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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자체 학예사들의 百態 >>


2018년 9월 10일 17시 58분. 공식 퇴근 개시 정확히 2분 전 용인시청 학예직 이서현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천연기념물로 보이는 새가 한 마리 낙오했으니, 와 보란다. 

용인시청 공무원 중에 천연기념물을 취급할 사람은 오직 한 명이다. 새가 문화재라니? 그 새가 천연기념물이라면 다르다. 문화재는 학예직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다만, 야근 때문에 현장으로 출동하지는 못했다. 

보니, 문제의 낙오한 새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었다!!!! 

(사진은 그 황조롱이다. 이서현 포스팅에서 무단으로 업어왔다)


설악산 보호구역을 사는 산양. 천연기념물이다. 

이 놈들이 근자 보호구역을 탈출해 서울 용마산 공원에 출현하는 일이 있었거니와, 이 놈들이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해서는 원주 산기슭에 출현하기도 한다. 

그런 산양이 어찌 된 셈인지 원주에서 죽었다!!! 

새는 들고나 다니지, 박종수를 비롯한 원주시청 학예사들은 이 죽은 산양을 등에 업고 내려왔다.


지난 겨울, 구미시청 학예사 박은진은 죽은 고니 주우러 다녔다. 고니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출장으로 자리 비웠다. 같은 시청 환경 부서에서 고니 죽었다고 빨리 수거해가라 난리를 쳐댔다. 박은진이 현장을 가 보니...뿔싸 기러기였다. 기러기야 이 놈들아. 그래도 그 부서에서는 안 믿길래 조류 전문가한테 연락하고 환경 부서에 다시 결과 알려주었다. 박은진은 한탄한다. "이기 무슨 짓인지..."


당진군청 학예사 고대영 일화다. 

- 자넨 누구인가?

- 학예사인데요.

- 학씨인가? 그런 성씨가 있나?


천안시청 학예사 김은정 실화다 

- 자넨 어떤 일 하는 공무원인가?

- 학예사인데요. 

- 어딨는 절인가? 그런 절이 우리 동네 있던가?

분통 터진 김은정...나중에는 무슨 일 하냐 물어서 학예사라고는 아니하고 "큐레이터요..이럼 알아듣더라구요!"


어느 지자체 박물관에서는 학예사가 유물유적 확인하러 자주 출장간다고 짤라 버려야 한다고...(이건 출처가 확인되지 아니한다)


서울 광진구청 학예사 윤성호가 겪은 일...출근 첫날에 행정서기보 분께서 신경 써서 사물함에 "하계사 윤머시기"라고 예쁘게 이름표를 붙여주시어 감동 받은적이 있습니다. ^^


지금은 돌고 돌아 문화재청 세계유산팀에 가 있는 박영록...누군가가 하계사는 여름에만 일하냐고 물어봤다고(이는 본인한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구선이가 간접으로 전한 내용)

이를 확인한 박영록이 보탠 말..."정말 여름에만 일하고 겨울에 개점휴업 할수 있으면 전 제 명함에 하계사라고 적고싶네요........ ㅎㅎㅎㅎㅎ"

이런 대화에 이주화(Joohwa Lee)가 끼어들어 말하기를 "이건 저도 겪었어요! 冬季士는 겨울에 오시냐고! ㅋㅋㅋ"


Jaewan Lee이 겪은 일..."전 우리 과장이 군수 외 다른 사람 앞에서 '이제 부터 우리 해설사가 설명하겠습니다'해서 뻥쪘습니다 ㅎ"...."학예사 10년차 때 개념없는 행정직 과장이 했던말 ㅠㅠ"이라고...Yohan Kim도 보태기를 "저도 같은 일 당해봤습니다. 제가 쳐다보자 '왜? 뭐?'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한숨한번 쉬고 설명시작했죠."


지역에서 학예사가 해설사로 통하는 듯...진천군청 학예사를 지낸 원보현의 말..."대부분 군 단위에서는 학예사를 해설사로 아나봐요 저도 11년 내내 들었어요 자 이제 부터 여기 해설사 분이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 해설해 주시겠습니다 ~ 라고 소개받았어요"


지금은 공사박물관장인가로 있는 Tae Hyun Ahn이 문경 학예사 시절..."해설사도 없던 시절. 첫 출근날 '안내원'으로 소개된 1인! ㅠㅠ"


앞서 말한 Yohan Kim의 다른 경험

-"거기 하주사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하씨 성 가지신 분이 없습니다"

-"하계사 주사님이요. 하계사씨 안계세요?"

제 경험담입니다. ㅡㅡ


다시 김요한의 에피소드..."주말에 출근해 박물관에서 입장료 받고 있는데, 그런 그를 보고 박물관 입장하던 아줌마가 아들래미한테 이르기를 '공부 안하면 너 저런 일 한다'"


문관욱의 비슷한 경험...대딩 때 답사준비위원회여서 모 지방시청에 전화해서 "문화관광과에 학예사님 좀 연결해주세요"

했는데 전화받은 사람이

"네? 학예사요? 학예사가 뭔가요? 학씨가 있나요?"

라고해서 그냥 끊음.ㅋㅋㅋㅋㅋㅋ


독립기념관에 있는 옥주연

"ㅋㅋㅋㅋ 저도 ㅋ

10년 전 쯤 ‘박물관에서 일하는 학예사예요!’라고 설명해도 돌아오는 답은

‘박물관에서 표 팔아요?’였습니다 ㅜㅠ"


지자체 학예사 1호 이채경....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을 요구한다는... 별별 희한한 걸 다 물어보고는 모른다고 하면 아니 학예사가 그것도 모르나...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잡학다식한 자가 되었으며, 몰라도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고 기디리라 해놓고는 온갖 자료를 찾아서 답변을 해주다보니 설혹 대답이 궁해서 구라를 쳐도 내말은 모두 진실이 되었음. 따지는 자가 있으면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2% 차이다. 어떤 사실에 진실이 51%면 진짜이고 49%면 가짜라고 강변했다는... 그런데 다 넘어감...


다시 구미시청 박은진..."예전 옆계 계장님은 저만 보면 곡예사의 첫사랑을 불러댔죠...쩝."


이채경만큼 오래된 노땅 학예사 박종수....

90년대 중반까지 시군의 문화공보실에서 문화업무와 공보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문서제목에 '문' 자만 박혀있으면 전부 학예사에게 맡겼죠. 문화재, 문화예술, 문화원지원, 음반비디오, 시사편찬, 합창대회, 지역축제, 민속예술경연대회, 국어순화, 지명업무 까지. 90년대 후반부터 이업무는 보통 2~3과에서 담당 합니다. 몇몇 시군을 제외하면 지방 공립박물관은 95년 지방자치 제도 시행 이후 경쟁적으로 설립되는데 전시자료와 전문인력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건물만 지으면 박물관이 되는지 알았던 시기였어요.

