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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중에서도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자리한 소위 북한산 순수비가 존재를 드러내기는 오래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위치한 곳이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요, 그곳이 사방을 조망하는 위치 때문에 언제나 외부에 노출되었거니와, 온통 거대한 바위인 이 봉우리 꼭대기에 우뚝하니 선 표지성表識性에서 비롯한다. 이 비석이 차지하는 막강 위치는 북한산을 구성하는 무수한 봉우리 중에서도 오직 이곳만을 비봉碑峰이라 일컫게 하거니와, 비봉이란 빗돌이 선 봉우리라는 뜻인 까닭이다. 


북한산 비봉



하지만 이 비석 실체가 진흥왕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19세기 들어와 김정희를 기다리고 나서였다. 그가 현지를 답사하고, 남긴 증언을 볼 적에 그때까지만 해도 글씨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며, 비석은 온통 이끼로 범벅이었다. 김정희가 등장해 이를 진흥왕비로 확정하기 대략 반세기 전, 《택리지》로 유명한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 역시 이 비석의 존재만큼은 알았다. 다만, 청담이 현장을 직접 보지는 않은 듯하니, 이를 두고 맹랑한 말을 하는 까닭이다. 이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동아시아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말미암으니, 현장을 보지 않으니, 전대前代 문헌에 보이는 구절을 끌어와서 짜깁기 우라까이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택리지》 중 팔도론八道論, 개중에서도 경기도京畿道 편에 보이는 다음 관련 구절 역시 그가 참고한 선대先代 문헌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끌어왔을 뿐이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



옛날 신라의 승려 도선道詵이 《비기秘記》를 남겨 "왕씨王氏를 잇는 자는 이씨李氏이고, 한양에 도읍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 윤관尹琯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서 지세를 관찰하여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그때마다 베어내어 기운을 억눌렀다. 우리 조선이 나라를 선양禪讓받고 나서 승려 무학에게 도읍지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향하여 비봉碑峰에 이르렀다. 돌로 된 비석 한 개가 있어 보니, 큰 글씨로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이곳에 이르리라)"나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곧 도선이 세운 빗돌이었다. 무학은 마침내 길을 바꿔 만경대의 정남쪽 맥을 따라 곧장 백약 밑에 당도하였다. 세 개의 맥이 합쳐져 하나의 들을 이룬 지세를 보고서 마침내 궁궐터로 정하였으니 다름 아닌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었다. (번역은 안대회 외 옮김,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2018, 153쪽에 의거한다. 


맹랑한 소리 일색이다. 이는 《택리지》가 지닌 치명적 함정 중 하나이거니와, 이런 무수한 전설로 점철하는 그의 이 저술은 내 보기엔 탁상의 안출案出이다. 한데 이런저런 자료들을 짜깁기해서 새로운 저술을 창조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자기가 본 것만큼은 내가 그런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한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보지도 못한 곳들을 전대에 나온 문헌들, 예컨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니 하는 지방지들을 버무려서 만들 수밖에 없거니와, 그런 곳 중에서도 내가 직접 본 곳은 현장성을 가미하여 윤필하기 마련이거니와,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내가 이 블로그에서 '18세기, 한반도는 인구가 폭발했다'는 제하 글에서 다루고 적출하고 적시한 강원도 산림 황폐화 현상이다. 


 

 



어제(October 26, 2017) 하루는 휴가였다. 그런 휴가에 느닷없이 익산 왕궁리로 내가 향한 까닭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때문이었다. 현장 자문회의가 있다 했고, 그 자문위원으로 가신다 해서 서둘러 내려갔다. 


1947년(실제는 1946년 1월) 경북 영주 출생. 아버지는 육군 장교 출신으로 5.16 때 군을 떠났다. 외지 생활을 하는 아버지와는 떨어져 고향 영주 안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안정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있는 부모와 같이 살고자 중앙선 야간 열차를 타고는 홀로 상경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처음엔 영등포 신도림에 살다가 중동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문래동 적산가옥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의 주공아파트마냥 그때 문래동엔 상자로 찍어낸 듯한 적산가옥 500채가 있어 갑·을·병·정의 네 등급으로 구분됐다. 갑 적산가옥은 수도가 실내에 있었고, 병과 정은 공동수도를 사용했다. 윤 전 소장은 을 적산가옥 거주자였다.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입에 거푸 낙방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대신 써준 원서로 단국대 사학과에 1967년 입학하고 그에서 정영호 선생을 만나면서 이후 인생 향로가 정해졌다. 2학년 때인 68년 4월, 군에 들어갔고, 1973년 2월 28일 졸업했다.


졸업 직후 정영호 선생이 김정기 박사라는 분이 있는데 가서 만나보라 했다. 약속한 날 김정기 박사를 찾아가니 그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 둘이 더 있었다. 숭실대 최병현과 이화여대 소성옥이었다. 이튿날 셋은 괴나리봇짐을 매고 동대문에서 버스를 타고는 경주 팔우정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이들을 반긴 이는 김동현과 지건길. 이들은 이튿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으니 그곳이 바로 훗날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155호 고분이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고고학 파트 팡파르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98호분을 파고, 다시 안압지로 갔다. 그렇게 시작한 경주 생활은 1984년 2월 28일까지 이어졌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서울 문화재연구실 미술공예실로 복귀하자마자 또 일이 터졌다. 그해 4월 초파일, 화순 쌍봉사 대웅전에 불이 났다. 전소됐다. 기단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김기웅, 조희경 선생과 더불어 이번에는 화순으로 내려갔다. 절간에서 조사를 하다보니 고기가 먹고 싶었다. 


