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나만 못본 구라파 유람기》 (9) 뼁끼칠 마을 부라노(2)

미어터지는 베네치아를 들이칠 한국 관광객


근자 보도를 보니, 인천과 베네치아를 운항하는 아시아나 직항이 생긴 모양이다. 이에 의하면 지난 5월 1일을 시발로 주 3회, 곧 화·수·금 일정으로 베네치아에 신규 취항한다는 것이다. 이에 즈음해 이 항공사는 오는 8월 30일부터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도 주 4회 화·목·토·일 여객기를 보낸다고 한다. 이 두 노선에는 B772 항공기를 투입된다. 퍼스트클래스 좌석을 없애고 비즈니스·이코노미 투 클래스 체제로 전환한 기종이며, 비즈니스클래스는 180도로 펼 수 있는 침대형 좌석 '비즈니스 스마티움' 좌석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이탈리아를 오가는 직항은 로마와 밀라노 공항 두 군데 밖에 없었다니, 가뜩이나 이탈리아라고 하면, 로마를 빼고는 피렌체와 더불어 한국인 사이에서는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곳으로 꼽히는 베네치아는 더욱 한국인이 넘쳐나는 도시가 될 것이거니와, 직항 개통 이후 그런 면모를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직항 이전에도 이미 그랬던 곳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데 주시할 대목은 그만큼 베네치아 현지는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다는 베네치아 현지 소식이 줄기차게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30일 연합뉴스가 전한 '伊 베네치아 관광객 급증에 출입통제 검문소까지 등장'이라는 제하 기사를 보건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인 베네치아가 관광객 출입통제를 위해 검문소까지 설치했다고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전했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이보다 이틀 전인 28일 베네치아로 통하는 출입 지점 2곳에 회전문으로 된 검문소가 설치됐다고 한다. 베네치아를 찾는 인파가 관리가 어려운 수준으로 많아지면 현지 주민만 통과를 허용하고, 관광객은 베네치아 중심부인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어지는 다른 다리를 통해 가도록 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루이지 브루냐로 베네치아 시장은 "이는 그 역사적인 중심가를 폐쇄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혼잡을 줄이기 위해 일부 경로를 차단, 밀려드는 인파를 관리하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타 도시가 관광객을 끌어들이지 못해 환장인 판국에 왜 베네치아는 통제에 나섰는가. 계속 보도를 따라가면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임대료 상승 등으로 정작 이곳 주민들은 일상에 심대한 위협을 받는 중이다. 매년 2천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과 함께 거대 기업이 투자하는 호텔과 레스토랑 등이 몰려들면서 정작 전통 상점과 공방은 급속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에 베네치아에는 '관광객은 꺼져라'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이 도심 곳곳에 배포되는가 하면 관광객에 반대하는 시위도 이어진다고 하거니와 내가 갔을 적에 이런 전단이나 시위는 볼 수 없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관광이 얼마나 이 도시엔 고통이 되는지, 지난 세기 17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곳 인구는 근자엔 5만3천 명으로 급감한 상태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하는 비슷한 소식은 조선일보 지면을 타기도 했다. 지난 5월 10일자 이 신문 '베네치아에 관광객 검문소, 왜?'라는 파리특파원발 보도를 보면 인구 5만명으로 급감한 이 도시에 연 관광객은 2000만명이라 현지 주민들은 물가와 임대료 올라 못산다 아우성이라 하거니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스페인 팔마 등도 같은 고민에 처한 도시들이 관광객 유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을 인용한 이 보도를 보면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물가 상승과 도시 혼잡이 발생해 삶의 질이 떨어져 그런 주민들 사이에서는 '투어리즘 포비아(관광 공포증)'가 번진다는 것이다.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에 따르면, 마요르카섬 최대 도시 팔마는 7월부터 마요르카 주민이 아닌 사람에게는 아파트 임대를 금지하는 제도를 시행할 계획이거니와, 이에 의하면 관광객이 단기로 아파트를 빌리는 방식으로는 머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기는 집주인은 최대 40만유로(약 5억1000만원)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몰려드는 관광객이 아파트 임대료를 천정부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엘파이스에 따르면 "2015년부터 2년 사이 팔마의 아파트 임대료는 40% 올라 주민들이 생활고를 겪는 중이다. 지중해 휴양지인 마요르카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000만명에 달한다. 그 전해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스페인 주요 도시에서는 '반(反)관광객'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관광객 통제를 위한 베네치아 결정에 같은 이태리 나폴리 인근 휴양지인 카프리섬 역시 성수기에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의도 3배 크기인 카프리섬(10.4㎞)엔 연간 2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찾는다. 암스테르담은 지난 4월 이래 밤 11시 이후 홍등가 관광을 금지하기도 했다. 성(性) 산업 종사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라며 시 당국에 민원을 제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나아가 수려한 경치로 인기를 끄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은 2016년부터 하루 방문객을 4000명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런 베네치아에 인천과 연결하는 직항로가 개설되었으니, 그곳은 관광객으로 더욱 미어터지지 않을까 잠시 상념에 빠져본다. 특히 아이유가 흔들어 놓은 부라노(Burano) 섬은 이후 내가 현장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섬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아마 부라노 현지에서는 '아이유 포비아'가 번지지 않을까? 도대체 아이유가 무엇이기에?  

   


  1. 연건동거사 2018.05.23 01:03 신고

    중국관광객도 많이 안받아 본것들이 엄살은... ㅉㅉ

    쫌만 기다리면 중국관광객들 몰려갈텐데, 그때 어떻게 할려구 벌써 시위..

<측면. 왼편은 19세기 증축이고, 가운데는 13세기, 오른쪽은 11세기부터 세웠다>


*** 이 포스팅은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그리스 어떤 대학에 연수 중인 박영록 선생이 April 18 at 10:52pm, 2018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거니와, 우리로서는 비교적 생소한 새로운 문화유산을 조금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실용적으로 소개했기에, 본인 의사 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무단으로 옮겨와 전재한다. 뭐 설마 표절로 날 고소하진 못하겠지? 문구는 데스킹(desking) 차원에서 내가 아주 약간 손봤음을 밝혀둔다. 괄호 안 파란색 '인용자 주'는 내 평이다. 


사실 이번 부활절 휴일에 다녀온 다른 세계유산들은 거의 관광지화 되어서 언젠가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 것도 같은데, 여기(그리스를 말함-인용자 주) 있는 김에, 가보기 어려운 세계유산들에도 한번 다녀와 보기로 결심했다. 나중 되면 다녀왔다는 것도 까먹을 것 같아서 메모 차원에서 기록한다. 


불가리아의 세계유산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


보야나 교회의 완전성은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 1917년 교회 주위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현대 교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발췌: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


'여기 현대 교통수단으로 찾아 가려면 어려울껄?' 이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적은 거였나 보다ㅋㅋ 시내 한복판에서 거리는 10킬로 정도밖에 안 되지만 불가리아인 친구가 조언했듯, 찾아가기 정말 복잡했다. 대중교통으로 갔으면 화 날 뻔 했다. 


*팁 : 보야나교회와 소피아국립박물관을 묶어서 하루를 잡되 차량 필수. 보야나교회에서의 체류시간은 길게 소요되지 않지만 길 찾기가 힘들다.


<naos of the church, altar of the church. from 11th century>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외곽에 있는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은 3개 동 건물로 이루어진다. 동쪽 교회는 10세기 무렵에 세웠으며, 13세기 초 세바스토크라토 칼로얀(Sebastocrator Kaloyan)이 교회 옆에 두 번째 건물을 짓도록 지시함으로써 2층짜리로 증축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19세기 초에 지었다. 


두 번째 교회에 있는 프레스코 화(畵)는 1259년에 완성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중세 회화로 평가된다. 이 유적은 동유럽 중세 미술을 완벽하게 보존한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11, 13, 15~17세기, 19세기 내부 벽화는 다른 어떤 시기의 벽화보다 높은 수준을 증명하려는 듯 몇 층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13세기에 그린 벽화가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다. (발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말이 발췌지 우라까이다-인용자 주)


내부는 제한된 인원(10명 내외) 단위로, 10분씩 관람할 수 있다. 더 있고 싶으면 다음 텀에 다시 들어와도 된다. 예약하라고 하진 않으니 최후의만찬 보다는 (관람환경이) 나은 건가 생각도 잠깐 했다. 굳이 여기까지 누가 어떻게 찾아오지? 싶었는데 나같은 사람이 있는지 은근히 관람객이 있었다.(왕릉보다 많았다..흥ㅠㅠ-필자는 현재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사무소 소속이다. 조선왕릉 관람객이 적어 열받았나 보다. 불가리아에 뒤진다니 하는 자괴감이 짙게 뭍어난다-인용자 주)


<external narthex, 19th century>


*팁 : 매표소를 지나면 안내소 없다. 안내원도 찾을 수 없다. 세 번째 사진 가운데서 보이는 검은 문이 입구다. 열어도 안 열린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저 문을 여러 번 당기면서 쿵쾅 대면 안에서 직원이 나와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얘기해준다. 즉, 바깥 의자에 앉아서 사람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한 텀 끝나고 직원이 문열고 나온다. 