시군에서 원하는 학예사는 문화 행정가 였어요.


이런 박종수 언급에 대한 또 다른 노땅 영주 학예사 금창헌....

"그래서 너무 개겼더니 요모냥이네..ㅋㅋ"...과장 진급 못함


이건 딴 얘기...건축학도이자 문화재 활용업자 김재홍 군이 전한 말..."북한산성교육지원센터를 북한산 성교육 지원센터라고 읽는 사람도 많았어요~☆"

이에 대해 노땅 학예직 과장인 김성배 왈...."아, 옛날 일 생각나게 하는군요. 산성 전문가를 '성관계 전문가'라 하신 분도 있었다는...ㅋㅋ"


(계속 보강한다)


뭐 코미디 같지?????

이게 지자체 학예사들 하는 일이다. 

뭐 이 정도는 되어야 문화재 일 한다 할 수 있지 않겠어?


*** 이 코너 계속 보강하려 합니다. 지자체 학예직 종사자들의 경험담을 모읍니다. 증언 부탁드립니다.


참고문헌 

https://www.facebook.com/moongtaeng23/posts/1068384379981563?__xts__[0]=68.ARBjemAV1-7wQOkuP20lNuTMZXLtABRHKRj-ioi4unccnwTO0xV1pH6DLJIlSonm0S3c9_4RIxXyBwTd_ghhXpQxiLe8GSuJaU445Y16yT3S9wf447ALeLjf6u9ZGURBG4wTa55S9aGSct6X7dqTsCgcKxaUWvRwfaHZKmUAod8tXQdyKG5o7Q&__tn__=-R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797426106992166&set=a.120053268062800&type=3&theater


https://www.facebook.com/taeshik.kim.5/posts/788508341174601?__xts__[0]=68.ARDWc9dtXWwaj8MqZxTAa0hMp9dPQknZYCbLTAB0zGCblnqmsPuDbEmYK_XoJ4cJvBhU16fJK3zg44UDZQFnVO3dOWs61bm6cJhCBFGtimu-x67S1Th4JPjYpoaG5ffiL259bzDxjBNELdVrbutJZOWknqgXnrklaF7mvBVR0Nm7btrSFO6p&__tn__=-R


Kyunghwan Kang "미국의 문화재보호법(national historic preservation act of 1966)에는 주정부문화재담당관(SHPO), 부족문화재담당관(THPO/인디언등), 심지어 일부 연방정부기관에도 문화재담당관(FPO)을 두도록 하고있습니다 우리도 중앙정부의 정책기능 강화와 함께 지방정부의 현장관리가 균형있게 조화되는 문화재관리체계의 재설계가 필요합니다 턱없이 부족한 지방의 문화재 전문인력의 보강이 시급합니다"


https://www.facebook.com/…/%ED%95%99…/keywords_blended_posts



작년 7월 4일인가 5일, 독일 본 세계유산위서 일본의 메이지시대 소위 산업혁명 유산군이 질긴 줄다리기 끝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자마자 중국대표단이 회의장 각국 대표단에 뿌린 유인물이다. 서명도 없고 대표자 명단도 없으며 날짜도 없으니 공문서로서의 그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본국 외교부에서 훈령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막강한 중국도 세계유산위 21개 위원국이 아닌 까닭에 그 어떤 발언권도 없어 분통만 터뜨리고 일부 대표단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유인물은 당시 내가 폰카로 촬영한 자료만 남고 실물은 멸실했겠거니 했는데 어제 서재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작년 세계유산위 찌라시 뭉치에서 찾아냈다. 고화질 스캔을 하러 가는 길에 일감一感을 초草하노라.


전문을 번역한다. 거친 번역임을 감안해줬으면 한다.


제39차 세계유산위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에 대한 중국 대표단 성명


중국은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에게 강제노역과 관련되지만 그런 사실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면서 저들 유산을 등재하고자 하는 일본을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저들 유산에는) 도합 2천316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수년간 모진 환경에서 강제로 노역해야 했으며 그들 중 323명이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강제노역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이자 인권 위반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나는 일본 대표단이 그들의 성명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1940년대에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저들 유산 중 몇 곳으로 강제동원되어 모진 조건에서 강제 노역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런 사실이 일본의 등재신청서에서는 무시된 사실을 주시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둘러싼 총체적 사실에 대한 일본 측의 충분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나는 일본에 대해 역사를 직면하고, 나아가 이코모스와 세계유산위가 요구한 것처럼 각각의 유산에 대한 전체 역사를 이해하게끔 하는 구체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며, 또한 모든 개별 강제노역 피해자의 고통이 기억되고, 더불어 그들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확실히 해줄 것을 촉구한다.


** 이는 꼭 2년 전인 2016년 9월 6일 내 페이스에 게재한 글이다. 

  1. yisabu 2018.09.09 12:43 신고

    사진속 글을 쓴 이는 Zhang Xiuqin라고 합니다.

2002 붉은악마 태극기 포쇄, 2012년 10월 5일.


2014년 8월 25일이었다. 이제는 문화체육관광위로 분산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한선교 새누리당 의원(용인병)이 기자들에게 보도자료 하나를 배포했으니, 다음과 같은 제목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어디에?

보도자료에 의하면, 2002년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린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당시, 경기장에서 붉은 악마가 사용한 대형 태극기가 현재는 어디에 있을까? 이를 이 의원실에서 최근 조사한 결과, 국립민속박물관 수장고 밖 복도 한편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한 의원실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은 13만3314점으로 15개 수장고에 나누어 수장됐지만 수장률이 125.27%로 수장고가 포화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빌랙 등을 설치해 공간 효율을 높였다지만 수장고가 포화상태인 까닭에 일부 소장품은 여전히 수장고 밖 복도에 보관 중이며,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가 사용한 태극기도 수장고 문제가 있어 복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의원실에서는 그것이 나무상자에 담겨 수장고 복도에 보관 중인 사진을 첨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의원은 "민속박물관 특성상 민예품, 근현대 생활용품, 농기구, 상여 등 대형 소장품 비중이 높으며 매년 소장유물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소장품은 연평균 7700점이 증가 추세라 이런 수장 환경이 지속된다면 유물의 안전과 보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한 의원은 "어보(御寶)나 숭례문 같은 국보도 중요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처럼 우리네 생활문화 자료를 잘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도자료 배포 당시 국립민속박물관은 보물 1318호(신구법천문도), 중요민속자료 230호(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 등 127점, 등록문화재 1,154점을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로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와 응원도구, 기념품 등 1162건 2628점 등을 보관 중이라고 한 의원실에 보고했다. 

