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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3년 기사(己巳·1569·선조 2) 9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선조 임금이) 사관(四舘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서 새로 과거에 합격하여 들어온 신진들에게 침학(侵虐·학대)하던 풍습을 혁파토록 명하셨다. 이이가 임금께 아뢰기를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는 비록 하루아침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나, 다만 교화(敎化)를 해치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을 사관(四舘)에서 ‘신래(新來·처음 온 사람이라는 뜻)’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침학(侵虐)하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대체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등, 체통을 완전히 잃게 하여 염치를 버리게 한 뒤에야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 올려주니, 호걸의 선비치고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새로 급제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이 매우 예모(禮貌)를 지킨다 하니, 만일 이 일을 듣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 풍속이라 할 것입니다”고 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침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때부터 시작한 것인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글에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고려 말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子弟)로 입에 젖내 나는 것들이 많아, 그때 사람들이 ‘분홍방(紛紅榜)’이라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고 했다. 임금께서는 “이는 개혁해야 한다” 하시고는 드디어 통절(痛切)하게 개혁토록 명하셨다.

○ 命革四館侵虐新進習。李珥白 上曰。作人之效。雖非一朝可見。但弊習傷敎者則不可不革。今者士之初登第者。四館目爲新來。汙辱侵虐。無所不至。夫豪傑之士。尙不以科擧爲念。況使之毀冠裂服。宛轉泥水中。盡喪威儀。以棄廉恥。然後乃登仕版。則豪傑之士孰肯爲世用乎。 中廟接待新恩。頗加禮貌。若聞此事。則必以爲胡風矣。 上曰。侵虐何意。昉於何代耶。珥曰。於傳無徵。但聞麗末科擧不公。登第者多貴家子弟。口尙乳臭者。故時人目之曰粉紅榜。人情憤激遂肇侵辱云。上曰此可革也。遂傳敎痛革。

이는 과거에 합격하고서 일선에 배치된 공무원 생활의 시작에서 당시 광범위하게 유통한 폐습 혁파를 논의한 것이니, 신참 신고식이 혹되었음을 말해주는 증좌로써 자주 끌어대곤 한다. 이에서 율곡은 그 실상으로써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 구르기를 들거니와, 그 실상은 이보다 더 참혹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구체 실상은 율곡보다 꼭 백년 전을 살다간 성현의 증언을 통해서 우뚝하게 관찰한다. 

그렇다면 이이가, 그리고 그에 부응해 선조 또한 혁파하고자 한 신참신고식 전통은 이때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는가? 그것이 아님은 딴 데 볼 것 없이 저 유구한 전통이 아주 최근까지 한국 군대문화에 남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알리라. 그때 뿐이었다. 잠시 그 폐습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르나, 그 전통은 이내 살아났다. 

이이가 말한 구체의 실상과 그 이후 유존하는 악습은 계속 보강키로 한다. 

우물에는 신령이 사는 곳이라 해서 신물로 존숭받은 흔적을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콕 집어 찾아 제시하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그 흔적 하나를 독서하다 우연히 발견해 소개한다. 

조선 초기 문사文士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제3에는 그의 외할아버지 안공安公이 열두 고을 수령을 역임하면서 겪은 일화, 혹은 행한 일을 나열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순흥 안씨 안종약安從約이라, 고려 공민왕 5년, 1355년에 출생하여 여러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해주목사를 마지막으로 정계 은퇴해 은거하다가 세종 6년, 1424년에 향년 70세로 졸했다. 

이에는 그가 지금의 충남 부여 일대에 설치된 임천林川군을 다스리던 때에 지방장관으로 행한 여러 행적 중 하나로 음사淫祠 철폐를 들었거니와, 그 일환으로 안종약은 동헌 남쪽 우물을 메워버리게 한 일이 있다. 

"동헌 남쪽에 옛 우물이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신물神物이 그 속에 있다 해서 다투어 모여들어서는 복을 빌었다. 공이 메워버리가고 명령하니 우물이 소 울음 소리 같은 소리로 사흘 동안 울었다. 고을 사람들이 메우지 말라 청했다. 공이 말하기를 '우물이 반드시 슬픈 일이 있어서 우는 것인데 무엇이 괴이함이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이때부터 요괴스러운 귀신의 재해가 다 없어졌다." 

