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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한국사 그 순간 -7-] 태종무열왕 출생의 비밀 김춘추 아버지 용수·용춘은 형제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2016.12.18 00:42 | 510호 23면 서기 654년 봄, 진덕여왕이 죽자 신라엔 성골(聖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632년) 때부터 남자 성골이 씨가 말랐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성골 여인인 선덕과 진덕을 차례로 왕으로 세운 것이었는데,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은 품계가 없는, 더 정확히는 품계를 초..
[추적, 한국사 그 순간 -6-] 황음무도해서 쫓겨난 진지왕 사도태후, 권력욕에 눈멀어 아들 몰아내고 왕 노릇[중앙선데이] 입력 2016.11.20 00:38 | 506호 23면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이 집적한 고대 삼국의 괴담 중에 제목이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인 에피소드가 있다. 도화녀와 비형랑은 모자지간이다. 어머니 도화녀는 글자 그대로는 복숭아꽃 같은 여인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렇게 일컬었을까? 반면 그가 낳은 아들 비형랑은 그 의미를 종잡기는 힘들지만 하필 ..
[추적, 한국사 그 순간 -5-] 수수께끼 신라 재상, 김양도 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4-] 선덕여왕과 3색 모란꽃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추적, 한국사 그 순간 -3-] 대야성 전투서 딸 잃은 김춘추 백제 멸망, 김춘추 사위의 치정이 부른 복수극[중앙선데이] 입력 2016.08.21 00:46 | 493호 23면  백제는 660년 음력 가을 7월 18일, 사비성(泗?城)에서 북쪽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친 의자왕이 나당(羅唐)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했다. 이때 일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 7년(660)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의자왕은 이달 13일 포위망을 뚫고서 가까운 신하들만 데리고..
[추적, 한국사 그 순간 -2-] 김유신의 김춘추 겁박 춘추가 임신한 문희와 혼인 미적거리자 “태워죽여라”[중앙선데이] 입력 2016.07.24 00:44 | 489호 23면   김유신은 월경(月經)이라는 난관을 눈부신 ‘대타 작전’으로 돌파했다. 애초엔 큰 누이동생 보희(寶姬)를 김춘추와 짝지어줄 요량이었지만 ‘거사(巨事)’를 준비한 그날 보희가 월경 중임을 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누이 문희(文姬)를 찢긴 옷고름을 걸치고 바느질을 기다리는 김춘추가 있는 방으로 밀어 넣..
[추적, 한국사 그 순간 -1-]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40 | 485호 23면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혈통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는 불완전한 민족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
김유인의 70세 치사(정년퇴직)와 생일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예기 왕제王制편에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한데 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