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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원창(興元倉, 興原倉)은 한강 두물머리 중 하나로, 섬강과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이라, 본래는 이 근처에 설치된 조창 이름이나, 지금은 이 일대 지명으로 흔히 쓴다.

그 보세 창고가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없고, 어디서 구해다 놓은 거대한 돌덩이에 안내판만 덩그럴 뿐이니, 조선 후기 그것을 표시한 그림이 남아 희미한 자취를 더듬을 뿐이다.


한반도는 산악 천지라, 육상 수송이 실상 불가능해 이런 내륙 수로로 물자와 사람이 움직였으니 원주가 도회로 발전한 힘이 강이다.

더구나 그런 강줄기가 두 군데서 합류하니 이 일대엔 뽀쁘라마치가 있었고 주모들이 손님을 유혹했다.


합류한 강물은 스테로이드 막 복용한 마이크 타이슨마냥 몸집과 힘을 불려 서쪽으로 치닫는다.

그 힘으로 경복궁 중건에 쓴 목재도 실어날랐고, 퇴계도 안동 오가는 길목에 이곳을 지났다. 물은 그만치 힘이 있었다.


헤르만 헤쎄였던가 아님 그가 그린 싯타르타였던가? 구도에 나선 그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곤 깨달음을 얻는다.

설피 그 흉내 내려하나 허여된 시간이 짧기만 해서, 그 좋기도 하다 하고 실제 두어번 경험한 그 짜릿 황홀 오르가즘 같은 이곳 낙조도 다음번을 기약하며 담배 한 개피 훅 빨고는 발길을 재촉한다.

그래, 낙조를 만난다한들 무에 달라지겠는가? 회한만 더할 뿐이다.

한숨 하나 보태 실어보낸다. 그 한숨 한강 어구로 흘러 바닷물에 휘말려 구천 떠돌다 어디로 갈지 모르나, 여기 한 사내 푸념하고 갔노라 새긴다.

지난 5일이었다. 우리 영화 담당 1진 조재영 차장이 어떤 영화제 예고기사를 하나 올렸는데, 이야기인즉슨 "시청각장애인들도 불편 없이 영화를 즐기는 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 올해 제8회 행사가 오는 7∼11일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영화제에는 총 7개 부문, 28편 영화가 상영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데 이 기사에 언급한 내용과 관련 사진을 보니,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단편 애니메이션 '산책가' '페루자'를 극장에서 라이브 화면해설로 감상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산책가'는 시각장애인 동생과 누나가 촉지도로 함께 떠나는 가상의 산책길을 그렸고, '페루자'는 에티오피아 오지 소녀 페루자가 조혼을 피해 꿈을 이루려는 노력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페루자' 실제 모델인 에티오피아 소녀 페루자가 직접 참석하는 '씨네토크' 등도 열린다. 


그러면서 이 대목에 다음 사진이 매핑(내장)되어 있었다. 


모르겠다. 딸이 없는 내 눈에 특히 더 그리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 사진 속 페루자라는 아이가 너무나 티 없이 맑아보였다. 더구나 그 이야기인즉, 조혼과 관련된다고 하니,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팀에다가 저 친구는 인터뷰 좀 해 봤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뭐 어투야 인터뷰 해 보면 어떠냐였지만, 이런 부장 말은 실상 지시다. 


그런 그를 우리 영화 담당 2진인 김승욱 기자가 어제 연락을 취해 저 친구를 인터뷰하고, 그 기사를 어젯밤 자정쯤 올렸으니, 오늘 아침 6시로 엠바고를 달았다. 엠바고 기사란 송고시간을 미리 설정해 놓고 써 놓은 기사를 말한다. 엠바고 시간이 6시란 말은, 그 시간에 송고되어 독자들에게 제공되는 시간을 말한다. 그 기사가 다음이다. 