이 보도자료는 전후맥락으로 볼 적에 당시 수장고 문제에 처한 국립민속박물관을 한선교 의원실이 돕겠다는 차원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큼 수장고 문제가 처참하니, 이를 수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장고 확충보완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마침 그런 사업을 추진 중인 박물관 측을 지원사격하겠다는 뜻에서 제기한 것으로 안다. 

한데 이 보도자료는 뜻하지 않은 역풍을 초래했으니, 다름 아닌 저 보도자료 제목이 저런 소중한 생활사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이 제대로 보관 관리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듯이 비쳤기 때문이다. 실제 이 보도자료를 토대로 하는 관련 보도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민속박물관을 성토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기억한다. 이에 박물관 역시 적지 않이 당황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 혹은 보도 통용이 박물관으로서는 못내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느 누구도 박물관 수집 대상으로 삼지 않은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를 민속박물관이 선제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에서는 나에 얽힌 작은 사연도 있으니, 월드컵 개최 당시 문화부 소속 기자인 나는 한때 체육부 기자였다는 경력이 고려되어, 월드컵 기간 그 취재에 잠깐 차출되기도 했거니와, 그 과정에서 나한테 배정된 미디어 관련 자료 일체를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취재 비표며, 관람권이며, 믹스트존 인터뷰권 등등을 서재에서 찾아내고는 마침 민속박물관이 월드컵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라기에, 미디어 관련 자료도 필요할 법 해서, 그것들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민속박물관으로서는 민속박물관이 그렇게도 소중한 월드컵 관련 유물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은 채 박물관 수장고 복도에 패대쳤다는 듯이 보이는 저런 보도에 못내 섭섭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하긴 박물관으로서는 꼭 해야한다는 규정도 없는 일, 어느 누구도 당시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월드컵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가 이런 비난에 쳐하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첨부사진은 2002년 붉은악마 태극기를 경복궁 경내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지붕에서 포쇄하는 장면이다. 포쇄란 습기를 말리고, 병충해를 제거하는 작업으로 간단히 말해 이불을 햇볕에 말리는 작업과 같다. 박물관에 의하면 사진이 포착한 포쇄는 2012년 10월 5일 일이라 한다.  

수장고 복도에 방치? 수장고 복도에 있다 해서 방치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복도도 수장고 일부다. 다만, 민박 수장고를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는 성립하니, 그런 점에서 한선교 의원실에서도 이 점에 방점을 두고 문제의 보도자료를 뿌린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 진의가 무엇이건 이를 국가기관에서 방치했다는 관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를 국가기관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아이디어를 제출한 사람과 민박은 훈포장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이를 방치했느니 하는 따위로 몰아부치거나 저런 식으로 일반에 통용된다면 누가 저런 일을 애써 하겠는가? 

민속박물관 수장고 문제는 그 이전 논란과 맞물려 추후 별도로 정리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故 김선기(이영덕 제공)



그저께 교통사고 여파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24일 향년 만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선기 선생과 나는 거의 인연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교수로서 대학 교단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요, 더구나 내가 문화재업계에 투신한 무렵만 해도 그가 생평을 몸담다시피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는 거의 손을 놓고는 발굴 주도권이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필두로 하는 국립기관과 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손으로 넘어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현장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계를 접하고 내가 직접 인연에 기반한 회상기를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원광대 고고학, 나아가 호남고고학, 나아가 한국고고학에 남긴 족적은 무시할 수 없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그의 흔적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그의 원광대 사학과 1년 후배 최완규 원광대 교수에 의하면, 고인은 전북 옥구 출신이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랜 기간 고인을 지켜본 이가 최 교수라 할 만하다. 고인과 최 교수는 정식 고고학 전담 교수가 없는 원광대 사학과에서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기틀을 다진 김삼룡 선생과 나중에 동국대로 적을 옮긴 불교사 전공 홍윤식 교수를 사사하면서, 고고학은 철저히 현장 실습을 통해 습득했다. 


최 교수에 의하면 고인과 그 자신은 경주 발굴현장에서 실습을 가서 고고학을 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말하는가"라는 반문에 최 교수는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병현 선생 (감독관) 시절인가 신창수 선생 시절인가" 되물었더니, 최병현 선생 시절이라 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중·후반에 문화재관리국이 황룡사지 발굴을 시작할 무렵에 고인은 실습생 신분으로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나아가 고인은 감은사지 발굴에도 실습생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인이나 최 교수 모두 박정희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철저히 현장에서 고고학을 습득한 원광대 고고학 1세대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고인의 까마득한 학과 후배로 많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는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통해 내가 조금 전 넘겨받은 고인 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덧붙이건대 고인과 더욱 가까웠던 이는 이 군과 학과 동기인 조상미 현 익산군청 학예연구사라 한다. 혹 나중에 여유가 나면 상미군을 통한 고인 일화를 보완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사학과

동아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사학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82~1995)

원광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담당관

호남고고학회장

(사)한국고도육성포럼 감사

전라북도문화재위원

이 정도라면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 인명록에도 올라있을 법 해서, 내부망을 통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없다. 아마도 고인이 어느 대학 교수를 역임했더라면 이런 현상은 빚어지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래, 대한민국에서는 인명록에 등재되려면, 대학교수는 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에서도 나오니 몹시도 씁쓸하기만 하다. 


이 약력에서 보듯, 교수가 되지 못한(혹은 안 된) 그의 學的 내력은 원광대 마백연구소 및 동대학 박물관과 궤를 같이한다. 이 두 기관을 통해 고인은 전북 고고학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이들 기관이 손댄 유적으로 가장 저명한 곳이 미륵사지 동탑과 같은 익산 지역 왕궁리 유적이 있으니, 고인은 이들 현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지금은 백제 고고학을 대표하는 이 유적들 곳곳에는 그의 체취가 남은 것이다. 특히 고인의 미륵사 사랑은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다. 그가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도 미륵사지 앞에다가 거처를 정한 이유도 이런 유별난 내력을 증언한다. 


고인은 동아대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단행본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를 2012년 8월에 도서출판 서경문화사를 통해 발간했거니와,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자작시가 실렸다.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미륵사 금당터에 뿌려다오.

그곳에 서려 계실 

백제의 용을 만나 보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마룡지에 뿌려다오.

백제의 꿈을 잊지 못하고 계실

연못속의 용과 함께

용화회상을 기다리리라.


