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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노을>


아래는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July 6, 2015 at 5:37 AM에 내 페이스북 계정에 게재한 글이다. 2년 전 오늘에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음미할 대목은 없는 않은 듯해서 관련 사진을 첨부하며 재게재한다.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의 혼란으로 이곳 독일 본 기준으로 오늘이라 하겠다. 이곳 제39차 세계유산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 산업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가 무엇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국제기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세계유산이 되고, 그것을 뒷받침한 여러 조건이 유네스코라는 이름에 맞물려 그리 통용되는 것 또한 엄혹한 사실이다. 세계유산...나도 아직 그 정체를 모르나, 이 현실세계의 통념이 세계유산의 이념 혹은 이상과 갖은 충돌을 빚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요 괴리이기 때문이리다.


이곳에서 잠깐잠깐 이번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한국과 일본간 합의를 두고 그것을 전하는 각종 뉴스에 오뉴월 소불알처럼 열린 댓글이라는 것들을 보니, 

첫째, 우리가 그 등재를 저지했어야 하고

둘째, 적어도 그것이 아니라 해도 등재 대상 23건 중 조선인 강제징용의 한이 서린 7개 현장은 등재 목록에서 삭제했어야 하며

셋째, 그렇기에 이번 협상은 굴욕이라 하며 

넷째, 이를 종합하여 한국 외교력의 실패를 운운하는 압도적인 논조를 본다.


<독일 본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 


하지만 이번 협상단 한국 어떤 외교관이 쓴 말을 동원하건대 세계유산은 레고 블럭 쌓기가 아니다. 블럭 몇 개를 넣고 빼고 하는 게임이 아니다. 내가 섣부르게 알지만 세계유산이 빵조각 뜯어먹기는 아니다. 그리고 등재 저지는 생각보다도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나는 기자로서 이번 사안에 생각보다는 조금 더 관여했다. 지금 고백하거니와 외교부에 불려간 일도 있고, 그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 세 가지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입에 발린 소리인 줄 모르나 이번 협상단 주축 중 한 명은 오늘 회의장을 나오면서 내 제안이 사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 이번 대회에 한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 현장을 지켰고 혼자서 왔다. 혹자는 어떻게 해서 나 혼자만 여기 오게 되었는가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우리 언론의 엄혹한 현실이 속된 말로 대통령 해외순방 말고는 회사 자비로 출장을 보내는 곳은 없다.


내가 분에 넘치게 현장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자로서, 혹은 그것을 벗어난 일종의 세계유산 자문관으로 이번 사태 귀퉁이 0.1%에 발을 걸쳤기 때문이다. 그에서 비롯되어 지금은 밝히기 힘든 어떤 기관의 힘을 빌려 독일까지 날아오게 되었다. 


애초 이번 사태가 커지면서 내가 외교부에 불려갔을 적에도 그렇고 그 초반기 한동안 나는 이번 사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피상으로 알던 이른바 한국 외교부의 불난집 호떡구워먹기식 기관이라는 이미지 혹은 선입관이 있기도 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우리는 저 댓글 퍼레이드가 피상으로 말하는 그것보다 훨씬 위대한 성과를 냈다. 


forced to work in harsh conditions 


이 말을 읽는 이는 다름 아닌 일본 정부를 대표한 일본 대표단이었다.


<강제동원 사실을 독일 제안으로 등재 결정문에 반영하는 장면> 


나는 23년전 기자 업계에 투신하고서 이내 이른바 대일전후청산 운동으로 내 전공을 삼은 전력이 있다. 원폭피해자니 위안부니 혹은 관동군포로니 하는 문제에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미친 정도로 기자 생활 초창기를 불살랐다. 그런 나를 늘 환장하게끔 만든 일이 각종 논리로 이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궤변의 논리였다. 나는 일본정부가 저런 식으로 과거사를 인정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한동안 과거사청산 운동을 쳐다보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주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혹자는 천황 이름으로 과거 어느 시점에 말한 통석의 념을 들 수 있겠지만, 일본 헌법을 봐라. 천황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상징일 뿐이요, 모든 책임은 일본 국회에 귀속한다. 일본은 내각책임제다. 국회가 절대 권능을 갖는 내각책임제 국가다. 그런 일본에서, 내 기억으로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을 비롯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장면을 목도하리라고는 불알이 떨어지기 전에는 없을 줄 알았으니, 

오호라, 

그래서 오늘 본은 나에겐 awakenig city노라. 


<등재 순간 일본대표단과 그 주변>


이로부터 꼭 1년 뒤 같은 날, 나는 같은 페이스북 내 계정에 다음 글을 포스팅 했다. 


일본 산업유산 등재 1주년에 즈음한 소회


아래 공유한 작년 오늘 포스팅에 잠깐 적었지만, 이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질 무렵, 우리 외교부에서 나를 불렀다. 가서 그 한-일 협상단 한국 대표를 면담했다. 가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이 대표가 대학교 선배더라.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태 해결 방안을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정리해 들어갔다. 이 문건이 어디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소중한 문건인데 말이다. 그러니 기억에 의존해 당시를 증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세 가지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1. 등재 자체 저지...이건 불가능하다. 

2. 제목 교체...등재 시설물 기간을 아주 제목에다가 1910년 이전까지로 박아서 교체하자. 

3. 등재 결정문statement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문구를 집어넣자.


이 중에서도 나는 세 번째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무슨 여파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산업유산 등재가 확정되고, 그 협상단 우리측 대표가 입에 발린 소리인지 모르나 "김기자 제안이 결정적이었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한다.


<유일한 한국기자>


아래는 광주 광산구 주최· 재단법인 고대문화재연구원 주관 '2017년 향교 서원 문화재활용사업 온고지신(溫故知新), 무양' 중 선비에게 '길을 묻다'의 두번째 강연록 '무양서원의 배향인물-최사전, 최부, 유희춘, 최윤덕, 나덕헌'(강연날짜 2017. 8. 17) 원고다. 



무양서원이 품은 사람들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1. 무양서원의 이례(異例)

 

이곳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자리한 무양서원(武陽書院)은 여로 모로 한국문화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1984229일에는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이곳은 그 태동이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이다. 그 태동 시점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이 1920년이고, 내 선친이 1921년생이시니, 무양서원은 두 신문은 물론이요, 내 선친보다 동생이다.


나아가 그 배향 주축 인물은 고려 인종(11221146) 때 어의(御醫)로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최사전이라는 점에서도 유별난 점이 있다. 서원은 제사 시설이면서 교육시설이라는 점에서 배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학덕(學德)이 뛰어나야 한다는 통념을 깨어버렸다.


태동 시점에서 서원이 조선시대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전통을 깨어버렸으며, 배향 인물에서도 파격을 보인다. 최사전을 중심으로 이 서원은 그의 후손 4, 곧 손암 최윤덕·금남 최부·문절공 유희춘·충열공 나덕헌을 함께 배향한다.


나아가 배향 인물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보면 철저히 혈연 중심이다. 뒤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배향 인물 5명 중 3명은 탐진최씨이며, 非崔 2명 또한 성은 달라도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그런 점에서 무양서원은 가묘(家廟). 이는 조선시대 전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난 20세기 이후에 새롭게 선보인 이례(異例)가 바로 무양서원이다. 이는 무양서원이 지닌 독특한 유산이다.

더불어 무양서원은 교육사업에 진출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했으니, 이런 사례로 조광조를 배향한 용인 심곡서원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교육 부문을 근대적인 교육제도로 접목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해도 좋다고 본다.

 

2. 묘지명으로 출현한 탐진최씨 중시조


무양서원을 세운 주체는 탐진최씨(耽津崔氏)라는 문중이다. 그 관향 탐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을 말한다. 이 문중 역사를 보면 다름 아닌 최사전을 중시조로 삼는다. 그는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라 하는데 이런 행적은 실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시대를 증언하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그의 선대 계보를 보충하는 이유는 그의 묘지명 때문이다. 이 묘지명은 그의 사후 이듬해인 1140, 인종 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세로 28.2cm, 가로 36.4cm 크기에 그의 행적을 해서체로 정리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재 소장 중이며, 출토지는 미상이다.


나는 몹시도 이 묘지명 출현과 그것이 알려지게 된 사정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묘지명을 통해 비로소 탐진최씨는 최사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보충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그가 탐진 출신임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묘지명을 데뷔케 한 초기 문헌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金石總覽()이 있으니, 그 서지사항을 조사해 보면 大正 8(1919) 경성에서 출판됐다. 이 자료집 336~338쪽에 걸쳐 이 묘지명이 소개됐다.


이 묘지명은 틀림없이 그 전 어느 시대에 총독부에서 인수했을 것이다. 출토지 미상이라 했지만 묘지명에서는 그의 장지(葬地)성남 장미산(城南薔薇山) 기슭 와곡(瓦谷)”이라 했으니, 성남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 개경의 남쪽을 말하며 장미산이란 아마도 이곳 장미가 유명한 데서 얻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와곡은 기와실인데, 틀림없이 이곳에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묘지명은 어느 때인가 개경 남쪽 어느 산기슭에서 도굴되어 떠돌았을 것이다.


2012년 국립광주박물관은 탐진최씨 기증유물 특별전을 개최했거니와, 탐진최씨 진사공파 최상규 씨가 기증한 유물을 중심으로 꾸민 이 특별전에는 당연히 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최사전 묘지명도 출연했다. 특별전에 즈음해 박물관이 정리한 묘지명 역사를 보면,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묘지명은 동경제국대학박물관(東京帝國大學博物館) 소장품이었다. 언제 이것이 일본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앞서 말한 대로 조선금석총람에 실림으로써 존재가 알려졌다.


이를 접한 탐진최씨 후손들은 열띤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동경제국대학 총장한테 반환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전남도청을 움직여 도지사 명의의 환수요청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마침내 묘지명은 192111, 국내로 반환된다.(주1) 이에 탐진최씨 후손들은 이를 보관하고자 1927년 무양서원을 건립한다.(주2) 이렇게 해서 무양서원에 보관하던 묘지명은 도난과 훼손 우려에 탐진최씨 대종회(무양서원)30년 넘게 기탁 보관 중이던 묘지명을 2009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주3) 이런 표현으로 보아 무양서원에서는 이미 일찍이 광주박물관에 묘지명을 기탁했던 것으로 보인다.(주4)


주1) 이런 문중 활동은 동아일보 1921년 2월 24일자와 같은 신문 같은 해 5월 3일자 보도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배재훈, <고문서와 고서를 통해 본 나주 향촌 사회의 동향-탐진최씨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 참조. 


주2)  다음 각주에서 인용하는 김주홍 글을 접하기 전 나는 이 대목에다가 다음과 같은 초고를 썼다. 

   “나는 묘지명 출현이 1927년 무양서원 태동 이전임을 주목한다. 내가 확실한 자신이나 증거는 없으나, 그의 묘지명 공개가 무양서원 태동과도 일정 부분 영향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중 관계자들께 내가 확인하고픈 내용이기도 하다.” 

   이를 새삼 밝히는 까닭은 내 추정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주3) 이상 묘지명 역사는 김주홍, <耽津 崔氏 소장 기증유물과 활용>,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를 참조했다. 


주4) 김주홍 앞 글. 


이 묘지명이 탐진최씨 문중 역사 정리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무양서원 건립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따라 문중 역사를 재정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중은 이 묘지명 기록을 근거로 祖諱哲·父諱靖·諱思全·諱弁烈 四世 五位 上代祖武陽書院 東便 境內을 모시고 每年() 36, 96全國宗人參席裡焚香하고 精誠으로 壇祭를 모시고 靈魂追慕하며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에 의하면 그는 인종 17(1139)에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그러니 이를 따른다면 그는 1067, 문종 21년 정미년(丁未年) 출생이다. 그의 나이를 추정할 만한 언급이 묘지명에도 보이거니와, 이를 고려사 열전이 말하는 그것과 뒤에서 대비해 보고자 한다.


아무튼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탐진(耽津) 사람으로 자가 휼세(恤世)이니, 세상을 구휼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자는 아무래도 그가 공신에 책봉되고 난 다음에 지은 이름인 듯하다.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의 조부는 상약직장(尙藥直長) ()이고, 아버지는 정()이라는데 모두 의술로써 벼슬했다 하니, 의술은 최사전 집안이 세습한 직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에서 그 또한 어려서 의술에 종사해 15세에 선종(宣宗)이 불러들이고는 이름까지 사전(思全)이라 지어주었다고 하니, 그 이전 이름은 알 수가 없다.