화순군청 공보실로 전화를 넣었다. 

"양계장 폐닭 몇 마리 좀 보내"


읍내에서 하루 한 대 오는 버스 편에 실려 시름시름한 닭 다섯 마리가 왔다. 그걸 절에다가 풀어놨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풀 뜯어먹고 하다 보니, 제법 토종닭으로 변했다. 그걸 잡아 먹으니 꿀맛이었다. 


시간이 흘러 서해안 도서 조사에 나섰다가 대천항 다방에서 오만분의일 지도를 펼친 그는 간첩으로 몰려 소총을 들이대는 경찰을 마주했는가 하면, 파주 민통선 안으로는 지뢰밭을 헤치며 고려 벽화고분 조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익산 어느 농촌 고등학생이 칡뿌리 캐다가 무덤 연도가 걸렸다는 신고를 접수하고는 내려가 조사해 보니 니미랄 그것이 바로 입점리 고분이었다.


정계옥, 박윤정을 데리고 나주 복암리 3호분을 한창 발굴 중인데 느닷없이 조선일보 신형준이 와인 한 병을 사들고는 현장을 들이쳤다. 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한 내부 조사. 금동신발이 출현했다. 저 밖에는 신형준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는 줄담배 피워가며 지켜본다. 


"이봐 신형, 특별한 것도 없는데 자전거나 타고 바람이나 쐬고 와."


신형준은 속았다. 마을로 담배 사러 간 사이, 현장은 후다닥 금동신발을 수습하고는 정계옥 차량 트렁크에다가 숨캤다. 그날 저녁 정계옥은 조용히 차를 몰고는 본소 보존과학실로 향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풍납토성에서는 매일매일이 전투였다. 능글능글맞은 그를 쏙 빼닮은 신희권이 행동대장. 둘은 매일매일 주민들과 사투를 벌였다. 저 토기 쪼가리가 뭐냐 이곳이 백제 왕성이라는 근거는 뭐냐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고 시위가 빈발했다. 


"김형.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 참 많이 고생도 한 거 같아"


어느덧 칠순을 넘긴 그도 어제 왕궁리 벌판에서 보니 영락없는 할배였다. 


*** 이는 내 페이스북 2017. 10. 27 포스팅이며, 이를 토대로 하는 관련 기고문은 문화재청 발간 월간 《문화재사랑》 2017년 11월에 실렸으니, 참고바란다. 파란 부분 링크하면 기사 본문이 뜬다. 


잊고 있었다. 나 자신도 잊어버린 내 자식을 다른 이가 찾아주었다. 


어제 우리 공장 연합뉴스 문화부에서는 이른바 '미남불상(美男佛像)'이라 일컫는 청와대 경내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원래 어디 있다가 이동했는지를 두고, 그것이 본래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라는 절터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정大正 6년(1916) 문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를 발굴 공개함으로써, 이 불상 출처를 둘러싼 기나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기사를 내보냈다.




한데 이 《사적고》는 출처가 신라학 혹은 경주학도로 이름 높았던 故 이근직 경주대 교수 컬렉션이다. 그의 유족이 최근 고인이 생전에 수집한 경주신라학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문제의 저 자료를 발견하고는 나한테 긴급히 연락한 것이다. 


저 청와대 불상이 여전히 청와대 구중심처에 볼모로 잡혀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그것이 경주로 반드시 귀환해야 한다는 신념이 깊었던 근직 형은 생전에 나한테도 그것이 본래 봉안된 곳이 이거사지였음을 줄기차게 주장했거니와, 경주지역 절친 박영우 선생이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8년에 내가 작성한 관련 기사를 찾아내고는 해당 기사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링크를 한 것이니, 아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나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산 내 기사다. 


<청와대 불상 출처는 경주 이거사>

기사입력 2008-05-12 07:02 최종수정 2008-05-12 09:52


청와대 안 통일신라 불상

"경주 남산도, 유덕사도 잘못"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청와대 경내 유일한 고대불상이 지난 9일 공개됐다. 

청와대 대통령 관저 뒤쪽 보호각 안에 안치된 높이 1m의 이 석조여래좌상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등재돼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평가된다. 석굴암 본존불과 크기만 다를 뿐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근거다. 

이 불상은 어디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일까? 

출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경주 남산일 것이라는 추정과 경주시 도지동 유덕사(有德寺)라는 주장이 그 것이다. 

유덕사라는 주장은 신문기자 출신 미술평론가이자 문화재 사가(史家)인 이구열 씨의 1973년 저서인 '한국문화재비화'와 그 재판인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베개.1996)에서 나온다. 

남산이라는 추정은 경주라는 원래 자리를 떠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대체로 남산에서 나온 것인데서 기인한다. 실제로 남산은 지금도 거대한 신라시대 야외 불교 박물관을 방불케하고 있다. 

그 출처가 어디건 청와대 불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안치되게 되었는지는 이구열 씨가 자세히 정리했다. 

이씨에 의하면 이 불상은 1913년 무렵,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小平)라는 일본인 집 정원에서 발견돼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다. 오히라는 데라우치가 이 불상을 탐낸다고 생각해 즉시 지금의 남산 밑 왜성대에 있던 총독관저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이 불상은 "1927년에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고 이구열씨는 적었다.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74년 1월이며 현재의 보호각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 

청와대 안 불상의 어제와 오늘


한데 이구열 씨가 무엇을 근거로 이 불상의 출처를 유덕사로 지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 유덕사의 위치 자체를 지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에 '유덕사(有德寺)'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대부(大夫)이자 각간(角干)인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 했다. 그의 먼 후손인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고 했다. 

