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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길두리 고분 유물 출토 현황>


<'살포,' 고분 출토 '삽자루'의 정체>

고흥 안동고분 대형 살포 유물 출토

[연합뉴스 2006-03-27 15:38]

 

(고흥=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은 보기 힘든 농기구로 '살포'란 것이 있다.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은 "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 두툼한 쇳조각의 머리쪽 가운데에 괴통이 붙은 모가 진 삽으로 긴 자루를 박아 지팡이처럼 짚고 다닌다"고 살포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살포가 삼국시대 한반도 고분에서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다. 25일 현장이 공개된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소재 '안동고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살포는 동-서 방향으로 장축(長軸)을 마련한 석실(石室·돌로 만든 무덤방) 중 동쪽벽과 인접한 남쪽 벽면 바닥을 따라 놓여 있었다.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은 동쪽벽에 닿아 있었으며, 자루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살포가 마주하는 반대편 북쪽 벽면에는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 큰칼)와 도끼, 창과 같은 철로 만든 무기류가 자리잡았다. 살포와 이들 무기류 사이에 위치하는 동쪽 벽면에 치우친 곳에서는 철로 만든 갑옷류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안동고분 출토 살포는 아직 수습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길이는 180㎝ 가량이며, 머리 부분은 물론이고 긴 자루 또한 모두 철이었다.


최근 발굴된 삼국시대 살포 유물로는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이 조사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 중 토광목곽(土壙木槨) 구조인 수촌리 Ⅱ-1호분 출토품이 있다. 수촌리 살포는 가죽 직물로 겉을 감싼 삼지창(三枝槍)과 나란히 놓인 상태로 발견됐다. 


수촌리건 고흥 안동고분이건 함께 출토되는 유물이 모두 무기류라는 점은 살포가 갖는 기능을 추정할 때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살포 유물로는 경상대박물관이 조사한 경남 합천군 옥전 M3호분이라는 5세기말 가야계 무덤 출토품을 들 수 있다. 이 고분은 살포 뿐만 아니라 환두대도만 해도 10여 자루나 부장했으며, 이중 절반은 금 제품이었다. 길이 125㎝인 옥전 무덤 살포 역시 환두대도라는 무기류와 함께 발견된다는 점이 수촌리 무덤이라든가, 안동고분과 공통점이다.


반면 4-5세기 백제 무덤인 천안 용원리 고분 출토 살포는 이들과는 우선 모양새부터가 현격히 다르다. 나무 막대를 사용했을 자루는 삭아서 없어지고 몸체만이 남아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농기구'로서의 살포로 분류되고 있다. 그렇다면 살포는 왜 이런 삼국시대 무덤들에서 출토되고 있을까?


그 기능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로 조선시대 자료들을 통해 풀리고 있다. 왜냐하면 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에 바로 살포가 있기 때문이다. "긴 자루를 박아 지팡이처럼 짚고 다닌다"는 《표준국어대사전》의 기술은 바로 조선시대에 사용된 살포의 전통을 언급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 경우 살포는 누구나 휴대할 수는 없다. 대단한 고위급 전·현직 관료가 아니면 휴대 자체가 금지될 정도로 상징성이 높았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들에 더러 출토되고 있는 살포 또한 그 기능이 기본적으로 같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살포는 다분히 의장적인 성격을 지닌 이른바 위세품(威勢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위세품(prestige goods)이란 글자 그대로 그것을 착용하거나 휴대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권세를 징표하는 물건을 말한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그랬듯이 그보다 약 1천년가량을 올라간 삼국시대에도 살포는 휴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엄격히 제한됐다는 뜻이다.


이런 의장적인 상징성과 함께 살포는 환두대도와 같은 무기류와 함께 출토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의미도 짙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살포가 그렇듯이 환두대도와 같은 칼 또한 실용성은 현격히 떨어진다. 그렇지만 환두대도와 같은 칼은 요즘의 무속사회에서도 신내림을 할 때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듯이 삼국시대에는 권력자라고 하면 그 지역의 종교사제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종교적 권능을 표시하는 대표적 기물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환두대도와 같은 칼은 특히 도교 신학에서는 동경(銅鏡)과 함께 신체(神體)를 구성하는 양대 기물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런데 실로 절묘하게도 고흥 안동고분에서는 동경과 환두대도가 세트로 출현했다. 이는 이것들과 함께 출현한 살포라는 유물 또한 같은 권능을 지닌 물건이었다고 간주해도 좋은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 안동고분에는 또 석실 벽면을 주칠(朱漆)이라 해서 온통 붉은물감으로 칠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데, 무덤을 이렇게 장식하는 것 또한 도교신학과 밀접하다. 같은 문화권역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는 아예 죽은 자를 위해 주사(朱砂)라고 해서 황화수은(HgS)이 주성분인 붉은물감을 그릇 가득히 담아놓기도 했다. 


주사나 주칠은 도교신학에서는 영생불멸을 상징하는 신약(神藥)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적 전통(도교)을 지닌 동경-환두대도가 안동고분에 가미돼 있다는 사실은 이 무덤이 축조되던 5-6세기 무렵 이 지역 종교적 특성까지 엿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어떤 대가야고분 발굴현장>


근자 문화재 소식을 훑어보니, 대구경북 지역에 기반을 둔 어떤 언론에서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 발굴업체 선정이 잘못되었음을 질타하는 보도가 있었음을 보았다. 무슨 내용인가 본즉슨, 지역에 대가야고분 발굴경험이 많은 발굴조사 전문기관이 많은데, 그런 경험이 전연 없는 타지 발굴업체가 조사기관으로 선정되었느냐는 비판이었다. 


〈대가야고분 '잘못된 발굴입찰' 한 목소리〉라는 제하 이 보도에 의하면, 경북 고령군이 지산동 고분군을 구성하는 대가야시대 무덤 중에서도 604호분이라고 명명한 대가야 후기 왕릉급 고분을 발굴키로 하고, 그 조사기관을 최근 공개입찰한 결과, 공개입찰이라는 제도 함정을 뚫고서 "왕릉급 고분 발굴 경험이 없는 외지 기관"이 선정됐다는 것이다. 


보도는 나아가 "왕릉급 고분발굴 경험이 많은 다수의 발굴기관을 제쳐두고 경험이 일천한 외지 기관이 맡으면서 잘못된 결정이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하면서, 보도에 동원된 어떤 '고분연구 전문가'는 "자격있는 곳 어떤 곳이라도 와서 하면 된다는 그런 식으로 국비를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유사한 사례가 전국에서 동시에 행해지고 있다"고 했다는가 하면, 실명으로 등장한 어떤 고고학도는 "조사를 잘 하기 위한 좋은 행정은 경험이 많고 충분하게 훈련된 조사 주체가 발굴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행의 전국 입찰로서는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사기관 선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보도에 의하면 5억원 이상 용역사업이라 지역제한이 불가능해 전국 입찰을 실시한 결과 빚어진 현상이라 하거니와, 박일찬 고령군 학예연구사는 이 인터뷰에서 "5억이 넘는 학술연구용역 예산으로는 지역을 제한을 둔다든지 이렇게 하기 어렵고 실질적으로 전국 입찰을 통해서 계약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금액이 일정액 이상이라, 전국단위 공개입찰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문제의 기관이 선정됐다는 뜻이다. 지역에 기반을 두었고, 그런 까닭에 지역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언론이 이런 지적을 하는 일은 언뜻 무리라거나 문제라고도는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보도는 "하지만 중요한 유적이니만큼 제한입찰로 발굴 경험이 많은 기관으로 입찰 자격을 제한했다면 깊이있는 조사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는 소위 지역 여론을 전달한다. 


이를 둘러싼 전후 사정을 좀 더 내가 알아봤다. 문제의 고분조사는 충청도에 기반을 둔 충청문화재연구원이 공개입찰을 통해 따갔다. 입찰 제시금액이 5억원 넘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략 4억5천 정도에 응찰한 이 연구원이 조사기관으로 선정됐다. 조사기간은 실조사일수 기준 80일이라 한다. 요새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복원 지시에 응해 가야사 관련 돈이 좀 풀린 모양인데, 뭐 볼짝없이 이만한 조사비를 재정 사정이 넉넉할 리 없는 고령군에서 자체 조달했을 리 만무하고, 국비 지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국민세금일 것이다.(혹 이 대목 내가 잘못 안 사안이라면 교정 부탁한다)


나는 이런 보도가 어찌해서 나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반드시 시나리오가 있기 마련이다. 해당 기자가 자체적으로 저런 일이 문제가 있음을 캐취해서 그것을 저리 기사화했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본다. 누군가는 분명히 찔렀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짚이는 데가 없지는 않다. 같이 입찰에 응했다가 떨어진 지역 업체이거나, 혹은 지역 사회와 밀접한 고고학계 어떤 인사일 것이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어찌 듣보잡 기관이 대가야 고분을 발굴할 수 있느냐? 언론이 왜 이런 일에 침묵하느냐 하고 로비도 하고 좀 했을 것이다. 안 봐도 비됴다. 


<어떤 대가야 고분 발굴현장>


그렇다면 저 보도 자체 혹은 저 보도가 말하는 소위 지역 고고학계 여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대가야 고분은 그것을 발굴한 경험이 있는 기관만이 발굴해야 한다는 법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조사기관 자격만 있으면 누구나 발굴이 가능하다. 그것이 법이다. 보도 논리대로라면 대가야 고분은 그것을 한 번 발굴한 기관만이 독점한다. 한데 실제로 이런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특정한 지역, 특정한 발굴업체가 대가야 고분 발굴을 독점한 경향이 없다고는 결코 할 수 없다. 


둘째, 선정된 기관이 능력이 없다는 듯이 보도는 말하지만, 진짜 그렇느냐는 별개 문제다. 없기는? 고고학 유적 중에서도 어떤 곳이 가장 발굴이 쉬운 줄 아는가? 고분이다. 고분 발굴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발굴한다. 도굴꾼도 당장 갖다 놓으면 고분 발굴 잘한다. 그만큼 고분 발굴은 쉽다. 


고분 발굴이 어렵다고 주장하는 고고학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수준이다. 그래 그 말 어느 정도 인정한다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새로운 기술이랍시며 현장에 접목한 고고학 발굴이라는 것도 내실을 따져보면 빈한하기 짝이 없어, 대개 봉분을 어떤 방식으로 쌓아올렸느내, 판축기법이니 뭐니 하는 것을 밝혀내는 수준의 저급함을 면치 못한다. 고분 축조공정이라는 말이 근자 한국고고학에서 일대 유행하는데, 저런 저급한 고고학 조사방법을 최신 기법이라 선전한다. 단언하지만 이런 방식 단 하나도 선진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 고고학계 나가봐라. 어느 고고학도가 봉분 축조기술로 발표한다던가? 한국이랑 일본 고고학도밖에 없다. 웃기는 소리다. 국내 어떤 발굴기관이건, 자격을 갖춘 곳이면 지금의 한국고고학 수준으로는 여건만 된다면, 봉황대 고분도 조사할 수 있다. 