내부는 당연히(?) 사진촬영 불가다. 학교 다닐 때 모 교수님께서 남들 다 찍는 사진 말고 못 찍게 하는 걸 찍어야 나중에 써먹는다..고 하셨지만, 난 소심하니까 하라는대로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안에 들어가면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바깥과 통하는 문을 닫고 안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열어준다. 그럼 띠로리~아 입장료값 하는군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렴한 감상평) 내부에는 공기순환장치가 작동 중이고, 몸에 맨 모든 가방은 모아 두어야 하며, 일종의 중문을 두어 벽화 보존에 신경을 쓴다. 벽화에 유리벽 같은 게 없어서 질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팁 : 불가리아는 전 지역에서 학생증스럽게 생긴 모든 ID로 학생할인을 해준다. 국제학생증을 요구하는 부다페스트나 자꾸 나이 물어보는 비엔나나 학생증 해석하라고 하는 베를린과 다르다!!! 그리스어만 써 있는 내 학생증으로 모든 곳에서 할인 가능. 아마 한국어도 가능할 듯?


불가리아에서는 내 얼굴보다 더 큰(내 기억을 살리면 필자는 얼굴이 큰 편이다, 그러니 다음에 말하는 피짜는 엄청 크다-인용자 주) 피자가 약 1유로(불가리아 화폐 단위는 레브)다. 근데 이렇게나 물가가 싼 불가리아에서도 여기 입장료는 거의 5유로에 육박한다....(학생은 1유로 정도) 우리나라 입장료 너무 싼거 아닌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려면 심심하니까 담배도 한 대 필수 있게 재떨이도 잘 갖춰져 있다. 불가리아는 흡연에 관대하다. 사실 그리스는 더 관대하다....


<유적 안내판>


총 감상평 : (이건 100퍼센트 내 주관적 견해) 전문지식이 얕은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일종의 '국가차원에서 검증한, 밀어 줄만한 관광지 목록'의 일환으로 세계유산목록을 참고할 때가 많다. 등재 시점을 보면서 혼자 미리 판단을 해 보기도 하는데, 보야나교회는 1979년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1. 전 세계적으로 너무 너무 유명하거나 

2. 관광지로서 흔히 말하는 '볼만한' 관광객들이 좋아할 경관 요소가 적고 학술적 가치(만?) 가 높은 유적지 성격일 가능성이 있었음. 


역시나 예상대로 찾아가기는 어려웠고 주변에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었으며 북적이지 않았고 내부는 기대 이상의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저 멀리 천장 어딘가에 붙어있는 프레스코화들만 보다가, 여기에선 1미리 앞까지 손가락을 뻗어도 보고 숨 참고 얼굴도 들이대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사진은 발로 찍은 것 같지만 손으로 찍었음.(실제 사진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발로 눌러도 저보단 나으리라-인용자 주

너무 대충 찍었네. 두 번 가기는 힘들텐데..(다시 가도 별로 달라지진 않을 듯하다. 교육 불가 판정이다-인용자 주




한반도 중심부를 관통하는 두 젖줄 한강과 임진강이 각기 다른 굴곡한 삶을 살다 마침내 합류하고는 손잡고 서해로 흘러가는 두물머리 남안에 위치하는 파주 오두산 전망대 중에서도 서울에서 파주로 뻗은 자유로 방면을 쳐다본 장면이다. 저 뒤쪽에서 흘러내린 임진강이 왼편 사진 뒤로 감돌아 한강 물길과 마주친다. 자유로가 달리는 화면 오른편이 남한이요, 그 반대편 강 너머가 북한이다. 불과 그저께 풍광이나, 그새 또 달라져, 아마 저 사쿠라는 비듬 같은 꽃잎을 흩날리고 있으리라. 



현무암 협곡과 단애를 뒤지며 연천을 헤집고 다니다가 자유로를 따라 서울로 귀환하면서 문득 오두산 전망대에 서고 싶어, 차를 몰았다. 확실히 해는 길어져, 다섯시 무렵인데도 저 서쪽 하늘 중앙쯤에 해가 걸터앉았다. 왼편 허리춤에서 감싸고 나온 한강이 오른편 화면 뒤로 숨은 임진강물과 합류해 이제는 강이 아니라 거대한 육지 호수를 연상케 하는 굵은 물줄기 되어 서해로 흘러간다. 


이 전망대에는 두어번 정상에 섰거니와, 그때마다 그 화면 중앙 왼편을 튀어나온 곶 끝터머리 저 나무 한 그루인지 두 그루가 무척이나 궁금했으니, 이젠 그 정체를 따지지 않고, 저것이 주는 묘한 풍광만 잔서리로 남았다. 왼편이 남한이요, 오른편 강너머가 북한일 터. 요즘 이곳은 남북관계 진정에 따라 풍광이 달라져, 그것이 한껏 대결로 치달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체제를 선전하는 확성기 소리 요란하다. 



아마 국방부나 혹은 그 비스무리한 기관에서 설치했을 법한 망원경 서다섯 대가 강 너머 북한을 조준한다. 이곳이 군사 접경지대임을 보여주고자 부러 저 망원경을 포착한 장면을 담아봤다. 확실히 해는 서쪽으로 진다는 금언은 오늘도 어김이 없어, 저편이 분명 강화도 인근 서해임을 직감하거니와, 그러다 문득 이곳에서 일몰을 지켜본 적 없음을 한탄하고는 오늘은 기필코 그 장면을 담아보리라 작심한다. 


강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혹은 산바람인지 분간이 쉽지 않은 바람이 조금은 거세진다. 솜털 같은 바람이 서서히 찬기를 뿜는다. 얇은 잠바 죽지 하나 걸쳤을 뿐인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툭진 잠바 하나 여분으로 장만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한시간 혹은 한시간 반가량이 지나 6시30분이 되니 전망대가 문을 닫는다. 마지막 관람객들이 나오고, 이곳에서 일하는 민간인들도 하나둘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는 사라지더니, 돌아보니 나와 내가 몰고다니는 똥차만 홀로 남았더라. 저 밑 강변을 따라 늘어선 군 감시초소가 눈에 더 잘 들어오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쫓아내지는 않으려나? 다행히 인기척이 없다. 기다리자. 낙조를. 



확실히 낙조다. 렌즈가 빨아들인 사진빨이 불그레죽죽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해가 지는 저쪽은 북녘일 듯. 셔터 속도가 연신 빨라져, 심장병 환자 심장 띄듯 한다. 



300미리 렌즈로 바꿔 끼웠다. 부러 저 나무를 한쪽 귀퉁이에 담은 장면을 포착해 본다. 따로 당겨 찍지는 않았으되, 확실히 저 나무는 두 그루이며, 군 초소다. 


낙조는 지구 아니 태양계 아니 우주가 탄생한 이래 그랬을 것이듯이 언제나 장관을 선물한다. 그것이 장관인 이유는 하루 중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건 대낮과 같다면 저 장면을 보고 어느 누가 찬탄하며, 저 장면을 보고 어느 누가 날 버리고 도망친 30년 전 여인을 떠올리며, 저 장면을 보고는 어느 누가 지구를 불질러 버리고 싶겠으며, 저 장면을 보고는 나도 월경하고 싶다고 외치겠는가?



마침내 헐떡이던 소 혓바닥 모양, 해가 반토막 난다. 어둠이 눈에 띄게 깔리기 시작한다. 북녘이 맞긴 하나보다. 게스츠레한 능선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 저 산하엔 나무 흔적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으니 말이다. 



저쪽엔 접근이 되려나? 그냥 궁금증을 물리고 말았지만, 언젠간 저 곳에 서 보고 싶다. 



발길을 돌리고 나서려는데 문득 아쉬어 뒤를 쳐다봤다. 조만식이 손짓한다. 잘 가그레이, 또 보제이. 나도 화답했다. 또 봅시다 영감. 한데 어찌하여 영감이 예 섰소? 아직 못다한 건준의 꿈이 있소? 영감이 꿈꾸며 '준비'한 '건국'은 무엇이었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소? 그나저나 영감 요새 남한에 나타나면 환영은 썩 받지는 못할 듯 하오.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이라 하니 말이오. 캬캬캬. 


영감한테 손짓하고는 돌아서 차를 몰아 전망대를 내려오는데, 중턱 산길에 턱하니 바리케이트가 쳐졌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젊은 군인 두 마리가 초소에서 지킨다. 나도 황당하고 지도 황당한 모양이다. 넌 뭐냐? 아마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아마도 저짝에서는 이 놈 뭐하다 지금에서야 끄질러 내려 오느냐 하는 표정이다. 그 옛날 같으면 나는 붙잡혀 가서 취조 당하곤 카메라 압수당했을지도 모른다. 


차를 몰아 나오면서 내내 이젠 갈 때가 되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저 강너머 땅을 헤집고 나아가 평안도며 함경도로, 그리고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은 마운령 황초령에 서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젊은날 성욕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마 이 생활 마지막 현장은 북녘 산하가 되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美란 무엇인가? 

죽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랑하는 이 누구인가?

그 美를 보고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다. 


고창읍성이다. 벚꽃 만발하는 봄날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낮엔 황홀해서 아름답고, 밤엔 떠난 사람이 아려서 아픔을 더하는 곳이다. 



무미건조한 설명으로 돌아간다. 발길로 차버려도 좋으나 그래도 한 번쯤 눈길 한 번 주고는 읽어놔도 손해볼 건 없으니깐 말이다. 


