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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찾은 문 대통령


이건 우리 문화재 담당 기자더러 하나 별도 기사화를 주문할까 하다가, 너 문빠냐 어쩌나 하는 말이 일각에서 나올 것이 빤해 이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제목이 말한 저 행보, 문통이 유별나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평가건대, 역사 혹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박정희와 더불어 최고를 다툴 만한 행적을 보인다. 주지하듯이 문화재 현장을 자주 찾은 역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능가할 이는 아직 없다. 그의 기나긴 재위기간을 감안한다 해도, 그는 주요 발굴현장까지 친림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한데 취임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문통 역시 그에 못지 않은 행보를 보이거니와, 언제나 우리 사회 다른 부문에 견주어 언제나 열세를 면치 못하는 문화재계에 이는 분명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말, 사석에서 나는 자주 한다. 

문통 자서전을 보면, 역사 덕후 모습이 완연한데, 취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고백을 반신반의했으니, 정치인의 자서선이란 으레 그렇듯이 대중을 위한 이미지 포장이라는 성격을 벗어버릴 수는 없어, 역사 덕후라는 고백 역시 나는 쇼맴십 일종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며, 그래서 과연 그 바쁜 국정 일정에서 문화재 현장은 몇 번이나 찾을 것인가 못내 의뭉스레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대통령 문재인은 역사 덕후임이 분명하다. 

인니 대통령 부부를 창덕궁 후원으로 안내한 문 대통령


그런 면모는 이번 여름 휴가 기간 중 봉정사를 찾은 일에서 잘 드러난다고 본다. 봉정사를 포함해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 7곳이 '한국의 산사'라는 이름으로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거니와, 그 일곱 사찰 중에서 오직 봉정사를 못 가봤다 해서 이번 여름 휴가를 이용해 봉정사를 찾았으니, 답사를 좋아하는 같은 사람으로 그 심정을 나는 조금은 이해한다. 

그 직전인가 아니면 그 즈음인가 문통은 문화재계 개혁을 주문했으니, 다름 아닌 문화재 안내판 문제였다. 청와대 안에 지정 문화재 몇 건이 있는데, 개중 한 곳의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는 그에서 난무하는 난수표 방불하는 각종 건축 용어를 보고는 소위 진노하면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불러다가 혼을 내면서 개선을 주문한 것이어니와, 그를 가까이 보필하는 비서한테 내가 물었다. "저거 진짜 문통 작품이야" 했더니 그 비서가 이르기를 "맞어. 경내 산책하시다가 안내판 보시고는 직접 자료 준비하라 지시하셨고, 그제 발표가 그렇게 해서 나온 거다"고 한다.   

근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방한했다. 그 환영식을 창덕궁에서 열었다. 이 일이 확정될 무렵, 모처에서 전화가 왔다. 이르기를 "환영식을 창덕궁 아니면 경복궁에서 하려 하는데, 앞으로 자주 그려려고 한다. 다만 문화재를 훼손하니 하는 말들이 혹 나오지 않을까 한다. 그런 쪽으로 여론이 호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으니, 그 말을 듣고는 내가 "고궁은 더 열여제껴야 한다. 그런 중요 국가행사장으로 더더욱 활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 언제까지 문을 걸어잠글 수는 없다"고 부화뇌동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묻기를 "창덕궁은 누구 아이디어냐" 했더니, "VIP가 직접 고르셨다. 저번 인도네시아 가셨다가 그쪽 대통령이 하도 고궁을 자랑했다. 그걸 보고 우리도 우리 고궁을 그리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성돈 대한제국공사관을 찾은 문 대통령


남북 정국, 북미 정국이 정신없이 돌아간 올해 들어, 그 일환으로 문통은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백악관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문통은 그곳 대한제국공사관을 둘러봤다. 그날 오전 막 개관한 이 공사관을 대통령이 돌아본 것이다. 이것이 나는 역사에 대한 성의라고 본다. 그런 성의를 문통이 직접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는 이 분야에 그런대로 오랜 기간 투신한 나로서는 작은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문통이 조만간 또 다른 문화재 현장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돈다. 

최고 권력자의 문화재에 대한 이런 유별난 관심이 반드시 문화재 그 자체에 대해 좋은 효과만 내지는 않는다. 때로는 역효과를 빚기도 했음을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 역사를 통해 엿보기도 했다. 

문화재는 사회 여타 부문에 견주어 항상 홀대받는다는 피해의식이 실은 광범위하다. 그런 현실에서 최고권력자의 유별난 관심은 분명 광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런 관심을 문화재계는 부디 잘 살려, 문화재 자체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08년은 갑골문으로 유명한 중국 은허(殷墟) 유적 발굴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무렵 이를 기념하는 각종 학술대회가 세계 곳곳에서 열렸거니와, 개중에서도 은허 현지에서 중국 당국이 개최한 그것이 주축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회는 이해 10월 30~31일 이틀간 이 유적이 위치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중심가 안양호텔(安陽賓館)에서 열렸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안양시 인민정부, 허난성문물국(河南省文物局), 안양사범학원(安陽師範學院),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가 공동 주최한 이 자리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미국 등지의 외국 연구자를 합쳐 총 180여 명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2006년 7월13일 은허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유적 실사를 담당한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형구 선문대 교수 등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 나도 끼었다. 고고학 전문잡지 《한국의 고고학》을 발간하는 도서출판 주류성 초청 형식으로, 나는 기자로서 경향신문 이기환, 서울신문 서동철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 학술대회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자리를 빌려 말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대회를 통해 만난 어떤 할매 이야기를 당시 현지에서 타전한 내 기사를 통해 새삼 상기하고자 한다.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존해 활동 중인지 궁금하다. 


