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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永 4년 1월 6일(1851년 2월 6일)~明治 41년(1908) 3월 2일. 


明治時代 일본 역사학자이자 동양사(東洋史)라는 개념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창안한 인물이다.

盛岡藩 번사(藩士)인 藤村盛德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이름이 荘次郎(莊次郞)이다. 번교(藩校)에서 성적이 뛰어나 14세에 藩校 교수이기도 한 漢學者 那珂悟楼의 청원으로 나카 가문[那珂家] 養子가 된다.


명치유신明治維新 뒤에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들어가 영학(英學)을 배웠다. 그후 사범학교 중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일하는가 하면, 뒤에는 치바사범학교(千葉師範學校)와 동경여자사범학교(東京女子師範學校) 교장으로도 일하면서 여성 교육에 진력했다. 그뒤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學校)와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교수가 되고,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강사도 겸했다. 


그 사이에 日本 朝鮮 中國 역사에 관한 소위 실증적 연구를 많이 발표했다. 또 연구를 위해 당시로서는 진귀한 자전거를 이용해 국내외를 여행한 까닭에 ‘자전거박사’(自転車博士)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중국通史인 《지나통사支那通史》(1888~1890)가 대표 저작으로 꼽히니, 미완이지만 간결하고 객관적인 개설서라 해서 중국에서도 읽혔다. 


그는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에 기초해 일본 고대사 紀年 문제를 연구한 ‘상세기년고’(上世年紀考)를 발표했으니, 이 논문은 《사학잡지(史学雑誌. 史學雜誌)》에 발표되고, 三品影英이 증보한 《상세기년고(上世年紀考)》에도 수록됐다. 


台植案 : 신유혁명설과 주갑설에 기초한 그의 기년 조정론 핵심은 일본서기 상대 기년이 신유년에 혁명이 일어난다는 종교관념에 기초에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조작되었다는 것이며, 나아가 상대 기년 중에서도 교차 검증이 가능한 사건은 공교롭게도 주갑 기준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1주갑은 60년이니, 간지로 연대를 매기는 과정에서 해당 사건이 실제보다 60년, 혹은 120년, 혹은 240년 이런 식으로 올려졌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연대를 교정한 잣대가 바로 《삼국사기》였다. 다시 말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말하는 같은 사건을 보니, 《삼국사기》 연대가 사실과 부합하는 반면, 《일본서기》 쪽은 주갑 단위로 실제보다 상승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한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일본서기》가 사건이나 연대를 조작하는 데 쓴 것으로 드러난 신유년 혁명설이, 도로 한국 고대사로 치고 들어와서는 '갑자년' 혁명설로 둔갑해서는, 《삼국사기》가 말한 박혁거세에 의한 신라 건국연도가 하필 갑자년인 것도, 그리고 그의 재위 기간이 하필 60년인 것도 조작이라고 하는가 하면, 상고기 연대는 믿지 못하므로 어느 시기까지는 모조리 120년, 혹은 240년을 당겨내리는 기년조정론으로 둔갑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를 교정하는 데 잣대 역할을 한 《삼국사기》가 도리어 재단되는 역설이 빚어진 것이다. 


나아가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성길사한실록(成吉思汗実録. 成吉思汗實錄)》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완역했다.

또한 같은 盛岡藩 출신으로 같은 동양사 전공자인 나이토 코난(内藤湖南․內藤湖南)과도 친교를 맺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백조고길․白鳥庫吉)는 그의 중학 교사 시절 제자다. 栃木県 日光市 華厳滝에 「巌頭之感」을 새겨 남기고 투신자살한 藤村操은 생질이다.



< 2005. 5. 23 서울대 강연에 나선 Walter M. Spink > 


미국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로 1928년 생이다. 한국 미술사학계, 특히 불교미술사학계에 끼친 영향도 다대해 곳곳에 그를 직간접으로 사숙한 학도가 있다. 


2008년 5월에는 그의 팔순에 즈음해 국내 미술사학도들이 그 헌정식을 겸해 그를 직접 초청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니, 취재를 위해 나는 현장에 있었다. 다음 내 기사가 바로 그 내용을 다루었다. 


<사람들> 팔순 헌정 월터 스핑크 교수 

"아잔타석굴 보존 위해 관람객 제한해야"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특정 연구자의 회갑이나 정년퇴직, 혹은 칠순이나 팔순 등을 기념하는 논문집 발간이나 학술행사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거의 없다. 비슷한 사례로 독일어권에서 대가(大家)의 칠순 기념논총이 있으나 한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만큼 활발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아잔타석굴로 대표되는 인도미술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월터 스핑크(Walter M. Spink) 미국 미시간대학 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의 팔순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행사가 국내에서 개최된 것은 조금은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학술대회는 '불교 석굴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내걸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사(이탈리아 르네상스미술) 분야 박사과정을 밟는 김영준(39) 씨가 재단 설립을 염두에 두고 조직한 단체인 청추예술사학회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문화유산연구소(소장 이주형) 공동 주최로 24일 서울대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젊은 미술사학도가 후원한 이 자리는 발표자 면면이 화려했다. 누구보다 팔순 헌정 대상인 스핑크 교수 본인이 '아잔타 석굴의 연구 과제'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그 외 피아 브랑카쵸 미국 드렉슬대학 교수와 아르빈드 잠케드카르 인도 뭄바이 소마이야 남아시아ㆍ동남아시아 연구센터소장, 야구치 나오미치 일본 가나자와대학 교수 리총펑(李崇峰) 중국 베이징대학 교수, 드니즈 라이디  미국 메트폴리턴박물관 큐레이터 등이 인도 불교석굴에 관한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스핑크 교수는 고령으로 인해 거동이 편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1시간 가량이나 정열적인 기조강연을 했다. 발표 원고는 따로 없고 그 대신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연을 했다. 


그동안의 연구 이력이 보여주듯이 이날 강연 또한 인도미술에 대한 건축학적 구조 해석과 아잔타석굴 보존 문제에 집중했다. 


강연이 끝난 뒤 휴식시간에 기자와 만난 그는 특히 아잔타석굴의 보존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지만 너무 많은 관람객이 한꺼번에 (아잔타석굴에) 들어갑니다. 석굴 보존에는 치명적이 결과를 초래하며 실제 훼손 상태가 심각합니다. 보존운동을 펼치는 중인데 그와 관련되는 각종 기고문을 이메일로 (기자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핑크 교수는 "관람객을 엄격히 제한해야 하며, 특히 어린이의 단체관람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적어도 1박2일 정도의 일정을 잡고 석굴을 학술적으로 조사하려는 연구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를 마련한 김영준 씨는 "미국에는 팔순 논총 봉정이나 학술행사와 같은 기념식이 없다"면서 "한국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으나 아잔타석굴의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스핑크 교수를 모셔와 직접 육성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국내 미술사학자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서울대 측과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팔순 잔칫상을 한국에서 받게 된 데 대해 스핑크 교수는 "너무 황송하고 한국학계의 열렬한 환대에 압도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주형 교수는 "스핑크 교수는 반세기 이상 인도석굴 연구에 매진해 온 분으로 아잔타석굴을 비롯한 이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면서 "특히 그의 아잔타 석굴의 편년(編年)과 구조적인 특성에 관한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이 같은 그의 학설은 인도미술사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전했다. 

taeshik@yna.co.kr


2008.05.24 15:45:43 송고  


< 2005. 5. 23 서울대 강연장에서 만난 Walter M. Spink >


학력

1949년 애머스트대학(Amherst College) 졸업(최우등)

1950년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미술사학과 석사(인도미술)

1954년 하버드대학 미술사학과 박사(인도미술)

          박사학위 논문: “Rock-cut Monuments of the Andhra Period: Style and  Chronology” (안드라 시대의 석굴 유적: 양식과 편년)

1956-1961년   브랜다이스(Brandeis)대학 강사, 조교수.

1961년-2000년 미시간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62-1965     미국인도연구원(American Institute of Indian Studies) 이사

1963-2001     학술지 Ars Orientalis 편집위원

1965-1971     미국베나레스연구원(American Academy of Benars) 이사

1972-1976     ACSAA(미국 남아시아미술사학회) 회장

1974-1996     동(同) 슬라이드 프로젝트 책임자

1972-1974     SARC(미국 남아시아연구위원회) 미술 분야 위원장

1972-1973     미국인도학연구원 이사

1981-1990     피닉스 프로젝트(인도석굴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책임자

1981-1996     NEH(미국 국립인문재단) 사진 프로젝트 책임자

1983-1986     스미소니언 아잔타 프로젝트 책임자


저서

Ajanta: History and Development, 6 vols., Leiden: Brill, 2005-2008.

        Vol. 1: The End of the Golden Age, 2005.

        Vol. 2: Arguments about Ajanta, Patterns of Patronage, 2006.

        Vol. 3: The Arrival of the Uninvited, 2005.

        Vol. 4: Ajanta, Year by Year, 2008 (출판 중).

        Vol. 5: Ajanta, Cave by Cave, 2007.

        Vol. 6: Ajanta (부제 미정), 2008 발간 예정.

The Journey of Siddhartha (Asvaghosa의 Buddhacarita의 자유로운 번역), Mumbai, 2000.

Ajanta: A Brief History and Guide, Ann Arbor: Asian Art Archives, University of Michigan, 1994.

The Axis of Eros, New York: Schocken Books, 1973.

The Quest for Krishna: Paintings and Poetry of the Krishna Legend, Ann Arbor, 1972.

Krishnamandala: A Devotional Theme in Indian Art, 전시도록, Ann Arbor: Center for South and South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1971.

Ajanta to Ellora, Bombay: Marg Publications, 1967.


주요 논문

"The Ajanta Caves," for Encyclopedia of India, ed. S. Wolpert, New York: Scribner's, 2005.

"A New Vakataka Chronology," in The Ananda-Vana of Indian Art (Dr. Ananda Krishna Felicitation Volume), ed. N. Krishna and M. Krishna, New Delhi, 2004.

"The Quest for Krishna," in A Celebration of Love, ed. H. Dehejia, NewDelhi, 2004, pp. 30-37.

"The Innocent Evolution of Ajanta's Technology," in The Vakatakas: Indian Culture at the Crossroads, ed. H. Bakker, Groningen, 2004.

"The Earliest Vakataka Cave Shrine: an Anomalous Stupa in the Ghatotkacha Vihara," in Sri Nagabhinandanam: Dr. M.S. Nagaraja Rao Festschrift, Bagalore, 1995, vol. 1, pp. 171-180.

"Topics for Study and Discussion in the Vakataka Caves at Ajanta and Aurangabad," in Indian Painting: Essays in honour of Karl J. Khandalavala, ed. B.N. Goswamy and U. Bhatia, New Delhi: Lalit Kala Akademi, 1995, pp. 436-449.