이런 사례들을 보충함으로써, 우리는 서울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 소위 어정御井의 폐기과정이라든가,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 우물 폐기과정을 이해할 발판을 마련한다, 

송 선화(宣和) 5년, 고려 인종 원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은 인종을 직접 만나고는 그 결과 보고서로 송 조정에 제출한 <선화봉사고려도경(使經)>에서 왕해(王楷), 곧 고려 16대 임금 예종을 일러 이렇게 묘사했다.

眉宇疏秀。形短而貌豐。肉勝於骨。

이를 한국고전번역원 역본(김주희, 1994)에서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고 옮겼다.

이 문제는 자칫 사자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으니, 뜻을 확실히 하고자 몇 가지를 찾아봤다. 먼저 '미우(眉宇)가 소수(疏秀)하다' 했으니 이것부터 해결하자.

'眉宇'는 글자 그대로는 눈썹의 지붕 혹은 처마라는 뜻이니, 여튼 이마 부분을 말한다. 

이를 중문사전에서는 "眉额之间。面有眉额,犹屋有檐宇,故称。亦泛指容貌"라 했으니, 애초에는 얼굴 부분에서도 눈두덩이가 튀어나온 모습이 집에 처마가 내민 것과 같아 이마 쪽을 이렇게 불렀다 하거니와, 이에서 비롯해서 얼굴 생김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이 말이 합성어로 쓰인 역사는 《文选·枚乘<七发>》:“然阳气见於眉宇之间,侵淫而上,几满大宅。” 刘良 注:“眉宇,眉额间也。”이라 했으니, 이미 전한 전반기로 올라간다.

다음으로 '疏秀'를 보니 다음과 같다.

疏秀亦作“疎秀”。亦作“踈秀”。 

(1) 疏朗清秀。《新五代史·杂传五·李彦威》:“ 太祖 见 裕 眉目疏秀,恶之。”

中文名 疏秀 拼 音 shū xiù 注 音 ㄕㄨ ㄒㄧㄨˋ 解释 疏朗清秀

亦作“疎秀”。亦作“踈秀”。 1.疏朗清秀。《新五代史·杂传五·李彦威》:“ 太祖 见 裕 眉目疏秀,恶之。” 宋 王谠 《唐语林·补遗三》:“此子眉目疏秀,进退不慑。” 宋 洪迈 《夷坚乙志·无缝船》:“女子齿白如雪,眉业踈秀,但色差黑耳。”《二刻拍案惊奇》卷二四:“明年生下一男,眉目疏秀,甚觉可喜。”《明史·李景隆传》:“﹝ 李景隆 ﹞长身,眉目疎秀,顾盼伟然。”

(2) 挺拔秀丽。 宋 司马光 《水红》诗:“烟枝静疎秀,风穗闲低举。” 况周颐 《蕙风词话》卷三:“ 辛 党 二家,并有骨榦。 辛 凝劲, 党 疏秀。”

뭐 볼 것 없다. 쭈쭈빵빵이라는 뜻이다. 수려하다는 뜻이다. 이로써 서긍이 예종 외모를 묘사하는 데 쓴 '眉宇疏秀'라는 말은 얼굴이 잘생깄다 이렇게 보면 된다.

다음 '형단이모풍形短而貌豐'이라 했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키는 작고 외모는 살이 쪘다는 뜻이니 한마디로 땅딸막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육승어골肉勝於骨'..이 말은 무슨 뜻인지 난 모르겠다. 글자 그대로는 고깃덩이가 뼈보다 뛰어나다는 것인데, 그 앞 말과 이어보면 비대하다는 뜻임에 분명하다.

김정은은 사고만 치지 않으면 그런대로 꽃돼지로 봐줄 만한 구석이 있는데, 혹여 이 친구가 예종과 비슷할 수도 있으리라. 뚱뚱하지만 키가 작다는 점에서 예종은 개그맨 김준연과는 이미지가 거리가 있다. 그보단 차라리 옥동자가 가깝다 하겠다.

앞으로 이 시대 사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인종은 옥동자를 캐스팅하라!!!!!