그리고 

사랑보다 더 큰 슬픔은

그리움인 줄 알기에

한없는 그리움에 우짖다가

그들과 함께

초회의 설법에 참여하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아버님 산소 곁에 뿌려다오.

고통을 안겨준 사람조차도 

포옹하고자 하셨던

그 품에

다시 안겨보리라...


2012년 05월


원광대학교박물관 유물정리실에서 김선기


음울한 이 시를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이영덕 군에 의하면, 고인이 교통사고라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이미 죽음을 예감하면서 저와 같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말한다. 이 군에 의하면, 고인은 2008년 무렵인가 뇌일혈로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일이 있거니와, 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이미 생사를 초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긴 그런 내력을 대입하면, 저 시가 이해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고인이 분신처럼 사랑한 미륵사지


아무튼 저 '유언'에서도 미륵사지에 대한 유별한 고인의 애착이 생생히 묻어난다. 저 단행본을 아직 접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간평하는 서경문화사 안내를 보니 이렇다.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는 익산 금마저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책이다. 그동안 익산 지역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사자사지, 연동리 사지, 대관사지, 제석사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당탑의 축제 수법과 가람 구조, 출토 유물의 특징을 파악하여 사찰의 축조 시기와 조영 목적 등의 전개 양상을 규명하고 있다. 이는 사찰이 조성되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역사적 맥락에서 본 익산 고도 육성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목차

Ⅰ. 緖言 

     1. 金馬渚의 正體性에 대한 爭點 

     2. 硏究史

Ⅱ. 金馬渚 百濟 寺址의 構造와 編年 

     1. 百濟 寺址 槪觀 

     2. 堂塔 構造 

     3. 伽藍 構造 

     4. 出山 기와의 編年

Ⅲ. 金馬渚 百濟 寺址의 特徵 

     1. 寺刹 造營 

     2. 三世祈願寺刹

Ⅳ. 金馬渚 百濟文化의 獨創性 

     1. 遺物을 통해 본 獨創性

     2. 遺構을 통해 본 獨創性

     3. 伽藍 配置의 獨創性

     4. 寺刹 造營의 獨創性

Ⅴ. 金馬渚 百濟 文化의 特徵과 古都 育成 

     1. 金馬渚 百濟文化의 特徵 

     2. 金馬渚 古都 育成 方向

영문초록

일문초록

참고문헌

도면ㆍ사진 인용기관 및 도서목록

찾아보기 


일간 내 찾아보고, 그것을 간평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미륵사지를 사랑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나를 후회해 본다.  


*** 추기)  

그의 자세한 행적은 도서출판 주류성에서 발간하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에 인터뷰 형식으로 실린 적이 있다는데, 나는 아직 그 글을 읽지 못했다. 나아가 방금(2018. 8. 25 저녁 10시 무렵) 숭실대 최병현 명예교수와 통화한 결과, 본인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1977년 혹은 78년 무렵 원광대 역사교육과에서 파견한 실습생 중 가장 먼저 온 학생으로 기억한다고 하며, 감은사지 발굴은 윤덕향 선생이 학예연구사로 현장을 지휘(상급자는 조유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미륵사지 발굴에 투입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나아가 김선기는 최병현 선생과는 지금은 군산시로 편입된 전북 옥구군 대야면 출신으로 면까지 같은 고향이라 한다. 그래서, 최 선생으로서는 특별히 더 아꼈다고 한다. 최 선생은 고인에 대해 "미련곰탱이처럼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했다"면서, 이런 성격이 좀 더 나은 자리로 못 나간 까닭인 듯 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1. 먹튀 2018.08.27 01:59 신고

    잘보고갑니다,.

<아차산 전경과 홍련봉 제1, 2보루..왼편이 2보루.



2013년 12월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 성곽축조 기술의 결정체를 확인

- 12.3. 오후 3, 홍련봉 제12보루 발굴 조사 2차 현장설명회 -

 

광진구청(구청장 김기동)이 발주하여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2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123() 오후 3시 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20127월 광진구청에서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하여 발굴조사를 의뢰하였고, 201341차 조사가 마무리되어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에서는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외황 및 부교시설>


1차 조사에서는 홍련봉 제1보루 성벽을 전면 노출 조사하였으며, 홍련봉 제2보루는 2005년도에 조사된 내부 건물지를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2보루는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의 외황(外湟:마른해자)이 설치되었는데,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보루 내부는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문화재 자문위원회의를 거쳐 추가 발굴이 결정되었고, 2차 조사에서는 내부시설에 대한 추가조사, 외황의 전체적인 구조파악, 지난 2005년 발굴했던 북쪽 평탄지의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홍련봉 2보루 남동편 외황 토층>


조사결과 외황은 북서쪽 일부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확인되었으며, 규모는 전체길이 204m 1.52m, 깊이 0.62.5m이다. 단면형태는 ‘U’자형과 ‘V’자형에 가까우며,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생토면을 굴광하여 내외벽을 이루고, 동쪽과 서쪽의 경우 내벽은 석축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2.43.5m(1725)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일부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은 연결하여 배수하였다.


<홍련봉 2보루 북서편 배수시설>


북쪽 평탄지에 대한 추가조사 에서는 2기의 석곽 저수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생토면을 굴광하여 점토를 바른 뒤 석축으로 벽면 축조하였다. 1호 석곽 저수시설의 경우 바닥면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확인되었고, 2m 가량의 대형 고구려 철제 깃대가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은 다른 토광형 저수시설과는 달리 저장시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2005년 조사된 소성유구의 하층에서 온돌시설 3기가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 폐기 후 사질토를 정지하여 소성시설 조성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성벽 외부로 이어진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를 확인하였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또한 1보루와 2보루 사이 시굴구간을 일부 제토하여 조사한 결과, 구릉의 경사면을 자로 굴광한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보루와 2보루를 연결하는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는 보루 사이 도로 시설로 추정된다


<홍련봉 2보루 석곽저장시설>


출토된 유물은 기존의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가 주를 이루며,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내부 철제 깃대 출토 장면>


지난 2005년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문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또한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 중 유일하게 와당과 기와가 출토되어 조사단에서는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출토 철제 깃대>


이번 조사에서는 지난 20127월부터 20134월까지 이어진 1차 조사에서 확인된 홍련봉 보루의 성곽구조와 외곽 구조를 더욱 자세히 밝혀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성곽의 전체모습을 노출 조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전체적인 규모와, 성격, 구조 등을 파악하여 문화재 복원 정비에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홍련봉 1,2보루 연결도로>


현장설명회에 관한자세한내용은광진구청(윤성호 학예연구사 02-450-7593), 한국고고환경연구소(이정범 연구원 010-xxxx-xxxx)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4월 19일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의 새로운 성곽 구조 확인!