조혼 피해 한국 동경하던 에티오피아 소녀…꿈을 이루다

송고시간 | 2018/11/09 06:00


애니메이션 '페루자'의 실제 주인공 페루자, 영화제 참석차 방한

아프리카 오지서 한국방송 보며 한국말 익혀 


 읽어보니 막연히 상상한 이상의 내용이 들어있다. 무엇보다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을 익혔다는 대목이 들어왔다. 조혼 풍습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은 이런저런 풍문을 통해 듣던 바이기는 하지만, 또, 그에서서는 페루자가 극적으로 탈출하기는 했다지만, 그 이면 다른 아이들은 저와 같은 처지라는 점도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이런 안타까움조차도 혹여 나의 오리엔털리즘 여파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막상 만나보니 어떻더냐 물었더니 김승욱 기자가 애가 너무 이쁘다는 말을 한다. 기사에 한국어를 잘 한다는 말이 있어, 한국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냐 물었더니, 통역이 없었고, 본인이 직접 한국어로 했다 해서 다시금 놀랐다. 


이 현장에는 우리 공장 사진부 연예인을 전담하는 기자가 같이 갔다. 보통 보도사진은 미안하지만 대략 몇 커트 찍고 만다. 작품이 아니라 기록용인 까닭에, 그리고 오죽 사전 현장이 많은가? 그래서 대개 30초, 혹은 1분 정도 몇 컷 우당탕 찍고는 휭 하니 사라지고 만다. 


한데 이 친구를 접한 우리 사진기자가 눈이 휘둥그레해져가기고는 물경 30분 넘게 각종 컷을 정성스럽게 찍어댔다고 한다. 조명 장치도 별도로 해서 찍었다가 어쨌다나? 카메라에 장착한 그 플래시가 아닌, 별도 조명장치를 하고는 완전히 작품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역시 사진은 그것을 찍은 사람이 피사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찍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 이렇게 촬영해 송고한 사진들을 본 주변 사람들이 "와! 네이처지 표지사진 같다"고 탄성이다. 





아침 6시에 송출한 우리 관련 기사는 반응이 좋다. 이럴 때 담당 기자나, 담당 부장은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부디 이런 반응들이 그의 앞날에 긍정적인 힘으로 작동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 모바일 정보창고 2018.11.09 23:56 신고

    저는 미국 영화 정말 많이 보는데 왜 영어가 늘지 않을까요? ㅠㅠ
    암튼 멋진 일입니다. ^^

  2. 한량 taeshik.kim 2018.11.10 00:18 신고

    ㅋㅋ

"한글이 이 지구상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다."

오늘(2012. 11. 7)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한글 현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풀이한 말이다. 한글 과학적이 않다고는 말 안한다. 하지만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학적이지 않은 그 무엇"과의 비교를 통해서라야만 가능하다. 과연 한글은 무엇에 견주어서 과학적이라는 말인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월인천강지곡



영어가 한글에 비해 비과학적이란 말인가? 불어가 비과학적이란 말인가? 히라카나 가타까나가 비과학적이란 말인가? 한문이 비과학적이란 말인가? 조형 원리,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라고? 뭐가 과학적이냐? 발음하는 기관 모양을 본뜬 것이 과학적이라더냐? 그러면 뫼 산을 모양을 본떠 山이라는 글자를 맹글어 낸 상형 한자는 과학적이 아니라더냐? 


한글이 과학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아니다. 한글이 과학적인 만큼 다른 문자 체계도 다 다름 과학적이다. 없는 신화 맹글어 내지 마라. 


한글은 과학의 신화에서 빨리 끌어댕겨 내려야 한다. 한글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한 지금까지 가장 효율적인 표기 체계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글이 과학적이라는 근거로 가장 수이, 그리고 가장 빨리 배운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배우기 쉽다 해서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배우기 쉬운 것과 과학은 눈꼽만큼도 상관이 없다.  그건 그냥 배우기 쉬울 뿐이다. 