태의까지 진급한 그가 출세가도를 달린 결정적인 사건은 이자겸의 난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이자겸을 겁낸 인종(仁宗)은 그를 제거하려다 외려 역공을 받아 일대 위기에 몰렸다. 이런 위기에서 최사전은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외려 왕의 편이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이자겸을 평정하는 공로를 세운다. 그의 행적을 정리한 묘지명은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앞면) 공은 이름이 사전이고, 자는 휼세이며, 성은 최씨다. 선조는 탐진현 사람인데, 조부는 상약직장 철이고, 아버지는 장작감 정이니 모두 의술로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했다. 공은 성품이 꾸밈이 없고 충성스럽고 정의로웠다. 지혜와 꾀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술에 정통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해 선종이 궁궐로 불러 들여 의원은 마땅히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십전]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대가 바로 최고의 의원이 될 것이오고 하면서, 이에 이름을 사전이라고 하고 친히 글을 써서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는데, 항상 친밀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 외척이 권세를 함부로 하고 정령을 사사로이 내어 나라 안팎의 온 나라 백성들에게 악을 마음껏 베풀었으므로, 아낙네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싫어하고 서로 상심하여 해독을 참지 못했다. 임금이 그것을 근심하여 병오년 2월에 한두 명의 대신과 함께 의를 들어 해로운 것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적신이 먼저 알고 대궐을 침범하여 궁궐이 타버리게 되자, 임금이 거처할 곳이 없어서 사가로 피하여 머물게 되었다. 외가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그때 외척에 붙은 자들은 출세하여 공과 상을 받았으나, 임금을 호위했던 자는 도리어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조정에 가득 찬 공경사대부들이 모두 외척에게 붙었으나, 오직 공만은 그렇지 아니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어 끝까지 한결같은 절의를 지켰다. 이때 적의 무리들이 더욱 불어나고 권신이 발호하여 장차 불측한 흉계를 자행하려 하였다. 임금이 이 일을 알고 몸을 보전하고 해를 멀리하고자 하여 장차 외가에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공이 간언하기를 삼한은 삼한의 삼한이지, 폐하의 삼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왕 태조께서 부지런히 힘써서 국가를 이루셨으니, 청컨대 소홀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임금이 오랫동안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회복시킬 수 있다면, 생사를 같이 한 피붙이와 같을 것이오라고 했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뒤 저 무리의 우두머리를 회유할 비책을 아뢰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소탕되자, 임금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하고 사직과 종묘를 받들어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오라 하고, 특별히 조서를 내려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삼고,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가 되게 했다. 공은 공으로 일찍이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는데, 63세에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공을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불법을 공경하고 믿었으며, 재산을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기미년 36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화장하고) 곧 그 유골을 모아서 다음해 227일에 성 남쪽 장미산 기슭 와곡(瓦谷)에 장사지낸다. (공에 대한) 기록을 멀리까지 전하고자, 힘써 뒷면명을 짓는다.

 

공의 아름답고 뛰어난 덕이여,

꾸밈이 없이 바르고 지혜가 많았으며

어려서부터 업을 배우니 의가의 갈래로다.

십전의 오묘한 솜씨가 임금을 위해 넉넉하니

항상 침전에서 함께 하며 총애를 받았다.

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니

오랫동안 친신한 관계를 맺어 더욱 지키고 보호할 것을 다짐하였다.

개연하게 절개를 지키니,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어찌 바뀜이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여 임금의 오랜 원로가 되었다.

병오년에 이르러 외척이 권세를 오로지 하자

사람들이 많이 무리 지어 붙었으나 자신만은 홀로 그러하지 않았다.

2월의 재난에는 임금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5월에 변란에는 지모로써 온전함을 도모하였도다.

원악이 제거되고 무리의 의구심도 사라지니

나라는 더욱 편안하고 조종에게 산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던 까닭을 살펴보면 다만 공의 힘이 있었으니

충성스럽게 호위하는 근면함을 끝도 없이 보였네.

아름답도다, 이 한 사람이야말로 가상하게 큰 공을 세웠으니

집안에 은총을 내리고 벽 위에 그 형상을 그렸다.

사람은 죽었다고 하나 그 영예는 더욱 빛나니

그것을 멀리 전하고자 명을 지어 돌에 기록하노라.(주5

 

주5) 公諱思全字恤世姓崔氏其先耽津縣人也祖尙藥直長名」

哲父將作監名靖皆以醫術進仕於朝公性質直忠正智」

謀過人自少棈於其術年十有五歲宣宗時召入殿內謂」

曰醫者宜也十全爲上汝是上醫也因稱名曰思全御筆」

賜之自是歷仕數代常見親信時外戚擅權政令私出」

肆其惡於中外一國之民至於婦人小子擧皆疾首」

相非不忍毒上患之丙午春二月與一二大臣欲擧義」

除害而賊臣先認犯闕以至宮室焚蕩上失所依」

辟在私第受制於外家其時附外者立見功賞衛上者」

反被流殺時滿朝卿士盡皆附外公獨不然忠誠奉」

上終始一節時賊類益熾權臣跋扈將肆不測之謀上」

稍認欲以全身遠害將讓位於外家公諫曰三韓者」

三韓之三韓也非止陛下之三韓也先君太祖勤勞以致請」

勿忽之上哭泣良久乃曰汝若復之生死而肉骨也公稽首」

再拜密告以謀和誘彼黨之渠魁掃蕩凶類上謂」

曰復正三韓載安宗社皆公之力也特下詔旨以爲三韓」

後壁上功臣仍許子孫入仕公以功曾任守大尉門下侍郎」

平章事年六十三引年乞退不居成功敬信佛法」

不事産業至己未年三月六日以疾卒卽収其骨越翼年二」

月二十七日葬于城南薔薇山麓瓦谷欲遠其傳强

  (陰記)

爲之銘曰

公之懿德 質直多謀 自小受業」

醫家者流 十全之妙 爲上所優」

常於寢殿 泮渙爾游 歷朝侍衛」

終好不離 久結親信 益思護持」

介然守節 夷險何移 有事必告」

爲王耆龜 屬當丙午 外戚專權」

人多朋附 我獨不然 二月之災」

効死王前 五月之變 以智圖全」

元惡卽除 衆疑頓息 家國益安」

祖宗血食 顧此之由 惟公有力」

忠衛之勤 示之罔極 媚玆一人」

嘉乃丕績 錫寵于家 圖形於壁」

人之云亡 厥譽愈赫 欲遠其傳」

銘之在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篇(1984)]


3.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만나는 최사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최사전은 인종 시대에 그 이름이 빈출한다. 이외에도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한번 고대를 들이민다. 파한집 卷中에서 그는 醫官 崔思全이라 등장한다.


우선 고려사절요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睿宗 17(1122) 12월조에 의하면, 최사전은 이때 태의(太醫)였으니, 당대의 권신 이자겸과 한 편이 되어 그가 정적을 처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때 이자겸에 의해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가 경산부(京山府)로 추방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한안인(韓安仁)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문공미(文公美) 역시 귀양을 갔다. 한데 이 일에 최사전이 키를 쥐었다고 하니, 다음 기사가 그것을 증언한다.

 

한안인과 문공미 등은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예종(睿宗)의 등에 난 종기를 보고 작은 종기라 여기어 일찍 치료하지 않았다 해서 법으로 다스리자고 해서 왕이 도형(徒刑) 2년의 벌을 내리니 최사전 또한 몹시 (한안인과 문공미 등을) 원망했다. 최사전이 그 틈을 알고 묵은 원한을 풀고자, 간사한 인간인 채석(蔡碩)과 더불어 이자량·최홍재 등에게 참소하기를 한안인과 문공미가 당여(黨與)를 맺고 은밀히 모의하니, 장차 이영공(李令公, 李資謙)께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자겸이 매우 의심이 깊어져 마침내 그 죄를 꾸며내서[羅織] 왕에게 아뢰어, 한안인을 승주(昇州) 감물도(甘勿島)에 귀양 보냈다가 물에 빠뜨려 죽이는 한편 문공미·한주·이영·정극영은 외방(外方)으로 귀양 보내고 그 형제와 자식, 사위와 사돈과 동서[姻婭]들을 모두 연좌(緣坐)시켜 귀양 보냈으며, 족당(族黨)들 가운데 파직(罷職)된 사람 또한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섣불리 최사전이 이자겸 족당이라 안심하면 안 된다. 이자겸을 축출하는 데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심복 척춘경에게 쫓겨나 패가망신한다.


같은 인종 4(1126) 3월 기사다.

 

척준신(拓俊臣)을 수사공좌복야(守司空 左僕射), 김정분(金鼎芬)과 척순(拓純)을 모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전기상(田其上)과 최영(崔英)을 모두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추증하고 후하게 부의하였는데 이자겸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외가가 더욱 방자하여 박승중(朴昇中)과 허재(許載)로부터 아랫사람까지 아첨하며 의부하여 기탁하였는데 흉악하여 두려워할 만하였다. 왕이 비밀히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과 함께 상의하였다. 최사전이 이르기를 이자겸이 발호한 까닭은 오직 척준경을 믿기 때문입니다. 상께서 척준경을 얻게 된다면 곧 병권이 내속되어 이자겸은 다만 한 사람의 필부가 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의 심복으로 혼인으로 맺어지기까지 하였고 척준신 및 척순이 모두 관병에게 해를 당하여 이로 인해 그를 의심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점을 쳐 길조를 얻으니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 타이르며 이르기를, “태조와 열성의 신령이 하늘에서 계셔 화복을 두려워할 만한데 이자겸은 특히 궁액(宮掖)의 권세에 의지하였고 신의가 없어 호오(好惡)를 함께 할 수 없다. 공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나라를 섬기어 영세토록 쇠하지 않을 공로를 세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척준경은 그러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는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이 되어 있다. 명칭으로 보아 내의이면서 무기를 관장하는 관직도 같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최사전이 척춘경을 인종 편으로 끌어들이는 밀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인종은 같은 해 5월 척준경을 앞세워 이자겸을 처단한다.

 

척준경(拓俊京)이 이미 이자겸(李資謙)과 틈이 벌어져 있었으니 최사전(崔思全)이 다시 틈 타 그를 설득하였다. 척준경이 이에 계책을 결정하고, ()를 덧붙여 제 정성을 다하기를 원한다고 일렀다.

 

이렇게 해서 인종은 이자겸 일당을 일망타진한다. 공을 세웠으니 포상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난 진압 직후인 같은 해 6, 최사전은 일약 병부상서가 된다.

 

6. 척준경(拓俊京)을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으로 삼고 처 황씨(黃氏)를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으로 삼고 의복·금 그릇과 은 그릇·베와 비단·안마(鞍馬) 및 노비 10, 30결을 하사하였다. 이공수(李公壽)를 추충위사공신 판이부사(推忠衛社功臣 判吏部事)로 삼고 김향(金珦)을 위사공신 호부상서 지문하성사(衛社功臣 戶部尙書 知門下省事)로 삼고 최사전(崔思全)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의관이 일약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고려시대가 아무리 조선시대와는 풍토가 달랐다 해도, 이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왜 그는 병부상서였을까? 이는 아무래도 그의 전공이 의술만이 아니라 군기 전문가였을 데서 찾을 수 있을 법하다. 그는 그 직전 군기소감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당시 의술이 광물학과 밀접했던 데서 연결 고리를 찾고 싶다.

그는 나아가 같은 달에는 이부상서 지도성사(吏部尙書知都省事)로 임명된다. 이부였으니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도 틀어쥔 것이다. 지도성사라 했으니, 수도 경비 사령관 혹은 특별시장도 겸한다. 그에 대한 파격은 계속 이어져 인종 6(1128) 3월에는 추충위사공신 수사공 상서좌복야(推忠衛社功臣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된다. 마침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이다. 사공이라 했으니, 국토부 장관까지 겸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해 8월에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자리에 간다.