고창읍성(高敞邑城)

사적 제145호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倭侵)에 대비하고자 당국에서 전라 도민을 동원해 만든 돌성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든 이 성은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됐다. 둘레 1,684m, 성벽 높이 4~6m, 성벽이 두른 내부 면적은 165,858㎡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 세 곳에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옹성(甕城) 3개소와 치성(雉城) 6개소, 그리고 성밖 해자(垓字)를 비롯해 성을 방비하는 전략 요충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조선시대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등 22개 동에 이르는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지만, 공북루를 제외하고 병화(兵火) 등으로 소진(燒盡)된 것을 1976년 이래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을 세 번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 



Gochangeupseong

Historic Site No. 145


Also known as "Moyang Fortress", Gochang-eup Fortress was built in 1453,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Danjong of the Joseon Kingdom, by the people of Jeolla Province to defend against Japanese aggressions. Together with Ibamsan Fortress in the Naju military district, it was meant to serve as an advance base to defend the fertile Honam region. 


Designated as Historic Site No. 145 on April 1, 1965, the fortress measures 1,684 meters in circumference, four to six meters in height, and 165,597 square meters in area. Its tactical features include north, east, and west gates; three half moon-shaped protrusions, six parapets, and surrounding moats. Its 22 structures included a commander's headquarters and guesthouse, with two ponds and four fountains located inside. 


Most of these were consumed by fire during the war, the exceptions being the multi-storied Gongbuk-ru and the Gilyong cheon, or "fountain of good luck". The site as it exists today is the result of a restoration undertaken in 1976. 


Legend holds that women who walk around the fortress three times with a stone atop their head during a leap month will enjoy long life and be admitted to paradise after their death. It is a custom still observed by many women to this day.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
도움말 Daum 지도



The tomb of King Mu (who reigned from 600 to 641), the 30th monarch of the Baekje Kingdom (18 BC~660) has opened its door in 100 years. Archaeologists have unearthed the tomb in Iksan, Jeollabukdo Province. The excavations revealed a flat rectangular stone chamber with a short corridor inside the mound 20 meters in diameter and 5 meters high. The chamber built of granite slabs, and hexagonal stones as corbels to support the ceiling is 3.78 meters long (from north to south), 1.76 meters wide (from east to west), 2.25 meters high (from bottom to ceiling).  At the center is a flat rectangular granite coffin standing on top of which pieces of a wooden coffin were found in excavations in 1917. The short corridor leading into the chamber was blocked with stone slabs. The size and style of the chamber are similar to those from tombs in Neungsan-ri in Buyeo, the capital of the late Baekje Kingdom. 


Artifacts including the decomposed wooden coffins and pieces of pottery were retrieved and are now at The National Museum of Jeonju.  


2기 묘가 한 구역에 있어 ’쌍릉‘이라 일컫는 익산 쌍릉(사적 제97호) 중 상대적으로 봉분 규모가 커서 대왕릉이라 일컫는 무덤을 최근 발굴조사한 결과 입구가 중앙에 있으며, 단면육각형의 현실(玄室)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기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이 재확인됐다. 조사 결과 무덤방은 대형 화강석을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무덤방인 현실은 길이 378cm, 너비 176cm, 높이 225cm로, 부여 능산리 왕릉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동하총 무덤방(길이 327cm, 너비 152cm, 높이 195cm)보다도 더 컸다.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사비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는 처음으로 판축(版築) 기법을 사용하여 봉분을 조성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현실 내부 중앙에 있는 화강암 재질 관대(棺臺) 맨 위쪽(북쪽)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다. 1917년 일제강점기 조사시, 발견된 피장자 인골을 수습해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항온항습실로 옮겨 보관 중이며, 향후 과학적 조사를 위한 학제간 융합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
도움말 Daum 지도

<남쪽에서 바라본 목탑지> 


아래는 2018년 4월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고즈넉한 농촌 평야마을 한가운데 위치하는 제석사지(帝釋寺址)라는 백제시대 절터 현지 유적 안내판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글과 영문 안내판은 거의 손대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아울러 뒤에는 제석사지와 관련한 현대 역사를 추적할 만한 관련 언론 보도를 시대순으로 나열한다. 제석사지 흐름을 간취하는 데 도움이 없지는 않으리라.  


익산 제석사지

益山帝釋寺址

Jeseoksa Temple Site in lksan

사적 제 405호

Historic Site No. 405


이 터는 백제 시대의 사찰인 제석사가 있던 곳이다. 제석사지는 무왕대의 익산 천도설을 밝혀 줄 수 있는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절터이다. 판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따르면, 제석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불타버렸으나,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넣었던 칠함(漆函)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짓고 안치하였다 한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터·금당터·강당터·회랑(回廊) 등이 확인되었으며,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이곳은 몇 개 남지 않은 백제 절터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This is the site where Jeseoksa Temple stood during the Baekje Kingdom (18 B,C.~ 660).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Jeseoksa was found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 (600 641) but was destroyed by fire started by lightning in 639. Relics of Buddha and a Vajra Sutra casket kept inside the pagoda remained, and they were enshrined when the temple was rebuilt.


Excavation of this site found sites for a wooden pagoda, a main temple hall, a lecture hall, and narrow corridors. Also discovered was a roof tile with an inscription bearing the temple name, Jeseoksa, This is one of only few temple sites from Baekje, making this site extremely important for research. 


<제석사지 건물 배치 양상>


목탑터 / 木塔址 / Wooden Pagoda Site 


목탑터는 중문터에서 약 18.5m 떨어져 있고, 중문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37m이다. 목탑터의 중심에는 길이 182cm, 너비 175cm, 두께 76cm인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채로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길이 60cm, 너비 26cm, 깊이 16cm인 사리공이 뚫려 있다. 목탑은 하층 기단깨비의 길이가 21.2m인 이중 기단구조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안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1.2m인 불단佛壇으로 추정되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목탑의 기초基礎는 약 3m 높이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촉颾해 만들어져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 통로가 네모서리에서 확인된다. 


The wooden pagoda site is located 18.5m away from the edge of the middle gate site and 3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agoda site has a capital pillar stone at the center, split into two pieces measuring 182cm long, 175cm wide, 76cm deep. 


Moreover, there is a sarira chamber carved at the center of the pillar stone. The wooden pagoda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on double-layered square platforms, with the outer layer being approximately 21.2m long. The inner layer is approximately 11.2m long and was likely used as a Buddhist altar. 


Located approximately 3m above the lowest platform, the base of the wooden pagoda is intricately designed and constructed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Each side of the four platforms has stairs in the middle, and work paths used to reinforce the underground foundations have been found at the four corners. 


<목탑터 기단>


<목탑터 심초석, 남에서 북으로>


금당터 / 金堂址 / Prayer Hall Site


금당터는 목탑터에서 약 17m 떨어져 있고, 목탑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1m이다. 기단은 길이 약 30m, 너비 약 21m의 상층 기단과 길이 약 32m, 너비 약 23m의 하층 기단으로 이루어진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다. 기초는 적갈색 사질 점토와 황색 마사토로 정교하게 판축하여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약 5m, 너비가 약 3m인 계단 시설 흔적이 앞·뒷면 중앙 2군데에 있다. 제석사지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고,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1 : 0.74로 부여 금강사지 중창(重創) 금당과 비슷하다. 금당터에서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인동 자엽의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여러 점 출토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17m away from the edge of the Pagoda Site and 41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consists of two layers, with the upper one being approximately 30m long and 21m wide and the lower one approximately 32m long and 23m wide. The foundation was intricately built out of reddish brown sandy clay and decomposed granite soil,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Remnants of stairs, approximately 5m long and 3m wide, have been found in the middle of the front and rear of the site. This prayer hall site at the Jeseoksa Temple Site is among the larger ones from the Baekje Period, and its horizontal to vertical ratio of 1:0.74 is similar to that of the reconstructed prayer hall at the Geumgangsa Temple Site in Buyeo. Several concave roof-end tiles with honeysuckle scroll designs and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s, typical artifacts from the Baekje Period, have been found intact, raising interest in the site.


<목탑터 심초석 너머가 금당터>


강당터 / 講堂址 / Lecture Hall Site


강당터는 금당터에서 약 26m 떨어져 있고, 금당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7m다. 기단은 길이 약 52m, 너비 약 18m의 단층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 3군데서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 중앙 계단의 규모는 길이 약 150cm, 너비 88cm다. 강당터는 규모나 구조에서 익산 미륵사지 강당터와 비슷하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26m away from the edge of the Prayer Hall Site and 4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is presumed to have been a single-level one, approximately 52m long and 18m wide. In addition, stairs have been found at the front, back, and left center of the site, and it is likely that they also existed at the right center. The three sets of stairs discovered are approximately 150cm long and 88cm wide. In terms of its scope and structure, the lecture hall site resembles the one at the Mireuksa Temple Site in lksan.


<강당터, 동에서 서쪽으로>


출토 석재 / 出土石材 / Stone Artifacts 


제석사지 발굴조사 및 유적 정비과정에서 수습된 석재들이다. 초석․지대석․갑석 등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는데, 제석사 건물에 쓰인 부재로 추정된다. 


Stone Artifacts Unearthed from Jeseoksa Temple Site, lksan

These stone remains were discovered during the archaeological surveys and the improvement works at Jeseoksa Temple Site. 

A wide variety of artifacts, such as column foundations, foundation stones, and cover stones were identified. In all likelihood, they were among the materials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buildings at Jeseoksa Temple. 


<출토 석재>


제석사지 관련 언론보도 모음 


1994.01.05 18:18:00 

益山군 王宮면서 백제 무왕창건 절터 확인


    (裡里=聯合) 全北 益山군 王宮면 王宮리 宮坪마을(일명 궁들마을)에서 중국  문헌에 ‘百濟 武王이 천도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절터(帝釋寺址)가 확인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원광대 부설 馬韓․百濟문화연구소(소장 金三龍총장)는 5일 오후 지도위원회의를 열고 추정 금당지와 추정 강당지등 유구와 百濟시대의 忍冬唐草文 암막새 등 유물을 공개했다.