셋째, 지역업체를 제끼고 왜 타지 기관이 들어왔느냐고 질타하나 이 역시 어불성설이요, 적반하장이다. 이 말...같잖아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지역주의라는 강고한 틀을 깨치고 타지로 가서 식민지 개척하듯 한 기관들 선두주자가 실은 영남 지역 발굴기관들이다. 이들은 요새 전국 어느 곳이나 안 나타나는 곳이 없다시피 하다. 2012-16년인가 조사한 충북 충주지역 대규모 택지개발지구를 공개입찰로 따서 조사한 기관은 다름 아닌 영남지역 기반 기관이었다. 지금 부여 읍내 한복판 공사장에서 대규모 백제시대 발굴이 벌어지는데, 그 조사기관 역시 영남지역 기반 기관이다. 이들 영남지역 기관들은 서울 도심까지 점령해 버렸다. 서울 도심지 곳곳 발굴현장에 영남지역 조사기관들이 들어와 조사 중이다. 이들이 파본 곳이라곤 신라시대 유적 정도라고 해서, 이들이 조선시대 한양 도시유적 발굴경험이 없다 해서, 그들이 발굴조사 자격 없다는 말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넷째, 지역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발상 역시 문제다. 이건 볼짝없이 기자가 생각한 구절이 아니라, 이번 건을 제보한 일부 고고학도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지역제한이며 하는 각종 제한을 두어 특정지역 발굴을 독식하는 구조를 구축한 주축 중에 영남지역 기관들이 있다. 애초 발굴조사기관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영남이었고, 그런 영남이 강고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섯째, 대가야 고분 경험이 있는 기관이 발굴을 해야 좋다? 어떤 자가 이 따위 소릴 지껄인단 말인가? 같은 조사기관이 같은 유적 조사하면 맨날 똑같은 소리다. 대가야? 대가야 조사와 연구는 영남지역 특정 학맥 인맥이 독식하는 구조다. 고령군 등이 주최한 관련 학술대회 지난 수십년치 조사해 봐라. 그 수십년 전에도 발표자 혹은 토론자로 등장한 사람이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등장하는 꼴을 본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이 반세기 가까이 똑같은 소리 되뇌이는 곳이 대가야 고고학이다. 이런 대가야 연구니 무슨 새로운 연구가 나오겠는가? 


한마디로 고령 대가야고분은 이 지역 발굴경험이 있거나 많은 이 지역 발굴기관이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 


  1. 턴오버 2018.08.15 17:45 신고

    문화재 발굴에도 이런 뒷얘기가 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아무쪼록 15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탈없이 빛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 한량 taeshik.kim 2018.08.15 20:22 신고

    어디나 같지요..기득을 지키려는 사람과 뚫으려는 사람


올해는 아니나, 지금 안동 병산서원은 이 모습에 얼추 가까우리라. 백일홍 배롱나무가 꽃을 흐드러지게 만발하는 시즌이 이 무렵이니 말이다. 



3년 전이다. 그때 무슨 인연으로 왜 이곳을 행차했는지 내가 자세한 기억은 없다. 아마 그 무렵 이를 포함한 전국 주요 서원을 엮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다 하고, 그에 이 병산서원이 포함되어, 내가 그 무렵 이들 후보지 서원들을 찾기 시작할 때이니, 이 일환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배롱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니로대, 마침 그 시즌이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이 배롱나무, 서원이나 향교 같은 마당에서는 비교적 드물지 않게 보는 나무지만, 이곳 병산서원의 그 만발한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으로 뇌리에 각인한다.



이 병산서원은 서원 그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그 앞 산과 계곡을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빚어내는 경관이 압권이라, 별천지 비인간인 듯한 곳이거니와, 이곳에다가 유독 강학당을 만든 서애의 뜻을 어찌 알리오마는, 다만 지금도 그렇거니와 이 서원 혹은 그 시원인 강학당이 처음 들어설 때도 이곳은 변변찮은 마을조차 없을 만한 곳이라, 이런 데서 공부가 되었을까마는, 그 시대는 이런 한적한 곳에다가 수신당修身堂을 만들고는 심신을 수련한다 설레발을 치곤 했으니, 그 심정으로 이해하면 될 법하다. 



내가 부동산에 그닥 욕심은 없는 편이나, 이런 데만큼은 내 것으로 삼았으면 하는 욕망은 있다. 마름 두고선 관리케 하고는 가끔 이런저런 시린 날이나, 답답한 날이나, 더운 날이나 하는 때 하루이틀 쉬는 곳으로 삼았으면 하는 욕심 정도는 있다. 그래, 유난히 무덥다는 올 여름 같은 날에는 이곳이라고 특별히 더 시원하고 그렇기야 하겠냐마는, 뭐, 에어컨 하나 갖다 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 무렵이건 비교적 흔히 보는 백일홍이라, 보통은 이렇다 할 감흥은 주긴 힘드나, 유독 이 병산사원이랑, 전라도 담양 땅 어느 곳만큼은 백일홍이 때로는 얼마나 화려찬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Museo Civico Archeologico..무제오 치비코 아르케올로지코라고 읽는다. 옮기면 시립고고학박물관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가 운영하는 곳인가? 그 명판 아래에 보면 Comune di Bologna 코뮤네 디 볼로냐라고 했으니, 볼로냐 자치시라는 뜻이거니와,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 고고학 박물관이다. 이곳을 정하고 찾지는 아니했다. 이런저런 곳 둘러보고는 이제 볼로냐가 물릴 무렵, 다음 행선지로 옮기는 길에 시간이 좀 남아 어슬렁거리다간 우연히 저 간판 마주하고서는 들어갔다. 



마침 내부 공사 중이라고 미안해 하면서, 이집트 콜렉션을 보겠느냐 한다. 유서 깊은 유럽 웬만한 박물관이라면, 이런 이집트 콜렉션은 거개 다 있다. 이들에게 이집트 컬렉션은 그 역사 전통의 유구함을 증언하는 필수품 같아, 없으면 왠지 모르게 와꼬 죽는 그런 코너이거니와, 다행인지 이 박물관엔 그런대로 고르게 구색을 갖춘 이집트 컬렉션이 있으니,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독지가가 생평 모은 것들을 몽땅 기증한 것이라 한 듯하다. 개중에는 악어 미라도 있다. 





보니 컬렉션 규모가 상당하다. 이것만으로도 이집트 고대사를 개괄할 만한 수준이다. 리모델링 중인 까닭에 둘러본 공간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집트 컬렉션 외에도 이탈리아, 특히 볼로냐 지역에 초점을 맞춘 이탈리아 고고학사를 이 지역을 대표하는 고고학도들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그들이 어떤 유적을 발굴해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를 작은 섹션별로 구분한 코너가 있었다. 나로서는 이 코너가 심히 마음에 들었지만, 찬찬이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죽 훑은 바, 이것만으로도 이탈리아 근현대 고고학 흐름이 한눈으로 감지되는 그런 교육효과는 다대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이 코너는 해당 고고학자별로 그들이 남긴 육필 원고와 그들이 실제로 발굴한 성과를 그 유물과 유적 중심으로 적절히 안배해 정리했다. 이 박물관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한 소개를 꾀하기로 하고, 오늘 내가 정작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박물관 전시기법이다. 


유럽 지역 역사가 웬만큼 되는 박물관 미술관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박물관 미술관이라면 왠지 모르게 삐까번쩍한 최신 현대식 건물일 법한 데는 단언하지만 단 한군데도 없다고 보아도 좋다. 내가 싸질러 다닌 세계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현대식 시설의 완비라는 관점에서 지금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그 현대성과 규모에서 중국을 따라갈 데가 없다. 중국의 박물관 미술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되거니와, 적어도 성급 박물관 이상을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의 박물관 미술관은 그 규모가 압도하고, 나아가 그 현대적 설비 역시 이를 따를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이들 중국 박물관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압도한다. 


그 뒤를 한국이 따른다. 한국 역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필두로 그 산하 지방국립박물관과 공립박물관, 미술관 등등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시시설과 전시기법이 뒤질 데가 없다. 


하지만 유럽으로 가면 사정이 딴판이다. 제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박물관 미술관이라 해도, 그 박물관 미술관 건물 자체가 대부분 문화재인 까닭에 전시기법이 훌륭한 것도 아니요, 설비 또한 여전히 전근대에 머무르는 곳이 대부분이다. 브리티시 뮤지엄이라 해서 별다른 구석이 없다. 루브르박물관이라 해서 삐까번쩍할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저들은 유물을 흩어뿌리기한 데 지나지 않으며, 전시기법이라 해서 별 본받을 만한 구석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렇다고 전시 설비가 현대적인가? 총괄하면 개판이거나 개판 일보전이다. 진열장은 더 개판이라, 유리엔 먼지 투성이요 손때 덕지덕지하고, 조명시설 역시 개판을 넘어 아수라장이기 일쑤다. 그렇다고 저들이 자상하기나 한가? 유럽 상당수 미술관 박물관은 작품 설명이 없는 곳이 허다하다. 



보다시피 이 볼로냐시립고고학박물관은 저 많은 석물에 해당 유물 안내판이 전연 없다. 알아서 보라 한다. 뿐이랴?



수장고 시설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로되, 유물을 갖다 놓을 곳이 없어 화장실 앞에다가 쳐박아 놓았다. 우리 같으면 저리 전시했다가는 관장 모가지가 열 개라도 성하지 못하다. 소중한 문화재를 이리 대하느냐 불호령이 떨어지고, 시민단체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들쑤시고 난리일 것이다. 저들이 문화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낮아 저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몹쓸 짓을 한다고 아무도 말하지 아니한다. 


나는 언제나 문화재 숭엄주의가 주는 패악을 말하곤 한다. 이 숭엄주의가 지나치게 강고하게 작동하는 바람에 그 숭엄주의가 문화재 보호라는 명분과는 전연 동떨어지게, 문화재를 질식케 하는 역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뭐 저기서도 Do not touch라는 경고문이 곳곳에 보이기는 한다만, 좀 만지면 어떻고, 손때를 좀 타면 또 어떤가? 또 좀 깨져 나가면 또 어떤가? 



영일 냉수리비의 쓸쓸한 1500년 생일

입력 2003.11.18 10:56 수정 2003.11.18 10:5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기 503년 진이마촌(珍而麻村)이란 곳에 사는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이 관련된 재산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급기야 지방관을 거쳐 신라 조정에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런 복잡한 재산분쟁에 관한 저간의 사정은 진이마촌을 다스리는 행정관인 촌주(村主) 등을 통해 문서 형태로 작성되어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조정은 재산 분쟁의 당사자들인 절거리와 그 반대편의 주장 중 어느 쪽이옳은가를 결정하려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법. "절거리" 분쟁과 비슷한 선례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판례는 어떠했는가? 판례가 있다면 그 판례는 어떤 법률에 근거했는가? 조정은 이와 같은 판례집, 혹은 관련 법령을 보관 혹은 관장하는 관청에 명령을하달해 찾아 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담당 관청은 문서 보관소를 뒤져 선대왕들인 ■부지왕(■夫智王)과 나지왕(乃智王)의 두 왕이 연이어 내린 교(敎. 일종의 명령 혹은 법률)가 바로 이와 같은절거리 재산 분쟁을 판결하는 준거가 되는 법률임을 알아냈다.(■은 판독은 되나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자표시) 이들 교(敎)를 검토한 결과 신라 조정은 절거리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절거리가 재산을 갖는다". 이 판결에는 "별교"(別敎)라고 하는 부대조항이 있었다. 이 별교는 "절거리가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에게 상속된다"고 판시했다.


재산 분쟁이 나중에 재발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정은 아예 현행재산 분쟁 뿐만 아니라 상속 문제까지 이참에 완전히 못을 박아버리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절거리" 재산분쟁에 관여해 공론(共論), 즉 함께 논의해 결정을 내린 인물은 모두 7명. 갈문왕(葛文王) 지도로(至都盧.지증왕)를 필두로 ■덕지(■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于支).이부지(爾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거벌간지.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모■지(暮■支) 간지가 그들이었다.