짐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임하자 외척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위세와 복덕을 부려 중상을 당한 자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50여 인을 유배하였으니, 조정이 모두 비어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붕당(朋黨)을 많이 만들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병오년(1126) 2월에 이르러 측근에서 시중들던 관원들과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여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는 이에 방자하고 악독한 짓을 하여 궁궐을 범하였고, 궁궐의 전각(殿閣), 부서(府署), 창고(倉庫)를 남김없이 싹 불태워 버렸으며, 짐이 연덕궁(延德宮)에 나가 임어하게 되자 모든 좌우의 시종(侍從)과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유배하여 흉악한 불꽃이 더욱 성하였고, 화변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최사전(崔思全)이 은밀히 척준경(拓俊京)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고 방책을 정하여 흉악한 역도들을 소탕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다시 평안히 하였으니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마땅히 유사에 명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에 쓰게 하라.”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해 1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니, 국정을 총괄한 셈이다. 같은 왕 9(1131) 2월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하니, 이런 그에게 임금은 큰 저택[甲第] 한 채를 하사했다. 고려시대 공무원 정년퇴직 연령은 70세다. 이로써 본다면 이때 최사전 역시 70세가 되는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묘지명에서는 그가 63세에 물러났다고 한다. 이런 그가 8년 뒤에 죽었으니, 묘지명을 존중한다면 향년은 71세다. 고려사 열전에서 말한 그의 향년은 73세다. 고려사 열전과 묘지명을 비교할 때, 향년은 아무래도 묘지명을 따라야 할 듯싶다. 이에 의하면 그의 생몰년은 1069~1139년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최사전은 국가 원로로 활동한다. 한데 이때 바로 최사전이 퇴직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같은 해 9월 그의 퇴직과 관련한 또 다른 언급이 절요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인종은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로 삼아 그를 치사케 한다. 이때가 완전 퇴직이었을 것이다. 보통 퇴직 전에 명예직을 주는 전통이 있으니 그것을 따랐다.


각종 영화를 누린 그는 인종 17(1139) 3월에 사망한다. 절요에는 그의 타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이 사망하였다. 최사전은 처음에는 의술로 진출하였으나 척준경(拓俊京)을 깨우쳐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여 그 공으로 갑자기 재사(宰司)에 올랐다. 만년에는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이 각각 금 술잔[金罍] 한 개씩을 주었는데, 그가 죽자 첩이 그 중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노하여 그녀를 매질하려 하자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그를 구휼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러한 물건이겠습니까. 제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어질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어필로 이름을 하사하니 효인(孝仁)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최사전은 처신을 상당히 잘한 듯하다.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고 하니,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 듯하다. 나아가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사망일자는 고려사를 통해 3월 갑신(甲申), 4일임을 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44이다. 죽음 이후 그에 대한 대접도 남달랐다. 고려사 권60 권제14 2 길례대사(吉禮大事) 태묘(太廟)조를 보면 체협(禘祫) 때 묘정(廟庭)에 배향한 공신 중에 최사전은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태묘란 종묘다. 이런 국가 최고 제사 시설 중 그는 인종실(仁宗室)에 배향되어 김부식(金富軾)과 이름을 나란히 올린다. 그는 반란군 진압 총사령관으로 서경에서 묘청을 토벌한 김부식과 동급이었다.


나아가 그런 까닭에 그의 후손도 대접을 잘 받았다. 같은 고려사 권75 권제29 選擧3 전주(銓注) 공신 자손에 대한 서용규정을 보면 충선왕(忠宣王)이 즉위 원년(1298)에 교서(敎書)를 내렸거니와, 최사전 관련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을묘년(1135) 묘청(妙淸)의 난 평정[西事]에 공을 세운 자 및 전사한 양반과 관원(官員)장수(將帥), 경술년(1130)에 창화군(昌化軍)으로 사직을 보위한 경순(景純이웅(李雄) 등의 친손자·외손자 중에서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 평장사(平章事) 최사전(崔思專)은 선대(先代)에 국난(國難)을 구하여 왕손(王孫)으로 하여금 길이 뻗어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친가·외가의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

 

그의 행적은 고려사 98 列傳 권제11 諸臣에 총정리가 이뤄졌으니, 다음과 같다.

 

최사전(崔思全)은 탐진(耽津) 사람이다. 처음에 내의(內醫)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승진하여 소부소감(少府少監)이 되었다. 예종(睿宗)이 등창[背疽]을 앓아 최사전을 불러 그것을 보였는데, 최사전은 작은 종기라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즉시 치료하지 않아 목숨을구하지 못하였다. 재상(宰相)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가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도형(徒刑) 2년에 그치게 하였다. 최사전이 그것에 원한을 품었다가 마침내 한안인과 문공미를 이자겸(李資謙)에게 모함하여 유배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한안인전(韓安仁傳)에 있다.


최사전은얼마 지나서 군기소감(軍器少監)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매우 휘둘렀다. 왕이 몰래 최사전(崔思全)과 더불어 의논하니 최사전이 말하기를, “이자겸이 발호(跋扈)한 것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척준경을 얻는다면 병권(兵權)이 폐하께 속하여 이자겸은 단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 이자겸)의 심복이 되었고 심지어 혼인을 맺었으며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아들 척순(拓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리할지 의심스럽다.”라 하고 이에 점을 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써 회유하여 말하기를,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神靈)이 하늘에 있으니 화복(禍福)이 가히 두렵습니다. 이자겸은 특히 궁 안의 세력에 의지할 뿐이고 신의가 없으니 좋거나 나쁜 일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히 전할 불후의 공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계책을 정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왕이 척준경의 공을 녹훈(錄勳)하고 아울러 최사전에게 상을 내려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발탁해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를 더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외척(外戚)이 권력을 전횡하여 위세를 부리거나 상을 주면서 중상모략(中傷謀略)한 바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살해하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50여 명을 유배 보내니 조정이 텅 비고 나라 안에 위세를 떨쳐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朋黨)이 많이 자라나 화()를 장차 예측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126) 2월이 되어 가까이 모시던 관료와 한 두 대신이 그 권력을 제거하도록 청하니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가 마침내 악독한 성미를 부려 대궐을 침범하니 궁전(宮殿)과 부고(府庫)를 불에 태워 남은 것이 없었다. 짐이 연덕궁(延德宮)으로 나가자 모든 좌우에 있는 시위(侍衛)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거나 혹은 유배 보내니 흉악한 불꽃이 더욱 타올라 재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경이 몰래 척준경을 회유하여 같은 마음으로 대책을 정해서 520일에 흉악한 역적을 제거하여 다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마땅히 담당 관청에 명령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 차례에 기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최사전은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叅知政事 判尙書刑部事)로 옮겼다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최사전이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자리에 오르니 치사(致仕)를 간청하였다. 이에 왕이허락하고 훌륭한 집을 한 채 하사하며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거센 바람에 강한 풀을 알게 되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고 하였다. 병오년(1136)에 재앙이 내부에서 일어나 종묘와 사직이 거의 위태로워졌고 어지러운 정세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짐의 좌우에 있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도 오히려 시퍼런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누가 사직을 지킬 힘을 낼 수 있었겠는가? 오직 경만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좋은 계책을 세웠다. 순역(順逆)을 밝히고 화복(禍福)을 타이르니 비록 척준경(拓俊京)처럼 사납고 교활하여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면서 종실을 높일 줄 알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하여 다시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경의 공이다. 경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나의 표창하는 마음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최사전에게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주국(開府儀同三司 守太尉 柱國)을 더하여 주었다.


최사전이 인종17(1139)에 죽으니 73세였다.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부의를 본래보다더 많이 주었으며 시호는 장경(莊景)이라 하고 인종(仁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사전의아들은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崔思全)이 일찍이 최변과 최열에게 금 술잔[金罍] 하나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죽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돌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으로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에게 드리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또 인자하다고 할만하다.”라 하고, 직접 글을 써서 최효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4. 최사전의 찬조 출연자들

 

이곳 무양서원이 품은 인물들은 최사전을 중심으로 손암 최윤덕과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그리고 충열공 나덕헌이 있다. 이들은 얼키설키 탐진최씨, 최사전과 연망(networking)을 형성한다. 우선 간략한 인연을 정리하면, 최윤덕과 최부는 다 탐진최씨이며, 유희춘은 어머니가 최부의 딸이며, 나덕헌은 할머니가 탐진최씨다.


최사전을 시조로 삼는 탐진최씨는 족보를 제외한 문헌들에서는 그의 두 아들만 보이고, 기타 후손은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앞서 본 대로 충선왕이 즉위 원년(1298)에 내린 교서를 통해 최사전은 친가와 외가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후손이 끊이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이 교서가 나온 시점이 최사전이 사망한 시점(1139)에서 160년이나 지났다는 점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는 없다. 나아가 그의 후손들은 충선왕 시대에 등용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고려 말~조선 초에 탐진최씨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


후대에 탐진최씨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로 추숭된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또한 그런 인물 중 한 명일지 모른다. 최윤덕은 그 종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물론이고,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발음은 같으나 한자 표기가 崔潤德인 저명한 무인이 세종시대에 맹활약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활동 연대도 다르다. 탐진최씨 문중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 가 살면서 술회시(述懷詩)를 남겼다 한다.(주6) 그의 손자 최호(崔灝)가 중종 때 계공랑에 이르렀고, 가선대부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증되었다고 하고, 호의 손자 최언웅(崔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주6) 이런 내용이 『광주지』에 있다는데, 나는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탐진최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은 최부(崔溥·1454~1504). 최부는 표해록(漂海錄)저자로 더욱 유명하거니와, 그와 표해록에 대해서는 이 강좌 첫 주자 배재훈 선생이 전문적으로 다루었으므로, 재방송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표해록이 너무나도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최부의 이름 또한 세계 기행문학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만들었지만, 정작 이 때문에 그 자신은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성종실록 19(1488) 614일 병오에 수록된 관련 기사다.

 

교리(校理)를 지낸 최부가 북경[京師]으로부터 돌아와서 청파역(靑坡驛)에 묵으니, 명하여 일기를 찬진(撰進)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이섬(李暹)이 표류했다가 생환하였으므로, 특별히 초자(超資)토록 명한 적이 있다. 최부는 쓸 만한 사람인데, 이제 또 만 리를 표박(漂泊)하다가 아무 탈 없이 생환했으니, 그를 서용(敍用)하는 명은 마땅히 상()을 마친 후에 할 것이고, 우선 쌀·콩 약간과 부물(賻物)을 내려 주도록 하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으면서 사신(史臣)이 논평한 말이 있다.

 

최부가 만약 이때 사례하고, 상을 당해 어미를 보고 난 후에 일기를 찬집하겠다고 했다면, 임금이 반드시 따르셨을 것이고, 사람들도 끼어들어 말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의 의논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최부는 표해 일기를 쓰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해도, 일단은 어머니 상을 치른 다음에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부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두고두고 최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요컨대 최부는 불효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최부의 등장에서 주목할 점은 적어도 명확한 흔적으로 확인하는 한, 그야말로 탐진최씨 가문에서 진정한 문사(文士)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사실이다. 탐진최씨가 최사전 시대에 비록 이름을 드날렸다 해도, 이후 탐진을 관향으로 삼는 후손 중에 이렇다 할 만한 족적을 남긴 문인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표해록의 저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종직의 제자로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홍문관 교리와 춘추관 편수관·예문관 응교와 같은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진정한 문사였다. 탐진최씨가 무양서원을 통해 최부를 배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나는 본다.


그의 여행기는 외손자 유희춘(柳希春·1513~1577)에 의해 간행을 본다. 자가 인중(仁仲), 호가 미암(眉巖), 본관 선산(善山)인 그는 해배되어 출사한 1567년 이후 1577514일까지 무려 11년간 자필로 쓴 방대한 미암일기(眉巖日記)가 불후(不朽)한 자리를 차지하거니와, 조선 중기 정치권의 거물이기도 했다.


해남 태생인 그는 김안국에게서 배우고 중종 32(1537)에 치른 생원시와 그 이듬해 별시(別試)에 급제하면서 긴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한 그는 탄탄대로를 달리다 명종 시대가 개막하면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벌인 권력 투쟁에 휘말려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곧이어 1547(명종 2), 양재역 벽사사건이 터지자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로서 당시 실권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서,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에게 찍혀 제주로 유배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유배생활은 19년 뒤인 1567(선조 원년)에야 풀린다. 다산 정약용보다 긴 유배였다. 유배 역시 범상치 않았으니, 처음에는 제주도로 갔지만, 그곳이 고향 해남과 가깝다 해서 함경도 종성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이후 그에겐 오직 초원의 빛만이 넘실거렸다. 선조의 극심한 총애를 등에 엎고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원, 예문관 제학, 형조·예조·공조·이조 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책 만 권을 소장한 장서가였으며, 사후에는 당 태종 시대를 빛낸 우세남에 견주어 걸어다니는 비서(行秘書)’라 칭해지기도 했다.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무수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탐진최씨와 형성하는 고리의 출발은 아버지 유계린(柳桂鄰)이다. 그는 탐진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그가 바로 최부의 딸이다. 미암이 외조부를 직접 언급한 글이 있으니, 미암집권제3에 실린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가 그것이다. 금남은 최부의 호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10월 계사에 썼다는 사실기에서 미암은 외조부의 경력을 약술하면서 행적과 성품을 칭송했으니, 이에는 표해록이 촉발한 논쟁들이 보인다.