소위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



문자를 배우고 익혀 그걸 읽는 것과 그런 문자로 표기한 언어 자체를 이해하는 건 전연 다른 문제다. 한글은 저 과학이라는 신화에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한글이 산다. 그런 점에서 아래와 같은 언급은 주목해도 좋다. 


한글의 창제에 대한 수많은 연구의 저변에는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 없는 과학적인 문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는 국수주의적인 주장이 깔려있어서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어떠한 연구도 용납되지 않는 것 같다. 또 우리 학계의 풍토도 한글의 위대성, 과학성, 편의성에 대한 연구라면 얼마든지 환영을 받지만 이에 반하는 연구는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비슷비슷한 연구가 반복되었고 이제는 누가 어떻게, 얼마나 더 한글의 우수성을 찬양하는지 경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이해하는 수준의 연구논문이 학회지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정광,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 역락, 2012, 11쪽) 


*** 이상은 2012년 11월 7일,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갈무리한 것이다. 

덧붙이건대, 소위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자가 천억원을 요구하니 마니 하는 헛소리도 따지고 보면 다 이 한글 과학이라는 신화가 낳은 촌극이다. 해례본이 무슨 천억원이라더냐?

  1. 고로 2018.11.10 14:12 신고

    세종대왕이 처음만들때 몰래 만들어서 베타테스트가 부족한 바람에... 쓸만한 문자가 되는데 시간이 올래걸렸죠..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없고 글자모양이 비슷비슷해서 큰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은 문자였음.. 결국 오백년이지나서야 대중화됌... 조합형 문자라 인쇄하려면 활자를 만개이상 만들어야 해서 인쇄술발전에도 도움이 안되던 문자였고.. 지금도 가독성은 낮은 문자중에 하나임..

  2. 아파트분양 2018.11.10 21:34 신고

    신화라니? 다들 과학적이라고 하는데...

    • 한량 taeshik.kim 2018.11.12 14:50 신고

      글쎄요. 다들 그리 말씀하시는데, 그 다들 하시는 말씀에 제가 승복을 못하네요

외우畏友 김태형 선생이 역작을 냈다. 기간其間 이 책 완성을 위해 김 선생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내가 익히 알거니와, 원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그가 쏟은 피땀은 그의 페이스북 기간 관련 포스팅을 대강 훑어도 안다. 부석사에 대한 오해와 신화를 실체의 영역으로 돌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바, 이번 책에는 그런 흔적이 오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번 책이 정말로 발로 썼다는 점이다. 2018년 11월 현재, 전남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인 김 선생은 이곳에 안착하기 직전까지 다름 아닌 부석사에서 4년 반을 근무했다. 그의 말마나따나, 그는 이 기간 24시간을 부석사에서 지냈다. 숙소가 다름 아닌 절간이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부석사 실체 해명을 위해 그는 부석사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의 손때가 묻은 부석사성보박물관을 가 보면, 무수한 출토 문화재가 전시 중이거나 수장고에 있거니와, 이들은 김 선생이 채집 혹은 수습한 것들이다. 나아가 이 일대 공사판은 반드시 참관해, 땅속에서 혹여 귀중한 유물 유적이 없나 살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부석사 해명과 관련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講堂'이 라는 명문 기와를 찾아냈는가 하면, 안양루 바닥에서는 불탄 흔적을 발견하고, 금당 추정지를 밝히기도 했다.