"The End of Imagery at Ajanta," in New Trends in Indian Art and Archaeology: S.R. Rao's 70th Birthday Felicitation Volume, ed. B.U. Nayak and N.C. Ghosh, New Delhi: Aditya Prakashan, 1992, pp. 337-348.

"The Vakataka Caves at Ajanta and Their Successors," in Reappraising Gupta History: Festschrift honoring Srirama Goyala, ed. B.C. Chhabral, New Delhi: Aditya Prakashan, 1992, pp. 248-262.

"The Caves at Ajanta," Archaeology 45-6 (November-December 1992), pp. 52-60.

"The Warlis" (A. Rane와 공저),  Pathik 3-3 (April 1992), pp. 8-10.

"Ajanta in a Historical and Political Context (Continued): Reply to K. Khandalavala, A. Jamkhedkar, B. Deshpande," Pathik 3-4 (July 1992), pp. 16-25.

"Before the Fall: Pride and Piety at Ajanta," in The Power of Art: Patronage in Indian Culture, ed. B.S. Miller,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 65-77.

"The Achievement of Ajanta," in The Aga of Vakatakas, ed. A.M. Shastri, New Delhi: Harman Publishing House, 1992, pp. 177-202.

"The Vakataka's Flowering and Fall," in The Art of Ajanta: New Perspective, ed. R. Parimoo, et al., New Delhi: Books & Books, 1991, pp. 71-99.

"Notes on Buddha Images," in The Art of Ajanta: New Perspectives, ed. R. Parimoo, et al., New Delhi, Books & Books, 1991, pp. 213-241.

"The Archaeology of Ajanta," Ars Orientalis 21 (1991), pp. 67-94.

"A Recently Discovered Buddha Image at Aurangabad," in Ratna-Chandrika: Panorama of Oriental Studies (Shri R.C. Agrawala Festschrift), ed. B. Handa and A. Agrawal, New Delhi: Harman Publishing House, 1989, pp. 189-196.

"Ajanta in a Historical and Political Context," Pathik 2-1 (September 1990), pp. 5-17.

"Maurya Figural Sculpture Reconsidered" (Frederic Asher와 공저), Ars Orientalis 19 (1989), pp. 1-25.

"Making Ajanta," in Making Things in South Asia: The Role of Artist and Craftsman (Proceedings of the South Asian Seminar), ed. M.W. Meister, Philadelphia: Department of South Asia Regional Studi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88.

"Ajanta's Paintings: A Checklist for Their Dating," in Felicitation Volume in Honour of Srimati Pupul Jayakar, ed. L. Chandra, Delhi" Agam Kala Prakashan, 1987, pp. 457-468.

"A Reconstruction of Events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Vakataka Caves," in Kusumanjali: New Interpretation of Indian Art and Culture, Sh. C. Sivaramamurti Commemoration Volume, ed. M.S. Nagaraja Rao, Delhi: Agam Kala Prakashan, 1987, vol. 1, pp. 185-190.

"Flaws in Buddhist Iconology," in Facets of Indian Art, ed. R. Skelton, et al., London: Victoria and Albert Museum, 1986, pp. 3-8.

"Ajanta's Chronology: Solstitical Evidence," Ars Orientalis 15 (1985), pp. 97-119.

"Ajanta's Chronology: Cave 7's Twice-bron Buddha," in Studies in Buddhist Art of South Asia, ed. A.K. Narain, New Delhi: Kanak Publications, 1985, pp. 103-116.

"The Great Cave at Elephanta: a Study of Sources," in Essays on Gupta Caves, ed. B.L. Smith, Delhi: Motilal Banarsidass, pp. 235-282

"The Elaboration of the Myth," in Krishna, the Divine Lover: Myth and Legend through Indian Art, ed. E. Isaaco, London: Serindia Publications, 1982, pp. 102-121.

"Ajanta's Chronology: Politics and Patronage," in Kaladarsana: American Studies in the Art of India, ed. J.G. Williams, New Delhi: Oxford and IBH Publishing, 1981, pp. 109-126.

"Jogeswari," Journal of Indian Society of Oriental Art, Dr. Moti Chandra's Commemoration Volume, special number (1978), pp. 1-35.

"Bagh: A Study," Archives of Asian Art 30 (1976-77), pp. 53-84.

"The Splendour of Indra's Crown: A Study of Mahayana Developments at Ajanta,"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Manufactures and Commerce CXXII (1974), pp. 743-767.

"The Cage of Form," in Structural Approaches to South India Studies, ed. H.M. Buck and G.E. Yocum, Chambersburg, PA: Wilson Books, 1974, pp. 17-42.

"Vijayanagar: City of Victory," Journal of Indian History 51-1 (1973), pp. 122-140.

"Ajanta: A Brief History," in Aspects of Indian Art, ed. P. Pal, Leiden: E.J. Brill, 1972, pp. 49-59.

"A Temple with Four Uchchakalpa (?) Doorways at Nachna Kuthara," in Chhavi: Golden Jubilee Volume, Banaras: Bharat Kala Bhavan, 1971, pp. 161-172.

"Ajanta's Chronology: The Problem of Cave Eleven," Ars Orientalis 7 (1968), pp. 155-168.

"Monuments of the Early Kalachuri Period," Journal of Indian History 46-2 (1968), pp. 263-270.

"Ellora's Earliest Phase," Bulletin of the American Academy of Benares 1 (1967), pp. 11-22.

"Ajanta and Ghatotkacha: A Preliminary Analysis," Ars Orientalis 6 (1966), pp. 135-155.

"The J.M. Plumer Collection of Oriental Art," Ars Orientalis 5 (1963), pp. 337-339.

"On the Development of Early Buddhist Art in India," The Art Bulletin 40-2 (1958), pp. 95-104. 


그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정보는 아래를 참조하라 


https://www.walterspink.com/

梵名은 Candra-prabha. 월광보살에 관한 出處를 보면 그 실체가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이에 대해서는 3종류의 解釋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 월광보살은 印度 古帝王으로 釋尊이 過去世에 보살행菩薩行을 닦을 때의 前身이라는 것이다. 《현우경(賢愚經)》 卷6, 《월광보살경(月光菩薩經)》, 《대보적경(大寶積經)》 卷80에 기재된 구절에 의하면 “此王具有大威德, 後施頭予勞度差婆羅門, 滿足檀波羅蜜行, 又稱月光菩薩”이라 한 것이 그 증거이다. 


두 번째는 佛世 時에 中印度 舍衛國 波斯匿王의 異名이라는 것이다.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 卷上(大八·八二五中)에 이르기를 “舍衛國主波斯匿王, 名曰月光”이라 한 것이 그 증거다.


波斯匿은 梵名이 Prasenajit이며 팔리어 이름巴利名은 Pasenadi, 邏犀那恃多王 혹은 囉洗曩喻那王이라고도 音譯하며 意譯할 때는 승군왕勝軍王․승광왕勝光王․화열왕和悅王․월광왕月光王․명광왕明光王이라 한다. 그는 中印度 憍薩羅國 國王으로서 대략 釋尊과 살다간 시기를 같이 하며 釋尊 敎團에는 大外護者였으며, 아울러 가시국(迦尸國)을 점유했으며 마갈타국(摩揭陀國)과 함께 大强國으로 분류되었다.  王은 초기에는 포악무신(暴惡無信)했다가 나중에 귀불(歸佛)한 뒤에는 누차 佛陀의 敎化를 입어 불법을 돈독히 믿고 일찍이 그의 夫人 마리가(摩利迦)와 問答하여 “人皆深愛自己”의 결론을 얻었다. 그 後에 釋尊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이 對話는 지금까지도 명성이 있다. 


세 번째는 月光菩薩은 월종보살月淨菩薩․월광편조보살月光遍照菩薩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月光菩薩은 東方 淨琉璃 世界 藥師佛의 右脅侍로서, 左脅侍인 일광보살日光菩薩과 함께 藥師如來의 兩大 輔佐를 구성한다. 藥師如來,  月光菩薩, 日光菩薩의 三尊 菩薩을 合稱하여 동방삼성(東方三聖)이라 한다. 이에서 비롯되었음인지 藥師如來는 日光․月光菩薩과는 본래 父子 관계였다는 전설을 낳기도 하며, 曾於電光如來法運中勤修梵行, 受電光如來咐囑分別改名爲醫王與日照․月照, 發無上菩提大願, 誓救六道一切有情出輪迴苦. 


佛法에서의 지위

‘月光遍照’는 佛法에서 靜定을 표시하며 明澈 清輝하여 大千芸芸眾生을 容攝할 수 있으며, 貪․瞋․痴의 三毒에서 逼惱함을 면탈케 한다. 藥師經에 이르기를 “于其國中, 有二菩薩摩訶薩:一名日光遍照, 二名月光遍照, 是無量無數菩薩之上首”라 한 것이 그 증거다. 藥師佛의 無量菩薩眷屬裡에서 月光菩薩은 日光菩薩과 함께 上首의 重要菩薩을 位居하여 兩人은 藥師如來의 正法寶藏을 秉持著한다.


菩薩形像

月光菩薩 尊像은 出現이 不多하나, 그 形相은 裝飾에서 一般的인 菩薩摩訶薩과 相差가 많지는 않다. 依修藥師儀軌布壇法所載, 月光菩薩은 身이 白色이며, 鵝座를 타며, 相好가 莊嚴하고, 頭에는 寶冠을 戴하며, 冠中에는 月輝가 있으며, 身에는 菩薩裝佩瓔裝飾을 穿하고, 手中에는 靑蓮花를 持하며, 蓮上에는 半月形이 있으며, 더러 是手托著一輪明月하기도 한다. 月光은 慈光을 비유하며, 清涼寧靜하여 黑暗에서 皎潔한 光芒을 發出하며 導邪하여 入正케 한다.


설명2 

月光菩薩(がっこうぼさつ)이란 仏教에서 薬師如来의 脇侍를 구성하는 一尊이며, 日光菩薩과 함께 薬師三尊을 構成하는 菩薩이다.


『薬師経』에 依하면 月光菩薩은 月光을 象徴하는 菩薩이며, 日光菩薩과 함께 薬師如来의 教説을 守하는 役割을 수행한다.


造形을 보면, 日光菩薩과는 대칭을 이루니, 즉, 日光菩薩이 右腕을 上한 左腕을 垂한 경우에는 月光菩薩이 左腕을 上하고 右腕을 垂한 姿形을 취하게 된다. 또, 그가 上한 손의 親指와 人差指로 輪을 作한 실례가 많다. 나아가 宝冠과 持物에 月을 表한 標幟를 表現하는 일도 많다.