판결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 문서는 관리 7명을 통해 진이마촌 현지에 공포되고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이들 관리는 분쟁 당사자들인 절거리 등을 소집하고는 판결내용을 낭독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로 소란케 하지 말지어다". 판결 내용이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루마리 문서에 적힌 판결 내용은 진이마촌 현지에 비석에다가 새겨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의식은 장엄했다. 판결 내용에 절대 복종을 맹세한다는 뜻에서 얼룩소를잡아 희생물로 하늘에 바쳤다. 절거리 등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다시 이와 같은 분쟁을 일으킬 때는 천벌을 받겠나이다". 이 때가 계미년(癸未年), 즉, 지증왕 4년(503) 9월25일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문헌기록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와 같은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경북 영일군 냉수리 신라 고비(古碑). 기적처럼 1989년 4월, 냉수리 주민에 의해 밭갈이를 하는 도중에 땅 속에서 긴잠을 깬 영일 냉수리비문이 올해로 건립 150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냉수리비가 올해로 1500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지나가고 있다.

taeshik@yna.co.kr



<사진1>  


로마 역사 태동을 말할 적에 거의 모든 출판물에 그 유일한 증언자처럼 매양 등장하는 이 조각은 내가 항용 그 크기와 출처가 궁금했더랬다. 작년 여름, 로마 구심 중심인 베네치아 광장 일대를 하릴없이 돌며 어느 곳을 들를까 망설이다, 서울 남산을 오르내린 기억이 있어, 그런 남산 축에도 들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건방지게 hill이라는 이름을 단 캄피돌리오Campidoglio라는 곳에 올라 언덕배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서니, 그런대로 로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정상에 Musei Capitolini라는 간판을 단 전각이 있어 들어갔다가 그에서 바로 문제의 저 조작을 만났다.  


나는 다른 자리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박물관 내부에는 두 시간 이상 머물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체력 고갈을 문제로 들지만, 그 체력 고갈 절대의 원천은 사진이다. 하도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켁켁 거리기 일쑤다. 그리 큰 기대를 품지는 않은 이 박물관은 여타 유럽 지역 박물관이 그렇듯이 건축물 그 자체가 소위 말하는 문화재라, 곳곳에 스민 역사의 흔적이 인상적이었거니와, 그 곳곳을 채운 유물들을 무심히 훑어보다가 전연 기대치도 않은 저 물건을 만났다. 아, 로마 역사를 논한 글에서 그리 자주 본 그 조각 출처가 바로 이곳이었다니 하는 그런 만남이 주는 감흥이 없을 수는 없다. 


<사진2> 


보통 동물 암컷에게서 나는 어린아이 생육을 위한 액체를 젖이라 하거니와, 그것으로 널리 애용한 것이 우유牛乳이니 이는 글자 그대로 소젖이라는 뜻이다. 사람 젖은 인유人乳라 해야 할 것이나 그리 말하는 일은 없고 그냥 젖이라 하거니와, 그렇다고 젖물린다는 표현 말고는 그닥 쓰임이 광범위한 편은 아니다. 


로마 건국 시조라는 로물루스, 이 놈은 쌍둥이 동생 레무스와 함께 티베리스 강가에 버려졌다가 암늑대 젖을 먹으며 살아났다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먹은 늑대 젖은 뭐라 해야 하는가? 늑대를 흔히 한자로 랑狼이라 하거니와, 그렇다면 늑대젖은 낭유狼乳라 해야는가? 

늑대 젖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아마 살균처리를 해야 했을 법한데, 하도 자주 먹다 보면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 해도 그에 적응했을런지도 말이다. 십여 년 전 몽골에 처음 갔을 적에 그 초원에서 유목민이 게르에서 파는 말젖 발효주인 마요주를 마셨다가 설사 좔좔한 기억이 생생해서 그런지, 로물루스-레누스 형제도 처음엔 늦대젖 먹고 제법 물똥께나 쌌겠다 하는 생각도 퍼뜩 해 본다. 


<사진3> 


앞서 제시한 사진 중 첫번째와 세번째 사진을 조금 세심히 살피면 늑대랑 그 젖을 빠는 아이둘이 제작기법이 어쩐지 다르다는 점을 눈치챈다. 이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늑대 조각[the Capitoline Lupa]은 기원전 5세기 무렵 이른바 에트루리아 시대 작품이고, 로물루스와 레누스 쌍둥이 형제상은 15세기 르네상스시대 화가이며 조각가이자 판화가인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Antonio del Pollaiolo, 1429~1498)가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근자 분석에 의하면 늑대 조각은 13세기 중세시대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 보도됐으니, 예컨대 이탈리아 일간 《la Repubblica》 2008년 7월 9일자 Adriano La Regina 기고문 "La lupa del Campidoglio è medievale la prova è nel test al carbonio"에 의하면, 늑대상은 방사선탄소연대 측정결과 중세기 완성품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유산국 책임자인 레지나에 의하면, 늑대상은 살렌토대학(University of Salento) 연대측정센터 연구자들이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2007년 2월 28일, 카피톨리네박물관은 늑대조각에 대한 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조사는 그해 8월에 시행됐다. 그러다가 그달 31일 조사가 시행되긴 했지만 그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당국은 이를 발표해야 했지만, 공표를 미룬 것이다. 이후 조사 결과가 공표되기까지 1년이 더 걸렸다. 


늑대상은 그 제작 시기 혹은 주체를 놓고 여러 견해가 있었으니, 에트루리안-이탈리리아식(Etruscan-Italic)이라는 말이 있었는가 하면, 마그노 그리스식(Magno-Greek)이라는 견해도 있었고, 로마제국시대 작품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원전 5세기 전반기 에트루리아 작품이라는 설이 가장 널리 통용됐다. 이런 늑대상을 중세시대 작품이라고 주장한 이는 안나 마리아 카루바(Anna Maria Carruba)였다. 


카루바는 제작 기법에 주목해 중세설을 주장했으니, 그녀에 의하면 늑대상은 밀납주조 방식을 통해 단번에 주물되었으며, 이는 중세시대 청동제품 제작에 광범위하게 보이는 수법으로 그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는 방식이라는 근거를 내세웠다. 그는 나아가 늑대상 표면에서 관찰되는 특징은 고대 조각에서는 보이지 않고 중세시대 청동제품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런 주장을 카루바는 2006년 12월에 발표해 파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1997년 이래 2000년까지 늑대조각 복원에 관여한 로마 지역 고고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깡그리 무시했다. 


늑대상은 워낙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가 상징성이 큰 까닭에 일종의 주술에 가까웠으니, 이런 점들이 그 제작시기와 관련한 논란을 잠재우는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Theodor Mommsen(1845)은 이 박물관 소장품 중 그 어느 것보다 이 작품을 아름답다 여기면서 본능에 가깝게 막연히 고대 작품이라 생각했다. 이를 에트루리아 시대로 끌어올린 장본인은 Winckelmann(1764)이라 할 수 있으니, 그는 이 조각에 나타나는 특징들의 연원을 에트루리아 시대에서 구한 것이다. 


일찍이 Famiano Nardini(1704)는 늑대상을 고대 조각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Friedrich Matz(1951) 같은 이는 에트루리아 설을 지지했으며, 이런 견해는 Erika Simon(1966)한테 지지를 받기도 했다. 


고대 작품이 아니라는 의문을 처음으로 품은 이는 Emil Braun(1854)이었다. 로마지역 고고학 발굴기관 사무총장이던 그는 늑대상 다리에 난 파괴 흔적을 관찰한 결과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어 루브르박물관 보존과학도인 Wilhelm Fröhner(1878)는 늑대상은 양식으로 보아 카롤링거시대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베를린박물관장 Wilhelm Bode(1885) 역시 비슷하게 늑대상이 중세작품일 가능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20세기가 되면서 깡그리 무시되고 말았다. 


새로운 연구성과에 의하면 늑대상 제작에 쓴 청동은 중세시대 중부 이탈리아, 구체적으로는 로마에서 오르비에토에 걸치는 티베르 계곡(the Tiber valley)에서 채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시대에 채택된 합금기술(fusion technique)은 카루바에 의하면 12세기 이래 관찰된다. 


이 늑대상을 보면서 내가 무척이나 의아한 대목은 실은 로물루스에 의한 로마건국을 모티브로 삼는 늑대 모티브 자체가 설혹 에트루리아 혹은 고대 로마시대라 해도, 그 시대 다른 데서는 좀처럼 그런 모티브를 관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로물루스 형제에 의한 늑대 젖물기는 이미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건국신화였다. 


하지만 그런 신화가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해서 그것을 모티브로 삼은 늑대 혹은 늑대와 루물루스 형제를 모티브로 삼은 조각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유행하고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전연 별개다. 내가 보고 들은 바가 짧아서인지 모르나, 저것이 과연 적어도 로마시대 혹은 이 이전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 소재로 보아 저를 주제로 삼는 무수한 늑대 혹은 로물루스 형제 예술작품이 남아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저 늑대상이 로마 제국 이전 작품이라도 해도, 현재까지 발견된 거의 유일한 같은 모티브 예술품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느닷없이 하늘에 떨어진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저 작품을 낳은 선배나 조상도 없고, 더구나 그 후손도 양산하지 못한 채 오직 저 한 작품을 남기도 늑대상을 사라졌다는 뜻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다면 저것이 중세시대로 내려오면 어찌되는가? 늑대 젖을 빠는 로물루스 형제 예술작품은 신통방통하게도 중세 이후에 쏟아진다. 저것을 본지 1년이 지난 이번 여름, 내가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 일대 몇 군데를 돌았거니와, 하나 같이 중세시대 이후 늑대 젖을 빠는 로물루스 형제 모티브 조각이나 회화작품을 자주 만났다. 


간단히 말해, 저 모티브의 예술작품은 중세 이후에나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근자 새로 등장한 늑대상 중세 제작설을 다른 측면에서, 다시 말해 예술의 유행성 측면이라는 점에서 지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양식론이나 주조기법 이런 데는 문외한이다. 다만 유행론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는 새로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몸뻬 바지가 19세기 이전 조선시대 한반도에서 발견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무신이 19세기 이전 조선시대에는 발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로물루스 형제한테 젖을 먹이는 늑대상은 내 상식으로는 중세 이전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 나타날 수 없다. 


중세시대 이래 내가 관찰한 늑대상은 차후 시간을 두고 정리하기로 한다. 

<공주 단지리 횡혈식 석실묘 출토 백제토기류>


한국고고학이 지나치게 토기 중심이고, 나아가 그 토기를 포함한 각종 유물 유구에 대한 다대한 분류 중심주의거니와, 언뜻 세밀하게 보이는 이 과정에서 정작 고고학이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을 팽개치는 결과를 낳았거니와,  


그런 한국고고학이 신주단지 받들듯 하는 토기 분류에서 그 기종을 중심으로 나눌 적에 '개(蓋)'라는 항목으로 배열하는 것이 있으니, 이는 글자 그대로 그릇 뚜껑을 말한다. 한데 작금 한국고고학 토기 분류를 보면 이를 호(壺)니, 옹(甕)이니, 병(甁)이니, 완(碗)이니, 발(鉢)이니 해서 동등한 가치를 두어 병렬로 나누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본다. 