이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유덕사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더구나 그 위치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유래한 곳은 어디일까? 

경주 지역사에 정통한 이 지역 출신 신라사 연구자 이근직 박사(문화재청 전문위원)는 "남산은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며, 유덕사 또한 무엇을 근거로 나온 주장인지 모르겠다"면서 "식민지 시대 이 불상과 관련되는 자료 등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移車寺) 터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거사는 성덕왕릉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의 존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시대 기록에도 보인다. 이에 의하면 성덕왕이 재위 35년(736)만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 출처가 이처럼 비교적 확실하게 밝혀짐에 따라 경주지역 문화계 일각에서는 원래 자리로 불상을 모셔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고딕체 부분에서 바로 나는 이근직 형 말을 인용했거니와, 그는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결과 청와대 불상 본래 자리는 이거사임에 틀림없다 확신한 것이니, 그러고 보니, 당시 이와 관련한 전화 문의에 그는 분명히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있다고 자신한 기억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때 다음에 경주에 가면 그 자료를 보기로 했던 것인데, 그도 나도 만나면 이런저런 경주와 신라 문화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을 몰라 그만 청와대 불상과 관련한 자료를 보는 일을 깜빡하고 말았으니, 그러다가 1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다가 그 사이 형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경주에서 약탈해 조선총독한테 진공되어 오늘날 청와대에 갇힌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둔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근자 벌어지는 사태 전개는 문재인 정부 출범과 직접 궤를 같이한다. 정권 출범 직후 나는 요로를 통해 이 불상의 조속한 경주 반환을 요청했고, 그에 병행해, 혹은 그와 관련없이도 당국에서도 익히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으니, 무엇보다 역사덕후 문 대통령이 이 불상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그런 면모를 발휘했으니, 이를 토대로 해서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이미 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요청에 의해 당시까지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이 불상에 대한 사상 처음으로 기초 정밀조사를 벌였던 것이며, 이를 토대로 나중에는 이 불상이 급기야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말하는 1916년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 사정. 이에서 이르기를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이에서 묘사하는 사정은 현재 남은 이거사지 사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으로 평가되는 이 청와대 불상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본래 위치가 경주 이거사(移居寺) 터라는 데는 이렇다 할 의문의 여지는 없었다. 이 불상이 문화재 혹은 미술품으로 재발견되어 보고되기 시작한 무렵에는 그 출처가 이거사지가 아닌 '경주 남산'으로 지목된 자료가 많기는 해도, 그것이 오류임은 이후 활발한 자료 발굴을 통해 이거사지임이 거의 다 드러난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거사지에 견주어 경주 남산을 지목하기도 했으니, 이들이 주로 내세운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으니, 첫째가 식민지시대 경주 남산을 뿌리로 적은 각종 자료였으며, 둘째가 이른바 미술사 양식론에 착목한 것으로써, 문제의 청와대 불상과 흡사한 같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같은 경주 남산에 두어 점 보고된 까닭이었다. 


이런 사정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불상 현지조사로 하고, 이를 통해 그것이 일약 대한민국 보물로 승격하면서 더욱 묘한 국면을 연출했으니, 다 죽은 듯하던 경주 남산론에 불을 다시 지폈기 때문이다. 해당 문화재를 지방문화재에서 중앙정부 지정 문화재로 격상할 때는 당연히 해당 문화재에 대한 정밀조사가 따르기 마련이고, 이를 토대로 해서 해당 지자체장은 문화재청에 보물지정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에 의해, 문화재청에서 이 조사를 의뢰받은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이름으로 보물 지정을 했거니와, 이에서 바로 이 불상이 본래 있던 곳을 '미상'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더욱 정확히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본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정리했으니, 그러면서도 신청서와 현지조사 보고서는 이거사지와 경주 남산으로 크게 보아 갈라진 두 견해 중에서도 실은 남산에다가 무게 중심을 두었다. 


신라사적고 서지사항



서울시가 2017년 9월, 문화재청에 제출한 이 불상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등의 지정 요청 자료보고서'는 이의 '연혁/유래/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1913년경 총독방문 후 경주금융조합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가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불상 진상

- 1927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로운 총독관저 신축되면서 불상도 함께 이전된 것으로 추정 

-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4호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

- 2006년, 불신의 일부 보존처리(수리보고서 별송)

- 2009년, <석불좌상>으로 지정명칭 변경(2009.6.4.)


나아가 이 지정신청서는 '지정가치 및 근거기준'으로는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석불좌상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진 상으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특징인 당당한 어깨와 가슴을 지녔지만, 두터운 팔과 손, 삼단사각대좌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무렵 제작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태가 양호하고,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통일신라의 드문 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라고 적었거니와, 이에서 보듯이 시종 일관 그 출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은 채, '경주'라고만 적었으며, 그것이 반출된 시점으로는 '1913년 무렵'이라 해서, 그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지 못했다. 한데 이 지정신청 보고서에는 이례적인 구절이 보이거니와, 우선 '조사내용' 중에 "1917년 6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중대석 확인- 경복궁에 있던 중대석을 2002년 춘천박물관으로 이전"이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다음 구절도 발견된다.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불좌상 가운데 양식적으로 가장 이른 예는 경주 남산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과 용장계사지 약사불좌상, 양지암곡의 석불좌상 등 경주 남산에서만 3구가 있고, 대좌만 남아있는 경우도 국립경주박물관을 비롯하여 그 예가 적지 않다. 삼단사각대좌를 갖춘 이들 남산 불상 가운데 약수계의 석불좌상은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유사하다.  


