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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의뢰로 무장읍성을 연차 발굴 중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올해 조사에서 비격진천뢰를 수습했다는 소식은 대략 한달 전쯤 접했으니, 당시엔 한두 점이었다. 그 무렵에는 좋은 것 찾았다. 언론 한 번 타겠다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격진천뢰는 그 이름이 유명한 까닭에 더러 실물이 있을 법했지만, 고작 6점밖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익히 보도된 대로, 2점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을 뿐, 그나마 파편 형태였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사정이 일변한 것은 대략 보름전쯤이었다. 비격진천뢰가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것이 단편으로 몇 점 수습된 인근 수혈 유구에서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 사진을 보고는 첨엔 공룡알인 줄 알았다. 이젠 사정이 일변했다. 나는 현장을 비록 떠났지만 그래도 기자다. 기왕 좋은 발굴성과 그에 걸맞는 대접이 있어야 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을 만나 말했다. "누님, 고창 다녀와야겠소. 가서 후횐 안할 거요. 관련 자료 등등은 내가 준비시킬 테니, 청장 되셨는데 현장 가서 폼 좀 잡으시고, 현장 격려도 하시고, 무엇보다 지금 문화재청과 지자체간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데, 이번 기회에 그런 관계도 개선할 기회이니 꼭 다녀와야겠소." 


이 과정에서 곡절이 좀 있었다. 문화재청 발굴제도과에도 보고되지 않은 정보를 청장이 던지면서, 고창에서 이런 것이 나왔으니 내려가겠다 했으니, 뭐 기분이야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발굴제도과에는 조금 미안하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 못할 곡절도 없지는 않다. 그건 훗날 기회가 되면 말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우당탕당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는 결국 어제 현장 공개가 있었고, 그 자리에 문화재청장이 참석했다. 정재숙 청장으로서는 사실상 첫 발굴 현장 방문이었다. 




그 사이 이렇게 노출한 비격진천뢰를 두고 막판까지 확인 작업을 거쳤으니, 조사단에서는 내부 CT 촬영인가를 통해 그 가능성을 한층 높인 한편, 그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으니, 이 고된 작업을 수행한 이가 실은 기호철 선생이었다. 기 선생은 비격진천뢰에 관련한 자료들을 쏵 조사해서 그것을 정리했다. 기호철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정과 그 방대한 조사 능력을 익히 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이 포탄이 비격진천뢰임을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른 것이다. 


오늘은 훗날 기억을 되살리는 고리를 삼고자 이 얘기만 간단히 해 둔다.  


첨부사진 두 장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 둔다. 이 사진은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촬영한 것인데, 현장 공개 당일, 연구원에서 배포한 사진이 도저히 현장감이 나지 않아 내가 쪽샘지구 발굴현장 오세윤 작가 사진을 보내주면서, 이런 식으로 인간미 나는 사진으로 대체하라 해서 당일 급하게 조사단이 찍은 것이다. 고로 이 사진 저작권 절반은 김태식한테 귀속한다!!!!!! 








 

 

전국 읍성 중 아름답기로 고창 모양성 만한 곳 없고 그 객사 건물로 가장 잘 남은 곳 중 하나가 같은 고창군 무장읍성이라.


이 무장읍성을 고창군이 연차로 발굴정비를 기획하곤 발굴은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한 바,  올해 조사에선 공룡알 같은 철포탄 11점이 쏟아지는 개가를 고했으니, 비격진천뢰가 그것이다.


오늘 그 발굴성과를 대국민한테 공개하는 바, 이번 발굴을 통해 비격진천뢰에 대한 조망이 본격화하길 기대해 본다.


오늘 긴한 개인 일정이 있어, 그것도 모른 채 덜커덩 해버린 다른 약속을 취소하며 6시가 넘자마자 그 자리를 가려 일어서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울린다. 이름이 뜨는데 유진룡 장관이다. 순간 느낌이 좋지 않다. 