선생을 알게 된지 대략 6~7년간 그의 글 솜씨는 어떤지 내가 미쳐 몰랐다. 교계 관련 신문에 연재한 글 몇 편은 지나치며 보기는 했고, 더구나 내가 만드는 데 관여한 단체에서 논문 발표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문필가로서의 김태형이 어떤지는 가늠이 힘들었다. 한데 막상 나온 책을 보니, 그는 그 누구보다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문필가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석사는 잊어라고 주문한다. 그러먼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왕명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를 둘러싼 여러 팩트를 체크한다. 예컨대 흔히 무량수전에 안치한 아미타불이 왜 동쪽을 향하는지에 대한 여지없는 신화 붕괴를 시도한다. 동아시아 사찰에서 대웅전 석가모니나 아미타전 아미타불 같은 부처는 거의 예외없이 남쪽을 향해 북쪽 중앙에 정좌한다. 하지만 이곳 무량수전은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 책은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한다. 무량수전은 애초에는 '강당'이고, 부처를 모신 금당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지금은 무량수전이 부석사 금당(金堂)이자만 옛날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본래의 금당이 현재 부석사 경내 자인당에 봉안된 보물 제220호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이 본래 있던 곳으로, 일부에서 동방사지(東方寺址)로 알려진 곳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동방사지도 동방사라는 절터가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던 절터'라는 뜻이라고 바로잡는다. 

그렇다면 무량수전은? 본래 강당인 까닭에 그것을 금당으로 전용하는 과정에서 할 수 없이 지금과 같이 무량수불을 서쪽 끝에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와 관련해 흔들림없는 통설처럼 군림하는 논리는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므로, 서쪽에 위치하며, 그런 까닭에 동쪽을 바라보게 배치되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다른 아미타전 아미타불이 예외없이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정좌한 이유를 전연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한 논리였다. 

아울러 저자는 조선시대 기행문 분석을 토대로 당시 부석사로 진입하는 동선이 현재와는 달리 지금의 천왕문 부근에 동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낸다. 이런 분석들을 통해 부석사는 전성기에 사역이 현재보다 최소한 3~4배가량 더 넓었다고 말한다.  

지금의 부석사라고 하면 무량수전과 함께 거대한 석축 또한 또 다른 상징이다. 부석사 경내에 여러 층으로 구성된 석축을 삼배구품 혹은 화엄십지를 상징한다고 거의 모든 부석사 관련 설명이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터무니없는 말로 내친다. 그에 의하면 구품은 전체 축대 갯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수전을 떠받든 석축 높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즉, 석축 높이가 9층으로 이루어져, 이를 두고 구품연대라고 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책은 부석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부석사와 벌인 피나는 전쟁의 증언록이다. 저자는 부석사와 싸워 그 부석사를 덧씌운 신화들을 벗겨냄으로써 새로운 부석사를 우리한테 안겼다. 

물론 이에서 주장한 저자의 주장 혹은 학설 중에서도 혹 손봐야 할 곳이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높이치는 대목은 상식과 통설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그 저항정신의 표본이 김태형의 이번 부석사다. 그는 부석사를 때려부수고 새로운 부석사를 지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제2, 제3의 부석사 중창이다. 

256쪽, 19,000원, ISBN 979-11-88297-05-4  03610, 도서출판 상상창작소 봄




한자의 변천사에서 허신은 부수를 발명함으로써 제일차 혁명을 일으켰고..이어 반절을 발명함으로써 음절을 나누는 제이차 혁명을 이룩했다..가장 시대에 뒤떨어질것같은 한자도 부단히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시대변화란 말 남용하지말라..그 논리 그대로 당할날 멀지 않았다..좀 있으면 영어로 광화문 현판 달자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온다. 

한글로 해야 한다는 그 논리 그대로 뒤집으면 그것이 바로 영어 현판의 당위성을 담보한다.

우쭐대지 마라. 

*** 이상은 November 7, 2012 at 8:01 PM 내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시대 변화에 맞추어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한글전용자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적이 있다. 요즘도 틈만 나면 이 주장을 일삼는다. 하지만 이 논리 진짜로 조심해야 한다. 그 논리 그대로 갖다 대면, 내가 말한 저 논리, 다시 말해 시대 변화에 맞게 무슨 얼어죽을 놈의 한글이냐? 영어로 달자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 모바일 정보창고 2018.11.08 12:59 신고

    서체 자체의 기픔도 느껴야 하니까요 ^^
    한글의 대중화는 되어야 겠지만, 지금 있는 것돌이라도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