        < '옥동자' 정종철 from YNA DB >  

고려 태조 13년(930), 왕건은 고창(안동) 전투에서 견훤에 대승하면서 승기를 완전히 잡는다. 한데 이 사정을 전하는 기록이 심상치 않다. 이때 왕건은 지금의 경상도 중북부와 영동을 다 손아귀에 넣고 지금의 포항에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정리한 고구려 영토는 얼토당토않다. 영일현, 그러니깐 지금의 경북 포항까지,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고구려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함에도 이런 택도 없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나는 《삼국사기》가 고려와 고구려를 헷갈리는 바람에 저리 잘못 정리했다고 본다. 아래는 《고려사절요》 해당년 기록이다.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경북 청송 진보) 장군 선필(善弼)이 와서 의탁하였다. 예전에 왕이 신라에 통호하려 할 제, 도둑이 일어나 길이 막히자 왕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선필이 기이한 계책을 써서 인도하여 통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와서 항복하니, 후한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그가 나이가 많다 하여 상보(尙父)라고 일컬었다.

○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드디어 서로 싸우자,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고창군에서 아뢰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순주(順州)를 쳐서 함락시키고 인호(人戶)를 약탈하고 갔습니다.” 하니, 왕이 곧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축하고 장군 원봉(元奉)을 죄주었으며, 다시 순주를 하지현(下枝縣)으로 강등시켰다. 고창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했다. 이에 영안(永安)ㆍ하곡(河曲)ㆍ직명(直明)ㆍ송생(松生) 등 30여 군ㆍ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 동쪽 주(州)ㆍ군(郡) 부락(部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 안동)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 일어진(昵於鎭)에 행차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치고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웠다. 남미질부(南彌秩夫)와 북미질부(北彌秩夫 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두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서 말하는 왕건이 점령한 땅이 신통방통하게도 바로  《삼국사기》 지리지가 기록한 고구려 영토 남방 혹은 남서방 경계다. 

나로선 이것이 내가 현재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金)이 재갈을 잡고 놓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그만두었다. 

上如果州, 相壽陵地。 將還, 都評議使司享于豆毛浦船上, 群臣以次獻觴。 鄭道傳進曰: "天佑聖德, 肇建丕基, 臣等蒙恩至厚, 常願千萬歲壽。 今日相地, 臣不勝感愴。" 因泣下, 上曰: "欲於平安之日, 預定之耳, 何泣爲!" 至徃尋 村路上, 上欲馳馬射獐, 僕隷朴夫金執鞚不放, 上乃止。 

같은 실록을 더 따라가면 같은 해 7월 11일 임인에는 

“상께서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했다” 

上命判三司事鄭道傳、左使南在、參知門下南誾、中樞院使李稷, 相壽陵地于廣州。 

고 하며, 이듬해 5년 4월 6일 계사에는 “상이 광주(廣州)를 지나다가 수릉(壽陵)의 땅을 보았다(上過廣州, 相壽陵之地。)”고 했으며, 이어 같은 해 9월 28일 계미에는 “전라도 역부(役夫)들이 수릉(壽陵)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손발을 부러뜨린 자가 89인이나 되었다(全羅道役夫輸壽陵蓋石, 顚仆傷折手足者, 八十九人。)”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주에다가 묏자리를 정하고, 그 조성에 나섰음을 본다. 

또 같은 해 11월 19일 계유에는 이성계가 직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연회하고, 수릉(壽陵)에 갔다(幸太平館宴使臣, 遂如壽陵。)”고 하니,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바깥 행차를 이용해 냅다 자기가 묻힐 곳을 직접 돌아봤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무신에 다시 한 번 수릉(壽陵)에 직접 거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골라 만든 땅에 묻힐 수가 없었다. 태종 8년 5월 24일, 그가 죽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8년 6월 12일 기축에 산릉 자리 물색에 나선 조정의 부산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에 의하면 검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전 서운 정(書雲正) 이양달(李陽達) 등이 원평(原平)의 예전 봉성(蓬城)에서 길지(吉地)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직접 해당 지역을 돌아본 결과 봉성 땅은 쓸 수 없고, 해풍(海豐)의 행주(幸州)에 있는 땅이 쓸 만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방원 맘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산릉 자리를 물색할 것을 주문한다. 

산릉 자리는 6월 28일 을사에야 정해진다. 이 날짜 실록에는 

“산릉을 양주(楊州)의 검암(儉巖)에 정하였다. 처음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다시 유한우(劉旱雨)·이양달(李陽達)·이양(李良) 등을 거느리고 양주(楊州)의 능 자리를 보는데,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하윤 등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검암(儉巖)에 길지(吉地)가 있다“고 하므로 하윤 등이 가서 보니 과연 좋았다. 조묘 도감 제조(造墓都監提調) 박자청(朴子靑)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役事)를 시작했다.” 