胎蔵曼荼羅에서는 五髻의 童子形으로, 右手에는 未開敷蓮華, 左手에는 半月을 乗한 開敷蓮華를 지닌다. 密名은 ‘청량금강’(清涼金剛).


日本에서 그 실물은 奈良市 薬師寺 金堂의 薬師三尊像의 脇侍立像(銅造, 国宝)이 유명하다.



                    <심덕잠> 


淸代 文學家이자 시인. 字는 확사(確士), 號는 귀우(歸愚)이며 강소성(江蘇省) 장주현(長州縣)人이다.


일찍부터 詩로써 이름이 높았다. 과거에 거듭 실패하다 1739년 67세에 겨우 進士가 되었다가 뒤에 건륭제의 총애를 받고 예부시랑(禮部侍郞)까지 올랐으며 1747년 고령 때문에 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시작과 저술로 보냈다.


청대 초기에 왕사정(王士禎)이 시에 신운설(神韻說)을 제창한 데 맞서 소위 격조설(格調說)을 주창하니 이는 《예기(禮記)》에서 말하는 “온유돈후(溫柔敦厚)함이 詩敎”라는 도덕적인 문학관에 기반해 바른 골격 위에 음률의 조화를 중시하는 시 정신을 찾는다. 이를 위해 격조파는 성당(盛唐)으로 복고하자고 외쳤으며 明代 전칠자(前七子)라든가 후칠자(後七子), 淸代 심덕잠 일파가 이런 흐름을 대표한다.


《고시원(古詩源)》을 비롯해 《당시별재집(唐詩別裁集)》이나 《명시별재집(明詩別裁集)》과 같은 역대 시집 편찬에 주력해 이를 통해 그의 시론을 관철하고자 했다.


그의 시는 구수하고 담백하지만 도학적인 냄새가 나서 ‘성령설(性靈說)’을 주장하는 원매(袁枚)와는 대립하기도 했다. 다른 저서로는 《귀우시문초(歸愚詩文鈔)》, 《죽소헌시초(竹嘯軒詩鈔)》와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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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잠(沈德潛. 1673~1769)


字는 확사(確士), 號는 귀우(歸愚). 中國 清代 詩人이며 江蘇 蘇州 사람이다.


少年 시절에 이미 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성년이 된 후에 누차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니 이런 생활을 무려 40여 년간 했다. 그러다가 1738년, 66세 고령으로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고 이듬해 考中 進士했다가 1749년에 致仕했다. 이 기간 동안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와 기거주관起居注官, 내각학사內閣學士, 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그는 詩歌 理論 방면에서 격조설格調說을 주장하면서 錢謙益 이후 宋元詩를 중시하는 風潮를 반대하는 한편, 원매(袁枚)의 성령설(性靈說)과도 대립각을 이루었다. 編著에 《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이 있으며, 隋代 이전 古詩選集으로 《고시원古詩源》․唐詩 選集으로 《당시별재唐詩別裁》․唐明清 詩選集으로 《국조시별재집國朝詩別裁集》이 있으니 이들 선집에는 그의 詩歌 創作 觀念이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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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介】

沈德潛(1673~1769 ), 淸代詩人, 字確士, 號歸愚. 江蘇長洲(今江蘇蘇州)人. 沈德潛早年家貧, 從23歲起繼承父業, 以授徒敎館爲生, 過了40餘年的敎館生涯. 盡管處境並不如意, 但他並未棄學, 在奔波生活之餘, 勤奮讀書, 十六歲前已通讀《左傳》․《韓非子》․《尉繚子》等書. 他早年師從葉橫山學詩, 不久即以詩文名世, 曾自謂深得葉燮詩學大義, 所謂“不止得皮․得骨, 直已得髓”, 其自負可見一斑.


沈德潛熱衷於功名, 但就是這樣一個滿腹才學的讀書人, 竟然科舉屢不中, 正如其四十歲所作《寓中遇母難日》中自表:“真覺光陰如過客, 可堪四十竟無聞, 中宵孤館聽殘雨, 遠道佳人合暮雲.” 淒淸之意和不甘寂寞的心情溢於言表. 從22歲參加鄉試起, 他總共參加科舉考試十七次, 最終在乾隆四年(1739年)才中進士, 時年六十七歲, 從此躋身官宦, 備享乾隆榮寵. 官至內閣學士兼禮部侍郎. 77歲辭官歸裏. 在朝期間, 他的詩受到乾隆帝的賞識, 常出入禁苑, 與乾隆唱和並論及曆代詩的源流升降. 沈德潛這種受到皇帝“隆遇”的特殊地位, 使他的詩論和作品, 風靡一時, 影響甚大.


沈德潛對於文學的貢獻主要在於詩選和詩論, 其所選各種詩選, 保存較豐富的篇章, 流傳頗廣, 到今天還有參考價值. 《古詩源》收錄了不少古代民歌, 在當時頗難能可貴. 選本中的評語, 在品鑒詩歌藝術方面, 有一些精辟見解.


【詩論】

沈德潛年輕時曾受業於葉燮, 他的詩論在一定程度上受葉燮的影響, 但不能繼承葉燮理論中的積極因素. 他論詩的宗旨, 主要見於所著《說詩晬語》和他所編的《古詩源》․《唐詩別裁集》․《明詩別裁集》․《國朝詩別裁集》(後名《淸詩別裁集》)等書的序和凡例.


沈德潛強調詩爲封建政治服務, 《說詩晬語》開頭就說:“詩之爲道, 可以理性情, 善倫物, 感鬼神, 設敎邦國, 應對諸侯, 用如此其重也.” 同時提倡“溫柔敦厚, 斯爲極則”(《說詩晬語》卷上), 鼓吹儒家傳統“詩敎”.


在藝術風格上, 他講究“格調”, 所以他的詩論一般稱爲“格調說”. 所謂“格調”, 本意是指詩歌的格律․聲調, 同時也指由此表現出的高華雄壯․富於變化的美感. 其說本於明代七子, 故沈氏於明詩推崇七子而排斥公安․竟陵, 論詩歌體格則宗唐而黜宋.  他的所謂“格”, 是“不能竟越三唐之格”(《說詩晬語》卷上), “詩至有唐, 菁華極盛, 體制大備”, 而“宋元流於卑靡”(《唐詩別裁集·凡例》)實質上與明代前․後七子一樣主張揚唐而抑宋. 所謂“調”, 即強調音律的重要性, 他說:“詩以聲爲用者也, 其微妙在抑揚抗墜之間. 讀者靜氣按節, 密詠恬吟, 覺前人聲中難寫․響外別傳之妙, 一齊俱出. 朱子雲:‘諷詠以昌之, 涵濡以體之. ’真得讀詩趣味.”


但沈氏詩論的意義和明七子之說實際是不同的. 因爲他論詩有一個最重要和最根本的前提, 就是要求有益於統治秩序․合於“溫柔敦厚”的“詩敎”. 其《說詩晬語》第一節就說:“詩之爲道, 可以理性情, 善倫物, 感鬼神, 設敎邦國, 應對諸侯, 用如此其重也.” 這首先是從有益於封建政治來確定詩的價值. 他也講“其言有物”和“原本性情”, 卻提出必須是“關乎人倫日用及古今成敗興壞之故者, 方爲可存”, 如果“動作溫柔鄉語”, 則“最足害人心術, 一概不存”(見《國朝詩別裁集·凡例》). 所以, 按“詩敎”的標准衡量, 唐詩已經不行了. 在宗唐和講求格調的同時, 還須“仰溯風雅, 詩道始尊”(《說詩晬語》). 因而沈氏的論調, 和桐城派古文家雖推重唐宋八家之文, 同時卻認爲他們的思想仍不夠純正, 還須追溯到儒家經典的態度非常相似. 在詩歌的風格上, 沈德潛把“溫柔敦厚”的原則和“蘊藉”的藝術表現混爲一談, 主張中正平和․委婉含蓄而反對發露.  又說:“樂府之妙, 全在繁音促節, 其來於於, 其去徐徐, 往往於回翔屈折處感人, 是即依永和聲之遺意也.” (同前)


【詩歌和其他著作】

沈德潛的詩現存2300多首, 有很多是爲統治者歌功頌德之作. 《制府來》․《曉經平江路》․《後鑿冰行》等反映了一些社會現實. 但又常帶有封建統治階級的說敎內容, 如《觀刈稻了有述》, 一方面反映天災爲患, 民生塗炭的情景:“今夏江北旱, 千裏成焦土. 荑稗不結實, 村落虛煙火. 天都遭大水, 裂土騰長蛟. 井邑半湮沒, 雲何應征徭?” 另方面卻又勸百姓要安貧樂道:“吾生營衣食, 而要貴知足. 苟免餒與寒, 過此奚所欲.” 因此多缺乏鮮明生動的氣息. 近體詩中有一些作品如《吳山懷古》․《月夜渡江》․《夏日述感》等, 尚淸新可誦, 有一定功力.


沈德潛的著作, 除上述各選本外, 有《沈歸愚詩文全集》(乾隆刻本), 包括自訂《年譜》 1卷․《歸愚詩鈔》14卷․《歸愚詩鈔餘集》 6卷․《竹嘯軒詩鈔》18卷․《矢音集》4卷․《黃山遊草》1卷․《歸愚文鈔》12卷․《歸愚文續》12卷․《說詩□語》 2卷․《浙江省通志圖說》1卷․《南巡詩》1卷等. 



【天子故人沈德潛】

人家都說壽則多辱, 但沈德潛是個例外, 他不壽則多辱, 壽則多榮. 他家五代不仕, 父母早逝, 衣食不周;從青絲考到白發叢生, 流年皆不利, 連考17次, 名字都在孫山外, 四十歲時寫詩道:“真覺光陰如過客, 可堪四十竟無聞.” 何止四十, 到了六十, 依然不得一中. 不過他癡心不改, “還思假我年, 勿使終無聞.” 也許真是鍥而不舍, 金石可鏤吧, 六十六歲高齡的“沈老”一舉奪魁, 點中翰林院庶吉士.


一朝得中龍虎榜, 十年身到鳳凰棲. 自稱愛才如愛子的乾隆皇帝看到了白發蒼蒼的“沈老”, 憐才之心頓起, 挽著其手, 穿行於翰林院裏, 共相唱和. 在乾隆的算盤裏, 豢養著一個沈德潛是特別合算的事情, 一可謂敬老, 二可謂惜才. 會引領多少人活到老, 學到老, 考試到老啊. 夏天, 兩人唱和《消夏詩十首》, 冬天, 兩人圍爐對話, 切磋詩藝. 沈老爲父母乞誥命, 乾隆二話不說, 即命給三代封典, 並賜詩曰:“我愛德潛德, 淳風挹古初.” 皇帝題詞就不得了, 何況還特地寫詩相贈呢, 在當時, 這就引起“文藝界”大震動了, 當時歌詠其事的不知凡幾.