  2. 아파트담보 2018.11.08 23:55 신고

    그러게요.. 중국에 쩔쩔매는 한국모습보면 , 영어로 된 광화문도 나쁘지 않겠네요

은행 단풍 제철이라, 미쳐 날뛰는 그 무수한 가을 은행 중에서도 내 보지 못하고, 그러면서 인구人口에는 아름답다 회자하는 그런 곳 골랐으니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그것이라. 지난 주말, 하릴없고, 또 그닥 쓰임새는 없는 듯하나, 그래도 나를 찍어주는 기록사 겸해서 어떤 이 대동하곤 나섰으니, 마침 그날 동제가 있는 날이라 잔치판 벌어지고 풍악이 울리더라. 


원망遠望하니 주변, 특히 산과 조화한 랜스케입 압도적이라 왜 이 나무를 첫손 둘째손 셋째손에 꼽는지 알겠더라. 다가서니 바닥에 노랑물 흥건 쓰나미라, 하마터면 놓칠 뻔했으니 때맞추어 왔음에 적이 안심이다. 살피니 둥치 서너 갈래라 , 서 살피니 크게 둘로 짜개졌으니 한 가지에서 갈라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가 세포분열한 느낌이다. 못 살겠다, 갈라서자, 그랬지만, 멀리 도망가진 못하고 연리지마냥 붙었더라. 


나무 나이야 연예인 나이만큼 나이롱 뽕이라, 이곳 고을 사람들이야 팔백살을 주장하며, 왜 그런 내용을 안내판에 담지 않느냐 관계 당국 닥달하는 모양이나, 내 보기엔 택도 없어 그보단 훨씬 젊다. 저같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두 그루 아니어니, 용문사인가 그쪽 은행나무 800살인가 주장한단 말은 들은 듯하나, 기타 좀 솔직한 데는 대략 500년을 내세우는 일 많으니, 그 500살이라는 그들 나무 견주어도 이쪽은 한참이나 동생 느낌 난다. 수체樹體 아름답고 넓은 까닭이야 현장에서 보니 입지조건과 짜개짐에 따름이다. 여타 은행이 공중으로, 공중으로, 더 높이, 저 멀리를 향해 달려가는 공중부양을 선택했을 적에, 이 반계리 은행은 땅으로 향해 펑퍼짐을 택했으니, 그것이 묘한 대비를 이루어 장관을 빚어난다. 


처자들 이런저런 바람이 들어 노랑물 떠가느라 여념없다. 이곳 관장하는 원주시청 공무원 박종수 선생 전언을 빌리자니, 이 나무를 둘러싸고 골치아픈 민원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왜 나이 800살을 안내판에 적지 않느냐이며, 다른 하나가 저 보호막 넘어 왜 사람들이 들어가냐라 한다. 

팔백은 천부당만부당이니, 다만, 그런 욕망을 그런대로 담고자 한다면야, 안내판에 고을 주민들은 팔백살이라 말한다는 대목 하나만 넣으면 될 것이요, 두번째 보호막과 관련해서는 저것이 낮아 사람들이 들어간다 하는데, 고을 사람들아, 역발상을 왜 하지 아니하나? 

첫째, 보호막은 누가 어떤 생각에서 쳤는지 모르나, 하등 씨잘데기 없는 거치물이니 저거 뽑아 고물상에 넘겨 그 돈으로 마을 잔치하면 될 것이요, 둘째, 사람들 들어간다 해서 높이쳐서 막으면 누가 저 나무 보러 가겠는가? 나아가 저걸 보호막이라 하지만 왜 보호막을 설치해야 하는지 근간에서 의뭉스럼 일거니와, 언제 저 나무가 사람과 유리하고자 했겠는가? 넷째, 무엇보다 저 나무 곂에 다가서는 아니 된다는 그 어떤 법률적 제재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호막 넘어 들어가도 하등 법범 행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종수 관장한테 이르노니, 당장 저 보호막인지 뭔지 다 주워뽑아버려라. 