은허 부호묘 발굴 고고학도 정전샹(鄭振香/정진향)

            


<사람들> 은허 유적의 산증인 정전샹

'부호묘' 발굴한 신중국 1호 여성고고학자


2008.11.03 18:11:08


(안양<중국>=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핀을 꽂은 머리에 수더분한 옷차림. 키는 155㎝가 될까 말까 한 작은 체구. 은허 유적에서 만난 정전샹(鄭振香·79)에게 평범한 한국 할머니와 다른 구석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 고고학계와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작은 거인'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화려하다. 그중에는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최초의 중국 여성 고고학자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와 친분이 남다른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주선과 통역으로 만난 이 작은 거인에게 우선 정말로 그가 제1호 중국 여성고고학자인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1949년 이전에 하남박물원에 고고학에 종사하는 여성 한 분이 계셨던 것으로 압니다. 아마 그 분이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부호묘 발굴 고고학도 정전샹(鄭振香/정진향) 선생(오른쪽)과 이형구 선생.



하지만 그의 추가 설명을 들으니, 이 여성이 직접 고고학 조사를 벌인 적은 없고, 단순히 박물관에서 일한 경험만 있는 듯했다. 따라서 정전샹이 중국 제1호 여성고고학자라는 세간의 평가는 틀리지 않는 듯했다. 


갑골문이 쏟아지기 시작한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이란 고즈넉한 농촌마을에 대한 공식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928년.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총 15차에 이르는 발굴조사 결과 이 소둔촌 지역은 상(商)나라 마지막 도읍인 은허(殷墟)가 있던 곳으로 판명났다. 


정전샹은 은허 유적 발굴이 시작된 이듬해인 1929년 10월15일 허베이성(河北省) 둥광현(東光縣)에서 출생했다. 


은허 부호묘 발굴 현장. 부호를 이미지화한 조각이 섰고, 화면 왼편 작은 건물 출입구가 부호묘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든을 앞둔 그의 인생 절반 이상은 은허와 함께한 나날이었다. 1954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59년 같은 대학 역사학 고고계(고고학 전공)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 중국의 유서 깊은 고도 뤄양(洛陽) 지역 발굴을 책임지는 '뤄양고고공작대'에 배치되어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1962년 안양공작대로 옮겼지요. 1977년에는 공작대 발굴단장으로 승진했으며, 2002년 남편의 병 시중을 위해 베이징으로 옮겨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이 되기 전까지 꼭 40년을 은허 유적 발굴조사에 종사했습니다." 


은허 생활 40년의 하이라이트는 1976년 '부호묘'(婦好墓) 발굴이 꼽힌다. 


부호묘 순장인골


이 묘는 부호(婦好)란 여성이 묻힌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발견 위치는 은허 궁전종묘지구 중에서도 병조(丙組)라고 일컫는 유적의 서남쪽이며, 2008년 현재 이곳은 현장 박물관 형태로 발굴현장과 그 출토 유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은허 유적지 중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부호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갑골문과 이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적힌 명문을 통해 존재가 확인된 여성으로 대략 기원전 1250년 이후 1192년까지 59년간 재위한 상나라 왕 무정(武丁)이 거느린 60여 명에 이르는 부인 중 한 명으로 나중에 무정을 뒤이어 즉위하는 조경(祖庚)과 조갑(祖甲)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모신'(母辛)이라 불리기도 한 부호는 갑골문에 나타난 행적을 조사한 결과 당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정치가이면서 특이하게도 군사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부호를 중국에서는 중국사 최초의 여성 군사전략가로 부르기도 한다. 


여느 상나라 때 무덤과 마찬가지로 땅을 깊이 파고들어가 조성한 이 부호묘는 발굴 결과 묘실 규모가 남북 5.6m, 동서 4m, 최대 깊이 7.5m로 밝혀졌으며 그 지상에는 향당(享堂)이라고 하는 능상(陵上) 건축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발굴이 놀라웠던 점은 무덤 주인공이 확실히 밝혀지고 그 주인공이 왕실 최고권력자인 데다 무엇보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위상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각종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옥기 755점, 뼈 제품 564점, 청동기 468점, 석기 63점, 도기 11점, 상아제품 5점 등이었다. 특히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190점이었으며 이 중 '부호'(婦好)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109건에 달했다. 이 외에 순장자가 16명에 개 6마리를 죽여서 묻은 것으로 밝혀졌다. 


부호묘 묘광 내부 청동기물 출토 양상. 청동기물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인근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976년 안양공작대 부단장으로서 부호묘를 발견하고 발굴한 그 때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듯 정전샹은 "격동(激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75년 겨울이었습니다. 농민이 이 부호묘가 잠자던 곳을 개간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판축(版築·켜쌓기) 대지가 노출됐습니다. 그래서 당국에 현장 조사 필요성을 요청하고 이듬해에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지표를 약 40㎝가량 파고 들어가니 바로 건물터가 나왔어요. 상나라 시대 주거지였지요. 주거지 조사를 끝내고 그 밑에서 저장구덩이를 찾았지요." 


이것으로 조사를 끝낼 예정이었다. 한데 심상치 않은 징후가 감지됐다. 


"저장구덩이 밑에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덤(부호묘) 상면이 노출됐습니다. 저장구덩이가 무덤 입구를 파괴하고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무덤 입구가 작아서 큰 발굴성과를 기대한 건 아닙니다. 그랬는데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으니, 당시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특히 이 부호묘 출토 청동기에 보이는 '부호'라는 글씨가 기존에 출토된 갑골문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흥분은 배가 됐다.      


은허 생활 40년 중 문화대혁명이란 회오리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땐 주로 발굴 유물들을 정리하는 일만 조용히 했습니다. 다른 활동이 불가능했으니까요." 