    중국의 觀世音應驗記에는 “百濟 武王이 枳慕蜜地(한국 지명으로 金馬渚)로 천도한 뒤 精寺(帝釋寺)를 창건했으나 서기 639년에 낙뢰에 맞아 소실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최근 인근 王宮寺址에서 시굴된 건물터(왕궁터로 추정)와 관련, 왕궁면 일대가 백제시대의 또 다른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金三龍 총장은 “王宮면이 시사하는 지명이나 중국의 문헌, 현재까지 진행된 益山군 王宮면과 金馬면 일대의 고적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때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王宮면에 百濟의 도읍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면서 “특히 이번에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지도위원회의에 참석한 金正基 박사(한림대 교수. 전 문화재연구소장)는 “추정 금당지의 기단구조가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축조된 점으로 미루어 이 절이 왕과 직결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해 정밀한 조사와 함께 잘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정금당지는 규모(추정)가 동서 30m 남북 23.2m이며 彌勒寺址와 같은 이중의 기단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추정강당지의 규모(추정)는 동서 50m 남북 18.4m이다.(끝)

(조순래 기자 작성)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5.13 09:26:00 

국가사적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전북 익산시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최근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내년부터 이 일대 2만3천여㎡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시는 이를 위해 사적지 안에서의 모든 건축행위와 광물의 채취나 반출,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지난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부분 발굴에 그친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이 절터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목탑지(木塔址)와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등의 기단이 발굴돼 이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됐었다.(끝)


1998.11.18 09:41:54 

익산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 유보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 전북 익산시는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이 道와의 입장차이로 산업단지 지정이 불투명해져 이를 유보키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시는 왕궁면 일대에 1천1백억원을 들여 오는 2002년까지 60만6천여평 규모의 제3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지난 5월 전북도에 산업단지 지정신청을 했으나도가 이를 미루고 있다.

     시는 현재 가동 중인 1, 2산업단지가 포화상태여서 지역발전을 위해 자동차부품, 전자, 통신, 기계산업 등 첨단산업을 유치할 제3산업단지 조성이 절실하다며 지난 96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뒤 개발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그러나 도는 도내 미분양 공단 부지가 5곳에 2백51만평에 이르고 있는데도 각 시․군에서 경쟁적으로 신규 공단을 조성하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익산의 제3산업단지 조성 예정지는 백제 말 궁성일 가능성이 높은 왕궁평성과 왕실기원 사찰인 제석사지 등 국가 유적지와 가까워 이를 훼손할 우려가 높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에 따라 시는 문화재 보호대책과 함께 경기가 호전돼 공단부지 분양전망이 밝아질 때까지 공단조성 사업을 미루기로 했다.(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출토 소조상>


2003.05.16 12:07:13 

익산서 흙으로 구운 불상 수십점 발굴


    (익산=연합뉴스) 전성옥 기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가마터에서 삼국시대에 흙으로 만든 불상 수십점이 발굴됐다. 

    원광대 박물관은 16일 "익산시의 의뢰로 지난 3월부터 시 향토유적 2호인 왕궁리 가마터를 시굴조사하던 중 가마터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흙으로 구운 불상의 두상 등 수십 점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흙으로 구운 다수의 불상과 이를 굽던 가마터를 발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백제 때 소조불상(흙을 구워 만든 불상)과 보살상, 천부상, 악귀 및  동물상 등이 연화문 수막새, 기와 등과 함께 수습돼 삼국시대 불교사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토된 불상은 완전한 형태는 아니나 길이 20-30㎝의 두상과 몸통, 좌대 등이며 백제시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연화문 수막새 60여 점도 함께 수습됐다.

    이중 두상의 우측 절반만 남아 있는 천부상은 고온으로 구워 회청색을 띠고 두툼한 볼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전형적인 백제시대 불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원광대 김선기 책임연구관은 "이 가마터는 백제시대 왕궁터인 왕궁리  유적지와 왕실 기원사찰이었던 제석사지의 기와와 불상을 굽던 곳으로 추정된다"며 "삼국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는 만큼 보존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사진있음)

    sungok@yonhapnews.co.kr 

(끝)

 


2007.08.29 15:22:21 

익산 제석사지 본격 발굴


    (익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제석사지(사적 제405호)를 발굴한다고 29일 밝혔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A.D.600∼641년)이 수도를 금마로 옮기기 위해 세운 왕실 절로 추정되는 제석사지는 얼마 남지 않은 백제사찰지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발굴작업은 오는 30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진행된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1993년 시굴조사를 실시, 명문와와 암막새를 비롯한 7세기 당시의 기와를 다량 발굴했다.

    부여연구소는 "사찰 중심부(9천100㎡)인 목탑지-금당지-강당지에 걸쳐 발굴하며, 사찰의 규모 및 존재양상, 각 유구들의 축조방법을 밝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ichong@yna.co.kr

(끝)  

 

<목탑터 기단판축>


2008.07.09 17:36:59 

백제 3중기단 목탑지 첫 확인

부여문화재연구소 제석사지 발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목탑이 들어설 기단을 3중으로 다져 만든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 제석사지(사적 405호)에 대한 올해 발굴조사 결과 정교한 판축(版築)으로 만든 삼중기단 목탑지와 백제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화려한 인동당초문 암막새를 출토한 금당지 등을 확인했다고 9일 말했다. 

    제석사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옛 문헌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 사비(부여)에서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는 일환으로 세웠다가 639년에 벼락이 쳐서 불당(佛堂)과 회랑(回廊) 등이 불탔다고 한다. 

    조사 결과 두께 약 3m에 3중인 목탑 기단은 차곡차곡 흙을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깥쪽 기단은 한 변 길이 21.2m에 이중 구조였으며 그 안에 목탑 중심부가 위치하는 또 다른 기단이 드러난 것이다. 

    목탑은 우선 지면을 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약 70cm 두께로 갈색 사질 점토를 채워 넣은 다음, 다시 그 위에는 약 250cm 두께로 또 하나의 판축 기단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소는 이와 같은 3중 기단 갖춤 목탑은 동아시아 3국 불교 건축에서는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전형적인 백제 연화문 수막새 및 다른 기와 편과 함께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다량으로 확인됐다. 

    조사단은 이 암막새들이 "같이 출토되는 유물 및 그 출토 층위를 볼 때 백제시대 유물로 판단된다"면서 "중앙에는 도식화한 귀면문(소위 도깨비 문양)을 조각했으며 그 좌우에는 유려한 인동당초 문양이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제석사지 곳곳에서는 건물 기단 기초를 다지기 위한 달구질 흔적이 확인됐으며 그 북동쪽 폐기장에서는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2009.10.29 09:50:59 

익산 왕궁리 백제 궁궐 후원 발견

곡수로도 드러나, 제석사지 가람 배치 추가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7세기 백제 궁궐의 후원(後苑)과 수로가 발견됐다.

    1989년 이후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을 발굴조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올해 그 북편 구릉지역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궁성 내부 후원과 물길(곡수로<曲水路>), 보도(步道) 시설, 석축시설 및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고 29일 말했다.

    물길은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크게 두 줄기가 확인됐으며, 그 중간에는 물을 저장해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네모난 집수시설(集水施設)이 드러났다.

    곡수로는 너비 80~140㎝이고 단면은 바닥이 편평한 U자형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총 길이는 228m다.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庭園)에서 보이는 구불구불한 사행수로(蛇行水路)와 유사한 형태지만, 이들과는 달리 왕궁리 유적 수로는 바닥이나 측벽에 자갈돌이나 판석 등의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나아가 수로 내부에서는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주변에서 백제시대 기와 등이 소량 출토됐다.

    부여연구소 김낙중 학예연구관은 "신라시대 포석정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에도 물을 대기 위한 수로는 있지만 이렇게 구릉 전체를 이용한 큰 규모의 수로는 없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곡수로가 궁성 내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역할뿐만 아니라 정원과 어우러진 조경 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 동진(東晉)시대부터 유행했고, 일본 헤이죠큐(平城宮) 동원정원(東院庭園) 등에서 채택된 구불구불한 물길이 후원 공간의 중심적인 요소로 확인돼 동아시아 고대 원림의 조영방식에 대한 비교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연구소는 평가했다.

    연구소는 또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1.4㎞ 떨어진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 대한 2차 조사를 통해 가람 배치가 기본적으로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사찰의 그것과 동일하며,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확인된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이외에 회랑지, 중문지, 동ㆍ서 건물지가 확인됐다. 

    목탑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42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된 동회랑지는 폭 7.8m로, 폭 6.8m인 미륵사지 회랑 백제 사찰의 회랑 가운데 가장 넓다. 

    또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편에서 목탑과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한 방형 건물의 기초부(동서 21.5m, 남북 20.8m)가 새롭게 확인됨으로써 제석사의 조성 및 변천양상을 밝히는 데 새로운 단서를 확인하게 됐다.