유 장관은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어차피 수림재단이랑 우리 공장이 함께 제정 시행하는 수림문학상 올해 시상식이 내일 수송동 우리 공장에서 있을 예정이라, 내일 만나야 한다. 그 자리를 빌려 유 장관 인터뷰를 할 작정이었다. 그런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먼저 했으니 뭔가 긴급한 사안이라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인즉 이성원 차장이 별세했단다. 하필 이럴 때 그 예감이 이런 식으로 적중할 게 뭐란 말인가?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오른쪽이 유홍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요새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리긴 했지만, 그래서 전화도 받지 않는다 해서 나까지 형을 괴롭힐 일은 없다 해서, 또 따로 연락을 한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어달 전쯤 어느 밤이다. 문화재청을 퇴임한 김상구 과장한테서 전화가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이 차장님이 통 연락이 안 되는데 아프다는 말이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하기에 "글쎄, 금시초문이요" 했더니, 김 과장이 버럭 화를 내면서 "사람이 왜 이래? 형님 형님하면서 그렇게 따르더니, 대체 차장님 근황도 모른단 말이오?" 하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어안이 벙벙해 무슨 일인가 수소문에 들어갔으니, 형이 매양 어울리는 문체부 멤버 중에 최규학 전 기조실장이 있어 전화를 넣으니 받지 않아, 할 수 없이 형과 단짝인 유 장관한테 전화를 넣었더랬다. 나중에 유 장관이 콜백을 해서 하는 말이 "요새 몸이 안 좋다. 그래서 연락도 통 끊고 지낸다. 지금은 그냥 조용히 놔두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까지 괜히 심란케 할까봐, 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당시 사정을 보면, 내가 전화했더라도 아마 받지 않았을 성은 싶다. 그래도 이리되고 보니 맘이 아프다. 목소리라도 들어둘 걸....

이성원 (李成元). 1956년 9월 28일생인 그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행정고시 23회(24회가 맞다는데 일단 우리 공장 인명사전을 따라 23회라 해 둔다)에 합격해 공직에 발을 디딘 문화부 정통 관료였다. 내가 형과 본격 연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형이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추진기획단장을 맡으면서였다. 새용산 국립박물관 개관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장이었다. 그의 관료 인생은 2006년 문화재청 차장에 임명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내가 알기로 그 자신은 문화재청 차출을 내켜하지 않았다. 비록 1급 차장으로 승진이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문화부로 남고 싶어했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청 차장 전출을 그 자신은 밀려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내가 직접 물은 적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건 머하러 물어쌓노"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만 50세에 오른 1급 문화재청 차장. 관료로서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이 1급을 그가 왜 그리 내켜하지 않았는지는 나이가 조금은 설명이 될 듯하다. 1급은 언제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만 50세 1급은 곧 퇴직 준비이기도 했으니,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화려한 듯한 그의 공직 생활은 결국 차장 생활 2년 만에 끝이 났으니, 다름 아닌 숭례문 방화사건이 그 직접 도화선이었다. 2008년 2월 9일 발생한 숭례문 방화사건은 그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책임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는 결국 옷을 벗었다. 자발로 벗고 말았다.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 2008. 2. 11


그가 옷을 벗기 직전,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각종 호사를 누린 채 유유히 사라져갔다. 이미 청장 생활만 3년 반인가를 하면서 물릴 대로 물린 그는 이 사건이 그 짐을 훌훌 털어버리는 구실이 되기도 했으니, 때마침 방화사건이 터진 그때, 대한항공 후원을 받아 부부가 유럽 여행인가 떠난 상태라 해서 동아일보에서 얻어텨져 청장직을 내려놓았다. 

유홍준이 떠난 자리를 이성원이 외롭게 지켰다. 그것이 대략 마무리될 무렵, 그는 미련없이 옷을 벗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을 질 사람이 그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공직을 떠났다. 만 52세. 그렇게 떠난 그는 긴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아까운 인재임을 적어도 문화계 주변에서는 누구나 알았기에 이런저런 자리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그는 물리쳤다. 

그러던 그가 다시금 공직 사회 주변에 나타난 것은 2012년이었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국외소재문화재단을 출범했으니, 이를 실질로 이끌 사무총장으로 일찌감치 그를 낙점하고는 섭외에 나섰던 것인데, 이 지랄 같은 양반이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설득에 겨우 넘어가 마침내 그 초대 사무총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무실이 우리 공장 인근 이마빌딩이었다. 이곳에서 2004년까지 일한 그에겐 나름 좋은 일 하나가 있었으니, 그와는 단짝인 유진룡이 박근혜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는 그것이다. 

유 장관은 재단을 물러난 그에게 한국관광공사 비상임이사 자리를 주었으니, 비상임이라 부담은 없었으나, 이성원 자신의 말을 빌리건대 용돈벌이는 되는 그 이사를 2014년 이후 2016년까지 지낸 것이다. 