이형구 교수는 정전샹 교수를 일러 "은허 발굴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수도산 수도암에 올랐다.
올 추석엔 날이 좋아서 그랬는지 전면 가로누운 단지봉 능선 너머로 가야산 꼭대기가 봉긋하다.
탑 사이로 가야산을 넣어봤다, 아들놈을 전면에 배치하기도 했다.
해발 950미터 고지에 왜 절을 세웠을까?
속세가 싫어서였을까?
창건 시기는 모르나, 이곳 대적광전을 안좌安坐한 석조 비로자나불로 보건데 저 가야산 기슭에 해인사가 창건된 그 무렵인 듯 하다.
자급자족이었을까?
여름 가을이야 그런대로 버틴다한들, 겨울과 춘궁기는 어찌 버텼을까?
속세와는 그리 썩 말끔히 단절하진 않았을 듯 하거니와, 혹 이곳은 수련원 아니었을까?
지리산 운상인雲上人을 위한 시설 같진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근자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가슴곰이 느닷없이 김천 수도산에 출몰했다 해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소백산맥을 따라 북상한 모양인데 해발 1317미터 수도산 기슭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두어 차례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추석인 오늘 오후 수도산 기슭 수도암 어르는 길목엔 이 경고문이 있다. 글쎄..저 대처 요령이 실제론 얼마나 효력 있을지는 모르겠다. 기절초풍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 같은 놈이야 사진기 먼저 꺼내지 않겠는가?


이 경고문이 붙은 곳은 수도산 무흘계곡 중 제1곡 무흘폭포가 있는 곳이다. 근자 비가 많이 왔다더니 물이 넘쳐난다. 글쎄 이런 폭포가 나이아가라며 이구아수며 빅토리아 폭포에야 비할 바겠냐만, 모름지기 규모여야 하리오? 수도산엔 수도산에 맞는 폭포가 나이아가라 아니겠는가? 장관 혹은 위협보단 그런대로 아담한 폭포도 제맛이 있기 마련이라, 나는 이런 풍광이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


수도암에 올랐다. 이곳 주차장에서 고도계 돌리니 해발 945미터라 찍힌다. 아마 해발고도 가장 높은 산중 사찰 중 하나 아닐까 한다. 고산지대라 사뭇 식생대가 저지대와는 다른 점이 있다.


대적광전 전면으로 언제나처럼 장관이 펼쳐진다. 수도산보다 십미터 정도 높다는 단지봉이 가로 눕고 그 뒤편으로 정수리만 빼곡히 내민 봉우리 하나 우뚝하니 가야산이다. 지금 수도암은 김천 경내라 해서 이 일대 거찰 직지사 소속 말사지만, 친연성은 외려 가야산 해인사니, 왜 그런가는 저 봉우리가 말을 한다.
노승들에 듣자니, 그 옛날엔 걸어서 수도암과 해인사를 오갔다 하니, 요새도 이 길을 횡단하는 등산객이 없지는 않은 듯 하다.


이 수도암엔 석굴암 본존불에 견주어도 될 만한 석조비로자나불이 좌정한다.
보라, 석굴암 견주어 무엇이 부족하랴.
한국불교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이 아름다운 산하에 나는 또 하나 번뇌를 녹이고 간다.


<< 지자체 학예사들의 百態 >>


2018년 9월 10일 17시 58분. 공식 퇴근 개시 정확히 2분 전 용인시청 학예직 이서현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천연기념물로 보이는 새가 한 마리 낙오했으니, 와 보란다. 

용인시청 공무원 중에 천연기념물을 취급할 사람은 오직 한 명이다. 새가 문화재라니? 그 새가 천연기념물이라면 다르다. 문화재는 학예직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다만, 야근 때문에 현장으로 출동하지는 못했다. 

보니, 문제의 낙오한 새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었다!!!! 

(사진은 그 황조롱이다. 이서현 포스팅에서 무단으로 업어왔다)


설악산 보호구역을 사는 산양. 천연기념물이다. 

이 놈들이 근자 보호구역을 탈출해 서울 용마산 공원에 출현하는 일이 있었거니와, 이 놈들이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해서는 원주 산기슭에 출현하기도 한다. 

그런 산양이 어찌 된 셈인지 원주에서 죽었다!!! 

새는 들고나 다니지, 박종수를 비롯한 원주시청 학예사들은 이 죽은 산양을 등에 업고 내려왔다.


지난 겨울, 구미시청 학예사 박은진은 죽은 고니 주우러 다녔다. 고니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출장으로 자리 비웠다. 같은 시청 환경 부서에서 고니 죽었다고 빨리 수거해가라 난리를 쳐댔다. 박은진이 현장을 가 보니...뿔싸 기러기였다. 기러기야 이 놈들아. 그래도 그 부서에서는 안 믿길래 조류 전문가한테 연락하고 환경 부서에 다시 결과 알려주었다. 박은진은 한탄한다. "이기 무슨 짓인지..."


당진군청 학예사 고대영 일화다. 

- 자넨 누구인가?

- 학예사인데요.

- 학씨인가? 그런 성씨가 있나?


천안시청 학예사 김은정 실화다 

- 자넨 어떤 일 하는 공무원인가?

- 학예사인데요. 

- 어딨는 절인가? 그런 절이 우리 동네 있던가?

분통 터진 김은정...나중에는 무슨 일 하냐 물어서 학예사라고는 아니하고 "큐레이터요..이럼 알아듣더라구요!"


어느 지자체 박물관에서는 학예사가 유물유적 확인하러 자주 출장간다고 짤라 버려야 한다고...(이건 출처가 확인되지 아니한다)


서울 광진구청 학예사 윤성호가 겪은 일...출근 첫날에 행정서기보 분께서 신경 써서 사물함에 "하계사 윤머시기"라고 예쁘게 이름표를 붙여주시어 감동 받은적이 있습니다. ^^


지금은 돌고 돌아 문화재청 세계유산팀에 가 있는 박영록...누군가가 하계사는 여름에만 일하냐고 물어봤다고(이는 본인한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구선이가 간접으로 전한 내용)

이를 확인한 박영록이 보탠 말..."정말 여름에만 일하고 겨울에 개점휴업 할수 있으면 전 제 명함에 하계사라고 적고싶네요........ ㅎㅎㅎㅎㅎ"

이런 대화에 이주화(Joohwa Lee)가 끼어들어 말하기를 "이건 저도 겪었어요! 冬季士는 겨울에 오시냐고! ㅋㅋㅋ"


Jaewan Lee이 겪은 일..."전 우리 과장이 군수 외 다른 사람 앞에서 '이제 부터 우리 해설사가 설명하겠습니다'해서 뻥쪘습니다 ㅎ"...."학예사 10년차 때 개념없는 행정직 과장이 했던말 ㅠㅠ"이라고...Yohan Kim도 보태기를 "저도 같은 일 당해봤습니다. 제가 쳐다보자 '왜? 뭐?'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한숨한번 쉬고 설명시작했죠."