 

정미년(1487, 성종18)9월에 추쇄(推刷)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윤 정월에 아버지 상사(喪事)를 듣고 황망히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태주(台州·절강성 현)에 이르렀다. 6월에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돌아와 왕명을 받들어 표해록을 찬술해 올렸다. 그 뒤로 연이어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임자년(1492, 성종23) 정월에 면상(免喪)함에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었다. 간관(諫官)들은 지난번 초상(初喪) 때에 어명을 받아 표해록을 찬한 것을 허물 삼아 논박하니 임금이 그 의론이 너무 심하다 하고, 선정전(宣政殿)에 왕림하시어 친히 만나보시고 표류의 본말을 물으니 공이 탑전(榻前)에서 자세히 말씀드렸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경은 사지(死地)를 돌아다니고, 또 중국에서도 옷 한 벌을 하사받았구나고 하셨다.

 

나아가 사실기는 최부가 죽임을 당한 이후 그의 글을 미암이 정리한 사연을 정리했다.

 

선생이 이미 혹독하게 죽음을 당하고, 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평생 저술이 흩어져 없어짐에 열 중 두셋도 남지 않았다. 희춘이 60년 뒤에 수습하여 겨우 소()()비명(碑銘) 일곱 수와 함께 동국통감론(東國通鑑論)120수를 얻어 책 두 권을 만들어 간행하여 장래에 전하니 그 기절(氣節)의 굳세고 특이함과 경륜의 규모와 의론의 정밀하고 간절함을 여기에서 살펴보면, 거의 그 한 실마리를 알 수가 있다.

 

사실기에는 최부가 해남으로 장가든 사연도 보인다.

 

해남현(海南縣)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어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없고, 예의 또한 황폐하거늘 선생이 이 읍으로 장가들어 여러 해를 오가며 정론(正論)으로 낡은 풍속을 변화시켰다. 또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두 명의 수재와 우리 선인(先人·유계린<柳桂隣>)을 얻어 균름(囷廩)을 기울여 가르치매 세 사람이 공부할 바로써 후학을 가르치니, 한 고을이 성대히 빛나 마침내 문헌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최부는 해남으로 장가든 일을 계기로 이곳을 들락거리면서 후학을 길렀으니, 개중 한 명이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이었다. 해남 지역 세 후학 중 최부는 유독 유계린을 눈여겨 본 듯, 그를 마침내 딸을 주어 사위로 맞아들인다. 미암집권제3에는 미암이 그의 아버지를 위해 쓴 묘갈인 성은 선생 묘갈 음기(城隱先生碣陰)’와 어머니를 위해 쓴 같은 묘갈인 증 정부인 최씨의 묘갈 음기(贈貞夫人崔氏碣陰)’가 나란히 수록되었거니와, 우선 아버지를 위한 묘갈은 다음과 같다.

 

성은(城隱) 선생은 휘가 계린(桂隣)이요, 자는 인지(隣之)이며, 성은 유씨로 선산(善山)의 계출(系出)이니, 순천(順天)에서 태어나 해남(海南)에서 거주하였다. 성품은 질박정직하고, 효성우애가 있어서 논밭과 장획(臧獲·노비)을 아우와 누이들에게 양보하였다.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상례(喪禮)를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함이 남들과 크게 달랐다. 총명함이 뛰어나고, 문리가 투철하였으며, 경문을 많이 보아 한번 읽으면 암송하여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글을 지음에 입론(立論)에 특장이 있었고, 언론과 풍지(風旨)가 항상 사사로움을 억제하고 정도를 따랐다. 나이 30세 때부터는 문을 닫고 은거하여 다만,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칠 뿐 외출이 드물어 고요히 오래 있은 다음에 사람들이 알았고, 행실이 결백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주색과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51세에 세상을 마쳤다.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 성춘(成春)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나 선생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희춘(希春)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으로 출입하다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성은을 입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자 마침내 (아버지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자(孤子)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어머니 묘갈은 다음과 같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최씨(崔氏)는 탐진(耽津) 사람이다. 해남 외가에서 살았으며, 사간원사간을 지내고 도승지에 증직한 금남(錦南) 최부(崔溥) 선생의 딸이다. 성품은 총명하고 엄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손에 놓지 않으니 금남이 특히나 사랑하였다. 평생 동안 누차 한 가정의 상례를 맡아 보았으며, 유씨 댁으로 시집을 가 성은(城隱) 선생, 휘 계린(桂隣)의 배필이 되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고, 남편과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였다. 성은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 곧바로 시어머니 설씨(薛氏)가 세상을 뜨자 부인은 몸소 순천으로 가서 고생스럽게 장례를 치렀다. 어린 아들과 딸을 가르침에 모두 예의로써 하였다. 나이 68세에 막내아들 희춘(希春)이 국사를 논하다가 연좌되어 멀리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 부인은 대의(大義)로써 서로 격려하고 이별의 슬픔을 짓지 않았다. 76세에 왜적의 난을 만나 창황히 담양으로 피난을 감에도 유씨의 신주는 안고 갔다. 나이 79세에 세상을 떴다. 7년 뒤에 희춘이 성은을 입어 중토(中土·충청도 은진)로 양이(量移)되었고, 오래 있지 않아 다시 총애를 받아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제수받음으로써 마침내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이로써 보면 미암이 탐진최씨 외가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탐진최씨 가묘 성격이 강한 무양서원이 그를 배향키로 한 일은 지극히 정당하다.


무양서원이 품은 마지막 인물이 나덕헌(羅德憲·1573~1640)이다. 그는 무신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헌지(憲之)이며 장암(壯巖)은 호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해 안현(鞍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이후 길주(吉州) 목사와 창성(昌城府使)부사의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다 청나라 조정이 황제를 참칭한 국서를 받았다고 탄핵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됐다. 이때 후금은 태종 시대였다.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 참석을 거부한 조선 사신단은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것이 본국에는 잘못 알려졌다. 이후 누명이 벗겨져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다. 이성(尼城)현감을 역임한 부친 나사침(羅士忱)이 유명하다.


그렇다면 나덕헌은 탐진최씨와 어떤 연결고리를 형성하는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방대한 유고집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나덕헌 행장이 수록됐다. 이재난고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 이재유고(頤齋遺藁)권지19 行狀이 저록한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水軍統禦使喬桐都護府使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羅公行狀이 바로 그것이니, 이에는 고조 나계조(羅繼祖), 증조 나일손(羅逸孫), 조부 나질(羅晊), 그리고 부친 나사침에 이르는 4대조 부부의 이름과 그 최종 경력을 간단히 정리돼 있다. 이에 의하면 조부 나질은 무과에 급제하고 通訓大夫 行 司憲府監祭을 역임했으며 죽은 뒤에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됐다. 그의 부인은 숙인(淑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탐진최씨로, 무오 명현(戊午名賢)으로 홍문관 부응교(弘文舘副應敎)를 역임하고 사후에 예조참판에 추증된 금남(錦南) ()의 딸이라 했다. 그가 바로 최부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로써 보면 나덕헌은 최부가 바로 외증조다. 미암에게 최부가 외조인 점과 비교하면 나덕헌은 미암에게 한 세대(항렬) 뒤가 된다. 나덕헌은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해서 무양서원에서 배향된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 전에 미암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떠오르는 허준을 언급하려 한다. 허준은 낙하산으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를 꽂은 이가 미암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준은 미암의 청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암일기를 보면 허준이 더러 모습을 들이민다. 1569, 유희춘은 허준에게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을 진찰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유희춘이 나사침 부자 진찰을 부탁한 고리는 역시 탐진최씨로 이어지는 혈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연건동거사 2018.06.16 08:55 신고

    침미다례=탐진

  2. 연건동거사 2018.06.16 09:34 신고

    같은 집안을 배향한 서원이 꽤 있지 않나요? 서원 철폐후에 이런 서원이 거의 사라져서 그렇게 보이는것 아닌가 싶은데요.. 제가 본 것만 그런 류의 집안 서원이 2-3개 되었던거 같은데요.

  3. 한량 taeshik.kim 2018.06.16 09:35 신고

    꽤 있더만요 조선후기에 특히 이 경향이 강하더만요

  4. 한량 taeshik.kim 2018.06.16 09:35 신고

    식민지시대에 더 강하지요

<2013년 10월 1일 연합뉴스 구 수송동 사옥을 찾은 아이유>


《나만 못본 구라파 유람기》 (10) 뼁끼칠 마을 부라노(3)

아이유가 바꾼 어촌마을


휴대폰 촬영분을 포함해 근자 과거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2013년 10월 1일 휴대폰에 내장된 사진 중에 느닷없이 아이유가 등장하는 몇 장을 발견했다. 보니 아이유가 증축 이전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 4층 당시 편집국을 찾았으니, 2018년 5월 현재 이 회사 부사장 이병로 선배가 당시 편집총국장 재직 시절이라, 둘이 인사하는 장면이 있고, 나 역시 그를 붙잡고 두 장 기념촬영을 했지만, 아쉽게도 두 장 모두 사진은 심하게 흔들렸다. 나아가 마누라와 아들놈 형은이 앞으로 각기 친필사인한 종이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무슨 계기로 인터뷰가 진행되는 자리에서 내가 부탁해 받은 사인이 아닌가 한다. 


아이유는 1993년 5월 16일생이라 하니, 이때가 만 20세였거니와, 그러고 보면 스무살을 앞두고 그 전해 5월에 발매한 그의 앨범 '스무살의 봄' 수록곡 중 하나인 '하루 끝'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베네치아 부라노(Burano)를 다녀온 직후였던 것이다. 이미 옛날 구닥다리 세대로 밀려난 내가 아이유라 해서 유별나게 아는 바가 있겠는가? 이구동성 젊은층에서 아이유 아이유하고, 더구나 그때 한창 뜨던 무렵이라 이런저런 관련 기사가 하도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유명한 친군가 갑다 하는 정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니와, 그럼에도 유명한 친구라 하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그가 느닷없이 편집국에 나타났기에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까지 받은 것이다. 


<2013. 10. 1 아이유와 함께...지나치게 비대한 머리 크기는 착시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질투 때문인지 초점이 나가게 찍었다. 부러 그런 것이라 나는 믿는다.>


여담이나, 저때까지만 해도 이미 주가 한창이었던 아이유가 새로운 앨범 발표라든가, 새로운 드라마 출연 등에 즈음해 연합뉴스를 포함한 각 언론사를 돌아댕기며 인터뷰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할 때였지만, 불과 5년이 흐른 지금,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공룡이 뛰어놀던 고생대 쥬라기 시대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 저런 급 연예인은 언론사에도 이젠 상전 중의 상전이 되어, 찾아가 한마디 줏어들어려고 혈안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젠 오라 해도 오지도 않을 뿐더러, 기자들이 읍소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17년 여름 8월, 나는 그 대표곡 하나 알지 못하나, 유명하다는 사실만은 잘 아는 아이유를 다시금 상봉했으니, 베네치아에서였다. 대략 19개월에 걸친 풍찬노숙 해직기자 시대 마감을 코앞에 두고 난생 처음 한달간의 해외자유 여행에 나서기로 하고 그 대상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를 고른 나는 그날 에게항공편으로 아데나이를 떠나 약 2시간만에 베네치아에 상륙했으니, 여름 휴가철이라, 이 수상도시 전체는 관광객으로 북새통이었고, 개중에 한국인이 적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자유여행이란 걸 첨으로 하다보니, 의외로 아무런 연이 없는 한국사람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거니와, 명색이 한때는 영문학도였던 내게 오직 셰익스피어 희곡 《베니스의 상인》 말고는 이렇다 할 인연이나 뚜렷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발을 디닌 베네치아에서 만난 몇몇 한국인에게서 얻어걸리는 정보가 전부였을 뿐이다.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기 전, 아데나이에서 조우한 어떤 젊은이가 하는 말을 들으니, 베네치아엔 육상교통수단이 하나도 없고 오직 배편뿐이니, 하루치 혹은 이틀치 혹은 사흘치 등등의 대중교통편 티켓을 끊으면, 그 기간에는 베네치아에서는 아무 데나 옮겨다닐 수 있다고 했으니, 그것을 기억하고는 공항에서 버스로 베네치아 섬에 내리자마자 그 인근 구멍가게에서 사흘치 티켓을 샀을 뿐이다. 


<부라노 가는 길>


배편으로, 혹은 오솔길 같은 골목길 옮겨가며 이래저래 한국 젊은이 몇몇을 마주쳤거니와,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너도나도 부라노(Burano)라는 델 갔다 왔거나 간다는 거였으니, 나로서는 아닌 밤중 홍두께 같은 부라노인가 대체 무슨 요물인가 알아봤더니 아이유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고, 그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데가 바로 부라노라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아이유라는 말도 첨엔 잘못 알아들어 첨엔 아유미로 들었다. 이렇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듯한 그런 데 내가 무엇하러 가느냐 했지만, 참말로 묘하게도 남들이 다 간다니 나도 아니갈 수 없는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남들이 부라노 가 봤냐고 물을 때 할 말은 있어야 했기에 말이다. 

