 안태를 하면서 왜 이런 지랄발광을 떠냐는 요지다. 

일반 사대부가에서는 태를 집안 어딘가에 묻었음을 추찰한다. 안태 의식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가장 확실한 출발은 김유신이거니와, 그의 열전에서 김유신 태는 출생지인 진천에다가 묻었다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서 이르거니와, 그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했으니, 김부식이 증언한 그의 태실은 지금도 엄존한다. 

기타 고려시대엔 안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그 가장 확실한 증좌가 마왕퇴 백서에 보인다. 그것이 생성된 연대는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중반이거니와, 이로써 잡는다면 태를 안장하는 의식은 중국에서는 적어도 서한시대 초기 이래에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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