이는 이 지정신청서, 나아가 그 토대가 된 실사보고서를 누가 썼는지를 엿보게 하니, 불교미술사 전공으로 경주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임영애가 그 주인공이다. 문제의 청와대 불상 받침대 중 하나인 중대석(中大石)은 결실됐지만, 국립춘천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어떤 불상의 중대석이 바로 이 불상의 그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오직 임영애만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나는 익히 접했으나, 고려할 만은 하나,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고, 여타 미술사학도 또한 나랑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설혹 저와 관련한 저런 논문이 나왔다 해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아니면, 저리 적을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면 "춘천박물관 소장 중대석이 이 불상의 중대석이라는 주장도 있다"는 정도로 적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최선일 등과 더불어 이 불상 현지조사를 벌인 임영애는 조사를 토대로 2017년 12월 발간된 한국미술사학회 기관지 《美術史學硏究》 第296號에 〈일명 ‘청와대 불상’의 내력과 의미〉라는 논문을 투고, 게재하거니와, 이 논문 다음 결론 부분을 보면, 저 보물지정 신청보고서가 어떠한 목적에 따라 작성되었는지를 엿보는데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청와대 불상은 경주 도지동의 이거사지가 원봉안처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와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인 1934년 『매일신보』 기사가 경주 남산이라고 못박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같은 불상이 경주 남산 약수계에도 있기 때
문이다. 아울러 청와대 불상과 같은 형식의 삼단사각대좌 불상이 경주 남산에만 남아있는 것도 원봉안처가 도지동 이거사지라고 단언하기 어렵게 만든다또 일제강점기 경주의 절터를 상세히 조사했던 오사카 긴타로도 『경주고적급유물조서』라는 보고서에서 ‘移車寺址’를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지만, 이곳에 있던 불상을 옮겼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같은 책에서 경주 남산의 삼릉계 약사불좌상과 감산사 불상이 서울로 옮겨간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적어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사카 긴타로가 청와대 불상에 대해 전혀 몰랐거나,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가 아닐 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이다한편 1917년 『조선고적도보』 해설편에서는 청와대 불상을 ‘경주의 모처에 있던 불상’이라고 적었다. 1917년의 이 기록은 옮긴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원봉안처를 밝히지 않았다. 원봉안처를 정말 몰랐기 때문인지, 혹은 출처를 밝히기를 곤란한 사정이 있어 의도적으로 ‘모처’라고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을 소유하고 있던 고다이라 자신도 원봉안처가 알려지는 일을 꺼렸을 것이니 지금 남겨진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원봉안처를 밝히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불상은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역사이다.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자료만으로 원봉안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청와대 불상은 현재 봉안되어 있는 장소도, 그 내력도, 또 통일기 신라 불상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삼단사각대좌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통일기 신라 9세기의 불상이다.  


이에서 보듯이 임영애는 시종일관 이 불상 원래 봉안처에서 이거사지를 떼어내려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비록 그에 대해서는 여러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런 언급 이면에 깔린 주장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봉안처는 이거사지가 아니라, 경주 남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임영애의 생각이다. 


신라사적고 서언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생명이 1년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본래 위치가 이거사지임을 명백하게 폭로한 1916년 문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1908년 무렵 이후 경주를 주무대로 활동한 그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나름 역사학도였고, 나중에는 금관총 발굴에 관여하는가 하면 1933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이 생기자 그 초대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책은 다이쇼 5년(1916)에 그가 자비 출판한 것으로, 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 


덧붙여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된 경위를 밝혀두어야겠다. 그 자신 경주 출신으로, 경주학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신라와 경주와 관련한 자료라면 불원이천리하고 긁어모은 고 이근직 형이 있다. 경주대 교수로 재직 중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거니와, 그의 컬렉션은 미망인인 주진옥 선생이 보유 중이다. 경주에 관한 무수한 글을 쓴 그의 글에서도 좀처럼 저 청와대 불상과 관련해서 이렇다 할 자세한 글로써 정리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원봉안처는 이거사지라고 떠들고 다닌 점이 나로선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증거없이 저리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저 청와대 불상을 이제는 볼모에서 건져내 경주 현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한 그 무렵, 내가 주 선생한테 신신부탁했다. "분명히 근직형이 이거사지 관련 자료를 모아놨을 것이다. 없을 리가 없다. 찾으면 바로 연락주시라." 그때 주 선생이 이르기를 "안 그래도 찾아 봤는데 없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는데, 그제 밤, 주 선생이 전화를 했다. "찾았다"고 말이다. 저 자료를 찾았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는 그랬다. "그 인간이 그런 인간이요. 분명히 있을 거라 그랬자누?" 


오늘 따라 근직형이 더 그립다. 





일곱살 꼬맹이가 무얼 알았으리오?
아버지와의 권력쟁투에서 마침내 권좌를 차지한 청상과부 지소는 이제 겨우 똥오줌 가리기 시작한 아들을 권좌에 앉히고는 이미 건국한지 육백년이 지난 왕국의 최고 실력자 되어서는 나라를 좌지우지한다.
십대 앳된 사내들 끌어들여 정염을 불태우나 서서히 권력에 짓물리곤 무엇보다 세월 앞에 장사 없어 그 어미도 늙어갔다.

마침내 뒷방으로 물러난 어미 대신하곤 친정을 시작한 아들도 권력에 물리기 시작했다. 어미가 그랬듯 아들 역시 아직 한창이긴 했으나 이미 왕노릇 28년..서서히 지쳐갈 무렵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고선 명령하길, 나도 찬바람 쐬고 싶노라.
지상의 절대권력자가 천상의 권력자를 만나고 싶노라. 저 한수변 북한산에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마련하라.