지역에서 학예사가 해설사로 통하는 듯...진천군청 학예사를 지낸 원보현의 말..."대부분 군 단위에서는 학예사를 해설사로 아나봐요 저도 11년 내내 들었어요 자 이제 부터 여기 해설사 분이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 해설해 주시겠습니다 ~ 라고 소개받았어요"


지금은 공사박물관장인가로 있는 Tae Hyun Ahn이 문경 학예사 시절..."해설사도 없던 시절. 첫 출근날 '안내원'으로 소개된 1인! ㅠㅠ"


앞서 말한 Yohan Kim의 다른 경험

-"거기 하주사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하씨 성 가지신 분이 없습니다"

-"하계사 주사님이요. 하계사씨 안계세요?"

제 경험담입니다. ㅡㅡ


다시 김요한의 에피소드..."주말에 출근해 박물관에서 입장료 받고 있는데, 그런 그를 보고 박물관 입장하던 아줌마가 아들래미한테 이르기를 '공부 안하면 너 저런 일 한다'"


문관욱의 비슷한 경험...대딩 때 답사준비위원회여서 모 지방시청에 전화해서 "문화관광과에 학예사님 좀 연결해주세요"

했는데 전화받은 사람이

"네? 학예사요? 학예사가 뭔가요? 학씨가 있나요?"

라고해서 그냥 끊음.ㅋㅋㅋㅋㅋㅋ


독립기념관에 있는 옥주연

"ㅋㅋㅋㅋ 저도 ㅋ

10년 전 쯤 ‘박물관에서 일하는 학예사예요!’라고 설명해도 돌아오는 답은

‘박물관에서 표 팔아요?’였습니다 ㅜㅠ"


지자체 학예사 1호 이채경....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을 요구한다는... 별별 희한한 걸 다 물어보고는 모른다고 하면 아니 학예사가 그것도 모르나...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잡학다식한 자가 되었으며, 몰라도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고 기디리라 해놓고는 온갖 자료를 찾아서 답변을 해주다보니 설혹 대답이 궁해서 구라를 쳐도 내말은 모두 진실이 되었음. 따지는 자가 있으면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2% 차이다. 어떤 사실에 진실이 51%면 진짜이고 49%면 가짜라고 강변했다는... 그런데 다 넘어감...


다시 구미시청 박은진..."예전 옆계 계장님은 저만 보면 곡예사의 첫사랑을 불러댔죠...쩝."


이채경만큼 오래된 노땅 학예사 박종수....

90년대 중반까지 시군의 문화공보실에서 문화업무와 공보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문서제목에 '문' 자만 박혀있으면 전부 학예사에게 맡겼죠. 문화재, 문화예술, 문화원지원, 음반비디오, 시사편찬, 합창대회, 지역축제, 민속예술경연대회, 국어순화, 지명업무 까지. 90년대 후반부터 이업무는 보통 2~3과에서 담당 합니다. 몇몇 시군을 제외하면 지방 공립박물관은 95년 지방자치 제도 시행 이후 경쟁적으로 설립되는데 전시자료와 전문인력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건물만 지으면 박물관이 되는지 알았던 시기였어요.

시군에서 원하는 학예사는 문화 행정가 였어요.


이런 박종수 언급에 대한 또 다른 노땅 영주 학예사 금창헌....

"그래서 너무 개겼더니 요모냥이네..ㅋㅋ"...과장 진급 못함


이건 딴 얘기...건축학도이자 문화재 활용업자 김재홍 군이 전한 말..."북한산성교육지원센터를 북한산 성교육 지원센터라고 읽는 사람도 많았어요~☆"

이에 대해 노땅 학예직 과장인 김성배 왈...."아, 옛날 일 생각나게 하는군요. 산성 전문가를 '성관계 전문가'라 하신 분도 있었다는...ㅋㅋ"


(계속 보강한다)


뭐 코미디 같지?????

이게 지자체 학예사들 하는 일이다. 

뭐 이 정도는 되어야 문화재 일 한다 할 수 있지 않겠어?


*** 이 코너 계속 보강하려 합니다. 지자체 학예직 종사자들의 경험담을 모읍니다. 증언 부탁드립니다.


참고문헌 

https://www.facebook.com/moongtaeng23/posts/1068384379981563?__xts__[0]=68.ARBjemAV1-7wQOkuP20lNuTMZXLtABRHKRj-ioi4unccnwTO0xV1pH6DLJIlSonm0S3c9_4RIxXyBwTd_ghhXpQxiLe8GSuJaU445Y16yT3S9wf447ALeLjf6u9ZGURBG4wTa55S9aGSct6X7dqTsCgcKxaUWvRwfaHZKmUAod8tXQdyKG5o7Q&__tn__=-R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797426106992166&set=a.120053268062800&type=3&theater


https://www.facebook.com/taeshik.kim.5/posts/788508341174601?__xts__[0]=68.ARDWc9dtXWwaj8MqZxTAa0hMp9dPQknZYCbLTAB0zGCblnqmsPuDbEmYK_XoJ4cJvBhU16fJK3zg44UDZQFnVO3dOWs61bm6cJhCBFGtimu-x67S1Th4JPjYpoaG5ffiL259bzDxjBNELdVrbutJZOWknqgXnrklaF7mvBVR0Nm7btrSFO6p&__tn__=-R