하지만 개는 저들 토기의 부품이지 기종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포함한 기종 분류는 분류학 근본조차 망각한 오류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받침인 대(臺)나, 귀퉁이 불룩 장식인 이(耳) 따위도 별도 분류항목으로 독립해야 한다.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 출토 백제토기류>


이런 지적에 동신대에서 고고학을 강의한 이정호 선생은 "당연히 뚜껑을 기종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것으로 설명해야 할 뭔가 있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하는 것 아닐까 하며, 나 역시 그런 식으로 변명하기도 한다"고 한다. 


혹자는 몸체와 분리된 가운데 저들 개가 별도로 출토되기도 하는 점을 들어, 기존 토기 분류체계를 옹호할지 모르나, 사람 팔뚝을 떼어내어 방망이로 썼다 해서, 그것을 온전한 인체 1개체로 인정할 수 없는 논리와 같다. 다시 말해, 뚜껑만 떼어내어 그것을 예컨대 김치를 담는 그릇으로 썼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애초에는 그릇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이었기에, 별도 분류 항목으로 독립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하다. 




문화재청은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발표 형식을 빌려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인골 조각들을 분석한 결과 이에서 남성 노년층의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부여문화재연구소는 "그동안 쌍릉은 백제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며,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과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했다는 이런 발표는 곧 대왕릉이 백제 무왕의 무덤임을 사실상 확인한 것인양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실제 이를 토대로 하는 관련 언론 보도에서는 그리 보도된 성향이 강했다. 




삼국시대 고대 한반도 왕릉급 무덤 중에서도 쌍릉은 비교적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묘한 지위를 점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쌍릉은 고려 충숙왕 시절인 서기 1327년 도굴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때는 이 무덤이 고조선 마지막 왕이라는 준왕이나 백제 무왕이 묻힌 곳이라는 양설이 병존했다. 그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내가 자세히 정리한 글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아래 제목 두 글을 클릭했으면 한다.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4편 고려 충숙왕 시대의 쇼생크 탈출 - 금마군 무강왕릉 도굴범, 감옥을 탈주하다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5편 기자조선과 백제, 그 괴이한 조우 “미륵사 석탑은 백성의 고혈 짜낸 죄악”


이런 쌍릉을 191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재조사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 조사성과 발표라, 총독부는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에 걸치는 기술 내용과 관련 사진 2장, 관련 도면 2장만으로 정리한 것이 전부였다. 이를 조사한 책임자인 야쓰이 세이이치는 그에서 훗날 더욱 자세한 보고를 기약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역시 이 블로그 다음 글을 참조하라.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6편 조선총독부가 빗장을 연 쌍릉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 조사, 목관 발견



아무튼 이러한 익산 쌍릉을 원광대가 지난해 지난해 8월에 재조사를 시작했다. 멀쩡한 무덤을 왜 파제끼느냐 하는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여전히 지닌 사람 중 하나다. 그럼에도 그 성과가 궁금하기는 어쩔 수 없다. 멀쩡한 무덤을 파제낄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른바 그것을 파야 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이를 추진한 원광대 마백연구소는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 일환임을 내세웠다. 나는 여전히 이 논리를 찬동하지 못한다.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가 곧 그 발굴조사를 말함은 아닐 것인 까닭이다. 


이에 이번 조사는 실제 발굴은 마백연구소가 진행하는 한편, 익산시와 공동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산하 기관 중에서도 이 지역을 관장하는 부여문화재연구소 역시 공동조사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민간한테 전적으로 발굴조사를 맡기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 까닭인지, 혹은 국가가 개입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으니 그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인골 수습은 조사전에 이미 기대한 까닭에, 그 조사를 수행할 책임 기관이 있어야 했기에, 그런 부분을 주로 국가기관인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맡아 수행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앞서 나는 100년 전 조선총독부 조사성과가 극히 일부분만 공개되었다고 했지만, 실은 그 성과 중 상당수는 이미 드러난 마당이었으니, 그건 다름 아니라 저때 발굴책임자 야쓰이 세이이치가 남겨놓은 조사기록 원본을 제국 일본이 패망하면서 고스란히 들고 튄 일본인 고고학도가 있고, 그 고고학도가 조사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해 냈기 때문이다. 나아가 1917년 조사 결과 수습한 관재(棺材) 조각과 토기 등의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해 곧 출범한 국립박물관에 고스란히 수장된 까닭이다. 지금은 그 유물 대부분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 중인 상태다. 



당시 조사성과를 보면, 이미 고려 충렬왕 시대에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쌍릉에서는 소왕릉과 대왕릉 모두 적지 않은 인골이 산재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인골 처리 여부가 관심이었지만, 이번 대왕릉 재조사 결과 그에서 수습한 인골 파편들은 나무 상자를 짜서 그 안에 몰아넣고, 그것을 석실 끝부분 관대(棺臺) 위에다가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천수백년, 아마도 천400년이 지났을 그 인골 파편들은 당시 발굴조사를 전하는 사진이나 도면 자료와 비교할 적에 그 당시 상태로 나무 상자 안에 남아있었다. 이 인골 파편들을 대상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분석을 실시한 것이며, 그 중간 성과를 이번에 발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부여문화재연구소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인골 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에는 다른 기관도 참여했으니 가톨릭의대 응용해부연구소, ㈜라드피온, 美베타연구소, ㈜퓨전테크놀로지가 그들이라고 한다. 뭐 상당히 거창한 느낌을 주는 대규모 인골 분석 프로젝트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협박성 기관 나열이라는 느낌도 강하지만, 그렇다고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암 것도 아니다. 



조사 결과 인골 파편은 모두 102개 조각으로 드러났다. 이를 분석한 결과 이들 인골 파편들은 한 사람 개체분일 것으로 판단된다. 성별로는 남성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 근거로 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을 보여주는 팔꿈치 뼈 각도와 발목뼈 중 하나인 목말뼈 크기, 먼쪽 뼈 부위인 넙다리뼈 무릎 부위 너비로 볼 때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넙적다리뼈 최대 길이를 추정해 인골 주인공 키를 산출하니, 161㎝에서 최대 170.1㎝로 추정됐다. 그러면서 연구소는 "훨씬 후세대에 속하는 19세기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것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큰 키"라고 말했다. 내가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자신이 없지만, 19세기 조선시대 남성 평균키는 164㎝가량이었던 듯하다. 


이를 참조할 때, 최대 171㎝ 키는 고대인으로는 큰 편에 속하거니와, 마침 《삼국사기》에 남은 무왕에 대한 기록을 연구소는 첨부해 이들 인골 주인공이 무왕일 가능성을 높여준 것으로 보강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그에 이르기를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라고 했다.  



나아가 연구소는 나이를 추정한 결과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목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은 표면이 거친 데다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골화란 노화로 연골이나 인대가 단단하게 굳어 뼈처럼 바뀌는 현상을 말하거니와, 이런 현상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것은 그 인골 주인공이 늙어서 죽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인골에서는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 다리와 무릎 통증(정강뼈와 무릎뼈의 척추외골화)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도 나왔다. 더불어 옆구리 아래 골반뼈(엉덩뼈능선)에 숫자 1(∣) 모양으로 골절되었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어긋나지 않아 타격보다는 낙상 등에 따른 현상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는 치료기간이 3개월 정도 되므로, 이것이 직접 사인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연구소는 덧붙였다. 


더불어 연구소는 인골에 대한 연대 측정도 시도했다. 가속 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를 이용한 정강뼈 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어 인골 주인은 7세기 초중반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뼈가 심하게 부식된 상태라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다만 추출한 콜라겐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인골 주인공이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에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 가능성도 확인했다고 한다.


쌍릉은 대왕릉이나 소왕릉 모두 질이 좋은 화강암으로 무덤방을 조성했다. 이들 화강암은 어디에서 조달했을까? 이에 대한 분석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는 "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 석재는 (무덤에서)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더불어 관재 역시 어떤 나무인지가 관심거리다. 이에 아마 내 기억이기는 하나, 식민지시대 조사 결과 일본열도 특산 금송이라는 분석결과가 이미 있었다고 안다. 한데 이번 분석에서도 역시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관재(棺材)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입니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류의 판자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한다. 


연구소는 "최신 공학기술이 반영된 이번 연구에서는 뼈의 3차원 입체(이하 3D) 모형화와 3D 프린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자료도 구축했습니다"고 덧붙였다. 


이런 분석결과를 토대로 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중간 결론을 제출했다. 


▲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진행 중인 대왕릉 보완조사와 앞으로 진행할 소왕릉 조사˙연구 등을 통해 익산 쌍릉의 성격과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추가적인 인골 심화연구, 백제 후기 왕릉급 고분의 구조와 특징 등에 대해 중장기 연구계획을 수립하여 백제 왕도의 역사성 회복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할 계획입니다"고 말한다. 


상대가 익산 쌍릉이라, 더구나 그 무덤 주인공이 오랜기간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무덤이라는 전설 혹은 기록이 있는 무덤이라 이미 극심한 도굴피해를 봤으며, 더구나 100년 전에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진 마당에 그 찌꺼기를 건져 이만한 분석결과를 얻었다는 점은 분명 상찬할 만하다. 모든 고고학 발굴조사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으면 하지만, 그리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학 분석 결과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고고학이나 고대사를 비롯한 소위 인문학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다대하다. 그렇지만 과학 역시 인문학이 그렇듯이 정답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각종 역사상 폭거가 증언한다. 


이 대왕릉 분석결과만 해도, 그 직전 국립전주박물관이 주도한 분석결과를 당장 뒤집는다. 전주박물관에서는 치아 분석 결과를 토대로 대왕릉 피장자가 여성 운운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나는 '이빨 고고학'을 증오하곤 했으니, 그것이 저지른 패악은 무령왕릉 발굴에서도 이미 있었다. 무령왕 부부를 합장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에서는 이빨 한 점이 수습되었거니와, 그 정확한 발견 위치도 모르는 이 이빨을 치과의사가 분석한 결과 30대 젊은 여성이라고 주장했거니와, 그런 주장이 버젖이 발굴보고서에도 실리는 바람에 지난 40년간 무령왕 마누라는 30대 후처로, 젊어서 죽었다는 신화가 한동안 횡행했으니, 나는 그 부당성을 이미 20년 전부터 주장했거니와, 그런 부당성 주장은 그것이 정식으로 뒤집어져서 이제는 한시대의 유물로 뒤켠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연구성과를 깡그리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 분석 자세와 분석 결과는 나름 탄탄함을 자랑한다. 다만, 이 시점에서 하나 확실히 할 것은 이런 분석결과에도 대왕릉 주인공이 무왕임을 확정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왕릉이 그 무덤 양식이나 규모, 목관 관재 등을 종합으로 고려할 적에 사비도읍기 백제시대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묻힌 무덤임을 의심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조사까지 종합해 지금까지 확실한 점은 첫째, 이곳에 묻힌 사람이 사비시대 왕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임에는 틀림없고 둘째, 그 무덤이 조성된 시기는 7세기 초중반 어느 무렵이라는 두 가지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에 더해 성별로는 남성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고, 그는 적어도 50~60대에 죽었고, 키는 큰편이었다는 점도 보강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구성과가 대왕릉 주인공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증거들은 방증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범위를 좁혔을 뿐이다. 


<라인강의 노을>


아래는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July 6, 2015 at 5:37 AM에 내 페이스북 계정에 게재한 글이다. 2년 전 오늘에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음미할 대목은 없는 않은 듯해서 관련 사진을 첨부하며 재게재한다. 