 

사흘짜리 수상버스 이용권은 샀겠다, 그것으로써 내 맘대로 갈 수 있으니, 구글맵으로 부라노를 검색해 마침내 그곳을 찾아 나섰다.  


가서 보니 부라노는 두 가지가 놀라웠다. 첫째 온통 뺑끼칠 마을이었다. 작은 섬마을 주택가가 온통 알록달록 뺑끼칠을 해 놓았다. 간단히 말하면 이곳은 단청 마을이었다. 그렇다고 건축물에 무슨 큰 특징이 있는가 하면 전연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냥 평범하고 고즈넉했을 어촌 마을 집들이 이런 모양이었으니, 섬이라 그런지, 무슨 빨래줄이 그리 많고, 늘어놓는 빨래 역시 그리 많은지, 그것이 사뭇 풍광이라면 풍광이라 할 만 했다. 지중해 빛이야 워낙 유명하거니와, 이곳은 섬이니 오죽 빨래야 잘 마르겠는가? 그런 점에서 부라노는 빨래 마을이다.  


<뼁끼칠 어촌 부라노>


둘째, 부라노는 아이유 마을이었다. 그의 뮤직비디오 한 편이 이곳을 온통 한국 마을로 만들어 버렸으니, 눈대중으로 짐작건대 이곳 관광객 70~80%는 한국 관광객이었다. 연령대와 성별로 보면 젊은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이쁘다 이쁘다"는 감탄사가 주종이었으니, 그래, 아이유라는 환상과 알록달록 뺑끼칠이 빚어낸 조화옹이 아닌가 했다. 


이곳에서 뭔가 색다른 역사 흔적을 찾고자 한 내가 그런 데서 감흥을 받을 리 만무하고 괜한 시간만 뺐겼다고 투덜대며 이리저리 어슬렁하다 보니, 해변가로 갔더니, 몇몇 어부가 그물 손질에 한창이더라. 제법 마을 깊이 들어간 곳에 무슨 교회 같은 건물이 있고 탑 하나가 있는데, 보니, 피사의 탑처럼 기울어진 상태였다. 지반이 약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저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같은 기웅뚱 신세인데 피사의 탑은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이곳은 전연 그런 사실조차 외부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역시 문화유산도 운때를 잘 만나야 할 성 싶다. 


<부라노 읍내>


이래저래 하릴없이 돌다가 딱히 감흥도 없어 뙤약볕 갈증을 젤라또 하나로 해결하고는 서둘러 그곳을 떠나 그 인근 다른 섬으로 튀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렇게 나를 부라노로 안내한 아이유 문제의 뮤직 비디오와 노래는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근자 이 생각이 퍼뜩 나서 유투브로 '아이유'와 '부라노'라는 두 개 키워드로 검색하니, 비로소 비디오를 보고 노래를 들었다. 보니 내가 본 그 거리였다. 햐! 이런 인연이라니 하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여하튼 그 노래를 듣다 보니, 영 노래가 낯설어서인지 몰라도, 이 노래보단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백 배 낫고, 나아가 이 노래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서둘러 이미자 노래로 돌리고 말았다.  


<부라노 빠이빠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이곳 섬마을 사람들은 한국을 어찌 생각할까 몹시도 궁금해 진다. 베네치아는 들끓는 관광객으로 정작 현지 주민들은 삶이 파괴당한다고 아우성이며, 실제 많은 주민이 외부로 빠져나갔다. 아이유가 아니었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 섬이었을 부라노. 아이유 이후 이곳은 관광객이 미어터지는 마을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런 현상을 어찌 바라보고 있을까? 몰려드는 한국인이 고맙기만 할까? 아니면 귀찮기만 할까? 


《나만 못본 구라파 유람기》 (9) 뼁끼칠 마을 부라노(2)

미어터지는 베네치아를 들이칠 한국 관광객


근자 보도를 보니, 인천과 베네치아를 운항하는 아시아나 직항이 생긴 모양이다. 이에 의하면 지난 5월 1일을 시발로 주 3회, 곧 화·수·금 일정으로 베네치아에 신규 취항한다는 것이다. 이에 즈음해 이 항공사는 오는 8월 30일부터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도 주 4회 화·목·토·일 여객기를 보낸다고 한다. 이 두 노선에는 B772 항공기를 투입된다. 퍼스트클래스 좌석을 없애고 비즈니스·이코노미 투 클래스 체제로 전환한 기종이며, 비즈니스클래스는 180도로 펼 수 있는 침대형 좌석 '비즈니스 스마티움' 좌석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이탈리아를 오가는 직항은 로마와 밀라노 공항 두 군데 밖에 없었다니, 가뜩이나 이탈리아라고 하면, 로마를 빼고는 피렌체와 더불어 한국인 사이에서는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곳으로 꼽히는 베네치아는 더욱 한국인이 넘쳐나는 도시가 될 것이거니와, 직항 개통 이후 그런 면모를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직항 이전에도 이미 그랬던 곳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데 주시할 대목은 그만큼 베네치아 현지는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다는 베네치아 현지 소식이 줄기차게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30일 연합뉴스가 전한 '伊 베네치아 관광객 급증에 출입통제 검문소까지 등장'이라는 제하 기사를 보건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인 베네치아가 관광객 출입통제를 위해 검문소까지 설치했다고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전했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이보다 이틀 전인 28일 베네치아로 통하는 출입 지점 2곳에 회전문으로 된 검문소가 설치됐다고 한다. 베네치아를 찾는 인파가 관리가 어려운 수준으로 많아지면 현지 주민만 통과를 허용하고, 관광객은 베네치아 중심부인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어지는 다른 다리를 통해 가도록 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루이지 브루냐로 베네치아 시장은 "이는 그 역사적인 중심가를 폐쇄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혼잡을 줄이기 위해 일부 경로를 차단, 밀려드는 인파를 관리하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타 도시가 관광객을 끌어들이지 못해 환장인 판국에 왜 베네치아는 통제에 나섰는가. 계속 보도를 따라가면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임대료 상승 등으로 정작 이곳 주민들은 일상에 심대한 위협을 받는 중이다. 매년 2천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과 함께 거대 기업이 투자하는 호텔과 레스토랑 등이 몰려들면서 정작 전통 상점과 공방은 급속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에 베네치아에는 '관광객은 꺼져라'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이 도심 곳곳에 배포되는가 하면 관광객에 반대하는 시위도 이어진다고 하거니와 내가 갔을 적에 이런 전단이나 시위는 볼 수 없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관광이 얼마나 이 도시엔 고통이 되는지, 지난 세기 17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곳 인구는 근자엔 5만3천 명으로 급감한 상태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하는 비슷한 소식은 조선일보 지면을 타기도 했다. 지난 5월 10일자 이 신문 '베네치아에 관광객 검문소, 왜?'라는 파리특파원발 보도를 보면 인구 5만명으로 급감한 이 도시에 연 관광객은 2000만명이라 현지 주민들은 물가와 임대료 올라 못산다 아우성이라 하거니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스페인 팔마 등도 같은 고민에 처한 도시들이 관광객 유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을 인용한 이 보도를 보면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물가 상승과 도시 혼잡이 발생해 삶의 질이 떨어져 그런 주민들 사이에서는 '투어리즘 포비아(관광 공포증)'가 번진다는 것이다.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에 따르면, 마요르카섬 최대 도시 팔마는 7월부터 마요르카 주민이 아닌 사람에게는 아파트 임대를 금지하는 제도를 시행할 계획이거니와, 이에 의하면 관광객이 단기로 아파트를 빌리는 방식으로는 머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기는 집주인은 최대 40만유로(약 5억1000만원)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몰려드는 관광객이 아파트 임대료를 천정부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엘파이스에 따르면 "2015년부터 2년 사이 팔마의 아파트 임대료는 40% 올라 주민들이 생활고를 겪는 중이다. 지중해 휴양지인 마요르카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000만명에 달한다. 그 전해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스페인 주요 도시에서는 '반(反)관광객'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관광객 통제를 위한 베네치아 결정에 같은 이태리 나폴리 인근 휴양지인 카프리섬 역시 성수기에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의도 3배 크기인 카프리섬(10.4㎞)엔 연간 2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찾는다. 암스테르담은 지난 4월 이래 밤 11시 이후 홍등가 관광을 금지하기도 했다. 성(性) 산업 종사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라며 시 당국에 민원을 제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나아가 수려한 경치로 인기를 끄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은 2016년부터 하루 방문객을 4000명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런 베네치아에 인천과 연결하는 직항로가 개설되었으니, 그곳은 관광객으로 더욱 미어터지지 않을까 잠시 상념에 빠져본다. 특히 아이유가 흔들어 놓은 부라노(Burano) 섬은 이후 내가 현장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섬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아마 부라노 현지에서는 '아이유 포비아'가 번지지 않을까? 도대체 아이유가 무엇이기에?  

   


  1. 연건동거사 2018.05.23 01:03 신고

    중국관광객도 많이 안받아 본것들이 엄살은... ㅉㅉ

    쫌만 기다리면 중국관광객들 몰려갈텐데, 그때 어떻게 할려구 벌써 시위..

<측면. 왼편은 19세기 증축이고, 가운데는 13세기, 오른쪽은 11세기부터 세웠다>


*** 이 포스팅은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그리스 어떤 대학에 연수 중인 박영록 선생이 April 18 at 10:52pm, 2018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거니와, 우리로서는 비교적 생소한 새로운 문화유산을 조금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실용적으로 소개했기에, 본인 의사 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무단으로 옮겨와 전재한다. 뭐 설마 표절로 날 고소하진 못하겠지? 문구는 데스킹(desking) 차원에서 내가 아주 약간 손봤음을 밝혀둔다. 괄호 안 파란색 '인용자 주'는 내 평이다. 


사실 이번 부활절 휴일에 다녀온 다른 세계유산들은 거의 관광지화 되어서 언젠가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 것도 같은데, 여기(그리스를 말함-인용자 주) 있는 김에, 가보기 어려운 세계유산들에도 한번 다녀와 보기로 결심했다. 나중 되면 다녀왔다는 것도 까먹을 것 같아서 메모 차원에서 기록한다. 


불가리아의 세계유산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


보야나 교회의 완전성은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 1917년 교회 주위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현대 교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발췌: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


'여기 현대 교통수단으로 찾아 가려면 어려울껄?' 이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적은 거였나 보다ㅋㅋ 시내 한복판에서 거리는 10킬로 정도밖에 안 되지만 불가리아인 친구가 조언했듯, 찾아가기 정말 복잡했다. 대중교통으로 갔으면 화 날 뻔 했다. 


*팁 : 보야나교회와 소피아국립박물관을 묶어서 하루를 잡되 차량 필수. 보야나교회에서의 체류시간은 길게 소요되지 않지만 길 찾기가 힘들다.


<naos of the church, altar of the church. from 11th century>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외곽에 있는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은 3개 동 건물로 이루어진다. 동쪽 교회는 10세기 무렵에 세웠으며, 13세기 초 세바스토크라토 칼로얀(Sebastocrator Kaloyan)이 교회 옆에 두 번째 건물을 짓도록 지시함으로써 2층짜리로 증축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19세기 초에 지었다. 


두 번째 교회에 있는 프레스코 화(畵)는 1259년에 완성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중세 회화로 평가된다. 이 유적은 동유럽 중세 미술을 완벽하게 보존한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11, 13, 15~17세기, 19세기 내부 벽화는 다른 어떤 시기의 벽화보다 높은 수준을 증명하려는 듯 몇 층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13세기에 그린 벽화가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다. (발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말이 발췌지 우라까이다-인용자 주)


내부는 제한된 인원(10명 내외) 단위로, 10분씩 관람할 수 있다. 더 있고 싶으면 다음 텀에 다시 들어와도 된다. 예약하라고 하진 않으니 최후의만찬 보다는 (관람환경이) 나은 건가 생각도 잠깐 했다. 굳이 여기까지 누가 어떻게 찾아오지? 싶었는데 나같은 사람이 있는지 은근히 관람객이 있었다.(왕릉보다 많았다..흥ㅠㅠ-필자는 현재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사무소 소속이다. 조선왕릉 관람객이 적어 열받았나 보다. 불가리아에 뒤진다니 하는 자괴감이 짙게 뭍어난다-인용자 주)


<external narthex, 19th century>


*팁 : 매표소를 지나면 안내소 없다. 안내원도 찾을 수 없다. 세 번째 사진 가운데서 보이는 검은 문이 입구다. 열어도 안 열린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저 문을 여러 번 당기면서 쿵쾅 대면 안에서 직원이 나와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얘기해준다. 즉, 바깥 의자에 앉아서 사람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한 텀 끝나고 직원이 문열고 나온다. 