乾隆給了沈德潛極高的禮遇, 官職由少詹事升詹事, 再升值書房副總裁, 八十多歲退休以後, 還封給禮部尚書銜, 甚至到了九十歲還晉階爲太子太傅․太子太師;而且沈德潛年老歸鄉後, 乾隆多次下江南, 幾乎每次都要他來陪護, 都要唱和幾首詩. 乾隆十六年, 乾隆遊幸江南, 沈德潛趕到淸江浦迎駕, 乾隆賜詩曰:“玉皇案吏今煙客, 天子門生更故人.” 這簡直是光榮到極致了, 文人做到這程度, 恐怕是絕無僅有的罷.


但是, 皇權之下, 也許做“門生”可, 真的能夠做皇帝的“故人”嗎?沈德潛編了一部《國朝詩別裁》, 當然是“盛世”之“頌歌”, 並將此敬獻給乾隆, 不料, 這回馬屁拍到馬腿上了. 《別裁》將錢謙益列爲集中之首, 乾隆大爲光火. 本來呢, 錢謙益投歸了大淸, 算是自己人, 但乾隆敬“英雄”不敬“叛徒”. 沈德潛沒有摸透乾隆心思, 純粹從“藝術”出發, 沒有“政治標准”, 把錢某也列了進去, 引得乾隆大罵他是“老而耄荒”!


後來, 沈德潛又卷入已故舉人徐述夔的“文字獄”中. 事情是這樣的:徐某與“沈老”是老朋友, 徐氏寫有《一柱樓詩集》, 集中有“明朝期振翮, 一舉去淸都”的“反動口號”, 被人告發, 乾隆把這事當政治案子查處, 查到了沈德潛腦殼上, 因他的“故人”爲徐氏做了“傳記”, 這下乾隆老羞成怒, 大罵他“昧良負恩”, “卑汙無恥”. 乾隆於是決定把原先封給沈德潛的所有榮譽全部“追回”, 而此時的“沈老”已經入土多年, 怎麼辦?鞭屍吧, 乾隆命人把沈德潛的墳墓鏟平了.


皇帝與文人能夠做朋友嗎?沈老雖得高齡, 但也算是死得早! 要不, 再活幾年試試, 看會不會被抽筋剝皮.



沈德潛

章第八編第四章第一節:

沈德潛(1673~1769)字確士, 號歸愚, 江蘇長洲(今蘇州)人. 他生活年代較早, 但六十七歲才中進士, 官至內閣學士兼禮部侍郎, 爲乾隆帝所信重, 故其影響詩壇主要是在乾隆時代. 著有《沈歸愚詩文全集》, 並編選了《古詩源》․《唐詩別裁集》․《明詩別裁集》․《國朝詩別裁集》(即《淸詩別裁集》)等書. 沈德潛的詩論, 一般稱爲“格調說”. 所謂“格調”, 本意是指詩歌的格律․聲調, 同時也指由此表現出的高華雄壯․富於變化的美感. 其說本於明代七子, 故沈氏於明詩推崇七子而排斥公安․竟陵, 論詩歌體格則宗唐而黜宋.


《고시원古詩源》

中國 先秦 이후 隋代에 이르는 古詩選集. 淸代 沈德潛(1673~1769) 選編으로, 全書는 共히 14卷. 收錄詩作은 700餘首. 編者가 選詩하매, 主要하게 주목한 곳은 詩歌의 發展演變이며, 詩가 唐代에 이르러 極盛을 맞이했음을 인정하는 한편, 古詩 또한 唐詩의 源頭이라 그런 까닭에 定名하기를 《古詩源》이라 했다. 書中에 所錄한 것은 모두 唐 以前 歷代 代表性 作品이며, 詩後에 부친 評語는 不乏精當或具有啟發性的見解. 


沈德潛是一位有眼光的選家. 他在此書中選錄了大量古代歌謠和樂府敘事詩;並於建安詩人中特別推崇曹操․曹植;於兩晉詩人中特別推崇左思․陶淵明;於劉宋詩人中特別推崇二謝和鮑照;於北朝詩人中特別推崇庾信. 體現了他反對綺靡而注重詩歌社會內容的宗旨. 但書中也選錄了不少郊廟樂章, 而將南朝民歌視爲“鄭衛之音”摒去不收, 則反映了編者的局限.


《당시별재집唐詩別裁集》

中國 唐詩選集. 淸代 沈德潛 編選. 共 20卷, 選에는 作家 270餘人, 詩作은 1900餘首이며, 分體 編排했다. 此書는 비교적 影響이 큰 唐詩選本이다. 重點 選錄에는 王維․李白․杜甫․岑參․韋應物․韓愈․白居易․李商隱 等大家名家之詩다. 同時注重到不同時期․不同流派和不同體裁的作品, 大致反映了唐代詩歌創作的基本面貌. 書中에는 簡要한 評注가 있다. 海古籍出版社가 乾隆 二十八年(1768)에 근거해 增補重刻한 本에다가 校勘標點한 排印本이 비교적 通行한다.


《명시별재집明詩別裁集》

中國 明詩選集. 淸代 沈德潛․周准合編. 全書 12卷. 明初의 劉基․宋濂 等人에서 시작해 明末의 陳子龍․張溥 等人에 이르기까지 수록 作者는 340人, 詩는 1000 餘首 . 明末淸初의 明詩選本에는 《 明詩選》․《列朝詩集》․《明詩綜》 等이 있다. 沈德潛以爲它們各有偏頗, 於是參考各選本和詩稿, 重新選錄編定此書. 其編纂意圖和選詩標准便是他所提倡的“溫柔敦厚”的詩敎, 強調詩的“厚人倫, 匡政治”的功用, 以及尊盛唐․主格調的論詩主張. 乾隆 四年(1739)刻本이 있으며, 中華書局에서 1975 年 縮印本하고, 上海古籍出版社에서 1979年 排印本했다.


《청시별재집(淸詩別裁集)》

中國 淸代詩歌 總集. 原名은 《국조시별재집國朝詩別裁集》, 沈德潛 編選. 原選本은 36卷, 入選 996人, 3952首詩. 乾隆 十九年(1754)에 시작해 二十二年에 完成했으며, 二十四年에 初刻하고, 二十五年에 重新修訂했다. 二十六年에 增訂本 刻成하고, 同年 十二月에 乾隆帝가 命하여 南書房가 刪改重鐫하여 32卷으로 만들고, 錢謙益․吳偉業․龔鼎孳 等人이 詩刪去에 참여했다. 書前으로 《例言》가 있고, 作者名下에 小傳이 있으며, 詩後에 評語가 있다. 香奩詩․遺老詩一般不選. 以乾隆二十五年36卷本較完備. 此本選有少數揭露統治階級內部矛盾․批評明末弊政․哀慟民間疾苦的作品, 相對缺少暴露康․雍․乾時期社會矛盾之作. 此集在一定程度上反映了淸初到乾隆的詩歌面貌. 中華書局에서 1975年 影印 乾隆二 十五年 36卷本 等이 있다.



                                     <平田篤胤> 


2005.05.28 23:58:35


히라타 아쓰타네(평전독윤<平田篤胤>)


1776.9.25~1843.10.4 : 안영(安永) 5~천보(天保) 14년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주창한 에도시대 말기 일본 사상가로, 천황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존왕파(尊王派)에게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한다. 


그는 號를 이부키노야(氣吹舍) 혹은 마스게노야(眞菅乃屋)라 했다. 아버지는 出羽國 아키타(秋田) 번사(藩士)인 大和田淸兵衛 平田祚胤이다. 祿高 100석인 平田祚胤에게 그는 넷째 아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하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려서는 아사미 게이사이(?見絅?.1652~1712)의 학풍을 잇는 中山靑我에서 한적(漢籍)을 배우고 여기에서 國學을 닦음으로써 나중의 古道 硏究의 실마리를 열게 된다. 


20세에 탈번(脫藩)에서 에도(江戶)로 가서 苦學한다. 이후 그의 생활 대부분은 에도를 근거로 하게 된다. 서기 1800년, 관정(?政) 12년, 25세에 備中國 마쓰야마(松山) 藩士인 병학자(兵學者) 히라타 아쓰야츠(平田篤穗)의 양자가 되어 藩主板倉家에서 봉직한다. 


享和 3년까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8세 때 『呵妄書』(1803)를 써서 유학자인 다자이 슌다이(태재춘대<太宰春台>. 1680~1747)를 비판하고, 1804년(文化 원년)에 眞菅乃?를 개업하고,그리고 本居宣長의 학문을  배웠으며 그 뒤 근면하게 학업에 힘써 『新鬼神論』『古道大意』『俗神道大意』『西籍槪論』『出定笑語』『伊布伎於呂志』『志都乃石屋』『靈の眞柱』를 완성했으며, 그런 다음에도 『王?』『古史徵』『古史傳』을 구상하게 된다。


『靈の眞柱』 간행은 널리 노리나가(宣長) 門의 주목을 끌게 된다. 이 저술에는 服部中庸의 영향도 있다. 그 뒤에 그의 문하는 에도의 下町을 중심하고 해서 서서히 관동(關東)으로 파급되게 된다. 그 뒤에도 저술을 기획하고 민속 기층으로 파고들려 했으나 幕府에 의해 秋田으로 추방됐다.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그는 불교와 유교가 습합된 神道를 비판하고, 이에 따라 나중에는 신불(神佛) 분리 혹은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발전해 나간다.


우창동마(羽倉東磨)   강부진연(岡部眞연)  모토오리 노리나가<본거선장<本居宣長>. 1730~1801)과 함께 국학(國學)  4대인(大人)이라 일컬어진다.


원래 주자학자였으나 신도(神道)로 전향해 모토오리 노리나가(본거선장<本居宣長>) 제자임을 자칭했다. 모토오리는 일본의 초기 전통과 문화에서 일본 정신의 진정한 표현을 찾으려고 애쓴 고쿠가쿠(국학<國學>)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사람. 


모토오리 학파에 비해 현저히 신비적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된다. 그에 따라 말년에 접어들수록 그는 천황을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앉혀놓고 쇼군(將軍)이라는 공직을 통해 일본을 다스린 도쿠가와(德川) 정권을 더욱 더 비판하게  된다. 히라타는 이런 정치적 활동 때문에 고향에 유폐된 채 여생을 보냈다.


히라타는 일본이 신들의 땅으로서 당연히 우월성을 갖고 있다는 신념을 열성적으로 설파했다. 그는 신들이 일본의 왕통을 통하여 일본에 '참된 길'을 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국수주의와 외국 혐오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문으로 번역된 책을 통해 알게 된 서양과학의 일부 요소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신학저서의 몇 가지 측면을 자신의 신도 신학에 적용했다.