고 한다. 

실제 산릉 공사는 7월에 시작했다. 이달 5일 신해 실록에 “여러 도(道)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산릉 역사(役事)에 부역(赴役)케 하니, 충청도에서 3천 5백 명, 풍해도(豐海道)에서 2천 명, 강원도에서 5백 명이었다. 7월 그믐날을 기(期)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고 하거니와, 아마도 제반 징발 과정 등을 거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사는 한창 진행되어 7월 26일 임신에는 마침내 석실을 만들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날짜 실록은 陵制와 관련해 매우 중대한 증언이다. 

“석실(石室)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산릉의 기일(期日)이 가까웠는데 고사(故事)를 따르는 자는 석실을 만들자고 하고, 《가례(家禮)》에 의거하는 자는 회격(灰隔)을 쓰자 해서 두 설 중 어느 것을 택할지가 결정되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世子) 이제(李禔)를 명하여 종묘에 나아가 점[栍]을 쳐서 석실로 정했다.” 

命造石室。 山陵期近, 遵故事者, 欲作石室; 據《家禮》者, 欲用灰隔, 兩說未定, 上命世子禔詣宗廟探栍, 定爲石室。 

주자가례도 관습 앞에는 이때까지만 해도 맥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는 점점 세력을 확보해 이데올로기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어 7월 29일 을해에는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曹溪宗)에 붙여서 노비(奴婢) 1백 50구(口)와 전지(田地) 3백 결(結)을 정속(定屬)시켰다. 연경사(衍慶寺)의 원속(元屬) 노비(奴婢)가 80구(口)인데 이번에 20구를 더 정속(定屬)시켰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것을 하는 것은 부왕(父王)의 대사(大事)를 당하여 시비(是非)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왕국 건국 이후에도 불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장면을 목도한다. 더불어 산릉을 관리하는 사찰인 원찰(願刹)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장면도 같이 본다. 

이어 같은 날에 이방원은 산릉 수호군(守護軍) 1백 명을 두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일종의 수릉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8월 7일 임오에는 이성계에게 계운 성문 신무 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와 태조(太祖)라는 廟號를 올렸으며, 8월 25일 경자에는 산릉사(山陵使) 이직(李稷)을 보내 산릉의 참초제(斬草祭)와 개토제(開土祭)를 행한다. 

9월 4일 기유에는 대신을 보내 산릉의 발인(發引)을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했는가 하면,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어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빈전(殯殿)에 올리니, 시보(諡寶)에는 전자(篆字)로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 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썼다. 

9월 5일 경술에는 백일재(百日齋)를 흥덕사(興德寺)에 베풀고, 이틀 뒤인 7일 임자에는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받들어 발인(發引)했다. 같은 날 오시(午時)에는 영구가 검암(儉巖) 동구(洞口)에 이르러서, 시신은 악차(幄次)로 옮겨진다. 

이튿날인 8일 계축에는 임금이 상왕 정종과 함께 산릉을 살피고, 그 이튿날인 9일 마침내 이성계는 건원릉(健元陵)에 영원히 잠든다. 이 장면을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시(子時)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임광제(臨壙祭)를 행하고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하고 나서, 곧 하직하고 신주(神主)를 썼다. 백관은 최복을 벗고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로 입시(入侍)했다. 다음에 반혼 동가제(返魂動駕祭)를 행하고 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오는데, 길장(吉仗)이 앞서고 문무백관이 앞에서 인도하며, 상왕과 주상은 소연(素輦)을 타고 반혼거(返魂車) 뒤를 따르고, 군위(軍威)는 뒤에서 옹위(擁衛)하였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관(李灌)을 머물게 하여 현궁(玄宮)의 봉함을 감독케 하고 엄광제(掩壙祭)를 행하게 하였다. 도성에 머물러 있던 각사(各司)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동교(東郊)에서 봉영(奉迎)하여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와, 오시(午時)에 우주(虞主)를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고,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권도(權道)로 최질(衰絰)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子時, 上率百官行臨壙祭, 奉安于玄宮, 遂奉辭題神主。 百官釋衰服, 以烏紗帽黑角帶入侍, 次行返魂動駕祭, 奉虞主而還。 吉仗居前, 文武百官前導, 上王及上乘素輦, 隨返魂車之後, 軍威擁後。 留司憲執義李灌, 監鎖玄宮, 行掩壙祭。 留都各司閑良耆老等, 奉迎于東郊, 入自興仁門, 午時, 奉安虞主于文昭殿。 上率百官行初虞祭, 還宮。 議政府請權釋衰絰著素服, 從之。