올랐다 서늘한 공기에 가슴이 쏴하니 뚫린다.
저 짙은 연무에 황홀함이 온몸을 감싼다.

행복했을까?
더 허무하지 않았을까?
신라왕 김진흥이 북한산에서 얻은 것은 인생무상뿐이었다.
북한산 이후 김진흥은 약물로, 약물로만 빠져들어 종국엔 약물 중독으로 이승을 하직하니 세수 겨우 마흔셋이었다.

일세의 호걸은 그렇게 갔다.

골목길 답사하는 김란기 형과 요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가끔 어울린다. 어제 보쟀는데 여러 일정이 겹쳐 내가 밥을 사는 조건으로 남영동으로 오시라 했다. 어금니 두 갤 뽑았대서 이빨이 안 좋대나 어쩐다나 해서 비교적 무른 살코기 주문하니, 주인장이 항정살을 추천한다. 괴기 먹어야 힘이 나니 점심으로 긁었다. 입가심으로 커피 한 잔 땡기고 소화도 할 겸 혼란한 심신도 달래자 해서 남산 밑 후암동 자락이나 한 바퀴 돌자 했다.


형은 마침 이곳에 오래 살아, 이 일대 지리도 이곳 주민 20년째인 나보다 훤 하고 마침 주전공이 근대 도시역사학이라 그의 풍성한 해설을 곁들여 매양 스치기만 하던 이 일대 도시경관 역사 일부를 배운다. 이젠 저 형도 나이 65를 넘겼으니, 언제 갈지 모른다. 걸으며 내가 말했다. "빨리 가지 마쇼" 형이 맞짱구한다. "자네나 조심해"


마누라가 나왔고, 아들놈도 다닌 삼광초등학교 앞이다. 그 정문 앞 요상타 한 이것들이 식민지시대 소위 문화주택이란다. 곳곳에 이런 집이라, 벽면이나 지붕 등등은 대부분 교체되었지만 그 형태만큼은 고스란하다. 급격화 도시화에도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이곳은 용산미군기지와 인접 지점이요, 그 기지는 그 전엔 조선군주차사령부가 있던 자리다. 그래서 이 후암동엔 그와 관련한 상가가 발달하고 그 사택이 즐비했다 한다. 


후암생활관은 한국은행 소유며, 지금은 아마 그 직원용 아파트 혹은 기숙사인가 보다. 이곳이 본래는 조선식산은행인가 소유였다 하는데 박승 총재 시절인 2006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 이곳은 수십 번 지나쳤는데 내부는 처음 들어가 봤다.


그 인근 대략 오륙층 높이 연립주택이 있어 엘레베이터는 없으나, 계단을 통해 오르니 다행히 옥상 문이 열린다. 철퍼덕 엉덩이 깔고는 한 모금 같이 빤다. 햇볕은 따가우나 바람은 차가운 가을 날씨 전형이다.


한 눈에 딱 봐도 식민지시대 주택단지다. 아래서 봤을 적엔 좀체 드러나지 않은 풍모가 완연하다. 이리도 잘 남아있을지 미쳐 몰랐다.

잘만 하면 군산 부럽지 않을 근대 도시유적이 후암동이지 싶을 정도로 이런 유산이 곳곳에 포진한다.


눈을 들어 사방을 조망한다. 인구 천만 거대도시 서울의 일면모들이다.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송곳 하나 꽂을 데 없는 땅이어니와, 종로와도 다르고 도봉과도 다르며 더더구나 강남과는 판이한 용산구 모습이다.


내려오는 길목마다 식민지 유산이다. 잊고 살았다. 그 유산 찾는다고 군산 목포를 갈 때가 아닌 성 싶다. 후암동 일대 남산 기슭이 온통 식민지 밭이다. 듣자니 일부 저런 건물 내부엔 소화 몇년에 지었다는 동판이 걸려있기도 하단다.



대로변 인접한 한 이상한 콘크리트 건물을 비켜선 오동나무, 아직은 한여름인양 푸르름 뽐내더라.

*** 이 포스팅에 이주화 선생이 다음을 안내해 주었으니, 참고바란다. 

*** 요새 폰을 갤놋5에서 갤놋9으로 교체하고 나선, 신세계 돌입이라, 이걸로 찍은 것들로 채우곤 하는 재미 쏠쏠하다. 


  1. 아파트담보 2018.10.14 16:25 신고

    아이구, 사진 좋습니다. 거기 살때는 지겹다고 다신 안오겠다고 했는데, 이리 보니 그리울 줄이야.

  2. 한량 taeshik.kim 2018.10.14 16:53 신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저리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훈민정음 신화화가 내 보기엔 위험수준에 이른게 아닌가 한다. 창힐이 문자를 발명하자 귀신이 울었다 하거니와 그것의 창제가 어찌 문화사 혁명이 아니리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귀신이 곡할 노릇도 아니요 그 모든 발명이 신화나 기적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세종이라는 똑똑한 군주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발명했을 뿐이다. 



그 해례본 소장자가 값으로 천억을 불렀다는데 태워버리건 씹어먹건 말건 그건 그 사람 자유다.(이건 좀 변했다. 이후 소송을 통해 소유권은 국가에 있는 것으로 판결난 까닭이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천억이란 말이 어디에서 기어나온 강짠지 모르겠다. 내 생각엔 20-30억원이면 족하다.


