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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강고하면서 억압적인 신분제 나는 유사 이래 본 적이 없다.
능력이 아니라 피로써 그 사람 생평을 절단낸 가족제도로 한국사만큼 엄혹한 데가 없다.


능력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고한 일부일처제를 혁파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일부일처제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신분 문제는 일부일처제에서 비롯한다.


한데 내가 알기로 이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폐기하고자 한 심각한 움직임이 전근대에 딱 한번 있었다.
고려시대 원간섭기였다.
이를 당시 힘께나 쓰는 어떤 관료가 원나라 제도 관습을 들어 그 혁파를 과감히 주창하고 나섰다.
누가 반대했겠는가?


당시 재상 마누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정식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첩하고 내가 동급이라니?
이를 전하는 기록을 보면 당시 재상들이 마누라를 두려워해 이 논의를 패대기쳤다고 했다.


여성 인권 해방은 지금은 의아하겠지만 일부다처제 도입이 첩경이었다.
몇몇 정경부인 농간에 천만 여성이 울었다.


나는 아래에서 말하는 일부일처제 혁파 움직임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 역사가 달라졌으리라 본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 1(忠烈王一) 을해 원년(1275), 송 효공황제(孝恭皇帝) 덕우(德祐) 원년ㆍ 원 지원 12년 


○ 2월에 태부경 박유(朴楡)가 상소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높은이나 낮은이가 한 아내만 둘 수 있어서,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아내를 얻는데는 제한이 없으니, 신(臣)은 인물이 모두 장차 북쪽으로 흘러나갈까 두렵습니다. 가령 신하들에게 첩 두는 것을 허락하되 관품에 따라 그 수효를 감하여 서인(庶人)에 이르러서는 일처일첩(一妻一妾)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서처(庶妻) 소생의 아들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모두 적자와 같이 하게 한다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남녀가 없어지고 인물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아 인구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유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방은 오행(五行)으로 볼 때 목(木)에 속하는데, 목의 생수(生數)는 3이요 성수(成數)는 8이다. 기수(奇數)는 양(陽)이요, 우수(偶數)는 음(陰)이니, 우리나라의 인물이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이수(理數)가 그러한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이런 상소를 하니, 부녀자들이 듣고 모두 원망하며 두려워하였다. 이때 재상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어 그 의논을 중지시켜 실행하지 못하였다. ○二月,大府卿朴楡,上疏曰,我國,男少女多,而尊卑,止於一妻,其無子者,亦不敢畜妾,異國人,來,娶妻,無定限,臣,恐人物皆將北流,令臣僚,許娵庶妻,隨品降殺其數,至於庶人,得娵一妻,一妾,其庶妻所生之子,得仕于朝,皆比適子,怨曠以消,人物不流,戶口日增矣,楡,嘗言,東方,屬木,木之生數,三,而成數,八,奇者,陽也,偶者,陰也,吾邦之人,男寡女衆理數然也,遂上此疏,婦女聞者,咸怨且懼,時,宰相,有畏其妻者,寢其議不行。


고려가 좀 독특한 면이 있어 지들은 요遼나 금金에서 책봉을 받았지만, 그 내부에서는 또 하나의 조공책봉 체계를 유지했으니, 탐라 울릉도, 그리고 금 건국 이전 여진에 대해서는 시종일관해서 종주국을 자처했다. 


종주국이 일방적인 공물의 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쪽에서 하나를 가져오면 두 개를 줘야 하는 것이 조공 책봉 체계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요 금에 대해 조공하니, 중국 대륙 남쪽 송宋과의 관계가 참말로 오묘하다. 
이게 조공 책봉 관계도 아니면서 긴 것 같은 묘한 관계.
양국 국교는 나중에야 성립하는데, 송이건 고려건 북쪽 요를 의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송 역시 요에 신속臣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송과 고려 교유는 비외교의 관계가 훨씬 더 활발한 이상한 시스템이 정착한다. 
줄기차게 송나라 상단이 개경으로 밀어닥친다.