그는 똥고집 대마왕이묘, 자존심 대마왕이었다. 그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고, 자존심은 더럽게 셌다. 그리고 성질이 더럽게 급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그렇다고 적절한 타협을 몰랐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 나름대로 정무감각도 있었다. 막 나가는 유홍준을 그나마 제어한 것도 이성원이었다. 유홍준이 청장 재직 시절, 각종 논란이 휘말렸을 때도, 그를 끝까지 보호할 줄도 알았다. 이것이 비호 혹은 덮어두기일 수도 있거니와, 대표적인 건이 유홍준 부여 별장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뇌관을 잠복하고 있거니와,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기회를 보고자 한다. 

그는 자리 욕심이 없었다. 차장 퇴임 이후 그에게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문화재청장 하마평이 오를 때마다 그는 늘 1순위였다. 그렇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다. 변영섭이 반구대로 왔다가 반구대와 함께 불과 7개월만에 침몰했을 때, 그 후임 1순위는 이성원이었다. 망가진 문화재청을 그나마 바로세울 적임자라 해서 그는 1순위로 청와대에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한사코 거부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강남 그의 자택을 야밤에 쳐들어가 밤을 새워가며 설득한 일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그 초대 문화재청장을 찾았을 때도 이성원은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적임자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후배 문화재청 차장 A를 한사코 밀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김종진 청장이 1년 만에 물러나자 다시 그는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부했다. 다만 이때 이미 병마가 깊은 때라, 이전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것이 단순한 회피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갈 줄은 미쳐 몰랐다. 

형은 나한테는 사표였다. 때론 말이 험하기는 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가 주는 강렬한 포스가 있었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공직자였다. 낭만을 알았으되, 난잡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이었다.  

몸이 망가져가는 그런 순간에도 아끼는 후배가 공직을 떠난 뒤 환갑을 맞았다면서,  그 후배를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려 갖은 고역 끝에 회고록을 집필해 낸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이 불과 두어달 전이었다.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하면서, 그 책을 좀 읽어보라며 던져준 사람, 이런 사람이 문화재청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원이다. 

아!

그런 사람이 갔다. 



원주 흥원창(興元倉, 興原倉)은 한강 두물머리 중 하나로, 섬강과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이라, 본래는 이 근처에 설치된 조창 이름이나, 지금은 이 일대 지명으로 흔히 쓴다.

그 보세 창고가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없고, 어디서 구해다 놓은 거대한 돌덩이에 안내판만 덩그럴 뿐이니, 조선 후기 그것을 표시한 그림이 남아 희미한 자취를 더듬을 뿐이다.


한반도는 산악 천지라, 육상 수송이 실상 불가능해 이런 내륙 수로로 물자와 사람이 움직였으니 원주가 도회로 발전한 힘이 강이다.

더구나 그런 강줄기가 두 군데서 합류하니 이 일대엔 뽀쁘라마치가 있었고 주모들이 손님을 유혹했다.


합류한 강물은 스테로이드 막 복용한 마이크 타이슨마냥 몸집과 힘을 불려 서쪽으로 치닫는다.

그 힘으로 경복궁 중건에 쓴 목재도 실어날랐고, 퇴계도 안동 오가는 길목에 이곳을 지났다. 물은 그만치 힘이 있었다.


헤르만 헤쎄였던가 아님 그가 그린 싯타르타였던가? 구도에 나선 그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곤 깨달음을 얻는다.

설피 그 흉내 내려하나 허여된 시간이 짧기만 해서, 그 좋기도 하다 하고 실제 두어번 경험한 그 짜릿 황홀 오르가즘 같은 이곳 낙조도 다음번을 기약하며 담배 한 개피 훅 빨고는 발길을 재촉한다.

그래, 낙조를 만난다한들 무에 달라지겠는가? 회한만 더할 뿐이다.

한숨 하나 보태 실어보낸다. 그 한숨 한강 어구로 흘러 바닷물에 휘말려 구천 떠돌다 어디로 갈지 모르나, 여기 한 사내 푸념하고 갔노라 새긴다.