아차산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설명회


- 광진구, 오는 23일 오후 2시 아차산 홍련봉 발굴현장서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실시

-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되는 등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



<홍련봉 1, 2보루...사진 왼편이 2보루> 


과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군사기지였던 서울 광진구 아차산 남쪽 기슭의 홍련봉 1·2보루(소규모 부대의 주둔위한 작은 규모의 성곽) 발굴조사 결과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고 광진구가 19일 밝혔다.

 

<아차산과 홍령봉 1,2보루..왼편이 2보루>


광진구(구청장 김기동)오는 23일 오후 2시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에서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홍련봉 1보루>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지난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한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이에 광진구는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추가 조사를 발주했다.

 

<홍련봉 1보루>


이번 발굴조사는 국·시비를 포함해 총 69천여만원이 투입됐으며, 지난해 7월부터 이달까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성벽 내·외부 및 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등 총 12,830의 면적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됐다.

 

<홍련봉 1보루 목책렬>


이날 현장설명회는 그동안 홍련봉 제1·2보루의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전문가 학술 자문 결과를 브리핑하고 향후 발굴 방향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일반인에게도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홍련봉 1보루 치>


홍련봉 제1보루의 성벽 전체에 대한 노출조사 결과 성벽 둘레는 140m, 잔존 높이는 최대 1.8m로 성벽 기저면은 사질토, 점질토 등을 정지한 후 두 겹으로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안쪽 성벽에서는 주동(柱棟)이 일부 확인됐고, 성벽이 유실된 구간에서는 방어시설의 하나인 목책열과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도 확인돼 성벽 붕괴 시점이 고구려 후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벽 축조방식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발견됐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2보루는 지난 2005년도에 조사된 곳을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로 진행됐다. 성벽은 치를 제외한 둘레가 총 204m, 잔존 높이는 최대 2.5m, 성벽 주변 시설로는 총 7개의 치가 확인되었으며, 곡부 구간의 경우 성벽 외곽으로 3~5m 지점에 1열의 성벽을 추가로 축조한 구조가 확인됐다특히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 길이 204m 의 해자(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홍련봉 2보루>

 

내부시설로는 건물지가 5기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과 함께 단야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함께 확인됐다. 이와 함께 가마유구 1, 저수시설 2, 집수정 1, 기타 석축시설 3기와 계단시설 3, 배수시설 2기 등과, 기존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와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이번 조사 결과 두 보루의 성곽구조가 자세히 밝혀졌으며, 특히 홍련봉 제2보루에서는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 2보루 남쪽구역의 석축시설 내부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고구려유적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와 함께 단야시설도 조사되었으며, 금속제품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공정에 사용되는 연장인 철제 집게 등 각종 단야구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


()한국고고환경연구소 관계자는홍련봉 제1보루는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 중 가장 위계가 높으며, 2보루는 무기와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던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와 건물지>


한편 홍련봉은 아차산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독립 구릉으로 서기 500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군사시설로써 한강 이남과 중량천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홍련봉 제1보루는 남쪽 봉우리에 전체둘레 120m 남북최장 46m 동서 37m, 홍련봉 제2보루는 북쪽 봉우리에 둘레 179m, 넓이 458평의 소규모 석성으로 축조돼 있으며 서로 150m 가량 떨어져있다.

 

<홍련봉 2보루 출수구出水口>


지난 2005년에 실시한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으며,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와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어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


김기동 광진구청장은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역사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비·보존하고, 문화재 훼손을 막는 등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우리구는 아차산 일대 홍련봉 보루를 새롭게 복원·정비하여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고 풍부한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와 생산시설(가마 등)>


[참고자료]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용역 중간 보고

 

용역개요

명 칭 :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용역

면 적 : 12,830

- 발굴조사 : 10,738(성벽 외부 10m, 성벽 및 내부)

- 시굴조사 : 2,092(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용역기간 : 2012. 7. 10 ~ 2013. 4.30 (실조사일수 180)

소요예산 : 696,390천원

발굴기관 :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추진실적 :

‘12.7.12~7.31 : 유적지 입구 및 등산로 정비

‘12.7.12~ 8.4 : 홍련봉 12보루 진입로 시굴조사(2,092)

- 조사 결과 성격 미상 석렬 1단 확인

- 복토 후 야적장 및 탐방로 활용 예정

‘12.7.12~현재 : 홍련봉 1보루 발굴조사

-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 및 제초작업 완료

- 성벽 발굴조사 완료, 실측 작업 진행 중

‘12.8. 6~현재 : 홍련봉 2보루 발굴조사

- 임시복토 토사 제거 및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작업 완료

- 성벽 내부 건물지 조사 중, 실측 작업 진행 중

 

향후일정 :

‘13. 4.23 : 자문회의 및 현장설명회

‘13. 4.30 : 발굴조사 준공

‘13.5월중 : 최종보고회(광진구청)

<안동 길두리 고분 유물 출토 현황>


<'살포,' 고분 출토 '삽자루'의 정체>

고흥 안동고분 대형 살포 유물 출토

[연합뉴스 2006-03-27 15:38]

 

(고흥=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은 보기 힘든 농기구로 '살포'란 것이 있다.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은 "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 두툼한 쇳조각의 머리쪽 가운데에 괴통이 붙은 모가 진 삽으로 긴 자루를 박아 지팡이처럼 짚고 다닌다"고 살포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살포가 삼국시대 한반도 고분에서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다. 25일 현장이 공개된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소재 '안동고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살포는 동-서 방향으로 장축(長軸)을 마련한 석실(石室·돌로 만든 무덤방) 중 동쪽벽과 인접한 남쪽 벽면 바닥을 따라 놓여 있었다.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은 동쪽벽에 닿아 있었으며, 자루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살포가 마주하는 반대편 북쪽 벽면에는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 큰칼)와 도끼, 창과 같은 철로 만든 무기류가 자리잡았다. 살포와 이들 무기류 사이에 위치하는 동쪽 벽면에 치우친 곳에서는 철로 만든 갑옷류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안동고분 출토 살포는 아직 수습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길이는 180㎝ 가량이며, 머리 부분은 물론이고 긴 자루 또한 모두 철이었다.


최근 발굴된 삼국시대 살포 유물로는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이 조사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 중 토광목곽(土壙木槨) 구조인 수촌리 Ⅱ-1호분 출토품이 있다. 수촌리 살포는 가죽 직물로 겉을 감싼 삼지창(三枝槍)과 나란히 놓인 상태로 발견됐다. 