이런 성향을 대표하는 그의 저작으로 《적현태고전(赤縣太古傳)》이 있다. 적현(赤縣)이란 중국의 별칭이며 '태고전'(太古傳)이란 원시 神道 이야기를 뜻한다.  여기서 히라타는 고사기에 사용되고 있는 중국 문헌자료를 색출함으로써 고사기의 신화전설을 중국고대의 종교 사상 신앙과 역사적으로 대응케 하고 양자의 비교검토를 시도했다. 이 점은 동아시아적인 규모의 결론을 기획하고 있다고 하는 점은 지금도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에 대한 일본 국내의 주석 작업이 시도되는데 그 주인공은 에도 중기의 尾張藩 河村秀根 부자였다. 이들은 <<일본서기집해>>(日本書紀集解)를 완성하는데 이는 한자로 씌어진 일본서기에서 어떤 기술이 중국문헌에서 따온 것인가를 각각 주기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이 똫란 일본고대의 신화전설에 대해 중국고대의 종교사상신앙을 대응케 하고 양자를 비교검토하기 위한 기초문헌자료로서는 지금도 훌륭한 성과로 평가되어도 좋다.


河村秀根이 尾張에서 일본서기 주석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명화(明和) 2년(1765) 무렵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宇佐見惠가 《왕필주노자도덕경(王弼注老子道德經)》을 간행한다(명화 7년<1770>)).


河村秀根 부자와 宇佐見惠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에도기 중국학의 문헌 실증주의가 피크를 맞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중국학 연구 성향을 보면 압도적인 유학 일변도라고 할 수 있다. 河村 부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日本書紀集解 주석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그런 특성은 용이하게 드러난다.


골수 유학자인 河村 부자와는 달리 국학자로서 신도학 연구자인 平田篤胤은 어떤가 하면 유학자들이 경시하는 주술 종교 관계 문헌, 즉,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책에 대해서도 훌륭한 감수성을 보이고 있다. 즉 記紀 시대와 그 찬자들이 지니고 있던 주술종교적 神經의 세계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이 그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篤胤의 중국학을 대표하는 《적현태고전》에는 다수의 위서(緯書)류 문헌이 인용되고 있고 나아가 《노자중경(老子中經)》이나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 혹은 《악독명산기(岳瀆名山記)》와 같은 도교 관계 문헌이 구체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1873.10.3~1961.12.4(明治 6~昭和 36)


일본어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면 '쯔다 소우키치'다. 歷史學者. 본명은 津田親文이다. 기후현(岐阜縣) 米田東?井의 士族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7년(明治 20) 國民新聞 창간호의 田口卯吉 논설 「國を建つるの他は幾何ぞ」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나중에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敎) 방어정치과(邦語政治科)에 입학해 1891년(明治24)에 졸업한다. 澤柳政太郞에게 寄寓했다. 그 뒤 富山縣 本願寺 別院 部屬學敎 교수로 일하다가 상경해 시라토리 구라키치(백조고길<白鳥庫吉>) 후원을 받는다. 또 中等敎師를 군마현립중학(群馬縣立中學) 치바현립중학(千葉縣立中學) 宇都宮中學 치바중학교(千葉中學校) 교사, 독일협회중학교(獨逸協會中學學校) 교사 등으로 일한다. 교과서 『신찬동양사(新撰東洋史)』『국사교과서(國史敎科書)』 출판에 종사한 일도 있었다. 


1907년(明治40)에는 만선지리역사조사실(滿鮮地理歷史調査室) 연구원이 되어 본격적인 연구조사 생활을 시작하다가 1918년에 와세다대학 교수에 취임한다. 


1939년 東大法學部 東洋政治思想史講座에 출강했다가 황실 존엄성을 모독했다는 공격을 받고 이듬해인 1940년 「神代史の硏究」를 비롯한 4종 저서가 발매금지되고 出版法 위반으로 기소되고 법적 투쟁 끝에 1942년 有罪가 확정된다. 이에 불복한 그는 상고해 재판을 벌여 1944년 면소(免訴) 판결을 받는다. 


태평양전쟁 말엽에는 공습을 피해 平泉이란 곳으로 소개(疎開)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뒤인 1950에야 동경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1947년에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회원(우리의 대한민국학술원에 해당)이 되고 1949년에는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수훈(受勳)했다. 


1951년에는 문화공로상(文化功勞賞)을 수상했다. 실증주의적 사학에 기초해 신화를 부정하는 견해를 지녔으면서도 천황제에 대해서는 줄곧 옹호론을 제창해 마르크시즘 사관 학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는다. 사후에 津田左右吉全集이 발간됐다.


【학문 자취】 

1913년 고증학에 기초를 둔 「朝鮮歷史地理」를 출판한다. 이어 같은 해에 스승인 시라토리(白鳥)를 비판하는 형식을 띤 논문을 기초로 「神典の解釋」을 추진해 『神代史の新しい硏究』(1913)에 발표하고,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1919),이의 개정(改訂)판으로서 『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1924)를 간행했으며,『神代史の硏究』(1924)를 거쳐 『日本古典の硏究』를 보정(補正)했다. 물론 그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는 『神代史の新しい硏究』 속에 보인 주된 틀은 변함이 없으나 자기비판을 거듭 가하고 있다. 이런 업적은 학문적인 고증에 힘쓰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기기(記紀), 즉,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황실(皇室) 유래를 추적한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기에는 정치적 작위가 감지되고,전설이나 민간설화로 윤색(潤飾)이 더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라토리(白鳥)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듯이 시라토리와는 견해가 다른 점이 많다. 그 중 하나로 『文學に現はれたる我が國民思想の硏究』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저작에서부터 『神代史の新しい硏究』가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지향(志向)】

쓰다(津田)의 지적이면서 정적(情的)인 관심은 고전적(古典的), 현대적 지식, 藝術의 흡수에 탐욕하는 것으로써,항상 개성적 비판력 육성에 힘써 문학청년적인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니며,광기(狂氣)와 풍아(風雅) 사이에서 살고 있다. 메이지(明治) 계몽사상가의 정신을 계승해 주체적 비판정신에 의해 정치비판적인 성향을 지니며,그것이 독자성을 지닌 요인이 되었다. 쓰다는 유신사(維新史)에 대한 관심 또한 매우 강해 친번(親藩)의 영지(領地)에서 태어난 본가인 佐幕派적인 사관에 서 있다. 따라서 유신사를 쓸 뜻을 계속 표명했다. 그의 국민사상 연구는 존왕(尊王) 사상은 결코 倒幕 사상은 아니었다고 단정한다. 그는 자아의 존중으로 나아가 자아를 바깥에서 규제하는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판,전근대적 도덕과 봉건사상에의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전제(專制) 관료주의 비판,절대주의적=비입헌적 정치 비판,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은 군국주의적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 성향을 지닌 것으로 나아가고,국민(國民) 민중(民衆)의 자주적 주체성의 입장에서 서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변화발전의 인식은 일본인 고유의 국민성을 부정하고 근대 서구문화의 수입수용을 意義 짓게 하며,사회문제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외래사상이라고 일괄해 傳하는 데 반대하고,취해야 할 점은 취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부인문제와 가족제도에 대해서도 오래된 것을 비판하고,인습적인 자연-예술관을 비판하고,일본의 전통예술에 대한 불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부정적 중국관(中國觀)과, 생활력이 약하다고 하는 조선관(朝鮮觀)을 지녔으며, 열등한 오키나와(忠繩)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또 기성 불교 교단에 대한 비판은 강하기는 하지만 종교사상에는 능통해 있다. 그런 입장에서 국민사상을 읽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쓰다사학의 의의】

쓰다는 천황제를 합리화하고 근대화해서 황실(皇室)의 존속을 염원하고 사회주의를 힘으로써 탄압하는 것을 반대한 자유주의적 역사가였다. 그는 마르크시즘에는 반대했으나 사상의 공존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사상의 고취를 비판하고,제정일치론(祭政一致論)을 비판하며,아시아주의에 비판적이었고 시국 편승을 경계했다. 그 결과 쓰다는 천황 불친정(不親政)이라는 고발을 받았다. 그의 天皇 不親政을 일본의 전통으로 삼는 견해를 대역(大逆) 사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대(古代)와 상대사(上代史)에 관한 저서를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다(皇室ノ尊嚴 冒瀆)」는 이유로 岩波茂雄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쓰다는 재판투쟁을 통해 자신은 불경(不敬)스럽기는커녕,天皇을 경애(敬愛)하고 있다고 힘써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전후가 되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쓰다 사학의 본령이다.


〔참고문헌〕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硏究』1972,岩波書店. 



                      <신농본초경이 최고품으로 꼽은 약초 인삼(人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현존하는 중국 가장 오래된 전문 본초학서다. 그 성립 연대는 이론이 분분하나 기원전 1세기 무렵 전한 말기가 아닐까 한다. 본초(本草)란 글자 그대로는 근간이 되는 풀이란 뜻이니, 예서 본초는 말할 것도 없이 약초를 말한다. 신농(神農)이라는 말이 들어간 까닭은 그 저자가 神農으로 설정됐기 때문이니, 신령스런 농사꾼이라는 액면 글자가 시사하듯이, 신화상 인물인 그는 농업을 일으킨 시조로, 특히 병 치료에 맞는 약초를 찾아 이것저것 맛보느라, 독물에 중독도 되고 했다고 한다. 이런 神農이라는 신화상 인물에 그 저자를 가탁한 것이 신농본초경이다. 


약초로서의 '본초(本草)'라는 말은 《한서· 평제기(漢書平帝紀)》에 가장 빠른 용례가 검출된다. 하지만 本草라는 말에 끌려 반드시 초본 식물만을 약물 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부 광물질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약물을 통칭할 때 흔히 本草라고 했다. 그렇지만 본초가 약물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신농본초경》은 그 본래 모습이었을 원서가 산일(散佚)되고 현재 통용되는 판본은 이곳저곳에 산발적으로 인용된 글들을 모아 놓은 소위 집록(輯錄)이다. 이 집록에 수록된 약물은 총 365종이니, 이 숫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1년 365일을 염두에 두었음이 확실하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풀 종류인 초(草), 곡물 종류인 곡(穀), 미곡 종류인 미(米), 과실 종류인 과(果), 나무 종류인 목(木), 곤충 종류인 충(蟲), 물고기 종류인 어(魚), 집에서 기르는 짐승인 가축(家畜), 광물질들인 금석(金石) 등을 포괄한다. 보다시피 순전한 식물성 외에도 동물성도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본초경은 그들 약물이 인체에 작용하는 기능, 다시 말해 약효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따라 上, 中, 下 3품(三品)으로 세분한다. 당연히 효능이 가장 뛰어난 것을 상품, 그 중간인 것을 중품, 가장 낮은 것을 하품으로 배속한다. 