    건물 기초부는 현재의 지표 아래로 130㎝ 두께가 남아 있으며, 특히 목탑 기단 기초에서 보이는 달구질 흔적(건물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흔적)보다 훨씬 치밀하고 정교하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이 방형 건물은 목탑과 그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목탑과 유사한 성격의 건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kimyg@yna.co.kr

(끝)

 

<악귀상 기와>

 

2016.07.12 09:45:36 

익산 제석사 폐기유적서 백제 악귀상 출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소조상 등도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익산 제석사(帝釋寺) 폐기유적에서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악귀상(惡鬼像)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부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커다란 눈과 들창코, 입 사이로 보이는 치아가 인상적인 악귀상을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 부근에 세운 절로, 중국에서 간행된 책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정관 13년(639) 벼락으로 인해 불당, 칠층탑, 회랑, 승방이 불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폐기유적은 불에 탄 기와와 벽체, 불상 조각을 버린 장소다. 규모는 남북 32.4m, 동서 28m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악귀상 외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살짝 다문 천부상(天部像)과 나한상(羅漢像) 혹은 불교 승려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흙으로 구워 만든 불상) 2점도 나왔다. 이들 소조상은 강인한 느낌을 주는 눈매와 두툼한 코, 둥그스름한 정수리가 특징이다.

    이와 함께 회칠이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는 벽체 조각과 흙벽돌 등 다양한 건축 부재가 출토됐다.

    연구소는 제석사지 소조상을 부여 정림사지, 중국 뤄양 영녕사(永寧寺), 일본 가와하라데라(川原寺)에서 나온 출토품과 비교하면 동아시아의 불교 문화교류 양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석사지 폐기유적에서는 2003∼2004년 시굴조사를 통해 소조상과 연꽃무늬 수막새, 벽체 등이 발견됐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세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기존에도 악귀상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 나온 유물은 사람보다 동물 느낌이 난다는 점에서 다르고, 눈에 유리가 남아 있는 것도 독특하다"며 "폐기유적 아래에 경작지 유적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psh59@yna.co.kr

(끝)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
도움말 Daum 지도

<故 김수남> 


사진작가 김수남(金秀南·1949~2006.02.04) 


1949년 제주 출생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연세춘추(학교신문)사 입사, 인영회(사진반) 입회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 입사, 결혼

1977년 장남(김상훈) 출생

1979년 차남(김재훈) 출생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 퇴원 후 죽음을 의식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

1981년 『공간』지에 「전통의 현장」 연재 시작(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내림굿, 제주 배연신굿, 함경도 망묵굿 등)

1982년 「한국의 굿」 사진 제작, 이때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 제의(전 20권)

1983년 『한국의 굿』 출간(『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 및 기념 사진전 개최

1985년 동아일보 사직, 동아일보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

1985년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주도 촬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 출간

1986년 『한국의 굿』으로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출간(평민사, 『풍물굿』 1권, 『호미씻이』 2권, 『장승제』 3권), 『옹진 배연신굿』 출간

1987년 『강릉 단오굿』(열화당) 출간,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한길사) 출간

1988년 『韓國心の美』 출간(일본 도쿄), 『한국의 탈․탈춤』(행림출판) 출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일본 촬영(日本の山と海祭り) 시작

1989년 『강사리 범굿』, 『제주도 신굿』, 『양주 경사굿 소놀이굿』, 『통영 오귀새남굿』, 『서울 당굿』 출간, 『빛깔있는 책들, 팔도굿』(대원사) 출간

1989년 중국 촬영 시작

1990년 중국에서 간첩으로 잡혀 조사, 재판에서 벌금형으로 모든 필름 몰수 후 섣달 그믐날밤 풀려남

1990년 『조상제례』, 『전통상례』(대원사) 출간, 연세대학교 강사 「사진촬영과 감상」 강의(1990~1997)

1992년 『안동하회마을』(대원사) 출간

1993년 『황해도 거제도 별신굿』, 『위도 띠배굿』, 『지노귀굿』, 『서울 진오귀굿』(열화당 출간), 「한국 현대사진, 관점․중재」 그룹전, 사진집 『濟州道』 3권 출간(國書刊行會, 일본 도쿄)

1995년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수상 기념 사진전 「한국의 무속」 개최, 김수남 사진전 「아시아의 하늘과 땅」 개최 및 사진집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출간

1996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으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1997년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출간, 「삶의 경계」 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1998년 「Schamaninnen in Korea」전 참가(함부르크 박물관, 독일)

1999년 김수남 사진전 「살아 있는 신화 ASIA」 개최, 『살아 있는 신화 ASIA』(연세대 박물관) 출간,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 대학원 강사(1999~2000)

2002년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역임,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여가와 삶』 사진부문 「사진찍기와 자기표현 또는 자기발언」 저술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수술

2004년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출간, 『한국의 굿』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될 ‘한국의 책 100’에 선정, 2004 아시아 전토예술 페스티벌 「신의 얼굴」 전시 개최

2005년 「빛과 소리의 아시아」 전시회 개최(인사아트센터), 「Schamaninnen in Korea」 개인전 개최(베를린 Werkstatt Der Kulturen), 사진집 『굿-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출간, 영문판 사진집 『Gut-Shamanic Ritual Ceremony』(열화당) 출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전시 개최 및 사진집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출간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 김수남기념사업회 창립, 옥관문화훈장 추서

2007년 「김수남 사진굿 魂」 전시 개최(이사아트센터), 『김수남 사진굿 魂』(현암사 출간), 사진집 『김수남』(김수남기념사업회) 출간 


<김수남이 포착한 제주영등굿 한 장면>


2006.02.06 09:20:48 

굿 사진 전문작가 김수남씨 별세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한국의 굿을 찍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4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현지 부족의 신년 축제를 사진으로 담다가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7세.

1949년 제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지질학과, 동아일보 사진부를 거쳐 70년대 말부터 현장을 찾아 발품을 팔며 굿 사진을 찍어왔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전 20권에 걸쳐 펴낸 방대한 사진집 '한국의 굿'은 고인의 굿 사진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2005년에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압축돼 출간됐다. 

고인은 1995년 일본에서 권위있는 국제사진상인 히가시카와(東川)상을 받았고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에서 초대전을 여는 등 한국의 민속기록들을 해외에도 널리 소개해 왔다.

마침 경기도 양평의 사진 갤러리 와(瓦)에서 ‘한국의 굿: 만신들 1978-1997’을 주제로 12일까지 열리고 있는 사진전은 고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유작전이 됐다.

내림굿을 받고 무아지경에서 고개를 젖힌 채 춤을 추는 무속인, 망자의 한을 풀기 위해 매듭을 풀고 있는 씻김굿, 시퍼런 물결이 일렁이는 제주 바다에서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배를 띄운 어민 등 서글프면서도 매혹적인 순간들을 포착한 고인의 땀방울이 묻어나는 기록물들이다.

빈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8일 오전 9시. 유족은 부인 이희영 여사와 상훈(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재훈(교통물류연구원 연구원) 두 아들이 있다.

☎02-6225-9631, 02-2072-2018. 

(끝)



<김수남이 포착한 인도 라다크>


2015.01.30 10:59:41 

<민속 현장과 함께한 사진작가 김수남>

국립민속박물관·네이버 문화재단, 사진 17만컷 정리·활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사진작가 일생을 민속 현장 담기에 투신한 사람이 있다. 

고 김수남(1949~2006). 제주 태생으로 연세대 입학해 사진반인 ‘인영회’에 들어가 활동하다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에 입사했다.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해 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을 사진에 담았다. 

이후 그는 한국 민속, 특히 굿 현장을 담는 일에 몰두한다. 도서출판 열화당에서는 전 20권 기획인 ‘한국의 굿’ 출판을 제의하게 되며 1983년 그 일환으로 ‘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이 나온다. 

1985년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같은 회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김수남은 그 해에 고향 제주도에 정착하며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을 내놓는다. 

이후 그의 촬영 무대는 외국으로 옮겨간다. 1989년 중국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 중국 땅에서 간첩으로 몰려 조사를 받고 재판 끝에 벌금형을 받고는 촬영한 모든 필름을 몰수당하고 그해 섣달 그믐날 밤에 풀려나기도 한다.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는 위출혈로 수술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한다. 

국경을 넘어 세계 민속현장을 카메라에 포착하고자 한 그의 열망은 17만 컷에 달하는 사진으로 남았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과 네이버 문화재단(대표 오승환)이 김수남이 남긴 사진 자료 정리와 활용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두 기관은 지난 26일 박물관 대회의실에서 고 김수남 사진작가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아들 김상훈 씨와 ‘김수남 사진작가 사진의 정리 및 활용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말 유족은 김수남이 촬영한 국내외 민속 사진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필름 및 인화지 형태다. 

협약에 따라 기증 처리 절차와 전문적인 내용 조사는 박물관이 맡아 진행한다. 이미 네이버 문화재단에서는 이들 사진에 대한 고해상도 스캔을 완료하고 그 일부 설명도 작성한 상태다. 현재 네이버 미술작품 웹페이지에서 사진 중 일부는 감상 가능하다. 

내년은 고인이 타계한 지 10주기가 된다. 

이에 민속박물관은 사진 특별전을 개최하며, 네이버 문화재단에서는 온라인 사진 특별전을 연다. 

나아가 향후 두 기관은 이들 사진 자료를 공익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협력하기로 했다.

taeshik@yna.co.kr

(끝)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그제 국립춘천박물관 탐방에서 나는 이번에 이 박물관이 채택한 새로운 전시기법이랄까 하는 점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개중 특징적이거나 인상적인 대목으로 '중도식 토기(中島式土器)'의 압도적인 위용을 들었다. 이 중도식 토기란 실은 기원전후, 그러니깐 이 지구상에 예수라는 분이 탄생하던 시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특정한 토기를 지칭하는 말로서, 그 하나하나는 이렇다 할 볼품은 없지만, 그것들 수백 점을 한데 모아놓으니 볼 만하다고 나는 말했다. 