그 신화화는 급기야 훈민정음이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란 얼토당토 않은 다른 신화 버전을 낳았다. 더불어 틈만 나면 훈민정음도 아니요 그 해례본을 국보 일호로 삼아야 한다는 괴담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글은 신화의 영역에서 내려외야 한다.(Taeshik Kim

October 13, 2015) 

  1. 김헌하 2018.10.14 17:22 신고

    20억...실제로 현금 들고...배익기 만나려 간 분도 계심...믿거나 말거나....ㅋㅋㅋ

  2. 한량 taeshik.kim 2018.10.14 18:53 신고

    ㅋㅋ 안주든가 보군요

사진1. 철감선사 부도탑(왼편)과 그 신도비(오른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 191-1 번지에 소재하는 쌍봉사라는 사찰 서쪽 뒤편으로 올라간 쌍봉산 기슭에 통일신라말, 이곳을 무대로 이름을 떨친 철감(澈鑒)이라는 선사(禪師) 산소가 있다. 이 무렵이면 승려는 거의 예외없이 다비를 할 때라, 원성왕 14년(798)에 출생한 철감이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자, 그 역시 다비식을 하고는 그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고는 그것을 봉안할 산소를 조성하고 그 인근에는 선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신도비를 세우니, 그것이 현재는 저리 배치되어 있다. 승려 무덤은 여타 직업 종사자 혹은 다른 신분과는 독특하게 다른 점이 있어, 역시 승려임을 표시하고자 그 모양을 탑으로 만들었으니, 불교에서 탑은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산소인 까닭이라, 이 전통을 살린 것이다. 


저 두 석조물은 한눈에 봐도 소위 비례가 맞지 않음을 눈치챈다. 부도탑과 신도비가 비율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하도 저 모습이 익숙해 그런갑다 한다. 좀 자세히 보면 짜리몽땅 납딱이라,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 난다.  




그 명패를 자세히 살피면 '쌍봉사 고 철감선사 비명'이다. 




 

비명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철감선사가 생전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적은 구절은 어디갔는가? 사라지고 없다. 


동아시아 모든 비碑,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패턴이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이 있고, 그 등 한복판을 직가각형으로 쪽개고 파낸 다음 그에다가 넓데데한 판석을 세우거니와, 이를 사람으로 치면 몸뚱아리에 해당한다 해서 비신碑身이라 하며, 그 위에다가는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머릿돌을 얹는다. 이 머릿돌에는 용 혹은 이무기를 새기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를 이수螭首라 부른다. 이 이수 전면 복판에다가 문패를 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철감선사 신도비는 거북이 받침돌과 용 문양 머릿돌만 있고, 비신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똑같은 꼴이 여주 고달사지에서도 벌어진다. 아래가 이곳 원종대사 혜진 스님의 탑비다. 이 역시 몸뚱아리는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반면 아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몸뚱아리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저 거무틱틱한 몸뚱아리 전면과 뒷면, 그리고 때로는 측면까지 활용해 이 스님이 무척이나 훌륭한 분이었다는 찬송가를 잔뜩 써놓기 마련이다. 이 탑비와 세트를 이루는 그의 부도탑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제 보수 중인데, 그것이 끝나면 아마 본래 자리, 그러니깐 저 탑비 바로 앞쪽으로 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몸뚱아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아가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이런 현상과 관련해 밑도끝도 없는 일제 수탈 신화가 또 작동한다. 걸핏하면 일본놈들 악랄한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것이라, 이게 참으로 만병통치약과도 같아, 비석 몸뚱아리를 없앤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일본놈이라는 신화가 강력히 작동한다. 이 경우 더욱 재미난 현상이 벌어지는데, 식민지시대에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고 할 때는 일본놈 소행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이 경우에도 참으로 기발난 왜놈 타령을 일삼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 소행이라고 밀어부치는 수법이 그것이다. 이런 수법은 조선후기 때 조선사대부들한테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언설이다. 


실제 저와 같은 문화재 현장에서 저와 같은 일제 만행론은 개독 신앙보다 더한 확고한 위력을 뿜어내곤 한다. 이런 '신앙'에 의하면 모든 나쁜 짓은 다 일본놈이 해야 한다. 지금은 아마 문화재 안내판이 교체된 듯한데 당장 저 철감선사 신도비만 해도 그 안내판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신은 일제시대에 잃어버렸다고 전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놈이 때려 부수었다는 뜻이다. 


한데 일본놈 소행이라 밀어부치면 참 말끔해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못내 찜찜한 대목이 있다. 첫째, 일본넘들이 할 일 없어서 멀쩡한 비석 중에서도 몸통만 쪼갠단 말인가? 그들이 극악무도하면 몸통만 아니라 대가리 받침 다 깨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둘째, 일본넘들 역시 불교국가인데(물론 이 경우 신불습합이라 해서 신도 성향이 강하긴 하나, 일본 사회에서 부처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만 하다) 그런 불교도들이 감히 스님 신도비를 부순단 말인가? 이 무슨 개망나니인가? 


더불어 탑비는 언제나 부도탑과 쌍을 이루는데 많은 경우,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부도탑은 지광국사 혜린 스님의 그것처럼 전체를 몽창 뽑아가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에 완상하기 위함이었거니와, 어떻든 부도탑은 대부분 멀쩡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도대체가 설명할 수가 없다. 기왕 때려부술 것 같으면 신도비만 아니라 부도탑도 때려부수어야 정상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놈 소행론은 눈꼽만큼도 눈길을 줄 필요도 없다. 다 개소리로 보고, 지나가는 똥개가 짓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석 몸뚱아리만 날아갔는가? 신라 태종무열왕비도 왜 하필 몸뚱아리만 날아가고 없느냔 말이다. 이유는 딴데 있다. 일본놈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 


더불어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과도 전연 무관계하다. 그렇다면 받침돌과 머릿돌도 만신창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다면 비신은 파편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저히, 이 비명은 몸통만, 그것도 처절히 파괴했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서 그 파편들은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몸통만 없애고자 하는 고의 혹은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 짓인가?