독일 본 라인강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의 혼란으로 이곳 독일 본 기준으로 오늘이라 하겠다. 이곳 제39차 세계유산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 산업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가 무엇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국제기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세계유산이 되고, 그것을 뒷받침한 여러 조건이 유네스코라는 이름에 맞물려 그리 통용되는 것 또한 엄혹한 사실이다. 세계유산...나도 아직 그 정체를 모르나, 이 현실세계의 통념이 세계유산의 이념 혹은 이상과 갖은 충돌을 빚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요 괴리이기 때문이리다.


이곳에서 잠깐잠깐 이번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한국과 일본간 합의를 두고 그것을 전하는 각종 뉴스에 오뉴월 소불알처럼 열린 댓글이라는 것들을 보니, 

첫째, 우리가 그 등재를 저지했어야 하고

둘째, 적어도 그것이 아니라 해도 등재 대상 23건 중 조선인 강제징용의 한이 서린 7개 현장은 등재 목록에서 삭제했어야 하며

셋째, 그렇기에 이번 협상은 굴욕이라 하며 

넷째, 이를 종합하여 한국 외교력의 실패를 운운하는 압도적인 논조를 본다.


<독일 본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 


하지만 이번 협상단 한국 어떤 외교관이 쓴 말을 동원하건대 세계유산은 레고 블럭 쌓기가 아니다. 블럭 몇 개를 넣고 빼고 하는 게임이 아니다. 내가 섣부르게 알지만 세계유산이 빵조각 뜯어먹기는 아니다. 그리고 등재 저지는 생각보다도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나는 기자로서 이번 사안에 생각보다는 조금 더 관여했다. 지금 고백하거니와 외교부에 불려간 일도 있고, 그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 세 가지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입에 발린 소리인 줄 모르나 이번 협상단 주축 중 한 명은 오늘 회의장을 나오면서 내 제안이 사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 이번 대회에 한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 현장을 지켰고 혼자서 왔다. 혹자는 어떻게 해서 나 혼자만 여기 오게 되었는가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우리 언론의 엄혹한 현실이 속된 말로 대통령 해외순방 말고는 회사 자비로 출장을 보내는 곳은 없다.


내가 분에 넘치게 현장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자로서, 혹은 그것을 벗어난 일종의 세계유산 자문관으로 이번 사태 귀퉁이 0.1%에 발을 걸쳤기 때문이다. 그에서 비롯되어 지금은 밝히기 힘든 어떤 기관의 힘을 빌려 독일까지 날아오게 되었다. 


애초 이번 사태가 커지면서 내가 외교부에 불려갔을 적에도 그렇고 그 초반기 한동안 나는 이번 사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피상으로 알던 이른바 한국 외교부의 불난집 호떡구워먹기식 기관이라는 이미지 혹은 선입관이 있기도 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우리는 저 댓글 퍼레이드가 피상으로 말하는 그것보다 훨씬 위대한 성과를 냈다. 


forced to work in harsh conditions 


이 말을 읽는 이는 다름 아닌 일본 정부를 대표한 일본 대표단이었다.


<강제동원 사실을 독일 제안으로 등재 결정문에 반영하는 장면> 


나는 23년전 기자 업계에 투신하고서 이내 이른바 대일전후청산 운동으로 내 전공을 삼은 전력이 있다. 원폭피해자니 위안부니 혹은 관동군포로니 하는 문제에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미친 정도로 기자 생활 초창기를 불살랐다. 그런 나를 늘 환장하게끔 만든 일이 각종 논리로 이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궤변의 논리였다. 나는 일본정부가 저런 식으로 과거사를 인정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한동안 과거사청산 운동을 쳐다보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주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혹자는 천황 이름으로 과거 어느 시점에 말한 통석의 념을 들 수 있겠지만, 일본 헌법을 봐라. 천황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상징일 뿐이요, 모든 책임은 일본 국회에 귀속한다. 일본은 내각책임제다. 국회가 절대 권능을 갖는 내각책임제 국가다. 그런 일본에서, 내 기억으로 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을 비롯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장면을 목도하리라고는 불알이 떨어지기 전에는 없을 줄 알았으니, 

오호라, 

그래서 오늘 본은 나에겐 awakenig city노라. 


<등재 순간 일본대표단과 그 주변>


이로부터 꼭 1년 뒤 같은 날, 나는 같은 페이스북 내 계정에 다음 글을 포스팅 했다. 


일본 산업유산 등재 1주년에 즈음한 소회


아래 공유한 작년 오늘 포스팅에 잠깐 적었지만, 이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질 무렵, 우리 외교부에서 나를 불렀다. 가서 그 한-일 협상단 한국 대표를 면담했다. 가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이 대표가 대학교 선배더라.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태 해결 방안을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정리해 들어갔다. 이 문건이 어디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소중한 문건인데 말이다. 그러니 기억에 의존해 당시를 증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세 가지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1. 등재 자체 저지...이건 불가능하다. 

2. 제목 교체...등재 시설물 기간을 아주 제목에다가 1910년 이전까지로 박아서 교체하자. 

3. 등재 결정문statement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문구를 집어넣자.


이 중에서도 나는 세 번째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무슨 여파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산업유산 등재가 확정되고, 그 협상단 우리측 대표가 입에 발린 소리인지 모르나 "김기자 제안이 결정적이었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한다.


<유일한 한국기자>


아래는 광주 광산구 주최· 재단법인 고대문화재연구원 주관 '2017년 향교 서원 문화재활용사업 온고지신(溫故知新), 무양' 중 선비에게 '길을 묻다'의 두번째 강연록 '무양서원의 배향인물-최사전, 최부, 유희춘, 최윤덕, 나덕헌'(강연날짜 2017. 8. 17) 원고다. 



무양서원이 품은 사람들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1. 무양서원의 이례(異例)

 

이곳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자리한 무양서원(武陽書院)은 여로 모로 한국문화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1984229일에는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이곳은 그 태동이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이다. 그 태동 시점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이 1920년이고, 내 선친이 1921년생이시니, 무양서원은 두 신문은 물론이요, 내 선친보다 동생이다.


나아가 그 배향 주축 인물은 고려 인종(11221146) 때 어의(御醫)로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최사전이라는 점에서도 유별난 점이 있다. 서원은 제사 시설이면서 교육시설이라는 점에서 배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학덕(學德)이 뛰어나야 한다는 통념을 깨어버렸다.


태동 시점에서 서원이 조선시대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전통을 깨어버렸으며, 배향 인물에서도 파격을 보인다. 최사전을 중심으로 이 서원은 그의 후손 4, 곧 손암 최윤덕·금남 최부·문절공 유희춘·충열공 나덕헌을 함께 배향한다.


나아가 배향 인물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보면 철저히 혈연 중심이다. 뒤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배향 인물 5명 중 3명은 탐진최씨이며, 非崔 2명 또한 성은 달라도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그런 점에서 무양서원은 가묘(家廟). 이는 조선시대 전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난 20세기 이후에 새롭게 선보인 이례(異例)가 바로 무양서원이다. 이는 무양서원이 지닌 독특한 유산이다.

더불어 무양서원은 교육사업에 진출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했으니, 이런 사례로 조광조를 배향한 용인 심곡서원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교육 부문을 근대적인 교육제도로 접목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해도 좋다고 본다.

 

2. 묘지명으로 출현한 탐진최씨 중시조


무양서원을 세운 주체는 탐진최씨(耽津崔氏)라는 문중이다. 그 관향 탐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을 말한다. 이 문중 역사를 보면 다름 아닌 최사전을 중시조로 삼는다. 그는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라 하는데 이런 행적은 실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시대를 증언하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그의 선대 계보를 보충하는 이유는 그의 묘지명 때문이다. 이 묘지명은 그의 사후 이듬해인 1140, 인종 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세로 28.2cm, 가로 36.4cm 크기에 그의 행적을 해서체로 정리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재 소장 중이며, 출토지는 미상이다.


나는 몹시도 이 묘지명 출현과 그것이 알려지게 된 사정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묘지명을 통해 비로소 탐진최씨는 최사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보충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그가 탐진 출신임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묘지명을 데뷔케 한 초기 문헌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金石總覽()이 있으니, 그 서지사항을 조사해 보면 大正 8(1919) 경성에서 출판됐다. 이 자료집 336~338쪽에 걸쳐 이 묘지명이 소개됐다.


이 묘지명은 틀림없이 그 전 어느 시대에 총독부에서 인수했을 것이다. 출토지 미상이라 했지만 묘지명에서는 그의 장지(葬地)성남 장미산(城南薔薇山) 기슭 와곡(瓦谷)”이라 했으니, 성남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 개경의 남쪽을 말하며 장미산이란 아마도 이곳 장미가 유명한 데서 얻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와곡은 기와실인데, 틀림없이 이곳에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묘지명은 어느 때인가 개경 남쪽 어느 산기슭에서 도굴되어 떠돌았을 것이다.


2012년 국립광주박물관은 탐진최씨 기증유물 특별전을 개최했거니와, 탐진최씨 진사공파 최상규 씨가 기증한 유물을 중심으로 꾸민 이 특별전에는 당연히 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최사전 묘지명도 출연했다. 특별전에 즈음해 박물관이 정리한 묘지명 역사를 보면,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묘지명은 동경제국대학박물관(東京帝國大學博物館) 소장품이었다. 언제 이것이 일본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앞서 말한 대로 조선금석총람에 실림으로써 존재가 알려졌다.


이를 접한 탐진최씨 후손들은 열띤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동경제국대학 총장한테 반환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전남도청을 움직여 도지사 명의의 환수요청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마침내 묘지명은 192111, 국내로 반환된다.(주1) 이에 탐진최씨 후손들은 이를 보관하고자 1927년 무양서원을 건립한다.(주2) 이렇게 해서 무양서원에 보관하던 묘지명은 도난과 훼손 우려에 탐진최씨 대종회(무양서원)30년 넘게 기탁 보관 중이던 묘지명을 2009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주3) 이런 표현으로 보아 무양서원에서는 이미 일찍이 광주박물관에 묘지명을 기탁했던 것으로 보인다.(주4)


주1) 이런 문중 활동은 동아일보 1921년 2월 24일자와 같은 신문 같은 해 5월 3일자 보도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배재훈, <고문서와 고서를 통해 본 나주 향촌 사회의 동향-탐진최씨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 참조. 


주2)  다음 각주에서 인용하는 김주홍 글을 접하기 전 나는 이 대목에다가 다음과 같은 초고를 썼다. 

   “나는 묘지명 출현이 1927년 무양서원 태동 이전임을 주목한다. 내가 확실한 자신이나 증거는 없으나, 그의 묘지명 공개가 무양서원 태동과도 일정 부분 영향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중 관계자들께 내가 확인하고픈 내용이기도 하다.” 

   이를 새삼 밝히는 까닭은 내 추정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주3) 이상 묘지명 역사는 김주홍, <耽津 崔氏 소장 기증유물과 활용>, 『탐진최씨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2012를 참조했다. 


주4) 김주홍 앞 글. 


이 묘지명이 탐진최씨 문중 역사 정리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무양서원 건립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따라 문중 역사를 재정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중은 이 묘지명 기록을 근거로 祖諱哲·父諱靖·諱思全·諱弁烈 四世 五位 上代祖武陽書院 東便 境內을 모시고 每年() 36, 96全國宗人參席裡焚香하고 精誠으로 壇祭를 모시고 靈魂追慕하며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에 의하면 그는 인종 17(1139)에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그러니 이를 따른다면 그는 1067, 문종 21년 정미년(丁未年) 출생이다. 그의 나이를 추정할 만한 언급이 묘지명에도 보이거니와, 이를 고려사 열전이 말하는 그것과 뒤에서 대비해 보고자 한다.