춘천박물관이 이 토기를 저리 집중적으로 소개한 까닭은 '중도식 토기'라는 말을 있게 한 본향이 바로 춘천인 까닭이다. '중도식 토기'란 요컨대 중도라는 지역에서 확인된 토기를 대표로 삼는 같은, 혹은 비슷한 시대 같은, 혹은 비슷한 토기를 일컫는 말이거니와, 예서 말하는 중도가 바로 지금은 의암호 건설로 북한강 수중섬으로 남은 중도를 말한다. 이 중도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가운데 있는 섬'이거니와, 북한강 한복판에 있다 해서 이렇게 일컫는다. 춘천 의암호에서는 북한강 상류와 하류에 서로 인접해서 섬 두 개가 있는 까닭에 상류에 있는 것을 상중도(上中島)라 하고, 그 아래 지점 섬을 하중도(下中島)라 한다. 

이 중도식 무문토기는 무문토기(無文土器)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별다른 문양을 베풀지 아니함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 무문토기는 그 전 시대, 그러니깐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늬없는 토기와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보통 청동기시대라면 청동기 유물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하지만,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청동기 등장이 요새 조금 시간을 치고 올라가 기원전 10세기 어간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 등장은 그보다 훨씬 낮추어 잡아 실은 초기철기시대가 개막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이 되어야 청동기 비중이 높아진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그런 까닭에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무문토기시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 또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한데 '중도식 토기'란 더 풀어제끼면 '중도식 무문토기'라, 이 경우 문제가 되는 점은 그 이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는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같은 무문토기라 해도 소위 중도식 무문토기는 그와는 결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특징이란 무엇인가? 고고학도들은 소성도에 주목한다. 소성도(燒成度)란 무엇인가? 토기를 가마에서 몇도에서 굽느냐 하는 것이다. 한데 중도식 무문토기는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무문토기보다는 높은 가마 온도에서 구웠다. 온도가 높으니, 당연히 그 전시대 같은 무문토기보다는 더 단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중도식 무문토기를 흔히 '경질(硬質)무문토기'라 일컫는다. 경질이란 단단하게 구웠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명명법도 문제는 없지 않다. 경질이라는 말에는 상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에 견주어 한국어가 지닌 함정 혹은 결함이기도 한다. 한국어는 영어만큼 비교급 문법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걸 그대로 대입하면 단순히 '경질무문토기'가 아니요, '상대적으로 더 경질인 무문토기'가 되어야 하며, 이에서 '상대적으로 더'란 비교가치는 그 전 시대 '상대적으로 더 연질(軟質)인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에 견주어'란 수식어가 잔뜩 달려야 한다. 

저 경질무문토기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내가 몇 군데서 살핀 적이 있는데, 'hard plain coarse pottery'라는 말을 쓰거나 혹은 저 중에서 'coarse'라는 말을 빼고 'hard plain pottery'라 쓰기도 하더라. plain은 이렇다 할 무늬를 넣지 않았다는 뜻이니 저에서 하등 이상한 점은 없거니와 문제는 'hard'라,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hard'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나는 저 용어가 그 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를 염두에 둔 것이므로 더욱 정확한 의미를 담으려면 'harder plain pottery' 정도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그 전시대 무늬없는 토기는 자연히 'softer plain pottery'가 되기 때문이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중도식 토기란 저 경질무문토기를 말한다. 이 경질무문토기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 종래와는 소성도가 높다는 점을 지적했거니와, 다시 들어가서 다른 특징을 보면, 빛깔은 대체로 약속이나 한 듯이 불그레죽죽한 빛을 띤다. 이 시대에 빛깔을 달리하는 다른 토기도 있으니, 회청색경질토기가 그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빛깔로써 경질무문토기와는 구별하려 하는 것인데, 그 빛깔이 회청색 거무틱틱 계열인 까닭이다. 

흐름을 보면 애초엔 경질무문토기가 먼저 등장해 유행하다가, 그것이 한창 흥성하던 무렵에 회청색 경질토기가 등장해 경쟁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후자 비중이 늘어난다고 고고학계는 본다. '중도식토기'라면 이 시대 토기 중에서도 회청색 경질토기를 제외한 '경질무문토기'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안다. 


그건 그렇고 과연 고고학계가 정의한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이 전체 한국고고학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낸 '한국고고학사전(2001)'에는 저 표제어로 수록됐거니와 그 정의와 설명, 그리고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설명

중도 주거지유적 출토 토기를 표지로 하는 중부지역의 초기철기 또는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말한다. 한강유역 철기시대 토기는 크게 3개의 기술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경질무문토기로 청동기시대 이래의 무문토기 기술전통에 새로운 고화도 소성의 기술이 가미되면서 나타난 유형이고, 둘째는 타날문토기로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하는 제작전통인데 주로 호와 같은 기종에 많이 채택된다. 셋째는 회색 또는 흑색의 환원소성토기로 기벽 등 표면처리에 타날문이 없는 무문양의 토기이다.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는 경질무문토기의 상대빈도가 높고 늦은 시기의 유적에서는 타날문토기와 회(흑)색무문토기의 빈도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다.

한강 유역의 철기시대 경질무문토기의 기종 중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이 중도식토기로 불리우는 평저외반구연호인데, 중도식토기는 축약 평저나 말각평저(抹角平底)에 배가 부른 갸름한 난형(卵形)의 동부, 밖으로 외반된 구연부를 갖는 형태의 토기로, 몸통의 최대경이 상부에 있으며, 저부의 안쪽은 들린 것과 편평한 것이 있다. 한강유역 철기시대 주거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강릉 초당동, 양양 가평리, 명주 안인리, 남쪽으로 제주도 곽지패총까지 분포하고 있다. 외반구연평저호는 함북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나 직접적 관련이 있는지 확실치 않으며, 전통적인 무문토기 제작수법이 한식토기와 같은 외래토기의 영향을 받아 기형의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송국리형 토기를 그 조형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시기적인 차가 있어 연결에 무리가 있다.

편년에 관해서는 중도 유적 발굴보고서에서는 중도 1호 주거지 출토의 철촉이 북창군 대평리 유적의 상층 출토품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토기상은 중층과 유사한 점과 마장리 유적에 대한 김원룡의 연대(B.C. 2세기~기원전후)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1~2세기로 추정하였다. 이 연대는 이후 여러 연구자에 의해 수용되었고 중도식 토기 유적의 연대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中部地方 原三國 文化의 編年的 基礎-住居址의 相對編年을 中心으로-(宋滿榮, 韓國考古學報 41, 韓國考古學會, 1999), 利川 孝養山遺蹟 發掘調査 報告書(湖巖美術館, 1995), 韓國의 先·原史土器(國立中央博物館, 1993), 中島積石塚發掘報告(朴漢卨?崔福奎, 中島發掘調査報告書, 1982), 中島 3(池健吉 외, 國立中央博物館, 1982), 中島 1(李健茂 外, 國立中央博物館, 1980)

지금 내 책상머리에 저 오프라인 사전이 없어 이 항목 집필자가 웹상에서는 확인되지 아니하는데, 어투 혹은 문투로 보면 이성주 선생 같다. 아니라면 몹시도 실례한 셈이 되겠지만, 저 양반 아니고서는 저리 어렵게 쓰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국고고학 대중화를 표방한 저 사전이 말하는 '중도식무문토기'...저 설명 보고 중도식 무문토기가 무엇인지 이해했다는 사람 손들엇! 

장담하거니와 단 한 사람도 저 사전을 통해 중도식 무문토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런 일이 발생했는가? 고고학도들끼리 장난 쳤기 때문이다. 원고가 철저하지 아니했고, 그것을 감수하는 자들조차 까막눈이었기 때문이다. 저런 일반교양 대중을 표방한 사전은 해당 표제항목 집필은 저 분야 전문가가 쓴다 해도, 그것을 윤문하고 재가공하는 일은 기자나 문필가들 몫이어야 한다. 

그런 과정이 몽땅 누락됨으로써 저런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국립춘천박물관 중도식토기 전시코너>

저 사전 집필을 어떤 이들이 주도했는지 내가 좀 안다. 한국 학계에선 고질이 있으니, 다른 분야 전문가가 참석하는 일을 지질이도 싫어해서 그것을 나와바리 침범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감수 혹은 윤문을 그들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면서, 아마추어들이 무얼 알겠느냐는 인식이 팽배하다. 내가 저 사전을 감수했더라면, 적어도 저 항목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새로 썼으리라.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강원 춘천시 중도동 | 중도
도움말 Daum 지도


근자 두어 번 허탕을 쳤다. 재개관을 위한 전시실 리모델링 중이라 해서, 꽝꽝 닫힌 문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국립춘천박물관을 주말인 오늘 문득 찾아 나섰다. 점심을 겸한 아침상을 남영동 사저에서 마주할 때만 해도 뚜렷이 어디로 나서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막연히 오후엔 근교로 바람이나 쐬러 갔다와야겠단 생각만 스칠 뿐이었다. 마침 때늦은 꽃샘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날이라 멀리 움직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밥상을 마주하는데, 집사람이 오늘은 어디 나가지 않느냐 해서, 대뜸 나온 말이 "춘천 잠깐 다녀올까 한다"였으니, 그 말에 다시 집사름이 대뜸 "그럼 기차표 끊어주까?" 하기에 "그리하라" 말한 것이 오늘 춘천행을 결행한 계기였다. 밥상 머리에서 휴대폰으로 기차 사정을 보던 집사람이 오후 1시30분 용산역 출발 ITX 기차표가 있다기에 그걸 끊어달라 했다. 듣자니 종착역인 춘천역까지 1시간 20분이 걸린다 한다. 