외우畏友 김태형 선생이 역작을 냈다. 기간其間 이 책 완성을 위해 김 선생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내가 익히 알거니와, 원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그가 쏟은 피땀은 그의 페이스북 기간 관련 포스팅을 대강 훑어도 안다. 부석사에 대한 오해와 신화를 실체의 영역으로 돌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바, 이번 책에는 그런 흔적이 오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번 책이 정말로 발로 썼다는 점이다. 2018년 11월 현재, 전남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인 김 선생은 이곳에 안착하기 직전까지 다름 아닌 부석사에서 4년 반을 근무했다. 그의 말마나따나, 그는 이 기간 24시간을 부석사에서 지냈다. 숙소가 다름 아닌 절간이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부석사 실체 해명을 위해 그는 부석사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의 손때가 묻은 부석사성보박물관을 가 보면, 무수한 출토 문화재가 전시 중이거나 수장고에 있거니와, 이들은 김 선생이 채집 혹은 수습한 것들이다. 나아가 이 일대 공사판은 반드시 참관해, 땅속에서 혹여 귀중한 유물 유적이 없나 살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부석사 해명과 관련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講堂'이 라는 명문 기와를 찾아냈는가 하면, 안양루 바닥에서는 불탄 흔적을 발견하고, 금당 추정지를 밝히기도 했다.



선생을 알게 된지 대략 6~7년간 그의 글 솜씨는 어떤지 내가 미쳐 몰랐다. 교계 관련 신문에 연재한 글 몇 편은 지나치며 보기는 했고, 더구나 내가 만드는 데 관여한 단체에서 논문 발표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문필가로서의 김태형이 어떤지는 가늠이 힘들었다. 한데 막상 나온 책을 보니, 그는 그 누구보다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문필가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석사는 잊어라고 주문한다. 그러먼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왕명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를 둘러싼 여러 팩트를 체크한다. 예컨대 흔히 무량수전에 안치한 아미타불이 왜 동쪽을 향하는지에 대한 여지없는 신화 붕괴를 시도한다. 동아시아 사찰에서 대웅전 석가모니나 아미타전 아미타불 같은 부처는 거의 예외없이 남쪽을 향해 북쪽 중앙에 정좌한다. 하지만 이곳 무량수전은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 책은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한다. 무량수전은 애초에는 '강당'이고, 부처를 모신 금당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지금은 무량수전이 부석사 금당(金堂)이자만 옛날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본래의 금당이 현재 부석사 경내 자인당에 봉안된 보물 제220호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이 본래 있던 곳으로, 일부에서 동방사지(東方寺址)로 알려진 곳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동방사지도 동방사라는 절터가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던 절터'라는 뜻이라고 바로잡는다. 

그렇다면 무량수전은? 본래 강당인 까닭에 그것을 금당으로 전용하는 과정에서 할 수 없이 지금과 같이 무량수불을 서쪽 끝에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와 관련해 흔들림없는 통설처럼 군림하는 논리는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므로, 서쪽에 위치하며, 그런 까닭에 동쪽을 바라보게 배치되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다른 아미타전 아미타불이 예외없이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정좌한 이유를 전연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한 논리였다. 

아울러 저자는 조선시대 기행문 분석을 토대로 당시 부석사로 진입하는 동선이 현재와는 달리 지금의 천왕문 부근에 동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낸다. 이런 분석들을 통해 부석사는 전성기에 사역이 현재보다 최소한 3~4배가량 더 넓었다고 말한다.  

지금의 부석사라고 하면 무량수전과 함께 거대한 석축 또한 또 다른 상징이다. 부석사 경내에 여러 층으로 구성된 석축을 삼배구품 혹은 화엄십지를 상징한다고 거의 모든 부석사 관련 설명이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터무니없는 말로 내친다. 그에 의하면 구품은 전체 축대 갯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수전을 떠받든 석축 높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즉, 석축 높이가 9층으로 이루어져, 이를 두고 구품연대라고 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책은 부석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부석사와 벌인 피나는 전쟁의 증언록이다. 저자는 부석사와 싸워 그 부석사를 덧씌운 신화들을 벗겨냄으로써 새로운 부석사를 우리한테 안겼다. 

물론 이에서 주장한 저자의 주장 혹은 학설 중에서도 혹 손봐야 할 곳이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높이치는 대목은 상식과 통설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그 저항정신의 표본이 김태형의 이번 부석사다. 그는 부석사를 때려부수고 새로운 부석사를 지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제2, 제3의 부석사 중창이다. 