저 보호막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뭐 생각이야, 시작이야 그럴 듯 했겠지만, 내가 저곳에 닿는 순간 저 보호막 보고는 뒷골이 땡겼다. 한데도 저 보호막이 고을에서는 저 나무를 범접해서는 아니되는 그런 신수神樹로 만들기도 하니, 뭐 그렇다면야 내가 그 의지를 찬동하겠지만, 괜한 긁어부스럼 왜 만들었단 말인가? 



The Buddha of the Lake



《Archaeology》 매거진 May/June 2017호에 실린 기사를 뒤늦게 트위터를 통해 접했다. 이 잡지 보도에 의하면 중국 남동부지역 (복건성) 도시 푸저우(福州) 수력발전소 건설과정에서 1950년대에 건설한 댐에 수몰한 명나라시대 강안 마애불상이 느닷없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머리와 어깨까지 드러난 이 불상은 수중 조사 결과 전체 높이 12피트에 달하며 그 바닥에서는 절터 흔적이 드러났다. 


주목할 점은 이 절터와 불상이 들어선 위치. 강물이 굽이치는 강안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아마도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곳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식으로 보아 마애불은 명대(1368~1644)로 간주된다. 


이 일대는 북쪽으로 흘러 양자강에 합류하는 지류를 막는 댐 공사를 하면서 1950년대에 수몰됐다. 이렇게 형성된 호수를 홍문수고洪門水庫라 한다. 그러다가 최근 이 일대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게 되고, 그 일환으로 수위를 낮추는 과정에서 이 불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이 불상과 절터 처리가 어찌되었는지는 내가 아는 바 없다. 다만, 그 모습을 보노라니, 우리네 반구대 암각화랑 처지가 비슷하거니와, 그런 점에서 이를 둘러싼 중국 당국 움직임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우리처럼 호들갑인지 등등은 비교검토하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본다.  


<수중발굴 투신 故강대흔 잠수팀장의 안타까운 사연>

몸 아끼지 않고 여러 수중발굴 참여…세월호 수색현장에서도 한달 보내 

2014/12/10 17:1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달 5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태안 마도 앞바다 '마도4호선' 발굴성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 침몰선박은 사상 처음으로 확인한 조선시대 선박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을 받았다.


연구소는 현장에서 닻에 달린 목제 갈고리인 닻가지를 인양하는 장면을 공개했다. 잠수장비를 갖추고 해저에 들어가 실제 닻가지를 선상으로 들어올린 이는 잠수사 2명이었다. 


태안 마도 앞바다 발굴현장에서 고 강대흔 반장과 나. 2014년 11월초 아니었으면, 그 전달 말미쯤이다.



박정원(55) 잠수사와 함께 이 작업을 지휘한 이가 강대흔 잠수팀장이었다. 주민등록상은 1958년생이지만 실제는 1956년생인 그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평생을 바다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1977년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했다가 79년 호된 훈련으로 유명한 해군 UDU(첩보부대)에 지원해 이곳에서 복무하다가 1982년 제대했다. 조개 잡는 잠수기배를 타는 '머구리생활'도 많이 했다는 그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주도하는 해저발굴이 본격화하면서 수중 발굴에 뛰어든다.


2008년 야미도 발굴을 시작으로 이듬해 마도1호선, 2010년 마도2호선, 2011년 마도3호선 발굴에 그야말로 온몸을 불살랐다. 2012년과 지난해에는 진도 오류리 해역과 인천 영흥도선 발굴에도 참여했다.