Kyunghwan Kang "미국의 문화재보호법(national historic preservation act of 1966)에는 주정부문화재담당관(SHPO), 부족문화재담당관(THPO/인디언등), 심지어 일부 연방정부기관에도 문화재담당관(FPO)을 두도록 하고있습니다 우리도 중앙정부의 정책기능 강화와 함께 지방정부의 현장관리가 균형있게 조화되는 문화재관리체계의 재설계가 필요합니다 턱없이 부족한 지방의 문화재 전문인력의 보강이 시급합니다"


https://www.facebook.com/…/%ED%95%99…/keywords_blended_posts



작년 7월 4일인가 5일, 독일 본 세계유산위서 일본의 메이지시대 소위 산업혁명 유산군이 질긴 줄다리기 끝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자마자 중국대표단이 회의장 각국 대표단에 뿌린 유인물이다. 서명도 없고 대표자 명단도 없으며 날짜도 없으니 공문서로서의 그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본국 외교부에서 훈령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막강한 중국도 세계유산위 21개 위원국이 아닌 까닭에 그 어떤 발언권도 없어 분통만 터뜨리고 일부 대표단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유인물은 당시 내가 폰카로 촬영한 자료만 남고 실물은 멸실했겠거니 했는데 어제 서재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작년 세계유산위 찌라시 뭉치에서 찾아냈다. 고화질 스캔을 하러 가는 길에 일감一感을 초草하노라.


전문을 번역한다. 거친 번역임을 감안해줬으면 한다.


제39차 세계유산위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에 대한 중국 대표단 성명


중국은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에게 강제노역과 관련되지만 그런 사실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면서 저들 유산을 등재하고자 하는 일본을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저들 유산에는) 도합 2천316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수년간 모진 환경에서 강제로 노역해야 했으며 그들 중 323명이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강제노역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이자 인권 위반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나는 일본 대표단이 그들의 성명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1940년대에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저들 유산 중 몇 곳으로 강제동원되어 모진 조건에서 강제 노역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런 사실이 일본의 등재신청서에서는 무시된 사실을 주시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둘러싼 총체적 사실에 대한 일본 측의 충분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나는 일본에 대해 역사를 직면하고, 나아가 이코모스와 세계유산위가 요구한 것처럼 각각의 유산에 대한 전체 역사를 이해하게끔 하는 구체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며, 또한 모든 개별 강제노역 피해자의 고통이 기억되고, 더불어 그들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확실히 해줄 것을 촉구한다.


** 이는 꼭 2년 전인 2016년 9월 6일 내 페이스에 게재한 글이다. 

  1. yisabu 2018.09.09 12:43 신고

    사진속 글을 쓴 이는 Zhang Xiuqin라고 합니다.

2002 붉은악마 태극기 포쇄, 2012년 10월 5일.


2014년 8월 25일이었다. 이제는 문화체육관광위로 분산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한선교 새누리당 의원(용인병)이 기자들에게 보도자료 하나를 배포했으니, 다음과 같은 제목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어디에?

보도자료에 의하면, 2002년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린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당시, 경기장에서 붉은 악마가 사용한 대형 태극기가 현재는 어디에 있을까? 이를 이 의원실에서 최근 조사한 결과, 국립민속박물관 수장고 밖 복도 한편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한 의원실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은 13만3314점으로 15개 수장고에 나누어 수장됐지만 수장률이 125.27%로 수장고가 포화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빌랙 등을 설치해 공간 효율을 높였다지만 수장고가 포화상태인 까닭에 일부 소장품은 여전히 수장고 밖 복도에 보관 중이며,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가 사용한 태극기도 수장고 문제가 있어 복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의원실에서는 그것이 나무상자에 담겨 수장고 복도에 보관 중인 사진을 첨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의원은 "민속박물관 특성상 민예품, 근현대 생활용품, 농기구, 상여 등 대형 소장품 비중이 높으며 매년 소장유물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소장품은 연평균 7700점이 증가 추세라 이런 수장 환경이 지속된다면 유물의 안전과 보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한 의원은 "어보(御寶)나 숭례문 같은 국보도 중요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처럼 우리네 생활문화 자료를 잘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도자료 배포 당시 국립민속박물관은 보물 1318호(신구법천문도), 중요민속자료 230호(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 등 127점, 등록문화재 1,154점을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로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와 응원도구, 기념품 등 1162건 2628점 등을 보관 중이라고 한 의원실에 보고했다. 

이 보도자료는 전후맥락으로 볼 적에 당시 수장고 문제에 처한 국립민속박물관을 한선교 의원실이 돕겠다는 차원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큼 수장고 문제가 처참하니, 이를 수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장고 확충보완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마침 그런 사업을 추진 중인 박물관 측을 지원사격하겠다는 뜻에서 제기한 것으로 안다. 

한데 이 보도자료는 뜻하지 않은 역풍을 초래했으니, 다름 아닌 저 보도자료 제목이 저런 소중한 생활사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이 제대로 보관 관리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듯이 비쳤기 때문이다. 실제 이 보도자료를 토대로 하는 관련 보도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민속박물관을 성토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기억한다. 이에 박물관 역시 적지 않이 당황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 혹은 보도 통용이 박물관으로서는 못내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느 누구도 박물관 수집 대상으로 삼지 않은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를 민속박물관이 선제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에서는 나에 얽힌 작은 사연도 있으니, 월드컵 개최 당시 문화부 소속 기자인 나는 한때 체육부 기자였다는 경력이 고려되어, 월드컵 기간 그 취재에 잠깐 차출되기도 했거니와, 그 과정에서 나한테 배정된 미디어 관련 자료 일체를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취재 비표며, 관람권이며, 믹스트존 인터뷰권 등등을 서재에서 찾아내고는 마침 민속박물관이 월드컵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라기에, 미디어 관련 자료도 필요할 법 해서, 그것들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민속박물관으로서는 민속박물관이 그렇게도 소중한 월드컵 관련 유물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은 채 박물관 수장고 복도에 패대쳤다는 듯이 보이는 저런 보도에 못내 섭섭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하긴 박물관으로서는 꼭 해야한다는 규정도 없는 일, 어느 누구도 당시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월드컵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가 이런 비난에 쳐하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첨부사진은 2002년 붉은악마 태극기를 경복궁 경내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지붕에서 포쇄하는 장면이다. 포쇄란 습기를 말리고, 병충해를 제거하는 작업으로 간단히 말해 이불을 햇볕에 말리는 작업과 같다. 박물관에 의하면 사진이 포착한 포쇄는 2012년 10월 5일 일이라 한다.  