수촌리건 고흥 안동고분이건 함께 출토되는 유물이 모두 무기류라는 점은 살포가 갖는 기능을 추정할 때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살포 유물로는 경상대박물관이 조사한 경남 합천군 옥전 M3호분이라는 5세기말 가야계 무덤 출토품을 들 수 있다. 이 고분은 살포 뿐만 아니라 환두대도만 해도 10여 자루나 부장했으며, 이중 절반은 금 제품이었다. 길이 125㎝인 옥전 무덤 살포 역시 환두대도라는 무기류와 함께 발견된다는 점이 수촌리 무덤이라든가, 안동고분과 공통점이다.


반면 4-5세기 백제 무덤인 천안 용원리 고분 출토 살포는 이들과는 우선 모양새부터가 현격히 다르다. 나무 막대를 사용했을 자루는 삭아서 없어지고 몸체만이 남아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농기구'로서의 살포로 분류되고 있다. 그렇다면 살포는 왜 이런 삼국시대 무덤들에서 출토되고 있을까?


그 기능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로 조선시대 자료들을 통해 풀리고 있다. 왜냐하면 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에 바로 살포가 있기 때문이다. "긴 자루를 박아 지팡이처럼 짚고 다닌다"는 《표준국어대사전》의 기술은 바로 조선시대에 사용된 살포의 전통을 언급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 경우 살포는 누구나 휴대할 수는 없다. 대단한 고위급 전·현직 관료가 아니면 휴대 자체가 금지될 정도로 상징성이 높았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들에 더러 출토되고 있는 살포 또한 그 기능이 기본적으로 같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살포는 다분히 의장적인 성격을 지닌 이른바 위세품(威勢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위세품(prestige goods)이란 글자 그대로 그것을 착용하거나 휴대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권세를 징표하는 물건을 말한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그랬듯이 그보다 약 1천년가량을 올라간 삼국시대에도 살포는 휴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엄격히 제한됐다는 뜻이다.


이런 의장적인 상징성과 함께 살포는 환두대도와 같은 무기류와 함께 출토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의미도 짙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살포가 그렇듯이 환두대도와 같은 칼 또한 실용성은 현격히 떨어진다. 그렇지만 환두대도와 같은 칼은 요즘의 무속사회에서도 신내림을 할 때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듯이 삼국시대에는 권력자라고 하면 그 지역의 종교사제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종교적 권능을 표시하는 대표적 기물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환두대도와 같은 칼은 특히 도교 신학에서는 동경(銅鏡)과 함께 신체(神體)를 구성하는 양대 기물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런데 실로 절묘하게도 고흥 안동고분에서는 동경과 환두대도가 세트로 출현했다. 이는 이것들과 함께 출현한 살포라는 유물 또한 같은 권능을 지닌 물건이었다고 간주해도 좋은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 안동고분에는 또 석실 벽면을 주칠(朱漆)이라 해서 온통 붉은물감으로 칠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데, 무덤을 이렇게 장식하는 것 또한 도교신학과 밀접하다. 같은 문화권역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는 아예 죽은 자를 위해 주사(朱砂)라고 해서 황화수은(HgS)이 주성분인 붉은물감을 그릇 가득히 담아놓기도 했다. 


주사나 주칠은 도교신학에서는 영생불멸을 상징하는 신약(神藥)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적 전통(도교)을 지닌 동경-환두대도가 안동고분에 가미돼 있다는 사실은 이 무덤이 축조되던 5-6세기 무렵 이 지역 종교적 특성까지 엿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어떤 대가야고분 발굴현장>


근자 문화재 소식을 훑어보니, 대구경북 지역에 기반을 둔 어떤 언론에서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 발굴업체 선정이 잘못되었음을 질타하는 보도가 있었음을 보았다. 무슨 내용인가 본즉슨, 지역에 대가야고분 발굴경험이 많은 발굴조사 전문기관이 많은데, 그런 경험이 전연 없는 타지 발굴업체가 조사기관으로 선정되었느냐는 비판이었다. 


〈대가야고분 '잘못된 발굴입찰' 한 목소리〉라는 제하 이 보도에 의하면, 경북 고령군이 지산동 고분군을 구성하는 대가야시대 무덤 중에서도 604호분이라고 명명한 대가야 후기 왕릉급 고분을 발굴키로 하고, 그 조사기관을 최근 공개입찰한 결과, 공개입찰이라는 제도 함정을 뚫고서 "왕릉급 고분 발굴 경험이 없는 외지 기관"이 선정됐다는 것이다. 


보도는 나아가 "왕릉급 고분발굴 경험이 많은 다수의 발굴기관을 제쳐두고 경험이 일천한 외지 기관이 맡으면서 잘못된 결정이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하면서, 보도에 동원된 어떤 '고분연구 전문가'는 "자격있는 곳 어떤 곳이라도 와서 하면 된다는 그런 식으로 국비를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유사한 사례가 전국에서 동시에 행해지고 있다"고 했다는가 하면, 실명으로 등장한 어떤 고고학도는 "조사를 잘 하기 위한 좋은 행정은 경험이 많고 충분하게 훈련된 조사 주체가 발굴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행의 전국 입찰로서는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사기관 선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보도에 의하면 5억원 이상 용역사업이라 지역제한이 불가능해 전국 입찰을 실시한 결과 빚어진 현상이라 하거니와, 박일찬 고령군 학예연구사는 이 인터뷰에서 "5억이 넘는 학술연구용역 예산으로는 지역을 제한을 둔다든지 이렇게 하기 어렵고 실질적으로 전국 입찰을 통해서 계약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금액이 일정액 이상이라, 전국단위 공개입찰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문제의 기관이 선정됐다는 뜻이다. 지역에 기반을 두었고, 그런 까닭에 지역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언론이 이런 지적을 하는 일은 언뜻 무리라거나 문제라고도는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보도는 "하지만 중요한 유적이니만큼 제한입찰로 발굴 경험이 많은 기관으로 입찰 자격을 제한했다면 깊이있는 조사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는 소위 지역 여론을 전달한다. 