 

 

"중국은 문명이 발달해 아무리 외진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 사대문에서 몇 리만 떨어져도 아득한 태고적처럼 원시사회다. 하물며 멀고먼 시골은 어떠하랴? 무릇 사대부 집안은 벼슬길에 오르면 서둘러 산기슭에 셋집을 얻어살면서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혹시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재빨리 서울 근처에 살며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다. 원문을 대조하지 않고 누군가의 번역을 옮긴다. 원문이 없으니 대조가 불가능하다. 
다산...요즘 태어났으면 재빨리 미국으로 날랐을듯..
거기서 원정출산도 했을 듯


왜 중국이었을까?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사대주의일까? 

큰물에 대한 동경이라고 나는 본다. 

국제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열망. 그 무대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라 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건대,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4일에 사망한다. 이틀 뒤에 발상(發喪)하고, 그 다음날 그의 시신은 빈전(殯殿)에 간다. 빈전은 궁궐 정전 혹은 편전이었을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했다. 빈(殯)을 마치고 그를 장사한 때가 같은 해 음력 6월 26일, 양력 7월 30일이다. 그의 무덤에는 현릉(顯陵)이라 했다. 이로써 본다면 왕건은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27일 만에 묻혔다. 나아가 왕건 기제(忌祭)는 매년 6월 1일이다. 

이런 상장(喪葬)제도를 보건대 고려는 이미 건국과 더불어 왕에 대해서는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일간 상장 의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장제를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말 그대로 하루를 한 달로 친다는 뜻이니, 27일은 곧 27개월인 셈이다. 이후 왕들도 장송 패턴을 보면 고려에서는 시종일관해서 이일역월제가 관철됨을 본다. 

이와 같은 이일역월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삼년상의 폐해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등장했다. 삼년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제도와 관습으로 정착시킨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공자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서 부모 품을 벗어나 아장아장 걷는데 3년이 소요된다는 발상을 장송에 적용해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년을 애도하는 기간으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나중에 어찌하여 3년 시묘살이로 치환되었는지는 내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다만 3년이라 하지만, 햇수로 3년을 말하며, 실제 3년을 꽉 채운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3년을 몇 개월로 삼을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한다. 이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으니, 27개월과 25개월이 그것이다. 전자가 아마 정현(鄭玄)이 주장한 것으로 기억한다. 

25개월이건 27개월이건, 이리 긴 복상(服喪)기간은 언제나 논쟁을 유발했다. 상주가 몸과 마음을 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기간에 모든 길례(吉禮)가 중단 연기되니, 그런 집안에서는 시집 장가도 못 보냈다. 나아가 상주 대부분이 한창 일해야 하거나, 관직에 종사해야 하는데,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는 이미 공자 당대에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불만이었다. 이를 두고 공자와 제자가 논쟁을 벌인 일이 이미《논어》에도 보인다. 나아가 틈만 나면 공자의 유가를 씹어돌린 묵자 교단에서도 계속 삼년상을 공격 빌미로 삼았다. 

이 일이 왕으로 옮겨가면 여러 문제가 돌발한다. 한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왕이 아버지가 죽었다 해서 3년이나 정사를 팽개치고 시묘살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묘살이는 안 한다 해도, 매일 미음이나 삼켜가면서 무슨 정사를 돌보겠는가? 

그래서 묘수 끝에 등장한 것이 이일역월제다. 이는 짱구돌리기에서 나온 발상이다. 하루를 어찌 한 달로 칠 수 있겠냐만, 오늘부터 요이 땅! 그리 하자 해서 도입된 것이 바로 이 제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는 전한(前漢) 초기다. 그렇게 등장한 이 제도가 초래한 각종 편리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뭐, 조선 문종처럼 엄마 아부지에 대한 그리움이 지나친 자식이 가끔 있기는 했지만, 세상 모든 왕은 아버지가 죽어야 왕이 된다. 한비자가 갈파한 인간 본능 중에 세상 모든 마누라와 아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일찍 죽기만을 바란다는 말이 있다. 그런 아들이고 마누라이니, 그들이라고 삼년이나 상복 입는 불편을 감수하고 싶겠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고려가 왕건을 추숭한 방식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종묘 신주 안치

둘째 어진 봉안

셋째 소상 제작

넷째 현릉 배알 

이 정도로 정리가능하다. 어진은 여러 곳에 봉안하나 가장 중심 되는 공간은 궁궐 안 어진각과 개성 인근 봉은사라는 사찰이다. 후대 왕들이 태조 어진이나 현릉을 6월 1일 무렵에 집중 배알하는 이유는 이날이 기제사일이기 때문이다.