256쪽, 19,000원, ISBN 979-11-88297-05-4  03610, 도서출판 상상창작소 봄



은행 단풍 제철이라, 미쳐 날뛰는 그 무수한 가을 은행 중에서도 내 보지 못하고, 그러면서 인구人口에는 아름답다 회자하는 그런 곳 골랐으니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그것이라. 지난 주말, 하릴없고, 또 그닥 쓰임새는 없는 듯하나, 그래도 나를 찍어주는 기록사 겸해서 어떤 이 대동하곤 나섰으니, 마침 그날 동제가 있는 날이라 잔치판 벌어지고 풍악이 울리더라. 


원망遠望하니 주변, 특히 산과 조화한 랜스케입 압도적이라 왜 이 나무를 첫손 둘째손 셋째손에 꼽는지 알겠더라. 다가서니 바닥에 노랑물 흥건 쓰나미라, 하마터면 놓칠 뻔했으니 때맞추어 왔음에 적이 안심이다. 살피니 둥치 서너 갈래라 , 서 살피니 크게 둘로 짜개졌으니 한 가지에서 갈라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가 세포분열한 느낌이다. 못 살겠다, 갈라서자, 그랬지만, 멀리 도망가진 못하고 연리지마냥 붙었더라. 


나무 나이야 연예인 나이만큼 나이롱 뽕이라, 이곳 고을 사람들이야 팔백살을 주장하며, 왜 그런 내용을 안내판에 담지 않느냐 관계 당국 닥달하는 모양이나, 내 보기엔 택도 없어 그보단 훨씬 젊다. 저같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두 그루 아니어니, 용문사인가 그쪽 은행나무 800살인가 주장한단 말은 들은 듯하나, 기타 좀 솔직한 데는 대략 500년을 내세우는 일 많으니, 그 500살이라는 그들 나무 견주어도 이쪽은 한참이나 동생 느낌 난다. 수체樹體 아름답고 넓은 까닭이야 현장에서 보니 입지조건과 짜개짐에 따름이다. 여타 은행이 공중으로, 공중으로, 더 높이, 저 멀리를 향해 달려가는 공중부양을 선택했을 적에, 이 반계리 은행은 땅으로 향해 펑퍼짐을 택했으니, 그것이 묘한 대비를 이루어 장관을 빚어난다. 


처자들 이런저런 바람이 들어 노랑물 떠가느라 여념없다. 이곳 관장하는 원주시청 공무원 박종수 선생 전언을 빌리자니, 이 나무를 둘러싸고 골치아픈 민원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왜 나이 800살을 안내판에 적지 않느냐이며, 다른 하나가 저 보호막 넘어 왜 사람들이 들어가냐라 한다. 

팔백은 천부당만부당이니, 다만, 그런 욕망을 그런대로 담고자 한다면야, 안내판에 고을 주민들은 팔백살이라 말한다는 대목 하나만 넣으면 될 것이요, 두번째 보호막과 관련해서는 저것이 낮아 사람들이 들어간다 하는데, 고을 사람들아, 역발상을 왜 하지 아니하나? 

첫째, 보호막은 누가 어떤 생각에서 쳤는지 모르나, 하등 씨잘데기 없는 거치물이니 저거 뽑아 고물상에 넘겨 그 돈으로 마을 잔치하면 될 것이요, 둘째, 사람들 들어간다 해서 높이쳐서 막으면 누가 저 나무 보러 가겠는가? 나아가 저걸 보호막이라 하지만 왜 보호막을 설치해야 하는지 근간에서 의뭉스럼 일거니와, 언제 저 나무가 사람과 유리하고자 했겠는가? 넷째, 무엇보다 저 나무 곂에 다가서는 아니 된다는 그 어떤 법률적 제재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호막 넘어 들어가도 하등 법범 행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종수 관장한테 이르노니, 당장 저 보호막인지 뭔지 다 주워뽑아버려라. 

저 보호막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뭐 생각이야, 시작이야 그럴 듯 했겠지만, 내가 저곳에 닿는 순간 저 보호막 보고는 뒷골이 땡겼다. 한데도 저 보호막이 고을에서는 저 나무를 범접해서는 아니되는 그런 신수神樹로 만들기도 하니, 뭐 그렇다면야 내가 그 의지를 찬동하겠지만, 괜한 긁어부스럼 왜 만들었단 말인가? 