문환석 해양연구소 수중발굴과장은 "최근의 굵직한 모든 수중발굴에 강 팀장이 전부 참여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와 동고동락한 홍광희 해양연구소 연구원은 "발굴단에서도 일을 참 잘하신 분"이라면서 "수중작업에 대해서는 최고 베테랑이었고 그만큼 탐사나 발굴 모두 깔끔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강 팀장이 주로 작업하는 서남해안 바닷속은 시야 1m가 되지 않는 때가 많아 그만큼 수중발굴 과정에서 안전 위협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인양 유물을 빼돌리는 불미스런 일이 발생할 우려도 크다. 실제 이런 일이 있어 연구소에서는 무엇보다 인양 유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문 과장은 "연구소가 강 팀장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마도4호선 발굴현장에서 닻가지를 인양한 직후 기자와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UDU 군기가 얼마나 센가"라는 질문에 그는 "(영화) 실미도보다 세다"고 했으며, "UDU가 뭐 하는 곳인가"라는 물음에는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이 바로 UDU 대원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팀장으로 이끄는 잠수사들은 보통 연중 6개월 정도 수중발굴에 참여한다고 했다. 기상 조건 등으로 줄곧 발굴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발굴이 없을 때는 등산을 좋아해 국내에서 안 다닌 산은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수중발굴 수당이 변변치는 않을 터인데 왜 이런 고된 작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로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런 투철한 국가관 때문일까? 지난 4월16일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자 그는 두 말없이 수색 현장으로 달려갔다. 한달간 수색작업을 벌이고는 5월17일 철수했다. 세월호 선미 다인실 47m 바닥까지 처음 들어가서 가이드라인을 설치한 사람이 바로 강 팀장이다.


한데 강 팀장과 함께 새로운 해저 발굴을 나갈 준비를 하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일요일인 지난 7일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강 팀장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경위를 알아보니 거주지가 여수인 강 팀장은 그 전날 서울에서 있는 후배 결혼식에 참석하고 주변 사람들과 만나다가 늦어지자 다음날 일찍 여수로 떠날 작정으로 어느 찜질방에 들어갔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험난한 바닷물도 이겨낸 그가 찜질방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다음날 아침 발견된 것이다.


고인은 9일 여수 제일병원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 묘역에 안장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12/10 17:10 송고


발굴현장에서 만난 강 반장과 주고받은 대화를 나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 내 페이스북 포스팅(2014.11.5)으로 삼은 적 있다. 


"UDU 출신이라시면서요. 군기 쎄지요?"

"실미도보다 쎕니다"

"UDU가 뭐 하는데지요?"

"아저씨에서 원빈이 그겁니다"

"아저씨는 꽃미남인데 반장님은..."


아, 너무 나갔다.

장기 파는 놈들을 칼로 썰어버리고 다 싸 지기던데..


돌이켜 보면,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나는 가난을 팔아먹곤 한다. 그것이 지나쳐 지금도 가난하다고 하는건 아닌지 짐짓 염려되기는 한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러했다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느냐 하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저 시절을 잊을 수는 없다. 어쩌면 잊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고자하는 세뇌 교육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다.


諱는 淵赫이요, 본관은 김녕이라, 1921년 음력 6월 15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조룡1리 222번지에서 출생했다.  선비先妣는 김해김씨이니 같은 금릉군 조마 태생으로 1남1녀를 두었다. 후비後妣 역시 김해김씨라 충무 태생으로 2남2녀를 두었다. 나는 5번째라, 선친이 마흔일곱에 얻은 아들이다. 


얘기가 길어질 듯해서 짤라버린다. 아버지가 끌고가는 저 송아지 팔아 나는 대학을 다녔다. 저 송아지 한 마리 팔면 그해 등록금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소값 파동이 일어나 황송아지 기준으로 마리당 150만원가량 하던 송아지 가격이 15만원대로 폭락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군대를 그때 간 이유였다.


내가 태어난지 반세기가 된 날,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이상은 2016년 11월 5일, 내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


천오백년 부동자세로 섰다가 

글자는 거의 다 지워지고

모자는 잃어버렸으며

몸통엔 총까지 맞았으니

곳곳이 생채기라

견디다 못해 중환자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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