<야외전시실 광배>


춘천은 서울에서 가까워 아주 자주 다니는 곳 중 하나지만, 내가 기차를 이용하기는 물경 20년이 더 지난 일이 아닌가 한다. 요새는 갈수록 장거리 여행에 차를 몰기가 버거워 되도록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쪽으로 바뀌는 중이라, 춘천은 비록 근거리이기는 해도 하루에 차를 몰고 오가기가 힘들어졌으니 그리하여 기차 여행을 생각한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어제 이런저런 일로 국립춘천박물관 김상태 관장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 있어, 그가 말하기를 "내려오심 미리 연락주시라"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 이튿날 딥다 그곳으로 쳐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차 이용은 하도 기억이 오락가락해, 알고보니 남춘천역에서 내리는 편이 박물관과는 접근성이 훨씬 좋았다. 


춘천역에 내리니 생각보단 날씨가 화창했다. 어제만 해도 온통 국토가 미세먼지 천국이었는데, 오늘은 공활한 가을하늘이 펼쳐졌다. 그런 까닭인지, 적어도 대낮엔 꽃샘추위도 기승이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내려 대중교통편을 검색하니 이래저래 복잡하고 괜히 시간만 걸릴 듯했다. 택시를 탔다. 운전하시는 분이 서울서 온단 말을 듣고는 "남춘천역에서 내리시지 왜 이곳으로 왔냐" 한다. 


<청와대 불상 대좌로 지목하기도 하는 석조물>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카운터 근무 중인 분께 "혹 관장님 오늘 출근하셨냐" 물어보니, "어린이박물관 개관행사 하시고 조금 전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아, 오늘 나왔었구나. 서울로 출발했겠지 하면서, 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괜한 사람 붙잡을 수는 없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사진기를 꺼내 그것을 켜고는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혹시나 하고는 밧데리 상태를 확인하니, 뿔싸, 깜빡깜빡 앵코 직전이라는 신호가 연신 들어왔다. 보조 밧데리를 넣어왔는가 하고는 온 가방을 다 뒤졌더니 없다. 보통 사진 가방째 매고 다니다가 요새는 일반 울러매는 가방으로 바꾸어 그 안에다가 잔뜩 사진기랑 렌즈랑 플래시 등등을 넣어다니곤 하는데, 그만 충전해 놓은 보조 밧데리를 사진가방에다 그대로 놓고 왔나 보다. 힘이 죽 빠진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요샌 폰카로도 그런대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세상이므로, 폰에 의지하기로 했다. 


언제 밧데리가 죽을지 몰라, 꼭 필요한 장면만 그 카메라로 촬영하기로 하고는 우선 내가 이것만은 반드시 좋은 화질로 담으리라 다짐한 코너들을 물색했다. 이래저리 김상태 관장이 그간 소개한 새 전시실이라든가, 다른 분들이 여러 매체로 소개한 것들을 버무리니, 우선 오백나한상을 담아야 했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나한상 모신 곳을 물으니 2층이란다. 곧바로 그곳으로 튀어올랐다. 


전시실 입구엔 '3 강원의 중세'라는 간판을 내달았으며, 그 입구 저편으로 펼쳐지는 내부를 보니 볼 만했다. 나중에 죽 훑어보고 알게 됐지만, 보통 '중세'라고 하면 고려시대만을 특정하는 데가 많지만, 춘천박물관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별도로 고려실과 조선실을 구분치 아니하고 한데 엎쳐 놓았다. 

<중세실 불상>


역시 이래서 상설전시실도 일정한 주기로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준다. 춘천박물관은 2002년 개관한 신생 축에 속하는 문화시설이기는 하나, 이곳도 이미 개관 십여 년을 넘기면서 새단장이 필요했다. 박물관 규모가 크지 아니한 까닭에 박물관 전체를 폐쇄하다시피 한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해 10월에 마침내 다시금 문을 열었다. 그 전과 비교하니 격세지감은 맞다. 새로운 시대감각에 맞추어 시원시원하게 만들어놨다. 


국립박물관 역사에서 이영훈 시대는 획기를 이룬다.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전 정권 마지막 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그는 두 박물관장 재임 시절에 새로운 전시기법을 도입해 단순무식하게 말하자면 '질보다 양'으로 박물관 전시 방향을 바꾸었으니, 그간 소위 백화점 명품 코너 위주 전시를 유적 전체 맥락을 이해한다는 방향에서 해당 유적과 관련 있는 유물은 모조리 다 내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재개관 춘천박물관 역시 그런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특히 중세실을 필두로 1층 선사실과 고대실에서 이런 경향은 농후해 고려조선시대 문화소개에 초점을 맞춘 중세실에서는 영월 창령사지(蒼嶺寺址) 석조 오백 나한상 전시는 그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들 석조나한상은 영월군 남편 창원2리 1075번지 일대 경지정리 과정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2년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 배치 양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나한상을 파편까지 포함하면 도대체 총 몇 점이 수습되었는지 헤아리기도 곤란할 정도로 많다. 완형만 해도 100점에 육박할 듯하다. 조선시대 작품인데 전부 화강암 재질이거니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고 중복되지 아니한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라 할 만하다. 히잡 혹은 숄을 머리에 걸친 아줌마 비스무리한 나한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45도 각도로 치켜 올린 나한도 있어 각양각색이다. 한데 하나같이 나한은 눈을 제대로 뜬 이는 없고 면벽을 하는지 지긋이 감은 표정이다.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이걸 한 군데 벽면을 터서 총 4개 정도 되는 단 혹은 감실을 마련하고 배열한 전시기법이 탄성을 자아낸다. 이제 우리 박물관도 이렇게 시도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격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바뀌고 세대가 교체되니 이런 전시기법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비단 이만이 아니라, 세부 코너 하나하나는 이런 식으로 해당 시대 혹은 해당 유적을 온전히 이해하게끔 했으니, 보기 좋은 떡만을 아무렇게나 골라놓고는 이것이 한국문화라는 자랑을 윽박하기에 여념이 없던 김재원 최순우 황수영 김원룡 한병삼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시대와는 격세지감이라 하겠다. 




이런 곳으로 또 하나 인상적인 곳이 1층 역사실 중도 코너다. 중도....의암호가 사방을 둘러친 북한강 수중섬인 중도는 요새 래고랜드 사업으로 분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거니와, 그 일환으로 대대적인 발굴조사 결과 실로 엄청난 성과를 쏟아냈으니, 고인돌만 해도 100기를 상회하고, 해당 시대 주거지는 천기를 넘었으며, 초기철기시대 유적도 드글드글한 곳으로 드러났다. 이 중도는 한국고고학에서는 중도식 무문토기 존재를 알린 곳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의가 있다. 


물론 중도식 무문토기는 그 전에 이미 1964년 광주 풍납리토성에서 존재를 알렸지만,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실습발굴조사에서 확인한 까닭에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는 그만 그 영광을 중도로 넘겨주어야 했다. 중도 유적은 80년대초 국립박물관 조사에 의해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졌거니와, 역시 국립박물관 힘이 센 까닭인지 그네들이 명명한 중도식 무문토기라는 명패가 대세를 장악했다. 중도식 무문토기란 경질무문토기라고도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무문토기 전통을 계승하되, 소성도를 높임으로써 토기 혁명을 이룩한 것으로 간주되거니와, 중심연대는 서력기원전후가 아닌가 하며, 집중 분포지역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이다. 


<창령사지 오백나한상>


춘천박물관에는 이 중도식 무문토기만 수백 점을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이것 역시 짙은 이영훈 영향이며, 더 범위를 넓히면 일본에서 더러 시도하는 것으로, 일본 국립박물관에서는 그런 종적을 찾기는 힘들되,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에서 주로 시도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이런 전시기법은 무엇보다 압도적인 시각효과를 주는 까닭에 고고학 문외한한테도 이것이 고고학이라는 깊은 인상을 주기 마련이며, 나아가 관련 유물 몇 점 표본으로 뽑아다 놓고는 설명만 잔뜩 갖다 붙이는 종래의 주입식 문화재 교육과도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할 만하다. 


<중도식 무문토기>   


기타 주목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으나, 차후 기회를 다시 엿보기로 하고 이 두 가지만으로 맛배기를 보인 것으로 갈음하노라.  


<중도식 무문토기>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강원 춘천시 석사동 95-3 | 국립춘천박물관
도움말 Daum 지도

<2017. 2. 9 저녁 경주 황남맷돌순두부에서> 


내 페이스북 계정에서 '과거의 오늘'을 훑으니, 작년 오늘이 미술사학자 호불(豪佛) 정영호(鄭永鎬·1934~2017) 선생이 타계한 날이라, 관련 포스팅이 뜬다. 이날 나는 경주에 있었는지, 다음과 같은 짤막한 말로써 소식을 전했다.  

《부고》

호불 정영호 선생이 타계하셨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추후 전하겠습니다.

듣자니 오늘 경주에서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는 모양인데, 그의 지인과 제자들이 주동이 되어 비석을 마련한 모양이며, 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감포 이견대 인근일 것이다. 호불은 이곳에다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4~1944)과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1918~2010)과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1918~2010) 기념비를 세운 바 있다. 진홍섭 기념비가 맨나중에 섰는데, 그 한 쪽 자리가 비어 주변에서는 호불이 자기 기념비를 위한 자리로 남겨놓았다는 말이 좀 있었으니, 그 내막이 무엇이건 결과로 보면 그리 된 셈이다. 


