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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동몽선습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 저작인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 저작이라 했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
묘제와 봉분 무덤에 가서 조상을 제사하는 행위인 묘제墓制 혹은 묘를 살피는 성묘省墓는 실은 각종 의례서에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어느 일정 시기까지 무덤에다가 그 표식인 봉분을 만들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으로 나는 본다. 중국사를 보면 공자 이전에는 봉분이 없어, 일단 무덤을 쓰고 나면, 그 위치는 후손도 이내 잊어버린다. 그런 까닭에 장소도 모르는 묘제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묘제의 제1 성립 조건은 그 위치 확인이다. 묘제를 둘러싼 이렇다 ..
서얼 차별, 그 부당성은 누구나 알았으나...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앞선 시대에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왕릉의 신도비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의 비는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태종(太宗) 헌릉(獻陵)의 비는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며, 세종 영릉(英陵)의 비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문종(文宗) 현릉(顯陵)에서는 세 능의 전례에 의하여 곧 비를 세우려고 공역(功役)을 이미 시작하였었는데, 어느 건의하는 자가 아뢰기를,..
연오랑세오녀와 신라수이전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일본(日本)의 대내전(大內殿)은 그 선대가 우리나라로부터 나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과 다르다 한다. 내가 일찍이 널리 전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아도 그 출처를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에 이르기를, “동해 물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라 하고 아내는 세오(細烏)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해변에서 수초[藻]를 따다가 홀..
여장남자 사방지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여장남자(女裝男子), 혹은 여성으로 행세하면서 많은 여성을 기롱한 남자 얘기가 보인다. 이 남자가 바로 사방지(舍方知)라는 자인데, 이 자가 가슴은 여자, 아랫도리는 남자인 소위 shemale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관련 기록을 추리면, 남성인데 여성으로 행세한 단순 남성인 듯한 느낌을 준다. 한데 그 극적 드라마성 때문인지, 이를 모델로 하는 사극 같은 것을 보면, 가슴은 젖소만하..
심청의 선배들과 인신공희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
소현왕후를 둘러싼 논란, 관 머리는 어디로?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보이는 일화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정인지)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