내부는 당연히(?) 사진촬영 불가다. 학교 다닐 때 모 교수님께서 남들 다 찍는 사진 말고 못 찍게 하는 걸 찍어야 나중에 써먹는다..고 하셨지만, 난 소심하니까 하라는대로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안에 들어가면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바깥과 통하는 문을 닫고 안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열어준다. 그럼 띠로리~아 입장료값 하는군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렴한 감상평) 내부에는 공기순환장치가 작동 중이고, 몸에 맨 모든 가방은 모아 두어야 하며, 일종의 중문을 두어 벽화 보존에 신경을 쓴다. 벽화에 유리벽 같은 게 없어서 질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팁 : 불가리아는 전 지역에서 학생증스럽게 생긴 모든 ID로 학생할인을 해준다. 국제학생증을 요구하는 부다페스트나 자꾸 나이 물어보는 비엔나나 학생증 해석하라고 하는 베를린과 다르다!!! 그리스어만 써 있는 내 학생증으로 모든 곳에서 할인 가능. 아마 한국어도 가능할 듯?


불가리아에서는 내 얼굴보다 더 큰(내 기억을 살리면 필자는 얼굴이 큰 편이다, 그러니 다음에 말하는 피짜는 엄청 크다-인용자 주) 피자가 약 1유로(불가리아 화폐 단위는 레브)다. 근데 이렇게나 물가가 싼 불가리아에서도 여기 입장료는 거의 5유로에 육박한다....(학생은 1유로 정도) 우리나라 입장료 너무 싼거 아닌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려면 심심하니까 담배도 한 대 필수 있게 재떨이도 잘 갖춰져 있다. 불가리아는 흡연에 관대하다. 사실 그리스는 더 관대하다....


<유적 안내판>


총 감상평 : (이건 100퍼센트 내 주관적 견해) 전문지식이 얕은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일종의 '국가차원에서 검증한, 밀어 줄만한 관광지 목록'의 일환으로 세계유산목록을 참고할 때가 많다. 등재 시점을 보면서 혼자 미리 판단을 해 보기도 하는데, 보야나교회는 1979년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1. 전 세계적으로 너무 너무 유명하거나 

2. 관광지로서 흔히 말하는 '볼만한' 관광객들이 좋아할 경관 요소가 적고 학술적 가치(만?) 가 높은 유적지 성격일 가능성이 있었음. 


역시나 예상대로 찾아가기는 어려웠고 주변에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었으며 북적이지 않았고 내부는 기대 이상의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저 멀리 천장 어딘가에 붙어있는 프레스코화들만 보다가, 여기에선 1미리 앞까지 손가락을 뻗어도 보고 숨 참고 얼굴도 들이대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사진은 발로 찍은 것 같지만 손으로 찍었음.(실제 사진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발로 눌러도 저보단 나으리라-인용자 주

너무 대충 찍었네. 두 번 가기는 힘들텐데..(다시 가도 별로 달라지진 않을 듯하다. 교육 불가 판정이다-인용자 주




한반도 중심부를 관통하는 두 젖줄 한강과 임진강이 각기 다른 굴곡한 삶을 살다 마침내 합류하고는 손잡고 서해로 흘러가는 두물머리 남안에 위치하는 파주 오두산 전망대 중에서도 서울에서 파주로 뻗은 자유로 방면을 쳐다본 장면이다. 저 뒤쪽에서 흘러내린 임진강이 왼편 사진 뒤로 감돌아 한강 물길과 마주친다. 자유로가 달리는 화면 오른편이 남한이요, 그 반대편 강 너머가 북한이다. 불과 그저께 풍광이나, 그새 또 달라져, 아마 저 사쿠라는 비듬 같은 꽃잎을 흩날리고 있으리라. 



현무암 협곡과 단애를 뒤지며 연천을 헤집고 다니다가 자유로를 따라 서울로 귀환하면서 문득 오두산 전망대에 서고 싶어, 차를 몰았다. 확실히 해는 길어져, 다섯시 무렵인데도 저 서쪽 하늘 중앙쯤에 해가 걸터앉았다. 왼편 허리춤에서 감싸고 나온 한강이 오른편 화면 뒤로 숨은 임진강물과 합류해 이제는 강이 아니라 거대한 육지 호수를 연상케 하는 굵은 물줄기 되어 서해로 흘러간다. 


이 전망대에는 두어번 정상에 섰거니와, 그때마다 그 화면 중앙 왼편을 튀어나온 곶 끝터머리 저 나무 한 그루인지 두 그루가 무척이나 궁금했으니, 이젠 그 정체를 따지지 않고, 저것이 주는 묘한 풍광만 잔서리로 남았다. 왼편이 남한이요, 오른편 강너머가 북한일 터. 요즘 이곳은 남북관계 진정에 따라 풍광이 달라져, 그것이 한껏 대결로 치달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체제를 선전하는 확성기 소리 요란하다. 



아마 국방부나 혹은 그 비스무리한 기관에서 설치했을 법한 망원경 서다섯 대가 강 너머 북한을 조준한다. 이곳이 군사 접경지대임을 보여주고자 부러 저 망원경을 포착한 장면을 담아봤다. 확실히 해는 서쪽으로 진다는 금언은 오늘도 어김이 없어, 저편이 분명 강화도 인근 서해임을 직감하거니와, 그러다 문득 이곳에서 일몰을 지켜본 적 없음을 한탄하고는 오늘은 기필코 그 장면을 담아보리라 작심한다. 


강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혹은 산바람인지 분간이 쉽지 않은 바람이 조금은 거세진다. 솜털 같은 바람이 서서히 찬기를 뿜는다. 얇은 잠바 죽지 하나 걸쳤을 뿐인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툭진 잠바 하나 여분으로 장만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한시간 혹은 한시간 반가량이 지나 6시30분이 되니 전망대가 문을 닫는다. 마지막 관람객들이 나오고, 이곳에서 일하는 민간인들도 하나둘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는 사라지더니, 돌아보니 나와 내가 몰고다니는 똥차만 홀로 남았더라. 저 밑 강변을 따라 늘어선 군 감시초소가 눈에 더 잘 들어오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쫓아내지는 않으려나? 다행히 인기척이 없다. 기다리자. 낙조를. 



확실히 낙조다. 렌즈가 빨아들인 사진빨이 불그레죽죽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해가 지는 저쪽은 북녘일 듯. 셔터 속도가 연신 빨라져, 심장병 환자 심장 띄듯 한다. 



300미리 렌즈로 바꿔 끼웠다. 부러 저 나무를 한쪽 귀퉁이에 담은 장면을 포착해 본다. 따로 당겨 찍지는 않았으되, 확실히 저 나무는 두 그루이며, 군 초소다. 


낙조는 지구 아니 태양계 아니 우주가 탄생한 이래 그랬을 것이듯이 언제나 장관을 선물한다. 그것이 장관인 이유는 하루 중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건 대낮과 같다면 저 장면을 보고 어느 누가 찬탄하며, 저 장면을 보고 어느 누가 날 버리고 도망친 30년 전 여인을 떠올리며, 저 장면을 보고는 어느 누가 지구를 불질러 버리고 싶겠으며, 저 장면을 보고는 나도 월경하고 싶다고 외치겠는가?



마침내 헐떡이던 소 혓바닥 모양, 해가 반토막 난다. 어둠이 눈에 띄게 깔리기 시작한다. 북녘이 맞긴 하나보다. 게스츠레한 능선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 저 산하엔 나무 흔적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으니 말이다. 



저쪽엔 접근이 되려나? 그냥 궁금증을 물리고 말았지만, 언젠간 저 곳에 서 보고 싶다. 



발길을 돌리고 나서려는데 문득 아쉬어 뒤를 쳐다봤다. 조만식이 손짓한다. 잘 가그레이, 또 보제이. 나도 화답했다. 또 봅시다 영감. 한데 어찌하여 영감이 예 섰소? 아직 못다한 건준의 꿈이 있소? 영감이 꿈꾸며 '준비'한 '건국'은 무엇이었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소? 그나저나 영감 요새 남한에 나타나면 환영은 썩 받지는 못할 듯 하오.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이라 하니 말이오. 캬캬캬. 


영감한테 손짓하고는 돌아서 차를 몰아 전망대를 내려오는데, 중턱 산길에 턱하니 바리케이트가 쳐졌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젊은 군인 두 마리가 초소에서 지킨다. 나도 황당하고 지도 황당한 모양이다. 넌 뭐냐? 아마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아마도 저짝에서는 이 놈 뭐하다 지금에서야 끄질러 내려 오느냐 하는 표정이다. 그 옛날 같으면 나는 붙잡혀 가서 취조 당하곤 카메라 압수당했을지도 모른다. 


차를 몰아 나오면서 내내 이젠 갈 때가 되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저 강너머 땅을 헤집고 나아가 평안도며 함경도로, 그리고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은 마운령 황초령에 서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젊은날 성욕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마 이 생활 마지막 현장은 북녘 산하가 되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美란 무엇인가? 

죽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랑하는 이 누구인가?

그 美를 보고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다. 


고창읍성이다. 벚꽃 만발하는 봄날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낮엔 황홀해서 아름답고, 밤엔 떠난 사람이 아려서 아픔을 더하는 곳이다. 



무미건조한 설명으로 돌아간다. 발길로 차버려도 좋으나 그래도 한 번쯤 눈길 한 번 주고는 읽어놔도 손해볼 건 없으니깐 말이다. 


고창읍성(高敞邑城)

사적 제145호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倭侵)에 대비하고자 당국에서 전라 도민을 동원해 만든 돌성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든 이 성은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됐다. 둘레 1,684m, 성벽 높이 4~6m, 성벽이 두른 내부 면적은 165,858㎡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 세 곳에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옹성(甕城) 3개소와 치성(雉城) 6개소, 그리고 성밖 해자(垓字)를 비롯해 성을 방비하는 전략 요충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조선시대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등 22개 동에 이르는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지만, 공북루를 제외하고 병화(兵火) 등으로 소진(燒盡)된 것을 1976년 이래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을 세 번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 



Gochangeupseong

Historic Site No. 145


Also known as "Moyang Fortress", Gochang-eup Fortress was built in 1453,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Danjong of the Joseon Kingdom, by the people of Jeolla Province to defend against Japanese aggressions. Together with Ibamsan Fortress in the Naju military district, it was meant to serve as an advance base to defend the fertile Honam region. 


Designated as Historic Site No. 145 on April 1, 1965, the fortress measures 1,684 meters in circumference, four to six meters in height, and 165,597 square meters in area. Its tactical features include north, east, and west gates; three half moon-shaped protrusions, six parapets, and surrounding moats. Its 22 structures included a commander's headquarters and guesthouse, with two ponds and four fountains located inside. 


Most of these were consumed by fire during the war, the exceptions being the multi-storied Gongbuk-ru and the Gilyong cheon, or "fountain of good luck". The site as it exists today is the result of a restoration undertaken in 1976. 


Legend holds that women who walk around the fortress three times with a stone atop their head during a leap month will enjoy long life and be admitted to paradise after their death. It is a custom still observed by many women to thi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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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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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mb of King Mu (who reigned from 600 to 641), the 30th monarch of the Baekje Kingdom (18 BC~660) has opened its door in 100 years. Archaeologists have unearthed the tomb in Iksan, Jeollabukdo Province. The excavations revealed a flat rectangular stone chamber with a short corridor inside the mound 20 meters in diameter and 5 meters high. The chamber built of granite slabs, and hexagonal stones as corbels to support the ceiling is 3.78 meters long (from north to south), 1.76 meters wide (from east to west), 2.25 meters high (from bottom to ceiling).  At the center is a flat rectangular granite coffin standing on top of which pieces of a wooden coffin were found in excavations in 1917. The short corridor leading into the chamber was blocked with stone slabs. The size and style of the chamber are similar to those from tombs in Neungsan-ri in Buyeo, the capital of the late Baekje Kingdom. 


Artifacts including the decomposed wooden coffins and pieces of pottery were retrieved and are now at The National Museum of Jeonju.  