고려와 이들 인접 왕조 혹은 종족 사이에 활발하게 품목이 교유하는 것이 동물이다. 말과 소, 그리고 나귀와 노새는 수시로 오갔다. 

고려시대는 인종人種이 대규모로 혼효하는 시대이면서 동물이 국제 교배하는 시대였다.


이 이야기도 내가 늘쌍 하는 말이다.
일본서기가 대표하는 고대 일본이 하는 논법은 작금 북한의 행태와 같다.
일본서기 이래 저들의 각종 기록을 보면 한반도 모든 사신 행차는 목적이 조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든 사절을 조공사로 표현한다.

하도 저리 뻥을 쳐놓으니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역사연구자가 의외로 많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작금 북한이 하는 꼴과 같다.
저들의 눈에는 모든 외교사절이 그들에 대한 조공 행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특사 방문도 저들을 알현하러 온 조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개뿔도 없으면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한다.

북한이 땡깡부릴수록 인근 국가의 사신 행렬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어찌 이것이 조공 행렬이리오?

일본서기는 지금의 북한 노동신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논리를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매양 史를 읽을 적마다 고려 성종이 죽음에 임해 취한 행동을 보고는 찬탄을 거듭해 마지 않으면서 지도자는 자고로 이러해야 한다는 전범으로 삼는다. 
그의 죽음에 즈음한 고려사절요 언급이다.

(997년)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송(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는 내천왕사(內天王寺)로 옮겨갔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했다.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이를 사람은 무엇으로 새로운 은전을 펼 수 있으랴"

그러고는 허락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왕이 병들면 죄수를 사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복을 구하고자 하는 관습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이를 거부한다. 
내가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다 석방해 버리면 내 뒤에 즉위하는 새로운 왕은 무엇으로써 신민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냐는 말이었다.

삼가고 삼갈지어다. 
나는 이런 지도자를 보고 싶노라. 
내가 아니면 지구가 망하고 우주가 망하며 대한민국이 망한다 해 난리를 피워대면서 거리에 나서 서명이나 해제끼는 푸른기와집 누나여. 성종을 볼지니라. 


注) 애초 이 글은 노무현 정부 말기에 노 대통령이 갖은 비난 무릅쓰고서 정치인을 대거 사면할 때 쓴 초고를 다시금 박근혜시대에 맞게 재가공한 것이다. 

사면....일반사면이 있고 특별사면이 있다. 어느 것이나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권한이다. 

사면권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노 대통령에게는 아마도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은 일 내가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이 옳다고 보지 않았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라 해도 다름이 없으니, 이른바 정통 유학자라는 자 중에는 시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요즘 한국사회 일부 개독이 여타 종교에 대하여 취하는 발본색원적인 사상을 지닌 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는 찻잔 속 태풍이라 대부분은 불교에 대하여 관대했으며, 양교 조화를 꾀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그 건국 주체 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이 천지라, 주희라는 요망한 이는 그 자신 중 노릇을 했으면서도 불교에 대해서는 불구대천 원수로 삼았으니, 그를 조술한 자들은 신통방통하게도 고려가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조선이 건국할 수밖에 없던 정당성을 불교에서 찾았으니. 그리하여 불교에 대해서는 시종하여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하여 그것을 퇴출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한데 우리가 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종래 불교가 수행하던 다양한 역할 중의 하나가 광장 정치였으니, 이 광장 정치가 비익秘匿을 근간으로 삼는 동아시아 전통 군주론에서는 그 유일한 돌파구였다는 점이거니와, 그런 숨통 막히는 비익형의 전통에서 불교는 군주를 신민에게 드러내는 광장 정치의 유일한 창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유교가 적어도 지배권력에서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음으로써 그에 둘러쌓인 군주는 더더구나 구중심처 궁궐로 숨어버리기에 바빴으니, 이 점은 두고두고 근대국가 혹은 시민성의 창발에 발목을 잡게 된다.