아무튼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탐진(耽津) 사람으로 자가 휼세(恤世)이니, 세상을 구휼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자는 아무래도 그가 공신에 책봉되고 난 다음에 지은 이름인 듯하다.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의 조부는 상약직장(尙藥直長) ()이고, 아버지는 정()이라는데 모두 의술로써 벼슬했다 하니, 의술은 최사전 집안이 세습한 직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에서 그 또한 어려서 의술에 종사해 15세에 선종(宣宗)이 불러들이고는 이름까지 사전(思全)이라 지어주었다고 하니, 그 이전 이름은 알 수가 없다.


태의까지 진급한 그가 출세가도를 달린 결정적인 사건은 이자겸의 난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이자겸을 겁낸 인종(仁宗)은 그를 제거하려다 외려 역공을 받아 일대 위기에 몰렸다. 이런 위기에서 최사전은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외려 왕의 편이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이자겸을 평정하는 공로를 세운다. 그의 행적을 정리한 묘지명은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앞면) 공은 이름이 사전이고, 자는 휼세이며, 성은 최씨다. 선조는 탐진현 사람인데, 조부는 상약직장 철이고, 아버지는 장작감 정이니 모두 의술로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했다. 공은 성품이 꾸밈이 없고 충성스럽고 정의로웠다. 지혜와 꾀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술에 정통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해 선종이 궁궐로 불러 들여 의원은 마땅히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십전]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대가 바로 최고의 의원이 될 것이오고 하면서, 이에 이름을 사전이라고 하고 친히 글을 써서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는데, 항상 친밀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 외척이 권세를 함부로 하고 정령을 사사로이 내어 나라 안팎의 온 나라 백성들에게 악을 마음껏 베풀었으므로, 아낙네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싫어하고 서로 상심하여 해독을 참지 못했다. 임금이 그것을 근심하여 병오년 2월에 한두 명의 대신과 함께 의를 들어 해로운 것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적신이 먼저 알고 대궐을 침범하여 궁궐이 타버리게 되자, 임금이 거처할 곳이 없어서 사가로 피하여 머물게 되었다. 외가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그때 외척에 붙은 자들은 출세하여 공과 상을 받았으나, 임금을 호위했던 자는 도리어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조정에 가득 찬 공경사대부들이 모두 외척에게 붙었으나, 오직 공만은 그렇지 아니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어 끝까지 한결같은 절의를 지켰다. 이때 적의 무리들이 더욱 불어나고 권신이 발호하여 장차 불측한 흉계를 자행하려 하였다. 임금이 이 일을 알고 몸을 보전하고 해를 멀리하고자 하여 장차 외가에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공이 간언하기를 삼한은 삼한의 삼한이지, 폐하의 삼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왕 태조께서 부지런히 힘써서 국가를 이루셨으니, 청컨대 소홀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임금이 오랫동안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회복시킬 수 있다면, 생사를 같이 한 피붙이와 같을 것이오라고 했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뒤 저 무리의 우두머리를 회유할 비책을 아뢰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소탕되자, 임금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하고 사직과 종묘를 받들어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오라 하고, 특별히 조서를 내려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삼고,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가 되게 했다. 공은 공으로 일찍이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는데, 63세에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공을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불법을 공경하고 믿었으며, 재산을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기미년 36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화장하고) 곧 그 유골을 모아서 다음해 227일에 성 남쪽 장미산 기슭 와곡(瓦谷)에 장사지낸다. (공에 대한) 기록을 멀리까지 전하고자, 힘써 뒷면명을 짓는다.

 

공의 아름답고 뛰어난 덕이여,

꾸밈이 없이 바르고 지혜가 많았으며

어려서부터 업을 배우니 의가의 갈래로다.

십전의 오묘한 솜씨가 임금을 위해 넉넉하니

항상 침전에서 함께 하며 총애를 받았다.

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니

오랫동안 친신한 관계를 맺어 더욱 지키고 보호할 것을 다짐하였다.

개연하게 절개를 지키니,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어찌 바뀜이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여 임금의 오랜 원로가 되었다.

병오년에 이르러 외척이 권세를 오로지 하자

사람들이 많이 무리 지어 붙었으나 자신만은 홀로 그러하지 않았다.

2월의 재난에는 임금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5월에 변란에는 지모로써 온전함을 도모하였도다.

원악이 제거되고 무리의 의구심도 사라지니

나라는 더욱 편안하고 조종에게 산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던 까닭을 살펴보면 다만 공의 힘이 있었으니

충성스럽게 호위하는 근면함을 끝도 없이 보였네.

아름답도다, 이 한 사람이야말로 가상하게 큰 공을 세웠으니

집안에 은총을 내리고 벽 위에 그 형상을 그렸다.

사람은 죽었다고 하나 그 영예는 더욱 빛나니

그것을 멀리 전하고자 명을 지어 돌에 기록하노라.(주5

 

주5) 公諱思全字恤世姓崔氏其先耽津縣人也祖尙藥直長名」

哲父將作監名靖皆以醫術進仕於朝公性質直忠正智」

謀過人自少棈於其術年十有五歲宣宗時召入殿內謂」

曰醫者宜也十全爲上汝是上醫也因稱名曰思全御筆」

賜之自是歷仕數代常見親信時外戚擅權政令私出」

肆其惡於中外一國之民至於婦人小子擧皆疾首」

相非不忍毒上患之丙午春二月與一二大臣欲擧義」

除害而賊臣先認犯闕以至宮室焚蕩上失所依」

辟在私第受制於外家其時附外者立見功賞衛上者」

反被流殺時滿朝卿士盡皆附外公獨不然忠誠奉」

上終始一節時賊類益熾權臣跋扈將肆不測之謀上」

稍認欲以全身遠害將讓位於外家公諫曰三韓者」

三韓之三韓也非止陛下之三韓也先君太祖勤勞以致請」

勿忽之上哭泣良久乃曰汝若復之生死而肉骨也公稽首」

再拜密告以謀和誘彼黨之渠魁掃蕩凶類上謂」

曰復正三韓載安宗社皆公之力也特下詔旨以爲三韓」

後壁上功臣仍許子孫入仕公以功曾任守大尉門下侍郎」

平章事年六十三引年乞退不居成功敬信佛法」

不事産業至己未年三月六日以疾卒卽収其骨越翼年二」

月二十七日葬于城南薔薇山麓瓦谷欲遠其傳强

  (陰記)

爲之銘曰

公之懿德 質直多謀 自小受業」

醫家者流 十全之妙 爲上所優」

常於寢殿 泮渙爾游 歷朝侍衛」

終好不離 久結親信 益思護持」

介然守節 夷險何移 有事必告」

爲王耆龜 屬當丙午 外戚專權」

人多朋附 我獨不然 二月之災」

効死王前 五月之變 以智圖全」

元惡卽除 衆疑頓息 家國益安」

祖宗血食 顧此之由 惟公有力」

忠衛之勤 示之罔極 媚玆一人」

嘉乃丕績 錫寵于家 圖形於壁」

人之云亡 厥譽愈赫 欲遠其傳」

銘之在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篇(1984)]


3.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만나는 최사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최사전은 인종 시대에 그 이름이 빈출한다. 이외에도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한번 고대를 들이민다. 파한집 卷中에서 그는 醫官 崔思全이라 등장한다.


우선 고려사절요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睿宗 17(1122) 12월조에 의하면, 최사전은 이때 태의(太醫)였으니, 당대의 권신 이자겸과 한 편이 되어 그가 정적을 처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때 이자겸에 의해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가 경산부(京山府)로 추방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한안인(韓安仁)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문공미(文公美) 역시 귀양을 갔다. 한데 이 일에 최사전이 키를 쥐었다고 하니, 다음 기사가 그것을 증언한다.

 

한안인과 문공미 등은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예종(睿宗)의 등에 난 종기를 보고 작은 종기라 여기어 일찍 치료하지 않았다 해서 법으로 다스리자고 해서 왕이 도형(徒刑) 2년의 벌을 내리니 최사전 또한 몹시 (한안인과 문공미 등을) 원망했다. 최사전이 그 틈을 알고 묵은 원한을 풀고자, 간사한 인간인 채석(蔡碩)과 더불어 이자량·최홍재 등에게 참소하기를 한안인과 문공미가 당여(黨與)를 맺고 은밀히 모의하니, 장차 이영공(李令公, 李資謙)께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자겸이 매우 의심이 깊어져 마침내 그 죄를 꾸며내서[羅織] 왕에게 아뢰어, 한안인을 승주(昇州) 감물도(甘勿島)에 귀양 보냈다가 물에 빠뜨려 죽이는 한편 문공미·한주·이영·정극영은 외방(外方)으로 귀양 보내고 그 형제와 자식, 사위와 사돈과 동서[姻婭]들을 모두 연좌(緣坐)시켜 귀양 보냈으며, 족당(族黨)들 가운데 파직(罷職)된 사람 또한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섣불리 최사전이 이자겸 족당이라 안심하면 안 된다. 이자겸을 축출하는 데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심복 척춘경에게 쫓겨나 패가망신한다.


같은 인종 4(1126) 3월 기사다.

 

척준신(拓俊臣)을 수사공좌복야(守司空 左僕射), 김정분(金鼎芬)과 척순(拓純)을 모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전기상(田其上)과 최영(崔英)을 모두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추증하고 후하게 부의하였는데 이자겸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외가가 더욱 방자하여 박승중(朴昇中)과 허재(許載)로부터 아랫사람까지 아첨하며 의부하여 기탁하였는데 흉악하여 두려워할 만하였다. 왕이 비밀히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과 함께 상의하였다. 최사전이 이르기를 이자겸이 발호한 까닭은 오직 척준경을 믿기 때문입니다. 상께서 척준경을 얻게 된다면 곧 병권이 내속되어 이자겸은 다만 한 사람의 필부가 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의 심복으로 혼인으로 맺어지기까지 하였고 척준신 및 척순이 모두 관병에게 해를 당하여 이로 인해 그를 의심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점을 쳐 길조를 얻으니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 타이르며 이르기를, “태조와 열성의 신령이 하늘에서 계셔 화복을 두려워할 만한데 이자겸은 특히 궁액(宮掖)의 권세에 의지하였고 신의가 없어 호오(好惡)를 함께 할 수 없다. 공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나라를 섬기어 영세토록 쇠하지 않을 공로를 세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척준경은 그러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는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이 되어 있다. 명칭으로 보아 내의이면서 무기를 관장하는 관직도 같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최사전이 척춘경을 인종 편으로 끌어들이는 밀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인종은 같은 해 5월 척준경을 앞세워 이자겸을 처단한다.

 

척준경(拓俊京)이 이미 이자겸(李資謙)과 틈이 벌어져 있었으니 최사전(崔思全)이 다시 틈 타 그를 설득하였다. 척준경이 이에 계책을 결정하고, ()를 덧붙여 제 정성을 다하기를 원한다고 일렀다.

 

이렇게 해서 인종은 이자겸 일당을 일망타진한다. 공을 세웠으니 포상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난 진압 직후인 같은 해 6, 최사전은 일약 병부상서가 된다.