수장고 복도에 방치? 수장고 복도에 있다 해서 방치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복도도 수장고 일부다. 다만, 민박 수장고를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는 성립하니, 그런 점에서 한선교 의원실에서도 이 점에 방점을 두고 문제의 보도자료를 뿌린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 진의가 무엇이건 이를 국가기관에서 방치했다는 관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한일 월드컵 관련 자료를 국가기관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아이디어를 제출한 사람과 민박은 훈포장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이를 방치했느니 하는 따위로 몰아부치거나 저런 식으로 일반에 통용된다면 누가 저런 일을 애써 하겠는가? 

민속박물관 수장고 문제는 그 이전 논란과 맞물려 추후 별도로 정리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故 김선기(이영덕 제공)



그저께 교통사고 여파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24일 향년 만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선기 선생과 나는 거의 인연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교수로서 대학 교단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요, 더구나 내가 문화재업계에 투신한 무렵만 해도 그가 생평을 몸담다시피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는 거의 손을 놓고는 발굴 주도권이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필두로 하는 국립기관과 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손으로 넘어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현장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계를 접하고 내가 직접 인연에 기반한 회상기를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원광대 고고학, 나아가 호남고고학, 나아가 한국고고학에 남긴 족적은 무시할 수 없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그의 흔적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그의 원광대 사학과 1년 후배 최완규 원광대 교수에 의하면, 고인은 전북 옥구 출신이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랜 기간 고인을 지켜본 이가 최 교수라 할 만하다. 고인과 최 교수는 정식 고고학 전담 교수가 없는 원광대 사학과에서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기틀을 다진 김삼룡 선생과 나중에 동국대로 적을 옮긴 불교사 전공 홍윤식 교수를 사사하면서, 고고학은 철저히 현장 실습을 통해 습득했다. 


최 교수에 의하면 고인과 그 자신은 경주 발굴현장에서 실습을 가서 고고학을 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말하는가"라는 반문에 최 교수는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병현 선생 (감독관) 시절인가 신창수 선생 시절인가" 되물었더니, 최병현 선생 시절이라 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중·후반에 문화재관리국이 황룡사지 발굴을 시작할 무렵에 고인은 실습생 신분으로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나아가 고인은 감은사지 발굴에도 실습생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인이나 최 교수 모두 박정희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철저히 현장에서 고고학을 습득한 원광대 고고학 1세대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고인의 까마득한 학과 후배로 많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는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통해 내가 조금 전 넘겨받은 고인 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덧붙이건대 고인과 더욱 가까웠던 이는 이 군과 학과 동기인 조상미 현 익산군청 학예연구사라 한다. 혹 나중에 여유가 나면 상미군을 통한 고인 일화를 보완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사학과

동아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사학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82~1995)

원광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담당관

호남고고학회장

(사)한국고도육성포럼 감사

전라북도문화재위원

이 정도라면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 인명록에도 올라있을 법 해서, 내부망을 통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없다. 아마도 고인이 어느 대학 교수를 역임했더라면 이런 현상은 빚어지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래, 대한민국에서는 인명록에 등재되려면, 대학교수는 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에서도 나오니 몹시도 씁쓸하기만 하다. 


이 약력에서 보듯, 교수가 되지 못한(혹은 안 된) 그의 學的 내력은 원광대 마백연구소 및 동대학 박물관과 궤를 같이한다. 이 두 기관을 통해 고인은 전북 고고학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이들 기관이 손댄 유적으로 가장 저명한 곳이 미륵사지 동탑과 같은 익산 지역 왕궁리 유적이 있으니, 고인은 이들 현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지금은 백제 고고학을 대표하는 이 유적들 곳곳에는 그의 체취가 남은 것이다. 특히 고인의 미륵사 사랑은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다. 그가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도 미륵사지 앞에다가 거처를 정한 이유도 이런 유별난 내력을 증언한다. 


고인은 동아대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단행본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를 2012년 8월에 도서출판 서경문화사를 통해 발간했거니와,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자작시가 실렸다.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미륵사 금당터에 뿌려다오.

그곳에 서려 계실 

백제의 용을 만나 보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마룡지에 뿌려다오.

백제의 꿈을 잊지 못하고 계실

연못속의 용과 함께

용화회상을 기다리리라.


그리고 

사랑보다 더 큰 슬픔은

그리움인 줄 알기에

한없는 그리움에 우짖다가

그들과 함께

초회의 설법에 참여하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아버님 산소 곁에 뿌려다오.

고통을 안겨준 사람조차도 

포옹하고자 하셨던

그 품에

다시 안겨보리라...