볼짝없다.

유독 글자만 파괴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범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글자를 필요로 했는가?


탁본이다.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자들이 그걸 없앤 것이다. 이 탁본의 고통은 한겨울에 그걸 딱 한 번만 해보면 안다. 탁본의 고역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역사를 인멸했다. 


결론한다. 


서예에 미친 놈들이 걸핏하면 비석 글씨가 좋다고 소문나니, 그리하여 걸핏하면 그것을 관리하는 현지 지방관한테 부탁해서는 탁본 좀 떠서 보내라 하니, 그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현지 주민들이 에랏, 내가 이 한겨울에 이게 무슨 짓이냐 해서 도끼로 깨뜨려 버린 것이다. 첨엔 깨뜨려서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파편들이라도 탁본해서 보내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열받은 현지 주민들, 니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그 파편들조차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몸통이 사라진 저런 고대의 비석들에서 우리는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이른바 민초의 고통을 읽어내야 한다. 나는 이런 고통을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역사학의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더불어 걸핏하면 왜놈 소행으로 밀어부치는 내셔널리즘의 욕망도 낱낱이 그 민낯을 까발려야 한다고 본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이 역주한 《조선불교통사》 제4권(동국대학교출판부. 376~377쪽)에 실린 다음 이야기를 부록으로 첨부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추후 이 글은 계속 보강해 나가기로 한다. 잠시 덧붙이건대 인각사비도 같은 이유로 훼멸되었다. 


<중국의 탁본 요구에 지친 백성들이 비를 동강내다>


단목端目스님이 김생의 글자를 모아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를 썼다. 본래 봉화군 타자산駝子山 석남사石南寺에 있었는데, 절이 폐허되고 비만 남은 지 오래되었다.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그 필적을 보배처럼 아껴, 정덕正德4년(1509) 8월 영천군 자민루子民樓 아래로 옮겼다. 원 ‧ 명 이래 중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매번 다 인출印出하여 돌아가 지극한 보배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도강渡江하고 제일 먼저 김생 글씨의 시詩를 물으니, 이는 곧 『영천읍지永川邑誌』에 말한 바대로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조선 땅에 찾아와 먼저 「백월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1천 장을 인출하여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의 고충이 되자, 비를 두 동강 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숙종 19년(1693)에 다시 꺼냈다. 



탑골공원..민족해방운동 성지 중 한 곳이라는 서울 종로통 한복판 이 공원이 근자엔 다른 상징을 탑재했으니, 고령화 사회 지표와도 같은 곳이라, 갈 곳 없는 노인들과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 집결지로 통용한다. 


이곳이 그보다 더 유서 깊은 역사 흔적이란 사실은 경내 십삼층석탑과 더불어 그 한 켠 비각이 둘러친 이 석물이 우뚝히 증언하거니와, 이를 일러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라 한다.


그 이름은 비석 자체에 보이거니와 머릿돌 전면에 전서체로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 적어놓았다. 그러니 이 비는 볼짝없이 대원각사라는 사찰이 어떤 내력으로 창건 혹은 중수되었는지를 적은 족보다. '대大'는 똥폼 낸다 붙인 수식어니, 그냥 원각사라 보면 대과가 없다. 


그 구체적인 내력이야 거북 등을 뚫고서 고추 선 대리석제 직사각형 몸돌 앞면과 뒷면에 새겼지만 글자는 거의 다 마멸되어 육안으로 판별할 만한 흔적이 거의 없다.


이 비는 받침돌인 귀부, 본문을 새기는 몸돌, 그리고 머리에 해당하는 이수 삼박자를 다 갖춘 완성체라, 더불어 원각사를 창건한 시대와 주체가 독실한 불교신자로 저명한 조선 세조이며 저 비석이 건립된 시기 역시 그에서 아주 가차운 성종 연간 초반기라, 여타 동시대 비석에 견주어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내가 이 원각사비 중에서도 거북 받침돌 뒷면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거니와, 저를 보면 조또나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도 울고 가리라. 저 생생한 꼬리, 특히나 껍데기를 에리로 말아올린 저 표현이야말로 최고의 예술 경지를 말해준다. 

자세히 보면 거북이가 응가하고자 괄약근에 힘을 주는 듯하나, 그보단 섹스 중 힘쓰는 모습 아닌가 못내 의심한다. 저 세 갈래는 꼬리임이 분명한데, 한데 거북 꼬리가 세 줄기던가? 


현장에 선 안내판 전부를 옮기되, 조사만 약간 손질한다. 영문은 일단 현지 안내판 그대로 옮긴다. 

대원각사비
Monument of Wongaksa Temple
大圆觉寺碑 | 大円覚寺碑
지정번호 : 보물 제3호 , 시대 : 1471년(성종 2)
소재지 : 서을특별시 종로구 종로 2 38-8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에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희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俱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었다. 거북이 모양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을 자리를 만들었다. 몸들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 전체 높이는 494센티미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각각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은(金守溫)이 앞면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이 뒷면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Designation : Treasure No. 3/ Period : 1471 (2n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Location:38-3, Jongno 2-ga, Jongno-gu Seoul

Monument of Wongaksa (Temple) was erected in 1471(2n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to record the particulars of the foundation of Wongaksa on this monument. King Sejo, who was a devout believer of Buddhism, built Wongaksa at the site of Heungboksa(Temple) in 1465 (11th year of King Sejo's reign), after being amazed by the incarnated sarira at Hwoeamsa in Yangju. 