 

6. 척준경(拓俊京)을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으로 삼고 처 황씨(黃氏)를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으로 삼고 의복·금 그릇과 은 그릇·베와 비단·안마(鞍馬) 및 노비 10, 30결을 하사하였다. 이공수(李公壽)를 추충위사공신 판이부사(推忠衛社功臣 判吏部事)로 삼고 김향(金珦)을 위사공신 호부상서 지문하성사(衛社功臣 戶部尙書 知門下省事)로 삼고 최사전(崔思全)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의관이 일약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고려시대가 아무리 조선시대와는 풍토가 달랐다 해도, 이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왜 그는 병부상서였을까? 이는 아무래도 그의 전공이 의술만이 아니라 군기 전문가였을 데서 찾을 수 있을 법하다. 그는 그 직전 군기소감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당시 의술이 광물학과 밀접했던 데서 연결 고리를 찾고 싶다.

그는 나아가 같은 달에는 이부상서 지도성사(吏部尙書知都省事)로 임명된다. 이부였으니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도 틀어쥔 것이다. 지도성사라 했으니, 수도 경비 사령관 혹은 특별시장도 겸한다. 그에 대한 파격은 계속 이어져 인종 6(1128) 3월에는 추충위사공신 수사공 상서좌복야(推忠衛社功臣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된다. 마침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이다. 사공이라 했으니, 국토부 장관까지 겸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해 8월에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자리에 간다.


짐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임하자 외척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위세와 복덕을 부려 중상을 당한 자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50여 인을 유배하였으니, 조정이 모두 비어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붕당(朋黨)을 많이 만들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병오년(1126) 2월에 이르러 측근에서 시중들던 관원들과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여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는 이에 방자하고 악독한 짓을 하여 궁궐을 범하였고, 궁궐의 전각(殿閣), 부서(府署), 창고(倉庫)를 남김없이 싹 불태워 버렸으며, 짐이 연덕궁(延德宮)에 나가 임어하게 되자 모든 좌우의 시종(侍從)과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유배하여 흉악한 불꽃이 더욱 성하였고, 화변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최사전(崔思全)이 은밀히 척준경(拓俊京)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고 방책을 정하여 흉악한 역도들을 소탕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다시 평안히 하였으니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마땅히 유사에 명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에 쓰게 하라.”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해 1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니, 국정을 총괄한 셈이다. 같은 왕 9(1131) 2월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하니, 이런 그에게 임금은 큰 저택[甲第] 한 채를 하사했다. 고려시대 공무원 정년퇴직 연령은 70세다. 이로써 본다면 이때 최사전 역시 70세가 되는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묘지명에서는 그가 63세에 물러났다고 한다. 이런 그가 8년 뒤에 죽었으니, 묘지명을 존중한다면 향년은 71세다. 고려사 열전에서 말한 그의 향년은 73세다. 고려사 열전과 묘지명을 비교할 때, 향년은 아무래도 묘지명을 따라야 할 듯싶다. 이에 의하면 그의 생몰년은 1069~1139년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최사전은 국가 원로로 활동한다. 한데 이때 바로 최사전이 퇴직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같은 해 9월 그의 퇴직과 관련한 또 다른 언급이 절요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인종은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로 삼아 그를 치사케 한다. 이때가 완전 퇴직이었을 것이다. 보통 퇴직 전에 명예직을 주는 전통이 있으니 그것을 따랐다.


각종 영화를 누린 그는 인종 17(1139) 3월에 사망한다. 절요에는 그의 타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이 사망하였다. 최사전은 처음에는 의술로 진출하였으나 척준경(拓俊京)을 깨우쳐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여 그 공으로 갑자기 재사(宰司)에 올랐다. 만년에는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이 각각 금 술잔[金罍] 한 개씩을 주었는데, 그가 죽자 첩이 그 중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노하여 그녀를 매질하려 하자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그를 구휼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러한 물건이겠습니까. 제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어질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어필로 이름을 하사하니 효인(孝仁)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최사전은 처신을 상당히 잘한 듯하다. “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위가 극도로 이르고 임금의총애가 넘친다고 하여 굳게 청하여 치사하였다고 하니,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 듯하다. 나아가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사망일자는 고려사를 통해 3월 갑신(甲申), 4일임을 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44이다. 죽음 이후 그에 대한 대접도 남달랐다. 고려사 권60 권제14 2 길례대사(吉禮大事) 태묘(太廟)조를 보면 체협(禘祫) 때 묘정(廟庭)에 배향한 공신 중에 최사전은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태묘란 종묘다. 이런 국가 최고 제사 시설 중 그는 인종실(仁宗室)에 배향되어 김부식(金富軾)과 이름을 나란히 올린다. 그는 반란군 진압 총사령관으로 서경에서 묘청을 토벌한 김부식과 동급이었다.


나아가 그런 까닭에 그의 후손도 대접을 잘 받았다. 같은 고려사 권75 권제29 選擧3 전주(銓注) 공신 자손에 대한 서용규정을 보면 충선왕(忠宣王)이 즉위 원년(1298)에 교서(敎書)를 내렸거니와, 최사전 관련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을묘년(1135) 묘청(妙淸)의 난 평정[西事]에 공을 세운 자 및 전사한 양반과 관원(官員)장수(將帥), 경술년(1130)에 창화군(昌化軍)으로 사직을 보위한 경순(景純이웅(李雄) 등의 친손자·외손자 중에서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 평장사(平章事) 최사전(崔思專)은 선대(先代)에 국난(國難)을 구하여 왕손(王孫)으로 하여금 길이 뻗어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친가·외가의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

 

그의 행적은 고려사 98 列傳 권제11 諸臣에 총정리가 이뤄졌으니, 다음과 같다.

 

최사전(崔思全)은 탐진(耽津) 사람이다. 처음에 내의(內醫)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승진하여 소부소감(少府少監)이 되었다. 예종(睿宗)이 등창[背疽]을 앓아 최사전을 불러 그것을 보였는데, 최사전은 작은 종기라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즉시 치료하지 않아 목숨을구하지 못하였다. 재상(宰相)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가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도형(徒刑) 2년에 그치게 하였다. 최사전이 그것에 원한을 품었다가 마침내 한안인과 문공미를 이자겸(李資謙)에게 모함하여 유배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한안인전(韓安仁傳)에 있다.


최사전은얼마 지나서 군기소감(軍器少監)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매우 휘둘렀다. 왕이 몰래 최사전(崔思全)과 더불어 의논하니 최사전이 말하기를, “이자겸이 발호(跋扈)한 것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척준경을 얻는다면 병권(兵權)이 폐하께 속하여 이자겸은 단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 이자겸)의 심복이 되었고 심지어 혼인을 맺었으며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아들 척순(拓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리할지 의심스럽다.”라 하고 이에 점을 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써 회유하여 말하기를,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神靈)이 하늘에 있으니 화복(禍福)이 가히 두렵습니다. 이자겸은 특히 궁 안의 세력에 의지할 뿐이고 신의가 없으니 좋거나 나쁜 일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히 전할 불후의 공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계책을 정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왕이 척준경의 공을 녹훈(錄勳)하고 아울러 최사전에게 상을 내려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발탁해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를 더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외척(外戚)이 권력을 전횡하여 위세를 부리거나 상을 주면서 중상모략(中傷謀略)한 바가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살해하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50여 명을 유배 보내니 조정이 텅 비고 나라 안에 위세를 떨쳐 과인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朋黨)이 많이 자라나 화()를 장차 예측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126) 2월이 되어 가까이 모시던 관료와 한 두 대신이 그 권력을 제거하도록 청하니 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가 마침내 악독한 성미를 부려 대궐을 침범하니 궁전(宮殿)과 부고(府庫)를 불에 태워 남은 것이 없었다. 짐이 연덕궁(延德宮)으로 나가자 모든 좌우에 있는 시위(侍衛) 군사를 혹은 베어 죽이거나 혹은 유배 보내니 흉악한 불꽃이 더욱 타올라 재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경이 몰래 척준경을 회유하여 같은 마음으로 대책을 정해서 520일에 흉악한 역적을 제거하여 다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마땅히 담당 관청에 명령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다음 차례에 기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최사전은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叅知政事 判尙書刑部事)로 옮겼다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최사전이스스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자리에 오르니 치사(致仕)를 간청하였다. 이에 왕이허락하고 훌륭한 집을 한 채 하사하며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거센 바람에 강한 풀을 알게 되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고 하였다. 병오년(1136)에 재앙이 내부에서 일어나 종묘와 사직이 거의 위태로워졌고 어지러운 정세가 이미 극에 달하였다. 짐의 좌우에 있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도 오히려 시퍼런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누가 사직을 지킬 힘을 낼 수 있었겠는가? 오직 경만이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좋은 계책을 세웠다. 순역(順逆)을 밝히고 화복(禍福)을 타이르니 비록 척준경(拓俊京)처럼 사납고 교활하여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면서 종실을 높일 줄 알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하여 다시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경의 공이다. 경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나의 표창하는 마음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최사전에게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주국(開府儀同三司 守太尉 柱國)을 더하여 주었다.


최사전이 인종17(1139)에 죽으니 73세였다.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부의를 본래보다더 많이 주었으며 시호는 장경(莊景)이라 하고 인종(仁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사전의아들은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崔思全)이 일찍이 최변과 최열에게 금 술잔[金罍] 하나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죽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돌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으로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에게 드리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또 인자하다고 할만하다.”라 하고, 직접 글을 써서 최효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4. 최사전의 찬조 출연자들

 

이곳 무양서원이 품은 인물들은 최사전을 중심으로 손암 최윤덕과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그리고 충열공 나덕헌이 있다. 이들은 얼키설키 탐진최씨, 최사전과 연망(networking)을 형성한다. 우선 간략한 인연을 정리하면, 최윤덕과 최부는 다 탐진최씨이며, 유희춘은 어머니가 최부의 딸이며, 나덕헌은 할머니가 탐진최씨다.


최사전을 시조로 삼는 탐진최씨는 족보를 제외한 문헌들에서는 그의 두 아들만 보이고, 기타 후손은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앞서 본 대로 충선왕이 즉위 원년(1298)에 내린 교서를 통해 최사전은 친가와 외가 현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후손이 끊이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이 교서가 나온 시점이 최사전이 사망한 시점(1139)에서 160년이나 지났다는 점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는 없다. 나아가 그의 후손들은 충선왕 시대에 등용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고려 말~조선 초에 탐진최씨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


후대에 탐진최씨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로 추숭된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또한 그런 인물 중 한 명일지 모른다. 최윤덕은 그 종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물론이고,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발음은 같으나 한자 표기가 崔潤德인 저명한 무인이 세종시대에 맹활약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활동 연대도 다르다. 탐진최씨 문중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 가 살면서 술회시(述懷詩)를 남겼다 한다.(주6) 그의 손자 최호(崔灝)가 중종 때 계공랑에 이르렀고, 가선대부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증되었다고 하고, 호의 손자 최언웅(崔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주6) 이런 내용이 『광주지』에 있다는데, 나는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탐진최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은 최부(崔溥·1454~1504). 최부는 표해록(漂海錄)저자로 더욱 유명하거니와, 그와 표해록에 대해서는 이 강좌 첫 주자 배재훈 선생이 전문적으로 다루었으므로, 재방송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표해록이 너무나도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최부의 이름 또한 세계 기행문학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만들었지만, 정작 이 때문에 그 자신은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성종실록 19(1488) 614일 병오에 수록된 관련 기사다.

 

교리(校理)를 지낸 최부가 북경[京師]으로부터 돌아와서 청파역(靑坡驛)에 묵으니, 명하여 일기를 찬진(撰進)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이섬(李暹)이 표류했다가 생환하였으므로, 특별히 초자(超資)토록 명한 적이 있다. 최부는 쓸 만한 사람인데, 이제 또 만 리를 표박(漂泊)하다가 아무 탈 없이 생환했으니, 그를 서용(敍用)하는 명은 마땅히 상()을 마친 후에 할 것이고, 우선 쌀·콩 약간과 부물(賻物)을 내려 주도록 하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으면서 사신(史臣)이 논평한 말이 있다.