나는 일전에 동아시아 군주론에 견주어 그리스 로마 그리고 페르샤 전통의 군주상은 공개형이며, 그것의 단적인 증거는 화폐에다가 군주의 얼굴을 새김을 들었거니와 은닉형 비익형 군주 국가에서는 군주는 뒤로 숨기에 바빴으니, 조선시대 그 어떤 왕실 연향 그림에도 임금 자리에는 임금이 없고 덩그러니 일월오봉도 그림이 그 차지가 되는 까닭에 이에서 말미암는다.

한데 그러한 은닉형 문화에서 불교는 위대한 반란자였다. 불교는 한편에서는 은닉형 수도자를 자처했지만, 그 한편에서는 대중과의 끊임없는 교감, 그리고 떼거리 정치를 표방했으니, 그들이 무수하게 내세운 각종 도량道場이 광장 정치의 표상이었다.

불교 국가에서는 이런 도량이 툭하면 있었으니, 그에 더불어 반승飯僧이라는 제도가 있어 이런 모임은 참가자 규모가 최소 1만명이라, 이에다가 수십만이 참가하는 연등회라든가 팔관회는 그 자체가 왕의 시혜로 간주되었으니, 그런 문화권에서 왕은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카니발 문화의 상실을 의미했다.

조선 후기 실학을 논하면서 개중 하나로 박제가를 언급하면서 
그가 수레 사용을 적극 주창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수레를 몰라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 아니다. 
산이 전국토 7할이었기 때문이다


수레를 사용하려면 
첫째. 지금의 고속도로 같은 도로가 구비되어야 하며 
둘째, 그런 도로는 높낮이 차이가 현격히 낮아야 하니
셋째, 그런 까닭에 소백이며 태백이며 차령산맥 등지는 터널을 뚫어야 했다.


이것 없이 수레 사용 운운은 다 개소리라, 설혹 수레가 있다한들 도로를 만들지 못하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리오?


박제가의 꿈은 그 200년 뒤에 이룩하게 되니
첫째, 일본넘들이니, 그들이 만든 경인선이며 경부선하는 철도가 그것이고 
둘째, 박정희니,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가 그것이다.


이런 제반 사정 고려 없이 그가 어떠한 소리 지껄였다 해서 그를 선각자였느니 하면서 운운해서는 결코 안된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전후사정 고려치 아니하고 이상론만 펴는 자들이 있으니 대체로 이런 이놈들을 일러 알량한 지식분자라 한다.

(2017. 01. 26)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했다.

70세가 되는 그해 첫날인가 아니면 70세를 꽉 채운 그해 마지막인가 하는 논쟁이 그것이었다.

후자를 따르면 71세가 되기 전날이 퇴직 시점이 된다.

김유신을 볼 때 70세에 도달한 그 해 첫날에 치정을 결행하고자 했으니 당시 신라 사회 공무원 정년 퇴직은 69세였다.

또 하나 유의할 대목은 이때 신라 사회엔 아직 생일이 없다는 사실을 유추한다는 점이다.

김유신은 생일을 기점으로 따지지 않았다.

생일은 훨씬 후대에 생긴 통과의례다.

하기야 중국에서 생일은 당 현종 이륭기 때 비로소 생겼다.

허심한 기술 하나로도 역사는 이리 풍부해진다.

한데 막상 역사학계엔 헛소리만이 난무한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했다.

70세가 되는 그해 첫날인가 아니면 70세를 꽉 채운 그해 마지막인가 하는 논쟁이 그것이었다.

후자를 따르면 71세가 되기 전날이 퇴직 시점이 된다.

김유신을 볼 때 70세에 도달한 그 해 첫날에 치정을 결행하고자 했으니 당시 신라 사회 공무원 정년 퇴직은 69세였다.


또 하나 유의할 대목은 이때 신라 사회엔 아직 생일이 없다는 사실을 유추한다는 점이다.

김유신은 생일을 기점으로 따지지 않았다.

생일은 훨씬 후대에 생긴 통과의례다.

하기야 중국에서 생일은 당 현종 이륭기 때 비로소 생겼다.


허심한 기술 하나로도 역사는 이리 풍부해진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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