인덱스index에 해당하는 말이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는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색인(索引)’이라는 말이 그 번역어로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말은 애초에 일본에서 인덱스에 대한 번역어로 만들어낸 말로써, 그것이 다시 한국과 중국으로도 침투해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한데 중국에서는 색인이라는 말 대신에 ‘인득(引得)’이라는 말도 더러 사용한다. 
요새 학술계에서는 이 말이 서서히 대세를 장악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데 인덱스에 해당하는 일본식 한자어 색인을 버리고 인득이라는 말을 쓰게 된 사유가 무척이나 재밌다. 


引得이라는 말 역시 근대의 발명품인데, 이 말을 제안한 이는 안식년을 맞은 국내 교수들이 툭 하면 똥 폼 낸다고 싸질러 가는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발명품이다. 이 연구소에 인득편찬실(sinological index series)이 있으니, 이는 하버드대에 봉직한 홍업(洪業.1893~1980)이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설립했다. 한데 홍업이가 굳이 색인이라는 광범위한 용어가 있는데도 이를 인득으로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함의가 색인보다 적절하고 영어 인덱스의 원음에 가깝다.”


근자에 김언종과 김수경이 번역해 한국고전번역원이 기획하는 ‘고전적정리이론총서’의 제2권에 포함된 중국친구 黃永年의 《고적정리개론(古籍整理槪論)》에 보인다. 


얼마 전에 나는 <<온공속시화溫公續詩話>>를 읽다가 그에서 나오는 다음 구절....


唐明皇以諸王從學,命集賢院學士徐堅等討集故事,兼前世文詞,撰《初學記》。


을 예로 들면서 이 구절은 "당 명황(현종)이 제왕인 아들들에게 공부를 시키고자 할 요량으로 집현원학사인 서견 등에게 명하여 고사 모아서....초학기라는 책을 편찬케 했다"고 옮기면서 이 경우 以는 使나 令에 해당하는 사역 동사라고 말한 바 있다.


한데 각중에 과연 以가 이런 뜻으로 쓰인 경우가 있는지 추가로 조사해 보고픈 욕망이 있어 강희자전 등을 뒤졌더니 전한 말기에 유향이 편집한 《전국책战国策》卷三 진책秦策 一에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용한 다른 용례를 검출했다.


泠向謂秦王曰: 向欲以齊事王, 使攻宋也.


영향(泠向)이 진왕(秦王)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나라가 왕을 섬기게 해서 그들(곧 제나라)이 송나라를 치케 했으면 합니다"


이 경우도 以는 使나 令, 혹은 命 정도에 해당하는 사역 동사... 다시 말해 누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비록 두 사례에 지나지 않으나 以가 이런 뜻으로 쓰이는 맥락이 드러난다.

使나 令, 혹은 命과 같은 다른 사역동사와 같은 문장에서 사용될 경우, 반복을 피하고자 부러 以를 썼다는 것이다. 
온공속시화에서는 바로 뒤에 命이라는 다른 사역동사가 보이고, 전국책에서는 使라는 사역동사가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다른 사례가 보이면 다시 보완하기로 한다.


유배 생활엔 돈이 엄청 나게 든다.
관에서 무상으로 집 임대하거나 먹을 것 대주는 일 따위 않는다.
유배는 자비 유학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무슨 돈으로 18년간이나 강진에서 생활한 거임?
첫째, 원래 부자다.
둘째, 큰아들 정학연이가 무허가 의사하면서 댔다.
셋째, 고액 과외 수업을 했다.
나는 세번째로 본다.


다산이 처음 강진 촌구석에 내려갔을 적에 어떻게 학생들을 모았을까?
서울대 출신 하버드 박사 기재부 과장 출신 이렇게 뻥을 쳤다고 본다.
입소문 났겠지.
족집게 선생 왔다고.
그 소문 진원지는 주막 여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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