이를 둘러싼 전후 사정을 좀 더 내가 알아봤다. 문제의 고분조사는 충청도에 기반을 둔 충청문화재연구원이 공개입찰을 통해 따갔다. 입찰 제시금액이 5억원 넘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략 4억5천 정도에 응찰한 이 연구원이 조사기관으로 선정됐다. 조사기간은 실조사일수 기준 80일이라 한다. 요새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복원 지시에 응해 가야사 관련 돈이 좀 풀린 모양인데, 뭐 볼짝없이 이만한 조사비를 재정 사정이 넉넉할 리 없는 고령군에서 자체 조달했을 리 만무하고, 국비 지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국민세금일 것이다.(혹 이 대목 내가 잘못 안 사안이라면 교정 부탁한다)


나는 이런 보도가 어찌해서 나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반드시 시나리오가 있기 마련이다. 해당 기자가 자체적으로 저런 일이 문제가 있음을 캐취해서 그것을 저리 기사화했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본다. 누군가는 분명히 찔렀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짚이는 데가 없지는 않다. 같이 입찰에 응했다가 떨어진 지역 업체이거나, 혹은 지역 사회와 밀접한 고고학계 어떤 인사일 것이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어찌 듣보잡 기관이 대가야 고분을 발굴할 수 있느냐? 언론이 왜 이런 일에 침묵하느냐 하고 로비도 하고 좀 했을 것이다. 안 봐도 비됴다. 


<어떤 대가야 고분 발굴현장>


그렇다면 저 보도 자체 혹은 저 보도가 말하는 소위 지역 고고학계 여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대가야 고분은 그것을 발굴한 경험이 있는 기관만이 발굴해야 한다는 법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조사기관 자격만 있으면 누구나 발굴이 가능하다. 그것이 법이다. 보도 논리대로라면 대가야 고분은 그것을 한 번 발굴한 기관만이 독점한다. 한데 실제로 이런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특정한 지역, 특정한 발굴업체가 대가야 고분 발굴을 독점한 경향이 없다고는 결코 할 수 없다. 


둘째, 선정된 기관이 능력이 없다는 듯이 보도는 말하지만, 진짜 그렇느냐는 별개 문제다. 없기는? 고고학 유적 중에서도 어떤 곳이 가장 발굴이 쉬운 줄 아는가? 고분이다. 고분 발굴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발굴한다. 도굴꾼도 당장 갖다 놓으면 고분 발굴 잘한다. 그만큼 고분 발굴은 쉽다. 


고분 발굴이 어렵다고 주장하는 고고학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수준이다. 그래 그 말 어느 정도 인정한다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새로운 기술이랍시며 현장에 접목한 고고학 발굴이라는 것도 내실을 따져보면 빈한하기 짝이 없어, 대개 봉분을 어떤 방식으로 쌓아올렸느내, 판축기법이니 뭐니 하는 것을 밝혀내는 수준의 저급함을 면치 못한다. 고분 축조공정이라는 말이 근자 한국고고학에서 일대 유행하는데, 저런 저급한 고고학 조사방법을 최신 기법이라 선전한다. 단언하지만 이런 방식 단 하나도 선진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 고고학계 나가봐라. 어느 고고학도가 봉분 축조기술로 발표한다던가? 한국이랑 일본 고고학도밖에 없다. 웃기는 소리다. 국내 어떤 발굴기관이건, 자격을 갖춘 곳이면 지금의 한국고고학 수준으로는 여건만 된다면, 봉황대 고분도 조사할 수 있다. 


셋째, 지역업체를 제끼고 왜 타지 기관이 들어왔느냐고 질타하나 이 역시 어불성설이요, 적반하장이다. 이 말...같잖아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지역주의라는 강고한 틀을 깨치고 타지로 가서 식민지 개척하듯 한 기관들 선두주자가 실은 영남 지역 발굴기관들이다. 이들은 요새 전국 어느 곳이나 안 나타나는 곳이 없다시피 하다. 2012-16년인가 조사한 충북 충주지역 대규모 택지개발지구를 공개입찰로 따서 조사한 기관은 다름 아닌 영남지역 기반 기관이었다. 지금 부여 읍내 한복판 공사장에서 대규모 백제시대 발굴이 벌어지는데, 그 조사기관 역시 영남지역 기반 기관이다. 이들 영남지역 기관들은 서울 도심까지 점령해 버렸다. 서울 도심지 곳곳 발굴현장에 영남지역 조사기관들이 들어와 조사 중이다. 이들이 파본 곳이라곤 신라시대 유적 정도라고 해서, 이들이 조선시대 한양 도시유적 발굴경험이 없다 해서, 그들이 발굴조사 자격 없다는 말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넷째, 지역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발상 역시 문제다. 이건 볼짝없이 기자가 생각한 구절이 아니라, 이번 건을 제보한 일부 고고학도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지역제한이며 하는 각종 제한을 두어 특정지역 발굴을 독식하는 구조를 구축한 주축 중에 영남지역 기관들이 있다. 애초 발굴조사기관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영남이었고, 그런 영남이 강고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섯째, 대가야 고분 경험이 있는 기관이 발굴을 해야 좋다? 어떤 자가 이 따위 소릴 지껄인단 말인가? 같은 조사기관이 같은 유적 조사하면 맨날 똑같은 소리다. 대가야? 대가야 조사와 연구는 영남지역 특정 학맥 인맥이 독식하는 구조다. 고령군 등이 주최한 관련 학술대회 지난 수십년치 조사해 봐라. 그 수십년 전에도 발표자 혹은 토론자로 등장한 사람이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등장하는 꼴을 본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이 반세기 가까이 똑같은 소리 되뇌이는 곳이 대가야 고고학이다. 이런 대가야 연구니 무슨 새로운 연구가 나오겠는가? 


한마디로 고령 대가야고분은 이 지역 발굴경험이 있거나 많은 이 지역 발굴기관이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 


  1. 턴오버 2018.08.15 17:45 신고

    문화재 발굴에도 이런 뒷얘기가 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아무쪼록 15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탈없이 빛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 한량 taeshik.kim 2018.08.15 20:22 신고

    어디나 같지요..기득을 지키려는 사람과 뚫으려는 사람


올해는 아니나, 지금 안동 병산서원은 이 모습에 얼추 가까우리라. 백일홍 배롱나무가 꽃을 흐드러지게 만발하는 시즌이 이 무렵이니 말이다. 



3년 전이다. 그때 무슨 인연으로 왜 이곳을 행차했는지 내가 자세한 기억은 없다. 아마 그 무렵 이를 포함한 전국 주요 서원을 엮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다 하고, 그에 이 병산서원이 포함되어, 내가 그 무렵 이들 후보지 서원들을 찾기 시작할 때이니, 이 일환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배롱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니로대, 마침 그 시즌이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이 배롱나무, 서원이나 향교 같은 마당에서는 비교적 드물지 않게 보는 나무지만, 이곳 병산서원의 그 만발한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으로 뇌리에 각인한다.