2012년 05월


원광대학교박물관 유물정리실에서 김선기


음울한 이 시를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이영덕 군에 의하면, 고인이 교통사고라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이미 죽음을 예감하면서 저와 같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말한다. 이 군에 의하면, 고인은 2008년 무렵인가 뇌일혈로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일이 있거니와, 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이미 생사를 초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긴 그런 내력을 대입하면, 저 시가 이해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고인이 분신처럼 사랑한 미륵사지


아무튼 저 '유언'에서도 미륵사지에 대한 유별한 고인의 애착이 생생히 묻어난다. 저 단행본을 아직 접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간평하는 서경문화사 안내를 보니 이렇다.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는 익산 금마저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책이다. 그동안 익산 지역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사자사지, 연동리 사지, 대관사지, 제석사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당탑의 축제 수법과 가람 구조, 출토 유물의 특징을 파악하여 사찰의 축조 시기와 조영 목적 등의 전개 양상을 규명하고 있다. 이는 사찰이 조성되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역사적 맥락에서 본 익산 고도 육성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목차

Ⅰ. 緖言 

     1. 金馬渚의 正體性에 대한 爭點 

     2. 硏究史

Ⅱ. 金馬渚 百濟 寺址의 構造와 編年 

     1. 百濟 寺址 槪觀 

     2. 堂塔 構造 

     3. 伽藍 構造 

     4. 出山 기와의 編年

Ⅲ. 金馬渚 百濟 寺址의 特徵 

     1. 寺刹 造營 

     2. 三世祈願寺刹

Ⅳ. 金馬渚 百濟文化의 獨創性 

     1. 遺物을 통해 본 獨創性

     2. 遺構을 통해 본 獨創性

     3. 伽藍 配置의 獨創性

     4. 寺刹 造營의 獨創性

Ⅴ. 金馬渚 百濟 文化의 特徵과 古都 育成 

     1. 金馬渚 百濟文化의 特徵 

     2. 金馬渚 古都 育成 方向

영문초록

일문초록

참고문헌

도면ㆍ사진 인용기관 및 도서목록

찾아보기 


일간 내 찾아보고, 그것을 간평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미륵사지를 사랑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나를 후회해 본다.  


*** 추기)  

그의 자세한 행적은 도서출판 주류성에서 발간하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에 인터뷰 형식으로 실린 적이 있다는데, 나는 아직 그 글을 읽지 못했다. 나아가 방금(2018. 8. 25 저녁 10시 무렵) 숭실대 최병현 명예교수와 통화한 결과, 본인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1977년 혹은 78년 무렵 원광대 역사교육과에서 파견한 실습생 중 가장 먼저 온 학생으로 기억한다고 하며, 감은사지 발굴은 윤덕향 선생이 학예연구사로 현장을 지휘(상급자는 조유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미륵사지 발굴에 투입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나아가 김선기는 최병현 선생과는 지금은 군산시로 편입된 전북 옥구군 대야면 출신으로 면까지 같은 고향이라 한다. 그래서, 최 선생으로서는 특별히 더 아꼈다고 한다. 최 선생은 고인에 대해 "미련곰탱이처럼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했다"면서, 이런 성격이 좀 더 나은 자리로 못 나간 까닭인 듯 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1. 먹튀 2018.08.27 01:59 신고

    잘보고갑니다,.

<아차산 전경과 홍련봉 제1, 2보루..왼편이 2보루.



2013년 12월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 성곽축조 기술의 결정체를 확인

- 12.3. 오후 3, 홍련봉 제12보루 발굴 조사 2차 현장설명회 -

 

광진구청(구청장 김기동)이 발주하여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2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123() 오후 3시 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20127월 광진구청에서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하여 발굴조사를 의뢰하였고, 201341차 조사가 마무리되어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에서는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외황 및 부교시설>


1차 조사에서는 홍련봉 제1보루 성벽을 전면 노출 조사하였으며, 홍련봉 제2보루는 2005년도에 조사된 내부 건물지를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2보루는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의 외황(外湟:마른해자)이 설치되었는데,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보루 내부는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문화재 자문위원회의를 거쳐 추가 발굴이 결정되었고, 2차 조사에서는 내부시설에 대한 추가조사, 외황의 전체적인 구조파악, 지난 2005년 발굴했던 북쪽 평탄지의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홍련봉 2보루 남동편 외황 토층>


조사결과 외황은 북서쪽 일부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확인되었으며, 규모는 전체길이 204m 1.52m, 깊이 0.62.5m이다. 단면형태는 ‘U’자형과 ‘V’자형에 가까우며,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생토면을 굴광하여 내외벽을 이루고, 동쪽과 서쪽의 경우 내벽은 석축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2.43.5m(1725)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일부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은 연결하여 배수하였다.


<홍련봉 2보루 북서편 배수시설>


북쪽 평탄지에 대한 추가조사 에서는 2기의 석곽 저수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생토면을 굴광하여 점토를 바른 뒤 석축으로 벽면 축조하였다. 1호 석곽 저수시설의 경우 바닥면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확인되었고, 2m 가량의 대형 고구려 철제 깃대가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은 다른 토광형 저수시설과는 달리 저장시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2005년 조사된 소성유구의 하층에서 온돌시설 3기가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 폐기 후 사질토를 정지하여 소성시설 조성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성벽 외부로 이어진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를 확인하였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또한 1보루와 2보루 사이 시굴구간을 일부 제토하여 조사한 결과, 구릉의 경사면을 자로 굴광한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보루와 2보루를 연결하는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는 보루 사이 도로 시설로 추정된다


<홍련봉 2보루 석곽저장시설>


출토된 유물은 기존의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가 주를 이루며,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내부 철제 깃대 출토 장면>


지난 2005년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문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또한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 중 유일하게 와당과 기와가 출토되어 조사단에서는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출토 철제 깃대>


이번 조사에서는 지난 20127월부터 20134월까지 이어진 1차 조사에서 확인된 홍련봉 보루의 성곽구조와 외곽 구조를 더욱 자세히 밝혀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성곽의 전체모습을 노출 조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전체적인 규모와, 성격, 구조 등을 파악하여 문화재 복원 정비에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홍련봉 1,2보루 연결도로>


현장설명회에 관한자세한내용은광진구청(윤성호 학예연구사 02-450-7593), 한국고고환경연구소(이정범 연구원 010-xxxx-xxxx)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4월 19일 서울 광진구 보도자료


고구려의 새로운 성곽 구조 확인!