When a thirteen-story stone pagoda was completed in 1467(13th year of King Sejo's reign), King Sejo held a dedication ceremony together with Yeondeunghoe (Lantem Festival) and directed subjects to erect a stone monument recording the circumstances. A turtle shaped stone prop was made, and lotus leaves were carved on the back of the turtle to create a space for the body stone of the monument. The body stone and the head stone 'isu' were made with a single stone. The height of the monument is 494cm. 

The turtle was made of granite, and the body and head stone was made of marble. Master writers and calligraphers at the time were in charge of the inscription. Kim Suon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front and Seong Im wrote it in a calligraphic style. Seo Geojeong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back and Jeong Nanjong wrote it in a calligraphic style. Wongaksa became an empty temple as private houses near the royal palace were pulled down during the period of King Yeonsangun. In modern times, the area was turned into a park. Only a Ten-story Stone Pagoda (National Treasure No. 2) and this monument remain today, showing traces of Wongaksa.


  1. 아파트담보 2018.10.08 21:15 신고

    안내판에 다음 사항이 추가되야할 것 같습니다. The turtle has lively shell on its back turned up like collar. That is the best artistic achievement ever so that Giotto di Bondone or even Gian Lorenzo Bernini should feel like crying upon seeing it.

일전에 나는 우리 문화재 현장의 문화재 안내판 문제를 정리한 글을 이곳 블로그 포스팅을 통해 정리하면서, 그것을 다음 네 가지로 집적했거니와, 


1. 무엇을 담을 것인가?(내용)

2.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디자인) 

3. 어디에 세울 것인가(위치)

4. 영어판은 어찌할 것인가?(독자)  


오늘 소개하는 서울 탑골공원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에서와 같은 이런 양식 안내판은 바로 두 번째 디자인과 연계한 것이니, 이는 볼수록 구토와 짜증만 자아낸다. 이런 양식 안내판이 심각성을 더하는 까닭은 첫째, 그것이 광범위하게, 주로 국가기정 문화재 현장에 소위 대세를 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둘째, 그럼에도 이 디자인은 어떤 놈이 개발해 퍼트리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반사가 극심해 글을 읽어내기조차 어려운 까닭이다. 



어제는 태풍이 지난 직후라 빛이 너무나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상 환경에 외려 이런 번질거림 안내판은 반사가 극심해 빛을 마주할 때는 그 극심한 반사 때문에 아예 전체 텍스트가 몽땅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다. 보다시피 그 텍스트 소비자인 독자가 그 앞에 서면 텍스트보다 그에 반사된 독자 모습이 더 확연하다. 



영어 안내판도 마찬가지고, 중국어판은 제일 아래로 밀려서 읽을 몸을 구부려야 한다. 


   

제목 부분과 한글 설명은 성인 남성 평균 키에 맞추어 그 소비자 대중을 고려한 점에서는 일단 고무적이긴 하지만, 내가 거울 보러 이곳을 온 것은 아니다. 


딴에는 저것이 내구성 뛰어나다 해서 선택한 모양이나, 그리고 그것이 한군데 쓰고 두군데 쓰다 보니, 그것이 양식이 되고 유행이 되어 일순간에 퍼졌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한 업체에서 일괄 제작해 전국에 유포한 느낌이 짙다. 


문제를 진단했으므로 그에 대한 치료법 역시 실로 자명해 진다. 첫째, 어떤 기상환경에서도 반사가 없는 재질이어야 한다. 저 금속판을 시급히 퇴출해 재활용 쓰레기 수거업체에 보내야 한다. 둘째, 텍스트 높이거니와, 첫번째 사진에서 보듯이 안내판 설명은 언어권 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순서로 되어 있지만, 그 배열이 문제로 대두한다. 물론 상대적인 소비자가 많은 한국어와 영어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했다 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는 문제다. 두 언어 안내판은 쪼그라 앉아 읽어야 한다. 


기왕 네 개 언어로 작성한 까닭은 이들 언어권별 독자를 다 염두에 둔 까닭이다. 따라서 저 안내판은 세움 형식이 아니라 뉜 형식으로 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 뉨 형식으로 할 적에는 지나치게 안내판이 길어지는 단점이 있으므로, 두 문단으로 나누어 왼편에는 예컨대 한국어와 그 아래 일본어, 오른편에 영어와 그 아래에 중국어판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개편해야 한다. 


이 문화재 안내판이 지닌 문제의 심각성은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지적하면서, 그 개선을 촉구했거니와, 그에 발맞추어 내년 문화재청 정부예산안에는 이를 위한 예산으로 50억원이 넘게 책정되는 파격이 있다. 그에 대응하는 지자체 예산까지 합한다면 이를 위한 예산만 내년에 전국에 80억원이 풀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적한 안내판 문제점은 그 내용과 기술 방식에 맞춰졌지만, 현행 안내판이 지닌 문제점은 그보다 더욱 심각하다. 따라서 저와 같은 문제점들을 광범위하게 수렴한 토대 위에서 새 시대에 맞는 문화재 안내판 개선이 이뤄져야만 한다. 이런 문제점을 이와 같이 지적해 놓지 않으면, 하나마나한 안내판 개선이 이뤄질 것이 뻔하기에 이 기회를 빌려 적어둔다. 


덧붙이건대 저 따위 안내판을 만든 제작업체는 찾아내어 색출해서, 새로운 안내판 개선사업에는 지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할 말이 없을 것은 아니로되,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정부 단가에 맞춰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것이 뻔하지만, 사기임을 알고도 저런 안내판을 만든 책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면탈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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