<중품으로 분류한 말벌집 봉방(蜂房)>


上品은 120종이다. 上品은 독성이 없는 무독(無毒)이면서, 강장 역할을 하는 자보강장약(滋補强壯藥) 계열이니, 오래도록 복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해서 인삼(人蔘), 감초(甘草), 구기(枸杞), 대추인 대조(大棗), 아교(阿膠), 거북껍데기인 구갑(龜甲) 등이 속한다. 지금도 한국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중에 대추를 제일로 치는 전통이 이 신농본초경과 무관치 않다. 거북을 중시한 까닭은 그것이 미래를 예언하는 신령스런 기운이 있는 동물로 간주된 전통과 밀접하다. 그 옛날에는 거북 등껍질로 점을 쳤으니 말이다.  


인삼은 언제나 최고의 본초로 쳤으니, 관건은 그것이 어디에서 생산됐느냐였다. 역시 고려인삼이 최고였으니, 단군조선 이래 한민족 최고 수출품은 갤럭시도 아니요, 현대차도 아니며, LG전자 에어컨도 아닌 고려인삼이다. 


中品 역시 120종인데, 이 역시 무독(無毒)하기도 하지만, 혹 독성이 있는 유독(有毒)도 포함하니, 병을 억제하고 허함을 보강하는 억병보허(抑病補虛) 작용이 있다고 간주된 약물이 포진한다. 그 실례로 보면 당귀(當歸), 황잠(黃岑), 마황(麻黃), 후박(厚朴), 백합(白合), 매실(梅實), 봉방(蜂房·벌집) 등이 있다.


요새도 우리사회에서는 벌집을 따서 그걸 달여 먹으면, 신경통에 좋다 해서 인기가 제법 있는 편인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신농본초경에 닿는다. 벌집 잘못 건드려 목숨까지 잃는 일도 더러 있으니, 조심하기 바란다.  


下品은 125종인데, 유독(有毒)해서 오래도록 복용할 수는 없다. 독성이 강한 까닭에, 그 효능은 더하다고 봐야 한다. 한열(寒熱)을 제거하고 쌓인 응어리인 적취(積聚)를 없앤다. 감수(甘遂), 오두(烏頭), 파두(巴豆), 도인(桃仁), 구인(蚯蚓) 등이 있다. 감수는 '개삼수'라 검색하면 그 실체를 엿보며, 오두와 파두는 식물이고, 도인은 복숭아나 살구씨에서 빼낸 속살이며, 구인은 지렁이나 거머리 종류다. 


한반도 고고학 조사성과를 보면, 복숭아씨는 대부분 드릴 같은 것으로 뚫어 속이 파낸 흔적이 보인다. 왜인가? 그 속을 파내서 약물로 썼기 때문이다. 


후백제 건국시조 견훤은 하필 그 아버지가 지렁인가? 그것이 영물이기 때문이다. 영물인 까닭에 약물로서의 효능도 있었던 것이다. 견훤을 깎아내리고자 아버지를 지렁이로 만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각 품별 분류에는 순서가 있어 옥석(玉石)을 제일로 치고 그 다음에는 초목(草木)과 충수(蟲獸), 과채(果菜)가 뒤따르며 미식(米食)은 맨 나중에 온다. 늘 먹을 수 있는 것은 뒤로 돌린 반면 희귀품을 앞세웠음을 알 수 있다.


《神農本草經》이 문세(問世)하자, 그 활용이 널리 퍼져 점차 그에 대한 추가 연구 확충도 이뤄진다. 예컨대 감숙성(甘肅省) 무위(武威)에서 출토된 東漢시대 간독(簡牘)에서는 근 100종에 달하는 약물을 기재했으니, 개중 20종은 현존 《신농본초경》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神農本草經》은 약물학서로 권위를 절대화함에 따라 각종 주석본 혹은 증보판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류에서 가장 저명한 것이 바로《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본초경집주)라고 하는 중국 남조 시대 양(梁)나라 도사(道士) 겸 명의(名醫)인 도홍경(陶弘景·452~536) 저작이다. 


<하품으로 분류한 복숭아씨 도인(桃仁). 충남 공주 공산성 백제목곽고 출토>


이 《本草經集注》는 글자 그대로는 신농본초경을 집주했다는 뜻이니, 신농본초경을 분석 해설한 후대 책들을 종합 완성했다는 뜻이다. 이에는 당연히 도홍경 본인의 해설도 들어간다. 도홍경은 이 작업을 하면서 편작을 비롯한 역대 중국사 저명한 의사 전기인  《명의별록(名醫別錄)》이라는 의서에 나오는 약물 365종을 덧보탰다. 이렇게 해서 이 도홍경 본 《신농본초경집주》에는 기존 신농본초경 365종을 합하여 730종 약물이 수록되기에 이른다.


이 《本草經集注》는 도홍경 생몰 연대를 고려할 때 대략 5세기 말에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전 7권이다. 그 편술 특징을 보면 약물을 자연계 속성에  따라 모두 6종류(六類)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1. 옥석류(玉石類)

2. 초류(草類)

3. 목류(木類)

4. 충수류(蟲獸類)

5. 과채류(果菜類)

6. 미식류(米食類)


가 그것이니 이것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이후 중국 약학의 1차 집성으로 평가된다. 


홍경은 약용식물 산지와 채집 시기가 치료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거니와, 예컨대 마황(麻黃)은 추계(秋季)에 채집해야 약효가 가장 뛰어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식물의 생리와 기후간 상관관계도 인식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분류에 있어 약물 본래의 효능에 의해 약물 품목을 나누어 玉石, 草, 木, 蟲, 獸, 果, 菜, 米食의 5가지로 분류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동식물 분류의 중대 발견이라 평가된다.

   

이러한 분류 방법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예컨대 唐代에 나온 《신수본초(新修本草)》, 宋代의 《중수경사증류본초重修經史證類本草)》, 明代의 《본초품회정요(本草品匯精要)》 등이 모두 이 방식을 따른다.


본초경집주 출현 이후 唐 高宗 현경(顯慶) 4년에 편찬한 《新修本草》가 출현한다. 이 의서는 《본초(本草)》, 《약도(藥圖)》, 《도경(圖經)》의 세 부분, 도합 54권이다. 약용 동식물로는 850종을 취급하니 집주에 비해 114종이 추가됐음을 알 수 있다. 《藥圖》는 본초경집주에도 있었으나 실존되고 현재는 그 잔권만이 겨우 남았을 뿐이다. 


<지렁이도 약물..독성이 강하다 해서 하품으로 분류한 구인(蚯蚓)>


《本草經集注》

7卷, 梁 陶弘景 撰, 約成書於5世紀末. 此書는 《神農本草經》을 基礎로 삼고 補入 魏晉年間 諸 名醫하여 增添한 內容(卽《名醫別錄》)으로, 加上 陶弘景 本人의 注釋하여 成했다. 全書 共收 藥物은 730種 이며 其中《神農本草經》 365種, 《名醫別錄》 365種이다. 書前 首에다가 序錄과 作者 釋文을 들고 其下는 藥物 各論이며, 諸藥은 分隸하여 玉石․草木․蟲獸․果․菜․米食 6類에 예속시키고, 나아가 把基原不明或已經不用之藥歸入“有名未用”類했다. 此分類法以藥物自然屬性分類, 比《神農本草經》的三品分類法先進. 在此書之前, 世間流傳的《神農本草經》․《名醫別錄》․內容均較混亂, 《本草經集注》采用統一體例整理各藥條文, 成爲早期經典本草的範本. 陶弘景注文及其創設的“諸病通用藥”․“七情表”等, 豊富了早期藥學理論, 並方便臨床用藥. 書中用朱筆寫《本經》, 墨字書寫《名醫別錄》, 個人見解則用小字注於藥物正文之後, 使全書出處分明, 源流清晰, 後世藥書多繼承這種嚴格標注文獻出處的傳統, 使中國本草學文獻脈絡明晰. 作者在注文中補充大量有關藥物形態․鑒別․産地․效用等內容, 對確定藥材品種, 保證用藥安全均有重要意義. 另外, 書中補充了眾多藥物制劑․炮炙․采收․劑量等資料, 又在序錄中設“解百藥及金石等毒例”, 此爲最早之中藥解毒專篇. 總之, 陶弘景《本草經集注》所創立的本草分類法及新體例, 多爲後世本草著作所仿效. 


《本草經集注》 原書는 僅存 殘篇하며, 그 主要 內容이 《證類本草》에 수입된 까닭에 至今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現재는 日本 森立之 所輯 《重輯神農本草經集注》七卷(1847年)․1961年 尙志鈞이 輯한 《本草經集注》가 傳世한다.



도교의 3대 경전 결집이다. 


정확히는 3대 경전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통 경전이라 하면 개개 경전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3대 경전은 경전들을 모아 분류하고 편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교에 빗대어 말한다면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첫째, 무상비요(無上秘要)이니, 


이는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재위 561~578)이 통도관通道觀 학사學士에게 명해 편찬케 했다. 《구당서 경적지(舊唐書經籍志)》와 《신당서 예문지(新唐書藝文志)》 및 《송사 예문지(宋史藝文志)》에  의하면 72卷이 현존한다고 했다. 현존 《정통도장正統道藏》 태평부太平部 目錄에는 100권이다. 하지만 결실권이 있으니 1~2권, 10~14권, 36권, 58~64권의 총 31권이 그것이므로 실제 현존하는 권수는 69권이다. 따라서 원래는 100권이었는데 唐宋에 이르러  72권이 남은 셈이 된다. 그러다가 明 정통(正統) 연간(1436~1449)에 《도장(道藏)》을 찬술하면서 다시  3권이 결실됐다. 


무상비요는 각 도교 경전을 주제에 따라 삼통사보(三洞四輔)로 분류한다. 일본 도교학 연구자 吉岡義豊에 의하면 이에 수록된 도서(道書)는 魏晉南北朝 시대에 편찬된 것들로 종류는 287종을 헤아린다. (吉岡義豊, 《道敎經典史論》 제3편 참조)


둘째, 운급칠첨(雲笈七籤)이니, 


이는 120권이다. 北宋시대 황제 중에서도 가장 도교를 열렬히 신봉한 이가 진종(眞宗). 벌써 시호에서 도교 냄새가 물씬 하다. 신라시대 眞자 돌림 시호 혹은 존호를 지닌 왕들, 예컨대 眞興, 眞智, 眞德, 眞聖 등이 모두 도교식 시호 혹 존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운급칠첨은 진종황제 천희(天禧) 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인 1019년에 완성됐다. 