아차산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설명회


- 광진구, 오는 23일 오후 2시 아차산 홍련봉 발굴현장서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실시

-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되는 등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



<홍련봉 1, 2보루...사진 왼편이 2보루> 


과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군사기지였던 서울 광진구 아차산 남쪽 기슭의 홍련봉 1·2보루(소규모 부대의 주둔위한 작은 규모의 성곽) 발굴조사 결과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고 광진구가 19일 밝혔다.

 

<아차산과 홍령봉 1,2보루..왼편이 2보루>


광진구(구청장 김기동)오는 23일 오후 2시 사적 제455호 아차산 일대 보루군(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에서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홍련봉 1보루>


홍련봉 제1보루와 제2보루는 지난 2004년과 2005년도에 각각 내부 건물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복토한 후 임시보호 중이었다. 이에 광진구는 문화재 복원정비를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추가 조사를 발주했다.

 

<홍련봉 1보루>


이번 발굴조사는 국·시비를 포함해 총 69천여만원이 투입됐으며, 지난해 7월부터 이달까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소장 이홍종)에서 성벽 내·외부 및 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등 총 12,830의 면적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구려의 성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확인됐다.

 

<홍련봉 1보루 목책렬>


이날 현장설명회는 그동안 홍련봉 제1·2보루의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전문가 학술 자문 결과를 브리핑하고 향후 발굴 방향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일반인에게도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홍련봉 1보루 치>


홍련봉 제1보루의 성벽 전체에 대한 노출조사 결과 성벽 둘레는 140m, 잔존 높이는 최대 1.8m로 성벽 기저면은 사질토, 점질토 등을 정지한 후 두 겹으로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안쪽 성벽에서는 주동(柱棟)이 일부 확인됐고, 성벽이 유실된 구간에서는 방어시설의 하나인 목책열과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도 확인돼 성벽 붕괴 시점이 고구려 후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벽 축조방식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발견됐다.

 

<홍련봉 2보루 전경>


홍련봉 제2보루는 지난 2005년도에 조사된 곳을 제외한 전체 내부 건물지와 성벽 및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로 진행됐다. 성벽은 치를 제외한 둘레가 총 204m, 잔존 높이는 최대 2.5m, 성벽 주변 시설로는 총 7개의 치가 확인되었으며, 곡부 구간의 경우 성벽 외곽으로 3~5m 지점에 1열의 성벽을 추가로 축조한 구조가 확인됐다특히 북서쪽 일부 지점을 제외한 성벽 외곽으로 폭 1.5~2m, 길이 204m 의 해자(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 고구려 성곽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홍련봉 2보루>

 

내부시설로는 건물지가 5기 확인되었는데, 온돌시설과 함께 단야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함께 확인됐다. 이와 함께 가마유구 1, 저수시설 2, 집수정 1, 기타 석축시설 3기와 계단시설 3, 배수시설 2기 등과, 기존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각종 고구려 토기류와 대도, 철촉, 삽날 등의 철기류 등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이번 조사 결과 두 보루의 성곽구조가 자세히 밝혀졌으며, 특히 홍련봉 제2보루에서는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성곽 구조가 확인됐다. 2보루 남쪽구역의 석축시설 내부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고구려유적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와 함께 단야시설도 조사되었으며, 금속제품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공정에 사용되는 연장인 철제 집게 등 각종 단야구도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


()한국고고환경연구소 관계자는홍련봉 제1보루는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 중 가장 위계가 높으며, 2보루는 무기와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하던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번 발굴조사 결과는 향후 6세기 전반 고구려 군의 조직과 운영 및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집수지와 건물지>


한편 홍련봉은 아차산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독립 구릉으로 서기 500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군사시설로써 한강 이남과 중량천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홍련봉 제1보루는 남쪽 봉우리에 전체둘레 120m 남북최장 46m 동서 37m, 홍련봉 제2보루는 북쪽 봉우리에 둘레 179m, 넓이 458평의 소규모 석성으로 축조돼 있으며 서로 150m 가량 떨어져있다.

 

<홍련봉 2보루 출수구出水口>


지난 2005년에 실시한 홍련봉 제2보루 발굴조사에서 서기 520년에 해당되는경자(庚子)명 토기가 출토되어 홍련봉 보루가 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바 있으며,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와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어 이 보루에 중요인물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


김기동 광진구청장은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역사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비·보존하고, 문화재 훼손을 막는 등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우리구는 아차산 일대 홍련봉 보루를 새롭게 복원·정비하여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고 풍부한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련봉 2보루 내부 건물지와 생산시설(가마 등)>


[참고자료]

 

홍련봉 12보루 발굴조사용역 중간 보고

 

용역개요

명 칭 : 홍련봉 제12보루 발굴조사 용역

면 적 : 12,830

- 발굴조사 : 10,738(성벽 외부 10m, 성벽 및 내부)

- 시굴조사 : 2,092(홍련봉 12보루 사이 진입로)

용역기간 : 2012. 7. 10 ~ 2013. 4.30 (실조사일수 180)

소요예산 : 696,390천원

발굴기관 :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추진실적 :

‘12.7.12~7.31 : 유적지 입구 및 등산로 정비

‘12.7.12~ 8.4 : 홍련봉 12보루 진입로 시굴조사(2,092)

- 조사 결과 성격 미상 석렬 1단 확인

- 복토 후 야적장 및 탐방로 활용 예정

‘12.7.12~현재 : 홍련봉 1보루 발굴조사

-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 및 제초작업 완료

- 성벽 발굴조사 완료, 실측 작업 진행 중

‘12.8. 6~현재 : 홍련봉 2보루 발굴조사

- 임시복토 토사 제거 및 성벽 외부 10m지점 벌목작업 완료

- 성벽 내부 건물지 조사 중, 실측 작업 진행 중

 

향후일정 :

‘13. 4.23 : 자문회의 및 현장설명회

‘13. 4.30 : 발굴조사 준공

‘13.5월중 : 최종보고회(광진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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