이 병산서원은 서원 그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그 앞 산과 계곡을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빚어내는 경관이 압권이라, 별천지 비인간인 듯한 곳이거니와, 이곳에다가 유독 강학당을 만든 서애의 뜻을 어찌 알리오마는, 다만 지금도 그렇거니와 이 서원 혹은 그 시원인 강학당이 처음 들어설 때도 이곳은 변변찮은 마을조차 없을 만한 곳이라, 이런 데서 공부가 되었을까마는, 그 시대는 이런 한적한 곳에다가 수신당修身堂을 만들고는 심신을 수련한다 설레발을 치곤 했으니, 그 심정으로 이해하면 될 법하다. 



내가 부동산에 그닥 욕심은 없는 편이나, 이런 데만큼은 내 것으로 삼았으면 하는 욕망은 있다. 마름 두고선 관리케 하고는 가끔 이런저런 시린 날이나, 답답한 날이나, 더운 날이나 하는 때 하루이틀 쉬는 곳으로 삼았으면 하는 욕심 정도는 있다. 그래, 유난히 무덥다는 올 여름 같은 날에는 이곳이라고 특별히 더 시원하고 그렇기야 하겠냐마는, 뭐, 에어컨 하나 갖다 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 무렵이건 비교적 흔히 보는 백일홍이라, 보통은 이렇다 할 감흥은 주긴 힘드나, 유독 이 병산사원이랑, 전라도 담양 땅 어느 곳만큼은 백일홍이 때로는 얼마나 화려찬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Museo Civico Archeologico..무제오 치비코 아르케올로지코라고 읽는다. 옮기면 시립고고학박물관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가 운영하는 곳인가? 그 명판 아래에 보면 Comune di Bologna 코뮤네 디 볼로냐라고 했으니, 볼로냐 자치시라는 뜻이거니와,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 고고학 박물관이다. 이곳을 정하고 찾지는 아니했다. 이런저런 곳 둘러보고는 이제 볼로냐가 물릴 무렵, 다음 행선지로 옮기는 길에 시간이 좀 남아 어슬렁거리다간 우연히 저 간판 마주하고서는 들어갔다. 



마침 내부 공사 중이라고 미안해 하면서, 이집트 콜렉션을 보겠느냐 한다. 유서 깊은 유럽 웬만한 박물관이라면, 이런 이집트 콜렉션은 거개 다 있다. 이들에게 이집트 컬렉션은 그 역사 전통의 유구함을 증언하는 필수품 같아, 없으면 왠지 모르게 와꼬 죽는 그런 코너이거니와, 다행인지 이 박물관엔 그런대로 고르게 구색을 갖춘 이집트 컬렉션이 있으니,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독지가가 생평 모은 것들을 몽땅 기증한 것이라 한 듯하다. 개중에는 악어 미라도 있다. 





보니 컬렉션 규모가 상당하다. 이것만으로도 이집트 고대사를 개괄할 만한 수준이다. 리모델링 중인 까닭에 둘러본 공간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집트 컬렉션 외에도 이탈리아, 특히 볼로냐 지역에 초점을 맞춘 이탈리아 고고학사를 이 지역을 대표하는 고고학도들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그들이 어떤 유적을 발굴해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를 작은 섹션별로 구분한 코너가 있었다. 나로서는 이 코너가 심히 마음에 들었지만, 찬찬이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죽 훑은 바, 이것만으로도 이탈리아 근현대 고고학 흐름이 한눈으로 감지되는 그런 교육효과는 다대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이 코너는 해당 고고학자별로 그들이 남긴 육필 원고와 그들이 실제로 발굴한 성과를 그 유물과 유적 중심으로 적절히 안배해 정리했다. 이 박물관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한 소개를 꾀하기로 하고, 오늘 내가 정작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박물관 전시기법이다. 


유럽 지역 역사가 웬만큼 되는 박물관 미술관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박물관 미술관이라면 왠지 모르게 삐까번쩍한 최신 현대식 건물일 법한 데는 단언하지만 단 한군데도 없다고 보아도 좋다. 내가 싸질러 다닌 세계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현대식 시설의 완비라는 관점에서 지금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그 현대성과 규모에서 중국을 따라갈 데가 없다. 중국의 박물관 미술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되거니와, 적어도 성급 박물관 이상을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의 박물관 미술관은 그 규모가 압도하고, 나아가 그 현대적 설비 역시 이를 따를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이들 중국 박물관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압도한다. 


그 뒤를 한국이 따른다. 한국 역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필두로 그 산하 지방국립박물관과 공립박물관, 미술관 등등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시시설과 전시기법이 뒤질 데가 없다. 


하지만 유럽으로 가면 사정이 딴판이다. 제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박물관 미술관이라 해도, 그 박물관 미술관 건물 자체가 대부분 문화재인 까닭에 전시기법이 훌륭한 것도 아니요, 설비 또한 여전히 전근대에 머무르는 곳이 대부분이다. 브리티시 뮤지엄이라 해서 별다른 구석이 없다. 루브르박물관이라 해서 삐까번쩍할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저들은 유물을 흩어뿌리기한 데 지나지 않으며, 전시기법이라 해서 별 본받을 만한 구석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렇다고 전시 설비가 현대적인가? 총괄하면 개판이거나 개판 일보전이다. 진열장은 더 개판이라, 유리엔 먼지 투성이요 손때 덕지덕지하고, 조명시설 역시 개판을 넘어 아수라장이기 일쑤다. 그렇다고 저들이 자상하기나 한가? 유럽 상당수 미술관 박물관은 작품 설명이 없는 곳이 허다하다. 



보다시피 이 볼로냐시립고고학박물관은 저 많은 석물에 해당 유물 안내판이 전연 없다. 알아서 보라 한다. 뿐이랴?



수장고 시설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로되, 유물을 갖다 놓을 곳이 없어 화장실 앞에다가 쳐박아 놓았다. 우리 같으면 저리 전시했다가는 관장 모가지가 열 개라도 성하지 못하다. 소중한 문화재를 이리 대하느냐 불호령이 떨어지고, 시민단체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들쑤시고 난리일 것이다. 저들이 문화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낮아 저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몹쓸 짓을 한다고 아무도 말하지 아니한다. 


나는 언제나 문화재 숭엄주의가 주는 패악을 말하곤 한다. 이 숭엄주의가 지나치게 강고하게 작동하는 바람에 그 숭엄주의가 문화재 보호라는 명분과는 전연 동떨어지게, 문화재를 질식케 하는 역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뭐 저기서도 Do not touch라는 경고문이 곳곳에 보이기는 한다만, 좀 만지면 어떻고, 손때를 좀 타면 또 어떤가? 또 좀 깨져 나가면 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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