2기 묘가 한 구역에 있어 ’쌍릉‘이라 일컫는 익산 쌍릉(사적 제97호) 중 상대적으로 봉분 규모가 커서 대왕릉이라 일컫는 무덤을 최근 발굴조사한 결과 입구가 중앙에 있으며, 단면육각형의 현실(玄室)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기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이 재확인됐다. 조사 결과 무덤방은 대형 화강석을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무덤방인 현실은 길이 378cm, 너비 176cm, 높이 225cm로, 부여 능산리 왕릉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동하총 무덤방(길이 327cm, 너비 152cm, 높이 195cm)보다도 더 컸다.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사비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는 처음으로 판축(版築) 기법을 사용하여 봉분을 조성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현실 내부 중앙에 있는 화강암 재질 관대(棺臺) 맨 위쪽(북쪽)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다. 1917년 일제강점기 조사시, 발견된 피장자 인골을 수습해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항온항습실로 옮겨 보관 중이며, 향후 과학적 조사를 위한 학제간 융합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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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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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바라본 목탑지> 


아래는 2018년 4월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고즈넉한 농촌 평야마을 한가운데 위치하는 제석사지(帝釋寺址)라는 백제시대 절터 현지 유적 안내판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글과 영문 안내판은 거의 손대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아울러 뒤에는 제석사지와 관련한 현대 역사를 추적할 만한 관련 언론 보도를 시대순으로 나열한다. 제석사지 흐름을 간취하는 데 도움이 없지는 않으리라.  


익산 제석사지

益山帝釋寺址

Jeseoksa Temple Site in lksan

사적 제 405호

Historic Site No. 405


이 터는 백제 시대의 사찰인 제석사가 있던 곳이다. 제석사지는 무왕대의 익산 천도설을 밝혀 줄 수 있는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절터이다. 판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따르면, 제석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불타버렸으나,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넣었던 칠함(漆函)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짓고 안치하였다 한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터·금당터·강당터·회랑(回廊) 등이 확인되었으며,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이곳은 몇 개 남지 않은 백제 절터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This is the site where Jeseoksa Temple stood during the Baekje Kingdom (18 B,C.~ 660).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Jeseoksa was found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 (600 641) but was destroyed by fire started by lightning in 639. Relics of Buddha and a Vajra Sutra casket kept inside the pagoda remained, and they were enshrined when the temple was rebuilt.


Excavation of this site found sites for a wooden pagoda, a main temple hall, a lecture hall, and narrow corridors. Also discovered was a roof tile with an inscription bearing the temple name, Jeseoksa, This is one of only few temple sites from Baekje, making this site extremely important for research. 


<제석사지 건물 배치 양상>


목탑터 / 木塔址 / Wooden Pagoda Site 


목탑터는 중문터에서 약 18.5m 떨어져 있고, 중문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37m이다. 목탑터의 중심에는 길이 182cm, 너비 175cm, 두께 76cm인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채로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길이 60cm, 너비 26cm, 깊이 16cm인 사리공이 뚫려 있다. 목탑은 하층 기단깨비의 길이가 21.2m인 이중 기단구조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안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1.2m인 불단佛壇으로 추정되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목탑의 기초基礎는 약 3m 높이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촉颾해 만들어져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 통로가 네모서리에서 확인된다. 


The wooden pagoda site is located 18.5m away from the edge of the middle gate site and 3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agoda site has a capital pillar stone at the center, split into two pieces measuring 182cm long, 175cm wide, 76cm deep. 


Moreover, there is a sarira chamber carved at the center of the pillar stone. The wooden pagoda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on double-layered square platforms, with the outer layer being approximately 21.2m long. The inner layer is approximately 11.2m long and was likely used as a Buddhist altar. 


Located approximately 3m above the lowest platform, the base of the wooden pagoda is intricately designed and constructed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Each side of the four platforms has stairs in the middle, and work paths used to reinforce the underground foundations have been found at the four corners. 


<목탑터 기단>


<목탑터 심초석, 남에서 북으로>


금당터 / 金堂址 / Prayer Hall Site


금당터는 목탑터에서 약 17m 떨어져 있고, 목탑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1m이다. 기단은 길이 약 30m, 너비 약 21m의 상층 기단과 길이 약 32m, 너비 약 23m의 하층 기단으로 이루어진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다. 기초는 적갈색 사질 점토와 황색 마사토로 정교하게 판축하여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약 5m, 너비가 약 3m인 계단 시설 흔적이 앞·뒷면 중앙 2군데에 있다. 제석사지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고,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1 : 0.74로 부여 금강사지 중창(重創) 금당과 비슷하다. 금당터에서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인동 자엽의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여러 점 출토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17m away from the edge of the Pagoda Site and 41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consists of two layers, with the upper one being approximately 30m long and 21m wide and the lower one approximately 32m long and 23m wide. The foundation was intricately built out of reddish brown sandy clay and decomposed granite soil,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Remnants of stairs, approximately 5m long and 3m wide, have been found in the middle of the front and rear of the site. This prayer hall site at the Jeseoksa Temple Site is among the larger ones from the Baekje Period, and its horizontal to vertical ratio of 1:0.74 is similar to that of the reconstructed prayer hall at the Geumgangsa Temple Site in Buyeo. Several concave roof-end tiles with honeysuckle scroll designs and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s, typical artifacts from the Baekje Period, have been found intact, raising interest in the site.


<목탑터 심초석 너머가 금당터>


강당터 / 講堂址 / Lecture Hall Site


강당터는 금당터에서 약 26m 떨어져 있고, 금당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7m다. 기단은 길이 약 52m, 너비 약 18m의 단층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 3군데서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 중앙 계단의 규모는 길이 약 150cm, 너비 88cm다. 강당터는 규모나 구조에서 익산 미륵사지 강당터와 비슷하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26m away from the edge of the Prayer Hall Site and 4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is presumed to have been a single-level one, approximately 52m long and 18m wide. In addition, stairs have been found at the front, back, and left center of the site, and it is likely that they also existed at the right center. The three sets of stairs discovered are approximately 150cm long and 88cm wide. In terms of its scope and structure, the lecture hall site resembles the one at the Mireuksa Temple Site in lksan.


<강당터, 동에서 서쪽으로>


출토 석재 / 出土石材 / Stone Artifacts 


제석사지 발굴조사 및 유적 정비과정에서 수습된 석재들이다. 초석․지대석․갑석 등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는데, 제석사 건물에 쓰인 부재로 추정된다. 


Stone Artifacts Unearthed from Jeseoksa Temple Site, lksan

These stone remains were discovered during the archaeological surveys and the improvement works at Jeseoksa Temple Site. 

A wide variety of artifacts, such as column foundations, foundation stones, and cover stones were identified. In all likelihood, they were among the materials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buildings at Jeseoksa Temple. 


<출토 석재>


제석사지 관련 언론보도 모음 


1994.01.05 18:18:00 

益山군 王宮면서 백제 무왕창건 절터 확인


    (裡里=聯合) 全北 益山군 王宮면 王宮리 宮坪마을(일명 궁들마을)에서 중국  문헌에 ‘百濟 武王이 천도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절터(帝釋寺址)가 확인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원광대 부설 馬韓․百濟문화연구소(소장 金三龍총장)는 5일 오후 지도위원회의를 열고 추정 금당지와 추정 강당지등 유구와 百濟시대의 忍冬唐草文 암막새 등 유물을 공개했다.

    중국의 觀世音應驗記에는 “百濟 武王이 枳慕蜜地(한국 지명으로 金馬渚)로 천도한 뒤 精寺(帝釋寺)를 창건했으나 서기 639년에 낙뢰에 맞아 소실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최근 인근 王宮寺址에서 시굴된 건물터(왕궁터로 추정)와 관련, 왕궁면 일대가 백제시대의 또 다른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金三龍 총장은 “王宮면이 시사하는 지명이나 중국의 문헌, 현재까지 진행된 益山군 王宮면과 金馬면 일대의 고적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때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王宮면에 百濟의 도읍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면서 “특히 이번에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지도위원회의에 참석한 金正基 박사(한림대 교수. 전 문화재연구소장)는 “추정 금당지의 기단구조가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축조된 점으로 미루어 이 절이 왕과 직결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해 정밀한 조사와 함께 잘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정금당지는 규모(추정)가 동서 30m 남북 23.2m이며 彌勒寺址와 같은 이중의 기단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추정강당지의 규모(추정)는 동서 50m 남북 18.4m이다.(끝)

(조순래 기자 작성)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5.13 09:26:00 

국가사적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전북 익산시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최근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내년부터 이 일대 2만3천여㎡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시는 이를 위해 사적지 안에서의 모든 건축행위와 광물의 채취나 반출,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지난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부분 발굴에 그친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이 절터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목탑지(木塔址)와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등의 기단이 발굴돼 이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됐었다.(끝)


1998.11.18 09:41:54 

익산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 유보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 전북 익산시는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이 道와의 입장차이로 산업단지 지정이 불투명해져 이를 유보키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시는 왕궁면 일대에 1천1백억원을 들여 오는 2002년까지 60만6천여평 규모의 제3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지난 5월 전북도에 산업단지 지정신청을 했으나도가 이를 미루고 있다.

     시는 현재 가동 중인 1, 2산업단지가 포화상태여서 지역발전을 위해 자동차부품, 전자, 통신, 기계산업 등 첨단산업을 유치할 제3산업단지 조성이 절실하다며 지난 96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뒤 개발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그러나 도는 도내 미분양 공단 부지가 5곳에 2백51만평에 이르고 있는데도 각 시․군에서 경쟁적으로 신규 공단을 조성하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익산의 제3산업단지 조성 예정지는 백제 말 궁성일 가능성이 높은 왕궁평성과 왕실기원 사찰인 제석사지 등 국가 유적지와 가까워 이를 훼손할 우려가 높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에 따라 시는 문화재 보호대책과 함께 경기가 호전돼 공단부지 분양전망이 밝아질 때까지 공단조성 사업을 미루기로 했다.(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출토 소조상>


2003.05.16 12:07:13 

익산서 흙으로 구운 불상 수십점 발굴


    (익산=연합뉴스) 전성옥 기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가마터에서 삼국시대에 흙으로 만든 불상 수십점이 발굴됐다. 

    원광대 박물관은 16일 "익산시의 의뢰로 지난 3월부터 시 향토유적 2호인 왕궁리 가마터를 시굴조사하던 중 가마터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흙으로 구운 불상의 두상 등 수십 점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흙으로 구운 다수의 불상과 이를 굽던 가마터를 발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백제 때 소조불상(흙을 구워 만든 불상)과 보살상, 천부상, 악귀 및  동물상 등이 연화문 수막새, 기와 등과 함께 수습돼 삼국시대 불교사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토된 불상은 완전한 형태는 아니나 길이 20-30㎝의 두상과 몸통, 좌대 등이며 백제시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연화문 수막새 60여 점도 함께 수습됐다.

    이중 두상의 우측 절반만 남아 있는 천부상은 고온으로 구워 회청색을 띠고 두툼한 볼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전형적인 백제시대 불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원광대 김선기 책임연구관은 "이 가마터는 백제시대 왕궁터인 왕궁리  유적지와 왕실 기원사찰이었던 제석사지의 기와와 불상을 굽던 곳으로 추정된다"며 "삼국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는 만큼 보존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사진있음)

    sungok@yonhapnews.co.kr 

(끝)

 


2007.08.29 15:22:21 

익산 제석사지 본격 발굴


    (익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제석사지(사적 제405호)를 발굴한다고 29일 밝혔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A.D.600∼641년)이 수도를 금마로 옮기기 위해 세운 왕실 절로 추정되는 제석사지는 얼마 남지 않은 백제사찰지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발굴작업은 오는 30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진행된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1993년 시굴조사를 실시, 명문와와 암막새를 비롯한 7세기 당시의 기와를 다량 발굴했다.

    부여연구소는 "사찰 중심부(9천100㎡)인 목탑지-금당지-강당지에 걸쳐 발굴하며, 사찰의 규모 및 존재양상, 각 유구들의 축조방법을 밝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ichong@yna.co.kr

(끝)  

 

<목탑터 기단판축>


2008.07.09 17:36:59 

백제 3중기단 목탑지 첫 확인

부여문화재연구소 제석사지 발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목탑이 들어설 기단을 3중으로 다져 만든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 제석사지(사적 405호)에 대한 올해 발굴조사 결과 정교한 판축(版築)으로 만든 삼중기단 목탑지와 백제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화려한 인동당초문 암막새를 출토한 금당지 등을 확인했다고 9일 말했다. 

    제석사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옛 문헌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 사비(부여)에서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는 일환으로 세웠다가 639년에 벼락이 쳐서 불당(佛堂)과 회랑(回廊) 등이 불탔다고 한다. 