셋째, 정통도장(正統道藏)이니, 


여기서 정통이란 오소독스, orthodox라는 의미가 아님을 유념토록. 물론 이 정통도장이 국가에서 공식 편찬한 것이니 오소독스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지 않다고 함은 문제가 없지 않겠으나, 이에서 정통은 그것이 편찬된 연대를 말함이니, 명나라 연호 중 하나인 正統을 가리킨다. 즉, 정통도장이란 도장(道藏), 즉, 불교의 대장경에 견주어 도교 경전들을 수합하고 간수하고 갈무리한(그래서 藏이다) 경전집 중에서도 정통 연간, 정확히는 정통 10년, 서기 1445년에 편찬된 도장이란 뜻이다.  정통은 명나라 영종(英宗)이 사용한 연호이다. 


도교 일체경(一體經)인 이 정통도장은 전체 5천48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왜 이처럼 분량이 늘어났는가? 중국사에서 도-불 쟁투는 몇 차례 피를 불렀거니와 교리 논쟁마다 도교가 거개 졌다.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도교측의 일 방편이 바로 쪽수 늘이기, 즉, 숫자 늘이기였는데, 불교측의 대장경보다 많은 경전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알맹이도 없는 쭉정이 같은 경전이 늘어나 이처럼 팽대한 분량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이 정통도장에 이어 같은 명대 만력 35년(1601)에 속간된 도장을 속장(續藏)이라 하는데 이는 그때까지 중국 도교 경전을 총합한 금자탑이다. 상무서국 등지에서 영인돼 나온 도장은 정통도장에다가 속장을 합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은 무엇을 텍스트로 해야 하는가? 정통도장? 이거 다 보다간 늙어 죽는다. 편찬 연대로 보나, 거기에 수록된 텍스트의 원전 성립연대를 보나, 모든 면에서 도교 교리의 핵심은 운급칠첨이다. 


다행히 이 운급칠첨은 최근 중화서국에서 아주 훌륭한 전 5권짜리 點校本이 나왔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 서지사항은 이렇다. 나는 이것으로 도교를 공부한다. 


이 도교와 관련한 내 경험은 이렇다. 도교와 동양의학, 특히 신라사와 관련한 이런 논문들을 최근에 이곳 저곳 학술지와 학술토론회 등지에서 썼으니, 그때마다 압도적인 반응이 신라에 무슨 도교라는 핀잔이 압도적이다.


그러면서 曰, 신라의 仙은 신라 고유의 신선사상이라나 어쨌다나? 仙이 신선사상이 아니면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귀란 말인가?


한데 아주 더 이상한 점은 신라의 仙이 중국 도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라 고유사상이라고 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도교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는 사실이다. 도교가 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신라의 仙은 중국의 도교와 다르다고 강짜를 부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최근 전질 48책짜리 도장 전질을 구입해 놓고는 펴볼 엄두는 못내면서 장서용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자위한다. 뭐 어때? 폼나는 거 하나 꽂아두는 것도 괜찮지?


저들 셋을 상술한다. 


무상비요(无上秘要, 無上秘要)


《無上秘要》는 目前에 所知하는 最早한 道教 類書다. 北周 武帝 우문옹宇文邕 칙찬敕纂이다. 기록에 근거할 때, 宇文邕은 일찍이 七次에 걸쳐 召集 道士․名僧 및 文武百官하여 儒․釋․道 三教의 優劣을 量定하게 했다. 力主道教居儒․釋之上하니 因하여 群臣․沙門이 反對하여 未果라. 後에 定議하여 儒教를 머리로 삼고 道教를 다음으로 삼으며 佛教를 맨 뒤로 삼았다. 다만 佛教徒는 이에 異議를 제기하여 僧道의 論爭은 空前의 激烈함을 빚었다. 이에 建德 三年(574)에 佛․道 二教를 並廢하고 勒令으로 僧人․道士를 還俗케 했다. 하지만 황제 자신은 崇信 道教한 까닭에 下詔하여 通道觀를 세우고 學士를 두었으며, 著名 道士․僧人 百二十人을 골라 通道觀에서 研究 《老子》《莊子》《周易》케 했다. 나아가 道士 王延에게 命하여 三洞 經圖를 校理케 하고 《주낭경목珠囊經目》을 撰하게 했다. 《續高僧傳․釋彥琮傳》에 이르기를 建德 六年에 齊를 멸망시킨 後에 宇文邕은 通道觀 道士의 幫助 下에 “自纘道書, 號《無上秘要》”라 했다.


《無上秘要》는 原來 100卷 292品이다. 《舊唐書․經籍志》《新唐書․藝文志》《通志․藝文略》《宋史․藝文志》는 모두 七十二卷이라 著錄하고 《崇文總目》에는 겨우 一卷이라 著錄했으며, 衢本 《郡齋讀書志》는 95卷이라 하면서 아울러 이르기를 “右題曰元始天尊說, 《藝文志》止七十二卷, 不知何時析出二十三通也.”라고 했다. 이로 볼 때 이미 唐代에 殘缺이 있다가 兩宋에 이르러 先後로 七十二卷本․一卷本․九十五卷本이 傳世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明 《正統道藏》 太平部에 所收한 것은 그 殘本이라 모두 67卷이며 實際는 33卷이 결실되었다. 나아가 現傳하는 諸卷 中에도 缺品이 발견된다. 此本은 宋代 諱가 많아 宋本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書前에는 目錄이 있고 100卷으로 마무리를 지으며, 모든 缺卷․缺品에는 品目을 기록하지 않았다. 正文은 一卷 一品이 있는가 하면, 一卷 數品도 있고, 數卷에 걸쳐 一品에 지나지 않는 곳도 있다. 그 외 《보안당비급속집寶顏堂秘笈續集》《총서집성초편성叢書集成初編》《성당총각雪堂叢刻》은 該書 一卷 殘本을 수록했다.


上述한 刊本 外에 일찍이 敦煌 唐寫本이 있다. 北珍 二十卷末 題識에 근거할 때, “開元 六年 二月八日, 沙州 敦煌縣 神泉觀 道士 馬處幽가 侄인 道士 馬抱과 더불어 一奉으로 七代 先亡 및 所生 父母․法界蒼生을 위하여 此經을 敬寫하여 供養한다”고 했다. P.2821은 寫本 目錄에 二百九十二品目을 詳列하고, 아울러 分義類品例 四十九科하며, 闡釋編纂次第之義理했다. 이에 근거할 때 原書 結構 및 《正統道藏》本에 결락된 品目을 알 수 있다. S.80은 《正統道藏》缺卷(卷十)이다. 


該書는 《大道品》에서 시작해 《洞冥寂品》(寫本作《歸寂寂品》)으로 마감하며, 三洞四輔의 精要를 采擷하여 分類 編纂했다. 그 內容은 道教 宇宙觀․生死觀․倫理政治 主張․神仙信仰 및 修道成仙思想․規則․方法 等의 諸 方面을 망라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크게 나눌 수 있다:


第一部分은 道․氣․天地人物․劫運․帝王․洲國․德政․慎兵․循物喪真․善惡․眾難․諸患․陰陽交隘을 포괄하며, “至道無形, 混成爲體”, “變無化有, 皆從氣立”;“氣之所分, 生天生地”, “眾類推遷, 循環不息”;“劫運交馳, 部域弘廣”, “惟王建國, 光宅天下, 布德爲政, 在於慎兵”;“人之稟生, 各有崖限, 違分廣求, 則乖理傷性”을 闡發하고, 善惡自招․運會吉凶 等 思想에 미치며, 大道流行과 立教의 根據를 설명한다.


第二部分은 神仙信仰을 陳述하고, 天曹科第․地司考錄․水官料簡 等 三界 賞罰․靈官升降․眾聖會議․生死․地獄․聖應和光․真靈位行․仙尊本跡 및 眾聖冠服儀駕․歌樂宮治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第三部分은 道教 經籍 圖文을 서술하며 포괄하는 내용은 三寶真文․天瑞地應․符圖章頌이며, 經文 出所․經符 異名․經德․經文 存廢․遇經 宿分․傳經 法度 및 次第 等 事項이 언급된다.


第四部分은 修煉 方法을 말하는데, 包括 내용은 投簡 通靈․事師 請業․修道 冠服․誦經․誡․齋․寶經靈衛․封經秘所․仙相․業報․攘災謝過․轉禍成福․入道防累․修道禁忌․專誠柔弱․山居違俗이며, 似及沐浴․入室․明燈․燒香․叩齒․咒請․起居․思五帝․修步罡․存五行․拘三魂․制七魄․安形神․守三一․療眾病․去三屍․寶一身․履三福․盡忠孝․布功德․發心啟願․辟穀․服氣․咽雲牙․餌玄根․行胎息․延老住年․徹視聽․明六通和靈藥神丹諸術.


第五部分이 包括하는 내용은 觀試․朝謁․得道人名․升仙靈所와 變神景․體兼忘․會自然․歸冥寂 諸 事項이며, 意在體現“行窮上道․位極高真, 易景通靈, 陶形變質. 混同物我, 則天地等遺;莫識其由, 則視聽無寄:斯乃自然之妙旨․冥寂之玄宗. 造化神途, 於茲驗矣”의 得道 成仙思想을 말한다.


《無上秘要》 今存 殘本은 除去同書 異名 外에 실제 요약하여 약 180종에 이르는 道書를 인용하며 그 절대 부분은 東晉 以後 新出한 道經이며, 더구나 上清․靈寶 二派의 道士가 所造한 洞真․洞玄部 經書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에는 《大洞正經注》《道跡經》《真跡經》《洞真太極寶簽上經》《洞真變化七十四方經》《洞真太微黃書經》《太微黃書八卷素訣》《皇人經》《隱元上經》《洞玄黃籙簡文經》《靈寶齋經》《洞玄本行妙經》《虛無經》《升玄經》(즉, 《升玄內教經》)《洞玄空洞靈章經》《洞神經》《洞神監乾經》《三皇經》《洞秘神籙經》《傳授五千文籙儀》《正一法文》《正一氣治圖》 等等이 있으며, 모두 道藏에서는 佚書이거나 缺文이다. 此書가 引錄한 글은 他書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어 더욱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此書는 按三洞四輔部引錄經名及節文, 反映出道藏三洞四輔分類結構已經形成한 까닭에 國外學者는 이를 “六世紀의 道藏”이라 칭하기도 한다.


歷史上 一部分 道經, 예컨대 《洞真太上靈書紫文上經》 等은 일찍이 離合增減을 거쳤으며, 또 此書에 의거하여 考見할 수 있다. 書中에는 部分적으로 卷帙이 殘缺되고 出處를 분명하지 밝히지 않았으나, 參考價值가 있다. 例如卷八十三至卷八十五(《正統道藏》本缺第八十五卷)按得鬼官․地仙․地真․九宮․太清․太極․上清․玉清諸道順序錄列得道人名, 與《真靈位業圖》分鬼官․地仙․九宮․太清․太極․上清․玉清七階位大體一致. 這對考察陶弘景原書結構和南北朝神仙譜系均有參考意義.