The Buddha of the Lake



《Archaeology》 매거진 May/June 2017호에 실린 기사를 뒤늦게 트위터를 통해 접했다. 이 잡지 보도에 의하면 중국 남동부지역 (복건성) 도시 푸저우(福州) 수력발전소 건설과정에서 1950년대에 건설한 댐에 수몰한 명나라시대 강안 마애불상이 느닷없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머리와 어깨까지 드러난 이 불상은 수중 조사 결과 전체 높이 12피트에 달하며 그 바닥에서는 절터 흔적이 드러났다. 


주목할 점은 이 절터와 불상이 들어선 위치. 강물이 굽이치는 강안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아마도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곳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식으로 보아 마애불은 명대(1368~1644)로 간주된다. 


이 일대는 북쪽으로 흘러 양자강에 합류하는 지류를 막는 댐 공사를 하면서 1950년대에 수몰됐다. 이렇게 형성된 호수를 홍문수고洪門水庫라 한다. 그러다가 최근 이 일대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게 되고, 그 일환으로 수위를 낮추는 과정에서 이 불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이 불상과 절터 처리가 어찌되었는지는 내가 아는 바 없다. 다만, 그 모습을 보노라니, 우리네 반구대 암각화랑 처지가 비슷하거니와, 그런 점에서 이를 둘러싼 중국 당국 움직임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우리처럼 호들갑인지 등등은 비교검토하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본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


천오백년 부동자세로 섰다가 

글자는 거의 다 지워지고

모자는 잃어버렸으며

몸통엔 총까지 맞았으니

곳곳이 생채기라

견디다 못해 중환자실로 갔다. 



가방을 열고 사진기를 찾았다. 뿔싸 정작 카메라만 없더라. 렌즈만 잔뜩 쑤셔박아 왔더라.
낭패다. 오늘 아니면 다시 내년 가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은행나무 단풍은 그렇게 언제나 내 곁을 떠나갔다. 첫사랑처럼, 둘째 사랑처럼, 그리고 셋째사랑처럼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이빨이 없으니 잇몸으로 때워야지 않겠는가? 다행히 근자 폰을 갤놋나인으로 교체하고, 몇번 시험 가동해 보니 그런대로 땜빵은 하더라.


성균관이다. 공자를 모신 학당이요 제전祭殿이다. 이곳에 터잡은 대학교가 굳이 이 이름을 택한 이유다. 한데 그 시작이 1398년이란다. 심한 뻥에 빙그레 웃어주자.

이곳 은행 단풍이 절정이라 해서 잠깐 짬을 냈더랬다.


불이 탄다. 입소문 났는지, 아니면 일욜 도심이라 그런지 많은 이가 몰려들어 단풍 구경 중이다. 연신 탄성을 지르고, 기념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 문묘가 이리도 각광받을 때가 있었던가?


홍단풍 지지 않을 세라, 노랑과 멱살잡이 한다. 내가 잘 났다 자랑질이다.
내 보기엔 어우러져 서로가 더 강렬한데 쌈박질은 뭐람?


그윽한 감상은 물건너갔다. 요란스레 기사가 날아든다. 간밤에 타계한 배우 신성일씨 빈소 관련 스케치 기사가 많다.

노랑물 발광하는 이 풍경이 그리 좋았을까?
행여 이 광경 아깝다 해서 더 버둥거리다 넋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꼭 가야 한다는 윽박은 없었다. 그래도 이맘쯤 본 그곳이 하도 강렬해 그저 보고싶었노라 말해둔다. 다만 그때랑 조금은 다른 코스를 골랐으되 여전히 대청호변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청주 시내에서 대청호를 향해 달리다 왼편으로 다리 건너 대통령 별장인지 뭔지 있다는 청남대 방향으로 튼다. 햇볕 은어처럼 튀기는 호수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나니 숲 터널이다. 그 위상 녹록치 않은듯 해 차 세울 만한 곳에 잠시 똥차 주차하곤 내가 갈 길, 내가 지난 길 번갈아 본다. 노랑 물결이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한다. 이 무렵 저 빛깔은 물림 질림이 없다. 권태 나른과도 거리가 멀고, 무엇보다 근자 나를 옥죈 그 어떤 휴밀리에이션 humiliation도 없다. 


호수 역시 말이 없다. 빛 등진 수면은 그 멋대로, 그 반대편은 또 제멋대로 맛이 난다. 아래선 폭풍우 치는지 모르겠으나 저 고요 한없이 부러워 침이 흐른다.


청남대다. 불이 탄다.
들끓는다.
태우다태우다 태울 것 없어 창자벽 파내다 피가 흥건한 어느 중늙은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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