내가 이 소식을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먼저 전한 까닭은 당시 나는 야인인 까닭이다. 작년 오늘 다른 포스팅을 보면 연합뉴스를 상대로 하는 해직무효소송, 그리니깐 복직 소송 2심에서도 내가 이겼다는 소식이 있다. 그 판결 소식을 나는 경주에서 전화로 변호사를 통해 통보받았다. 내가 하필 이날 경주에 있던 이유는 앞 포스팅에서 약속한 같은날 '자세한 소식'에서 드러난다.   

《고 정영호 선생의 마지막 일화》


전날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도교 강좌를 한 나는 경주서 그날을 유숙하고 이튿날인 지난주 수요일 오전 선문대 특강을 위해 아산천안발 ktx를 플랫폼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런 나를 누군가 아는 체 하며 말을 걸어오는데 성림문화재연구원장 박광열 형이었다. 경주에 들리면 반드시 연락하는 형이지만 요즘 그러지 못한 까닭은 형한테 피치 못할 바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인 일이냐니 이러저러해서 서울로 급거 상경하는 일이라 한다. 정영호 선생이 쓰러졌단다. 새벽 사모님 연락을 받고 상경하는 길이라며 소생할 가망은 없단 말을 들었다 한다. 이날 낮 열두시에 중환자실 면회 때 아마 마지막 인사를 해얄 거 같단다. 전날 저녁에만 해도 청로회라 해서 문화재업계 원로들 친목 모임에 나가 그리 즐기는 술과 담소를 여느 때처럼 하고 기분좋게 귀가해 자다가 새벽에 변이 닥쳤단다.


그러면서 형은 일단 함구를 당부했다.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나는 지키지 않았다. 이내 조선일보 문화재 담당 허윤희 기자한테 사정을 알리면서 선생의 부고를 준비하라 부탁했다. 그리한 까닭은 워낙이나 고인이 허 기자를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고선 나로선 비록 현직기자는 아니었지만, 서영일 한백문화원장에게 일이 생기면 즉각 연락을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다. 서원장은 고인의 제자이며 더구나 그 이사장 박경식 단국대 교수는 그 수제자로 고인의 뒤를 이어받았다.이미 유가족은 장지 물색까지 들어갔고 박 교수 역시 비상대기 상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더는 소식이 없어 연명치료가 계속되나보다 했다. 참 묘하다. 허 기자가 오늘 아침 고인의 안부를 물은 카톡 메시지를 나한테 보낸 직후 단국대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이 운명하셨단다. 나는 이 소식을 다시 경주에서 접했다.


지금 내 폰엔 고인의 생전 대담록 세 시간 분량 녹취록이 있다. 얼마 전 성림문화재연구원이 황복사지 인근 발굴성과를 발표한 그날 고인은 경주에 있었다. 불국사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저녁 무렵 성림 사무실에 있었다. 그날 나 역시 발굴현장에 있다가 선생이 계시다는 말을 듣곤 찾아갔다.


무슨 계시가 있었는지 모르나 녹취를 따야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사무실에 가니 한겨레 노형석 기자는 그 한 쪽에서 열심히 기사 작성 중이었다. 나는 폰을 꺼내 녹음기를 털었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풀고자 했으며 그런 물음에 고인은 신이 나는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그러는 사이 신라왕경조사단 사무실에서 기사 처리한 허윤희 기자가 합류하고 어찌어찌하다 자리는 저녁 식사 자리로 옮겨갔다. 나는 일부러 고인 자리 맞은편에 앉아 녹취를 계속했다.


고인 역시 사람이라 호오가 갈린다. 하지만 고인 그 자체가 한국문화재 근현대사다. 황수영 진홍섭 박사를 사사한 그를 빼고 20세기 한국문화재사 한국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거인이다. 그는 울트라 수퍼 거인이다. 그런 고목이 쓰러졌다.


그때 따지 못한 녹취는 시간나는 대로 보완한다 결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허여하지 않고 그가 그토록이나 섬긴 부처님이 그를 이끌었다. 아마도 고인에겐 마지막이었을 이 녹취록을 나는 월간 문화재사랑 기고문으로 정리하려 한다. 


극락왕생하소서.


빈소 :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30호실(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3길 88)

발인 : 2017년 4월 10일 월요일 08시.

1차 장지 : 서울시 서초구 양재대로 12길 74 서울추모공원(10시 10분 ~ )

연락처 : 02-3010-2230(빈소 연락처)

<2017. 2. 9 저녁 경주 황남맷돌순두부에서> 


작년 2월 10일에는 나는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페이스북 내 계정에다가 했다. 이에는 아래에서 말하는 그날 내가 내 폰으로 포착한 사진 2장이 첨부됐다. 

 

엊저녁 성림문화재연구원 뒤풀이 자리서 이 재단 명예원장인 정영호 선생과 자리를 함께했다. 주민등록상 1934년생이지만 내가 듣기론 1930년 3월생인 고 창산 김정기 박사와 동갑이다. 여쭈었다. 누가 위시냐고? 


"내가 그 놈보다 생일이 빨라"


녹취록을 풀어봐야겠지만 한달인가 빨랐다. 한데 그보다 한 달 더 빠른 이가 맹인재 선생이라 한다. 선생은 문화재위 창립 당시 제1호 전문위원이라 한다. 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합쳐 도합 43년을 재직했다 한다.


아마 9일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의 빈소가 차려진 아산병원으로 찾아가 그의 마지막을 배송했다. 이 무렵 나는 야인으로서 문화재청이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인 《월간문화재사랑》에 정기기고를 하는 중이었다. 한국 문화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생존자를 한 사람씩 인터뷰 하는 형식이었으니, 그해 1년간 계속한 이 시리즈에서 호불은 유일한 고인이었다. 


호불 역시 다룬다 내심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느닷없는 타계로 일정에 급변동이 생겨, 그해 5월호 잡지에다가 그 몇달 전에 녹취한 자료를 토대로 인터뷰를 꾸몄다. 아래 첨부물이 바로 그것이다. 


http://m.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9362&bbsId=BBSMSTR_1008&pageIndex=2&mc=MS_05_02


그의 빈소에서 호불 제자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인터뷰 분량은 세 시간 정도 된다. 인터뷰는 그것을 대담식으로 단순히 풀어놓는다고 해서 대담록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피와 살을 붙이는 일은 인터뷰어의 몫이다. 증언과 회고에는 항용 오류와 과장 축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판단하는 몫 역시 인터뷰어다. 짧은 지면 제한에 인터뷰 내용을 첨삭해 인터뷰를 꾸몄다. 


앞선 포스팅에도 잠깐 보이지만, 고인은 나이가 언제가 의문이었다. 주민등록상으로는 분명 1934년이지만, 본인은 언제가 그것이 오류임을 주장했다. 그를 오래 안 사람들도 잘 몰랐고, 그의 제자들도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지만, 누구도 몰랐다. 내가 저 만남에서 굳이 그것을 물은 이유는 이런 의문이 많았고, 주변에서도 항상 의심을 한 까닭이다. 


그와 생전에 참으로 가까웠던 1930년생 창산 김정기 박사와는 언제나 친구로 지냈으니, 이는 호불이 실제 출생한 해가 1930년이라 주장한 까닭이다. 창산은 그런 줄로 알다가 언제인가 외국에 여행을 함께 가다가 여권에 호불 출생연도가 1934년으로 적힌 걸 보고는 충격을 받고, 배신감을 느껴 한동안 말을 하지 않은 일도 있다고 한다. 나이를 속였다 해서 말이다. 


본인은 분명 1930년 생이요, 더구나 창산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르다 했지만, 이것도 믿을 수는 없는 듯하다. 그의 빈소에서 그와는 비교적 가까운 친척이요 제자이기도 한 어떤 이를 만났더니, 그 역시 이를 믿을 수 없어, 빈소에서 만난 호불 친계 가족을 대상으로 이를 탐문했더라. 빈소에서 호불 친동생을 만나, 이를 캐물었더니, 뿔싸, 호불은 1934년생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는 영원한 미제로 남길 수밖에 없을 듯하나, 각기 다른 증언을 채록해 둔다. 


<2017년 5월호 월간문화재사랑>


호불은 문화재계 지인 몇 사람과 청로회(靑老會)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에는 당연히 창산과 호불이 포함됐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한 김동현 박사 역시 단골이었다. 호불이 떠난 직후 김동현 박사를 만났더니, 고인의 마지막을 전했으니, 그것을 나는 4월 22일 페이스북에다가 다음과 정리했다. 


<<김동현 박사가 전한 정영호 박사 마지막 모습>>

4월 1일, 언제나 그렇듯이 청로회(靑老會) 모임을 종각 역 인근 중국집 안래홍에서 했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 오후 5시에 그곳에서 모인다. 그날도 같이 모였다. 그날이 마침 정 박사 생일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생일 케익도 켜고 했다. 나도 청로회 멤버다. 그렇게 담소하고 즐겁게 보내고 헤어져서 집에 가셨다가 그 다음날 새벽 화장실에 가시다가 쓰러지셨다. 


청로회 멤버 중 벌써 4명이 갔어. 씁쓸해...이젠 청로회도 힘들 거야. 정 박사가 회장이었고, 모임을 주도했는데 가셨으니 힘들지 않겠어?


***오늘 어떤 자리에서 뵌 김동현 박사 전언이다. 

박사껜 죄송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김박사를 비롯한 원로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면, 녹음기를 튼다.


기타 고인과 얽힌 일화 서너 개가 있으니, 언제 짬을 내볼까 한다. 


<호불 정역호 박사 공덕 추모비 제막식...2018. 4. 7>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