此外에 本書가 引用한 經文은 明刊 道藏本과 出入이 있어 이 둘을 비교하여 校訂 今本 文句할 수 있다.


東晉 南朝 道經에는 每多一卷短經, 有的書撰於不同時代, 後人據虛目合之則爲一經多卷. 《無上秘要》列其卷(篇)目, 這對了解道經的存佚十分方便, 而對了解經符異名也很有幫助.


《無上秘要》는 魏晉南北朝 眾多한 道書 中에 巨帙이며, 극히 높은 文獻價值가 있다. 魏晉南北朝 道教와 道經 硏究에 不可缺한 參考資料이며, 早期 道書를 校監할 때는 重要한 依據 자료가 된다. 法國學者인 勞格文 編이 引書索引을 만들어 法國 遠東學院에서 出版한 《無上秘要:六世紀的道藏》(《WU-SHANGPI-YAO:SOMMETAOISTEDUVIeEIEA》, 1981)에 수록했다.


參考資料 

1. 任繼愈 主編《宗教大詞典》 第859頁, 上海辭書出版社 1998年版

2. 卿希泰 主編《中國道教》 第二卷第37~40頁, 上海知識出版社 1994年版

3. 胡孚琛 主編《中華道教大辭典》 232쪽,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5年版

4. 朱越利 《道教要籍概論》 43~44쪽, 北京 燕山出版社 1992年版.

<唐朝疆域 : from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C%9D#/media/File:%E5%94%90%E6%9C%9D%E7%96%86%E5%9F%9F%EF%BC%88%E7%AE%80%EF%BC%89.png


약칭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비된 전국 지방지리 총서로서 전 40卷이다. 체례가 완비됐으며, 전국을 커버하니 100道 47鎭을 綱으로 삼고, 府/州/縣을 目으로 삼았다. 


각 지방 행정구역별로 그 연혁을 기술하되 위로는 三代로 소급하며 아래로는 이 책이 편찬된 唐代 元和 연간에 이른다. 편찬 책임자는 이길보(李吉甫.758~814)이니, 字를 홍헌弘憲이라 하며 趙州 찬황(贊皇) 사람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 棲筠의 아들인데 廕補로 좌사어솔부창조참군左司御率府倉曹參軍이 되었다. 貞元 연간 초에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고 관직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며, 卒하고는 충의忠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事迹은 《唐書》 本傳에 자세하다. 


이 書는 宋 홍매洪邁가 쓴 跋에 의하면 元和 八年에 獻上했다. 하지만 書中에 宥州를 설치한 대목이 있으니, 이는 곧 元和 九年에 있은 일이라, 홍매의 말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나중에 보완됐을 가능성도 있다. 


앞에는 吉甫가 쓴 序가 있어, 이에서 말하기를 “起京兆府, 盡隴右道, 凡四十七鎭, 成四十卷。每鎭皆圖在篇首, 冠於敍事之前, 並目錄兩卷, 共成四十二卷”이라 하며, 그런 까닭에 《元和郡縣圖志》라 한다고 했다. 


뒤에는 淳熙 二年에 쓴 정대창程大昌의 跋이 있으니, 이를 보면 圖는 이미 망실되고 오직 志만이 남았다 했다. 그래서 진진손陳振孫은 《직서해제書錄解題》에서 이르기를 《元和郡縣志》가 四十卷이라 했다. 지금 전하는 판본에서는 제19、20、23卷、24卷、26卷、36卷이 없고, 제18권은 그 절반이 사라졌으며, 25卷 역시 두 쪽이 사라졌으니, 이는 宋나라에 전해진 옛날 판본은 아니다. 


篇目이 斷續적이라 자못 尋檢하기가 힘이 든다。《水經注》 本 四十卷을 고찰하건대 宋代에 이르러 그 五卷을 망실해 그래서 水名 중에 21곳을 잃었으며, 南宋 刊板에서는 이에 四十卷으로 배열하니 그 체례를 본받아 重編하여 四十卷으로 삼았다. 


《唐志》에서는 五十四卷이라 했지만, 吉甫의 原序로 보건대 志의 오류다. 나아가 《唐六典》과 《新》、《舊唐書‧地理志》를 보건대 貞觀 初에 天下를 나누어 十道를 만들었다. 그 10개 도 명칭을 보면 1. 關內道, 2. 河南道, 3. 河東道, 4. 河北道, 5. 五山南道, 6. 隴右道, 7. 七淮南道, 8. 八江南道, 9. 九劒南道, 10. 嶺南道다. 


한데 이 책에서는 隴右道를 제10으로 삼았으니, 아마도 당 中葉 이후에 이곳이 토번吐蕃에 함몰된 까닭이리라. 淮南 한 개도는 今本에서는 卷之中이 없어졌으니, 《唐志》 淮南道 소속 諸州로써 그것을 보완했거니와, 今本 河南道에는 申、光 2개 州를 蔡州 다음에 배치했다. 江南道에는 蘄、黃、安 3개주는 鄂、沔 2개 주 뒤에다가 배열했으니 아마도 傳寫 과정에서 錯簡이 일어난 듯하다. 


하지만 《唐書‧方鎭表》를 살피건대 大歷 十四年에 淮西節度使가 다시 蔡州를 다스리니, 그래서 이름을 申光蔡節度使라 바꾸었다. 또 永泰 元年에 蘄、黃 2개 주는 鄂岳節度에 예속시키고, 鄂州都團練使를 높여서 觀察使로 삼아 岳、蘄、黃 3개 주를 더 다스리게 했다. 


元和 元年에 鄂州觀察使를 높여 武昌軍節度使로 삼고는 安、黃 2개 주를 더 다스리게 했다. 다시 말해 申州、光州는 일찍이 淮南道를 통해 河南道에 예속됐고, 蘄州、安州、黃州 역시 일찍이 淮南道를 통해 江南道에 예속된 것이다. 


권별 원문은 아래 


https://zh.wikisource.org/wiki/%E5%85%83%E5%92%8C%E9%83%A1%E7%B8%A3%E5%9C%96%E5%BF%97



애초 전 550권이며 서략(序略) 5권이 더 있었다. 당초(唐初)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로 위왕(魏王)에 책봉된 이태(李泰)가 주편한 거질 지리서(地理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與地志)》의 양대 先代 지리서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 체례를 열었다고 평가되며 여기에서 이룩한 지리서 편찬 전통은 후대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와 《태평환우기(太平圜宇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미 남송(南宋)대에 이르러 그 원전은 망실되어 버리고 그 잔편(殘篇)들만이 후대 다른 서적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편찬 책임자 이태는 “好士愛文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아버지 태종 또한 그를 총애해 그에게 문학관(文學館)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이에 이태는 學士들을 초빙하여 강습학문을 했다. 


태종 정관(貞觀) 12년(638)에 사마(司馬)인 마소앙(馬蘇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괄지지 편찬을 태종에게 아뢰어 비준을 받았다. 이에 著作郞 蕭德言, 秘書郞 顧胤, 記室參軍 蔣亞卿, 工曹參軍 謝偃 등과 함께 《괄지지》 편찬에 착수해 5년만인 같은 貞觀 16년(642)에 완성해 태종에게 바쳤다. 


그 서략에 의하면 괄지지는 ‘貞觀十三年大薄’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수왕조를 대신한 당조는 초창기에는 경황이 없어 대체로 수대 행정구역을 답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특히 태종대에 이르러 국내외 사정이 안정 기반에 접어들자 행정구역 조정에 전면적으로 착수했으며 정관 13년에 있었던 定薄 작업은 그 일환이었다. 이 大薄에 의하면, 당왕조는 전국을 10道, 41개 도독부(都督府)를 포괄하는 358州, 1천551현(縣)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정관 14년(639)에는 서역의 고창(高昌國)을 멸하고 그곳에 2개 주, 6개 현을 증치하게 되었다. 바로 이 단계가 이태의 괄지지가 정리한 전국 지리지인 것이다. 


주의할 것은 괄지지가 수록한 당 왕조의 치하가 唐 前史를 통털어 최대 전성기라는 사실이다. 中唐 이후 당 왕조는 토번이라든가 북방 여러 지방이 다른 민족 지배에 들어가는 바람에 비록 현 이름을 있었으나 허명에 지나지 않았다. 


괄지지는 각 행정구역을 綱으로 삼고, 해당 지방별로 건치 연혁과 산악 형승, 하류구거(河流溝渠), 풍속물산, 왕고유적(往古遺跡), 인물 故實 등을 수록했다. 


이 괄지지는 당 玄宗 때 張守節이 《사기정의(史記正義)》를 저술할 때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지명을 비정하는데 요긴하게 활용했으며 기타 당송대 저작물에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미 남송 대에 그 원전이 망실되어 버렸으므로 청대(淸代) 가경(嘉慶) 2년(1797)에 마침내 손성연(孫星衍)이 당송(唐宋) 사람들의 글에 인용되어 있는 괄지지 일문(逸文)들을 정리하여 집본(輯本)을 만들어 대남각총서(垈南閣叢書)》에서 포함시켜 판각하니, 전 8권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괄지지 집본이다. 


이후 황석(黃奭)의 《한학당총서(漢學堂叢書)》, 주기영(朱記榮)의 《괴로총서(槐盧叢書)》 등지에 손성연 괄지지 집본은 重刻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주기영은 《괴로총서》에서 손성연 집본을 수록하면서 그 부록으로 진기영(陳其榮)이 보집(補輯)한 5개조를 수록했다. 그 외에도 조원충(曹元忠)의 《남청례기(南菁禮記)》에도 추가로 몇 개 조를 더하기도 했다. 


이 괄지지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貞觀 年間에 편찬되었다 해서 ‘貞觀地志’라고 일컫기도 하며, 같은 당대에 편찬되었으나 당 헌종 원화(元和) 연간에 편찬된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가 唐 憲宗 시대(806~820)의 단대 지방지이며, 북송 시대에 편찬된 《구당서》 《신당서》 지리지가 晩唐 시대의 중국 지방 사정을 전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가치가 평가된다. 


손성연 괄지지 집본은 최근 중국 중화서국이 기획하는 중국고대지리총지총간 시리즈 중 하나인 ‘括地志輯校’(첨부사진)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나온 게 있으니 참고바란다. 이 집교본은 賀次君이 집교를 맡았으며 2005년 2월에 제1판이 발간됐다. 책값은 20원, 우리돈 3천원이 채 되지 않는다. 


원문은 다음 참고 


https://zh.wikisource.org/wiki/%E6%8B%AC%E5%9C%B0%E5%BF%97%E8%BC%AF%E6%A0%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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