 

최부가 만약 이때 사례하고, 상을 당해 어미를 보고 난 후에 일기를 찬집하겠다고 했다면, 임금이 반드시 따르셨을 것이고, 사람들도 끼어들어 말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의 의논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최부는 표해 일기를 쓰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해도, 일단은 어머니 상을 치른 다음에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부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두고두고 최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요컨대 최부는 불효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최부의 등장에서 주목할 점은 적어도 명확한 흔적으로 확인하는 한, 그야말로 탐진최씨 가문에서 진정한 문사(文士)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사실이다. 탐진최씨가 최사전 시대에 비록 이름을 드날렸다 해도, 이후 탐진을 관향으로 삼는 후손 중에 이렇다 할 만한 족적을 남긴 문인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부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표해록의 저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종직의 제자로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홍문관 교리와 춘추관 편수관·예문관 응교와 같은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진정한 문사였다. 탐진최씨가 무양서원을 통해 최부를 배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나는 본다.


그의 여행기는 외손자 유희춘(柳希春·1513~1577)에 의해 간행을 본다. 자가 인중(仁仲), 호가 미암(眉巖), 본관 선산(善山)인 그는 해배되어 출사한 1567년 이후 1577514일까지 무려 11년간 자필로 쓴 방대한 미암일기(眉巖日記)가 불후(不朽)한 자리를 차지하거니와, 조선 중기 정치권의 거물이기도 했다.


해남 태생인 그는 김안국에게서 배우고 중종 32(1537)에 치른 생원시와 그 이듬해 별시(別試)에 급제하면서 긴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한 그는 탄탄대로를 달리다 명종 시대가 개막하면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벌인 권력 투쟁에 휘말려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곧이어 1547(명종 2), 양재역 벽사사건이 터지자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로서 당시 실권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서,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에게 찍혀 제주로 유배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유배생활은 19년 뒤인 1567(선조 원년)에야 풀린다. 다산 정약용보다 긴 유배였다. 유배 역시 범상치 않았으니, 처음에는 제주도로 갔지만, 그곳이 고향 해남과 가깝다 해서 함경도 종성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이후 그에겐 오직 초원의 빛만이 넘실거렸다. 선조의 극심한 총애를 등에 엎고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원, 예문관 제학, 형조·예조·공조·이조 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책 만 권을 소장한 장서가였으며, 사후에는 당 태종 시대를 빛낸 우세남에 견주어 걸어다니는 비서(行秘書)’라 칭해지기도 했다.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무수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탐진최씨와 형성하는 고리의 출발은 아버지 유계린(柳桂鄰)이다. 그는 탐진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그가 바로 최부의 딸이다. 미암이 외조부를 직접 언급한 글이 있으니, 미암집권제3에 실린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가 그것이다. 금남은 최부의 호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10월 계사에 썼다는 사실기에서 미암은 외조부의 경력을 약술하면서 행적과 성품을 칭송했으니, 이에는 표해록이 촉발한 논쟁들이 보인다.

 

정미년(1487, 성종18)9월에 추쇄(推刷)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윤 정월에 아버지 상사(喪事)를 듣고 황망히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태주(台州·절강성 현)에 이르렀다. 6월에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돌아와 왕명을 받들어 표해록을 찬술해 올렸다. 그 뒤로 연이어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임자년(1492, 성종23) 정월에 면상(免喪)함에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었다. 간관(諫官)들은 지난번 초상(初喪) 때에 어명을 받아 표해록을 찬한 것을 허물 삼아 논박하니 임금이 그 의론이 너무 심하다 하고, 선정전(宣政殿)에 왕림하시어 친히 만나보시고 표류의 본말을 물으니 공이 탑전(榻前)에서 자세히 말씀드렸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경은 사지(死地)를 돌아다니고, 또 중국에서도 옷 한 벌을 하사받았구나고 하셨다.

 

나아가 사실기는 최부가 죽임을 당한 이후 그의 글을 미암이 정리한 사연을 정리했다.

 

선생이 이미 혹독하게 죽음을 당하고, 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평생 저술이 흩어져 없어짐에 열 중 두셋도 남지 않았다. 희춘이 60년 뒤에 수습하여 겨우 소()()비명(碑銘) 일곱 수와 함께 동국통감론(東國通鑑論)120수를 얻어 책 두 권을 만들어 간행하여 장래에 전하니 그 기절(氣節)의 굳세고 특이함과 경륜의 규모와 의론의 정밀하고 간절함을 여기에서 살펴보면, 거의 그 한 실마리를 알 수가 있다.

 

사실기에는 최부가 해남으로 장가든 사연도 보인다.

 

해남현(海南縣)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어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없고, 예의 또한 황폐하거늘 선생이 이 읍으로 장가들어 여러 해를 오가며 정론(正論)으로 낡은 풍속을 변화시켰다. 또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두 명의 수재와 우리 선인(先人·유계린<柳桂隣>)을 얻어 균름(囷廩)을 기울여 가르치매 세 사람이 공부할 바로써 후학을 가르치니, 한 고을이 성대히 빛나 마침내 문헌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최부는 해남으로 장가든 일을 계기로 이곳을 들락거리면서 후학을 길렀으니, 개중 한 명이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이었다. 해남 지역 세 후학 중 최부는 유독 유계린을 눈여겨 본 듯, 그를 마침내 딸을 주어 사위로 맞아들인다. 미암집권제3에는 미암이 그의 아버지를 위해 쓴 묘갈인 성은 선생 묘갈 음기(城隱先生碣陰)’와 어머니를 위해 쓴 같은 묘갈인 증 정부인 최씨의 묘갈 음기(贈貞夫人崔氏碣陰)’가 나란히 수록되었거니와, 우선 아버지를 위한 묘갈은 다음과 같다.

 

성은(城隱) 선생은 휘가 계린(桂隣)이요, 자는 인지(隣之)이며, 성은 유씨로 선산(善山)의 계출(系出)이니, 순천(順天)에서 태어나 해남(海南)에서 거주하였다. 성품은 질박정직하고, 효성우애가 있어서 논밭과 장획(臧獲·노비)을 아우와 누이들에게 양보하였다.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상례(喪禮)를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함이 남들과 크게 달랐다. 총명함이 뛰어나고, 문리가 투철하였으며, 경문을 많이 보아 한번 읽으면 암송하여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글을 지음에 입론(立論)에 특장이 있었고, 언론과 풍지(風旨)가 항상 사사로움을 억제하고 정도를 따랐다. 나이 30세 때부터는 문을 닫고 은거하여 다만,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칠 뿐 외출이 드물어 고요히 오래 있은 다음에 사람들이 알았고, 행실이 결백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주색과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51세에 세상을 마쳤다.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 성춘(成春)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나 선생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희춘(希春)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으로 출입하다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성은을 입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자 마침내 (아버지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자(孤子)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어머니 묘갈은 다음과 같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최씨(崔氏)는 탐진(耽津) 사람이다. 해남 외가에서 살았으며, 사간원사간을 지내고 도승지에 증직한 금남(錦南) 최부(崔溥) 선생의 딸이다. 성품은 총명하고 엄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손에 놓지 않으니 금남이 특히나 사랑하였다. 평생 동안 누차 한 가정의 상례를 맡아 보았으며, 유씨 댁으로 시집을 가 성은(城隱) 선생, 휘 계린(桂隣)의 배필이 되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고, 남편과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였다. 성은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 곧바로 시어머니 설씨(薛氏)가 세상을 뜨자 부인은 몸소 순천으로 가서 고생스럽게 장례를 치렀다. 어린 아들과 딸을 가르침에 모두 예의로써 하였다. 나이 68세에 막내아들 희춘(希春)이 국사를 논하다가 연좌되어 멀리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 부인은 대의(大義)로써 서로 격려하고 이별의 슬픔을 짓지 않았다. 76세에 왜적의 난을 만나 창황히 담양으로 피난을 감에도 유씨의 신주는 안고 갔다. 나이 79세에 세상을 떴다. 7년 뒤에 희춘이 성은을 입어 중토(中土·충청도 은진)로 양이(量移)되었고, 오래 있지 않아 다시 총애를 받아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제수받음으로써 마침내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 희춘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노라.

 

이로써 보면 미암이 탐진최씨 외가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탐진최씨 가묘 성격이 강한 무양서원이 그를 배향키로 한 일은 지극히 정당하다.


무양서원이 품은 마지막 인물이 나덕헌(羅德憲·1573~1640)이다. 그는 무신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헌지(憲之)이며 장암(壯巖)은 호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해 안현(鞍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이후 길주(吉州) 목사와 창성(昌城府使)부사의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다 청나라 조정이 황제를 참칭한 국서를 받았다고 탄핵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됐다. 이때 후금은 태종 시대였다.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 참석을 거부한 조선 사신단은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것이 본국에는 잘못 알려졌다. 이후 누명이 벗겨져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다. 이성(尼城)현감을 역임한 부친 나사침(羅士忱)이 유명하다.


그렇다면 나덕헌은 탐진최씨와 어떤 연결고리를 형성하는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방대한 유고집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나덕헌 행장이 수록됐다. 이재난고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 이재유고(頤齋遺藁)권지19 行狀이 저록한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水軍統禦使喬桐都護府使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羅公行狀이 바로 그것이니, 이에는 고조 나계조(羅繼祖), 증조 나일손(羅逸孫), 조부 나질(羅晊), 그리고 부친 나사침에 이르는 4대조 부부의 이름과 그 최종 경력을 간단히 정리돼 있다. 이에 의하면 조부 나질은 무과에 급제하고 通訓大夫 行 司憲府監祭을 역임했으며 죽은 뒤에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됐다. 그의 부인은 숙인(淑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탐진최씨로, 무오 명현(戊午名賢)으로 홍문관 부응교(弘文舘副應敎)를 역임하고 사후에 예조참판에 추증된 금남(錦南) ()의 딸이라 했다. 그가 바로 최부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로써 보면 나덕헌은 최부가 바로 외증조다. 미암에게 최부가 외조인 점과 비교하면 나덕헌은 미암에게 한 세대(항렬) 뒤가 된다. 나덕헌은 탐진최씨 피가 흐른다 해서 무양서원에서 배향된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 전에 미암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떠오르는 허준을 언급하려 한다. 허준은 낙하산으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를 꽂은 이가 미암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준은 미암의 청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암일기를 보면 허준이 더러 모습을 들이민다. 1569, 유희춘은 허준에게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을 진찰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유희춘이 나사침 부자 진찰을 부탁한 고리는 역시 탐진최씨로 이어지는 혈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연건동거사 2018.06.16 08:55 신고

    침미다례=탐진

  2. 연건동거사 2018.06.16 09:34 신고

    같은 집안을 배향한 서원이 꽤 있지 않나요? 서원 철폐후에 이런 서원이 거의 사라져서 그렇게 보이는것 아닌가 싶은데요.. 제가 본 것만 그런 류의 집안 서원이 2-3개 되었던거 같은데요.

  3. 한량 taeshik.kim 2018.06.16 09:35 신고

    꽤 있더만요 조선후기에 특히 이 경향이 강하더만요

  4. 한량 taeshik.kim 2018.06.16 09:35 신고

    식민지시대에 더 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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