    조사 결과 두께 약 3m에 3중인 목탑 기단은 차곡차곡 흙을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깥쪽 기단은 한 변 길이 21.2m에 이중 구조였으며 그 안에 목탑 중심부가 위치하는 또 다른 기단이 드러난 것이다. 

    목탑은 우선 지면을 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약 70cm 두께로 갈색 사질 점토를 채워 넣은 다음, 다시 그 위에는 약 250cm 두께로 또 하나의 판축 기단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소는 이와 같은 3중 기단 갖춤 목탑은 동아시아 3국 불교 건축에서는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전형적인 백제 연화문 수막새 및 다른 기와 편과 함께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다량으로 확인됐다. 

    조사단은 이 암막새들이 "같이 출토되는 유물 및 그 출토 층위를 볼 때 백제시대 유물로 판단된다"면서 "중앙에는 도식화한 귀면문(소위 도깨비 문양)을 조각했으며 그 좌우에는 유려한 인동당초 문양이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제석사지 곳곳에서는 건물 기단 기초를 다지기 위한 달구질 흔적이 확인됐으며 그 북동쪽 폐기장에서는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2009.10.29 09:50:59 

익산 왕궁리 백제 궁궐 후원 발견

곡수로도 드러나, 제석사지 가람 배치 추가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7세기 백제 궁궐의 후원(後苑)과 수로가 발견됐다.

    1989년 이후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을 발굴조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올해 그 북편 구릉지역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궁성 내부 후원과 물길(곡수로<曲水路>), 보도(步道) 시설, 석축시설 및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고 29일 말했다.

    물길은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크게 두 줄기가 확인됐으며, 그 중간에는 물을 저장해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네모난 집수시설(集水施設)이 드러났다.

    곡수로는 너비 80~140㎝이고 단면은 바닥이 편평한 U자형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총 길이는 228m다.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庭園)에서 보이는 구불구불한 사행수로(蛇行水路)와 유사한 형태지만, 이들과는 달리 왕궁리 유적 수로는 바닥이나 측벽에 자갈돌이나 판석 등의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나아가 수로 내부에서는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주변에서 백제시대 기와 등이 소량 출토됐다.

    부여연구소 김낙중 학예연구관은 "신라시대 포석정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에도 물을 대기 위한 수로는 있지만 이렇게 구릉 전체를 이용한 큰 규모의 수로는 없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곡수로가 궁성 내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역할뿐만 아니라 정원과 어우러진 조경 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 동진(東晉)시대부터 유행했고, 일본 헤이죠큐(平城宮) 동원정원(東院庭園) 등에서 채택된 구불구불한 물길이 후원 공간의 중심적인 요소로 확인돼 동아시아 고대 원림의 조영방식에 대한 비교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연구소는 평가했다.

    연구소는 또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1.4㎞ 떨어진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 대한 2차 조사를 통해 가람 배치가 기본적으로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사찰의 그것과 동일하며,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확인된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이외에 회랑지, 중문지, 동ㆍ서 건물지가 확인됐다. 

    목탑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42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된 동회랑지는 폭 7.8m로, 폭 6.8m인 미륵사지 회랑 백제 사찰의 회랑 가운데 가장 넓다. 

    또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편에서 목탑과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한 방형 건물의 기초부(동서 21.5m, 남북 20.8m)가 새롭게 확인됨으로써 제석사의 조성 및 변천양상을 밝히는 데 새로운 단서를 확인하게 됐다.

    건물 기초부는 현재의 지표 아래로 130㎝ 두께가 남아 있으며, 특히 목탑 기단 기초에서 보이는 달구질 흔적(건물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흔적)보다 훨씬 치밀하고 정교하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이 방형 건물은 목탑과 그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목탑과 유사한 성격의 건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kimyg@yna.co.kr

(끝)

 

<악귀상 기와>

 

2016.07.12 09:45:36 

익산 제석사 폐기유적서 백제 악귀상 출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소조상 등도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익산 제석사(帝釋寺) 폐기유적에서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악귀상(惡鬼像)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부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커다란 눈과 들창코, 입 사이로 보이는 치아가 인상적인 악귀상을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 부근에 세운 절로, 중국에서 간행된 책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정관 13년(639) 벼락으로 인해 불당, 칠층탑, 회랑, 승방이 불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폐기유적은 불에 탄 기와와 벽체, 불상 조각을 버린 장소다. 규모는 남북 32.4m, 동서 28m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악귀상 외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살짝 다문 천부상(天部像)과 나한상(羅漢像) 혹은 불교 승려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흙으로 구워 만든 불상) 2점도 나왔다. 이들 소조상은 강인한 느낌을 주는 눈매와 두툼한 코, 둥그스름한 정수리가 특징이다.

    이와 함께 회칠이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는 벽체 조각과 흙벽돌 등 다양한 건축 부재가 출토됐다.

    연구소는 제석사지 소조상을 부여 정림사지, 중국 뤄양 영녕사(永寧寺), 일본 가와하라데라(川原寺)에서 나온 출토품과 비교하면 동아시아의 불교 문화교류 양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석사지 폐기유적에서는 2003∼2004년 시굴조사를 통해 소조상과 연꽃무늬 수막새, 벽체 등이 발견됐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세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기존에도 악귀상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 나온 유물은 사람보다 동물 느낌이 난다는 점에서 다르고, 눈에 유리가 남아 있는 것도 독특하다"며 "폐기유적 아래에 경작지 유적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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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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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수남> 


사진작가 김수남(金秀南·1949~2006.02.04) 


1949년 제주 출생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연세춘추(학교신문)사 입사, 인영회(사진반) 입회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 입사, 결혼

1977년 장남(김상훈) 출생

1979년 차남(김재훈) 출생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 퇴원 후 죽음을 의식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

1981년 『공간』지에 「전통의 현장」 연재 시작(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내림굿, 제주 배연신굿, 함경도 망묵굿 등)

1982년 「한국의 굿」 사진 제작, 이때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 제의(전 20권)

1983년 『한국의 굿』 출간(『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 및 기념 사진전 개최

1985년 동아일보 사직, 동아일보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

1985년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주도 촬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 출간

1986년 『한국의 굿』으로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출간(평민사, 『풍물굿』 1권, 『호미씻이』 2권, 『장승제』 3권), 『옹진 배연신굿』 출간

1987년 『강릉 단오굿』(열화당) 출간,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한길사) 출간

1988년 『韓國心の美』 출간(일본 도쿄), 『한국의 탈․탈춤』(행림출판) 출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일본 촬영(日本の山と海祭り) 시작

1989년 『강사리 범굿』, 『제주도 신굿』, 『양주 경사굿 소놀이굿』, 『통영 오귀새남굿』, 『서울 당굿』 출간, 『빛깔있는 책들, 팔도굿』(대원사) 출간

1989년 중국 촬영 시작

1990년 중국에서 간첩으로 잡혀 조사, 재판에서 벌금형으로 모든 필름 몰수 후 섣달 그믐날밤 풀려남

1990년 『조상제례』, 『전통상례』(대원사) 출간, 연세대학교 강사 「사진촬영과 감상」 강의(1990~1997)

1992년 『안동하회마을』(대원사) 출간

1993년 『황해도 거제도 별신굿』, 『위도 띠배굿』, 『지노귀굿』, 『서울 진오귀굿』(열화당 출간), 「한국 현대사진, 관점․중재」 그룹전, 사진집 『濟州道』 3권 출간(國書刊行會, 일본 도쿄)

1995년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수상 기념 사진전 「한국의 무속」 개최, 김수남 사진전 「아시아의 하늘과 땅」 개최 및 사진집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출간

1996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으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1997년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출간, 「삶의 경계」 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1998년 「Schamaninnen in Korea」전 참가(함부르크 박물관, 독일)

1999년 김수남 사진전 「살아 있는 신화 ASIA」 개최, 『살아 있는 신화 ASIA』(연세대 박물관) 출간,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 대학원 강사(1999~2000)

2002년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역임,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여가와 삶』 사진부문 「사진찍기와 자기표현 또는 자기발언」 저술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수술

2004년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출간, 『한국의 굿』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될 ‘한국의 책 100’에 선정, 2004 아시아 전토예술 페스티벌 「신의 얼굴」 전시 개최

2005년 「빛과 소리의 아시아」 전시회 개최(인사아트센터), 「Schamaninnen in Korea」 개인전 개최(베를린 Werkstatt Der Kulturen), 사진집 『굿-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출간, 영문판 사진집 『Gut-Shamanic Ritual Ceremony』(열화당) 출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전시 개최 및 사진집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출간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 김수남기념사업회 창립, 옥관문화훈장 추서

2007년 「김수남 사진굿 魂」 전시 개최(이사아트센터), 『김수남 사진굿 魂』(현암사 출간), 사진집 『김수남』(김수남기념사업회) 출간 


<김수남이 포착한 제주영등굿 한 장면>


2006.02.06 09:20:48 

굿 사진 전문작가 김수남씨 별세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한국의 굿을 찍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4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현지 부족의 신년 축제를 사진으로 담다가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7세.

1949년 제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지질학과, 동아일보 사진부를 거쳐 70년대 말부터 현장을 찾아 발품을 팔며 굿 사진을 찍어왔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전 20권에 걸쳐 펴낸 방대한 사진집 '한국의 굿'은 고인의 굿 사진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2005년에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압축돼 출간됐다. 

고인은 1995년 일본에서 권위있는 국제사진상인 히가시카와(東川)상을 받았고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에서 초대전을 여는 등 한국의 민속기록들을 해외에도 널리 소개해 왔다.

마침 경기도 양평의 사진 갤러리 와(瓦)에서 ‘한국의 굿: 만신들 1978-1997’을 주제로 12일까지 열리고 있는 사진전은 고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유작전이 됐다.

내림굿을 받고 무아지경에서 고개를 젖힌 채 춤을 추는 무속인, 망자의 한을 풀기 위해 매듭을 풀고 있는 씻김굿, 시퍼런 물결이 일렁이는 제주 바다에서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배를 띄운 어민 등 서글프면서도 매혹적인 순간들을 포착한 고인의 땀방울이 묻어나는 기록물들이다.

빈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8일 오전 9시. 유족은 부인 이희영 여사와 상훈(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재훈(교통물류연구원 연구원) 두 아들이 있다.

☎02-6225-9631, 02-2072-2018. 

(끝)



<김수남이 포착한 인도 라다크>


2015.01.30 10:59:41 

<민속 현장과 함께한 사진작가 김수남>

국립민속박물관·네이버 문화재단, 사진 17만컷 정리·활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사진작가 일생을 민속 현장 담기에 투신한 사람이 있다. 

고 김수남(1949~2006). 제주 태생으로 연세대 입학해 사진반인 ‘인영회’에 들어가 활동하다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에 입사했다.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해 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을 사진에 담았다. 

이후 그는 한국 민속, 특히 굿 현장을 담는 일에 몰두한다. 도서출판 열화당에서는 전 20권 기획인 ‘한국의 굿’ 출판을 제의하게 되며 1983년 그 일환으로 ‘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이 나온다. 

1985년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같은 회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김수남은 그 해에 고향 제주도에 정착하며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을 내놓는다. 

이후 그의 촬영 무대는 외국으로 옮겨간다. 1989년 중국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 중국 땅에서 간첩으로 몰려 조사를 받고 재판 끝에 벌금형을 받고는 촬영한 모든 필름을 몰수당하고 그해 섣달 그믐날 밤에 풀려나기도 한다.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는 위출혈로 수술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한다. 

국경을 넘어 세계 민속현장을 카메라에 포착하고자 한 그의 열망은 17만 컷에 달하는 사진으로 남았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과 네이버 문화재단(대표 오승환)이 김수남이 남긴 사진 자료 정리와 활용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두 기관은 지난 26일 박물관 대회의실에서 고 김수남 사진작가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아들 김상훈 씨와 ‘김수남 사진작가 사진의 정리 및 활용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말 유족은 김수남이 촬영한 국내외 민속 사진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필름 및 인화지 형태다. 

협약에 따라 기증 처리 절차와 전문적인 내용 조사는 박물관이 맡아 진행한다. 이미 네이버 문화재단에서는 이들 사진에 대한 고해상도 스캔을 완료하고 그 일부 설명도 작성한 상태다. 현재 네이버 미술작품 웹페이지에서 사진 중 일부는 감상 가능하다. 

내년은 고인이 타계한 지 10주기가 된다. 

이에 민속박물관은 사진 특별전을 개최하며, 네이버 문화재단에서는 온라인 사진 특별전을 연다. 

나아가 향후 두 기관은 이들 사진 자료를 공익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협력하기로 했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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