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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1608

아마존 여전사는 실존했을까? 뭐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고, 실제 아마존 여전사 혹은 그에 버금하는 여전사 이미지를 활용한 영상물이 넘쳐나는 시대다. 실상 원더우먼도 그 베리에이션 아닌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나흐츠반Nakhchivan 이라는 데에 청동기시대 공동묘지가 있고 그것을 고고학도들이 발굴한 결과 여성들 무덤에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화살촉 arrowheads 라든가 청동 단검 bronze dagger, 그리고 철퇴 mace 같은 것들이 수습된다고 한다. 물론 보석류도 빠지지 않지만 말이다. 이를 통해 4천년 전에는 아마존 여전사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전망을 고고학도들이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이들 여전사들은 남성이 없는 사회와 전장터에서 활과 화살 다루는 기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역사학도 베.. 2024. 3. 25.
지방관의 위수지역 이탈은 삭탈관직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영락永樂 11년(1413) 6월 5일 임자 첫번째 기사다. 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으로 겸 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를, 한상경韓尙敬·유정현柳廷顯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연趙涓으로 공조 판서를, 박자청朴子靑으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하구河久로 우군 도총제를, 안성安省으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삼았다. 예서 문제가 강원도관찰사였다. 그 전임이 탄핵을 받아 삭탈되었기 때문이다. 강원도도관찰사 우홍강禹洪康·충청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충주 목사忠州牧師 권진權軫·원주 목사原州牧使 권완權緩 등이 충청도 제주提州(제천)에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일이 발각되자 헌사憲司에서 탄핵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우홍강이 타도他道에 넘어 들어갔다고 하여, 특명으.. 2024. 3. 25.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2) 펀더멘털로부터의 이탈 혹자는 이런 반론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저 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그렇게 예제禮制를 철저하게 관철하려 했을까? 그러니 이런저런 절차 생략하고 했을 것이니, 남녀 위치가 바뀐 것도, 머리를 남쪽으로 둔 것도 하등 이상할 점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예제가 규정한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3년상만 해도 그것이 공자에서 비롯하지만 그건 책에서나 있는 이야기일 뿐이요, 실제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니 해서 각종 편법이 판을 쳤으니, 이는 무엇보다 책 혹은 이상이 규정하는 절차일 뿐이요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관철하기에는 적지 않은 애로가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희한하게도 곧이곧대로 이 예제를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당시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실현하려 하지 .. 2024. 3. 25.
이방원이 강행 임명한 문서 (전북) 장수에는 조선 초기 고위인사를 임명하는데 왕(임명권자)과 사간원 또는 사헌부(현 법무부 인사검증단)의 마찰을 보여주는 귀한 문서가 있다. 사간공 “안성安省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현 도지사?) 고신告身 왕지王旨(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다. 조선초 태종(이방원)이 서경제도(인사검증시스템)를 무시하고 사간공 안성을 독단적으로 임명한 임명장이다. 조선초에 제작된 왕지로 희소성이 높으며 당시 정치상을 엿볼 수 귀중한 자료다. 단, 광주안씨 사간공파 문중에서 어떻게 장수에 소장하게 됐는지 등의 궁금증이 해결된다면 국가유산(보물) 승격이 당연시 되는 중요자료다. 장수는 이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품고있는 자랑스런 고장이다~^^ *** 이상은 장수군 학예연구사 이현석 선생 자랑질이다. 태종 14.. 2024. 3. 25.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1) 왜 남녀 위치 머리 위치는 반대인가? 보꾸와 열라리나 바까야로데싯따. 머리를 남쪽으로 둔 이유를 이제야 풀다니. 해직 직후 직설 무령왕릉 단행본 원고를 막판 손질하던 과정에서 2016년 3월 25일 나는 내 페이스북 계정에 저와 같이 적으면서 아래 두 도판을 제시했다. 도판1이 무령왕이 죽어 지금의 공주 송산리고분군 이른바 공주 백제왕릉원에 묻힐 상태의 묘실 배치도요 도판2는 그로부터 3년 뒤 무령왕비가 죽어 같은 무덤에 왕비가 매장될 때 모습을 간단히 시각화한 것이다. 결국 이 무덤은 1971년 발견 개봉 당시 도판2와 같은 상태로 발견됐거니와 이것이 심대한 두 가지 문제를 양산했는데 첫째 남녀 위치가 바꼈고 둘째 머리 방향이 바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동아시아 예제에 의하면 첫째 부부를 합장할 적에 남자는 서쪽, 여자는 동쪽.. 2024. 3. 25.
왜 다리미를 북두칠성이라 하는가? 요새야 다리미라 하면 전기다리미를 생각하나 전통시대 다리미는 다음과 같다. 실례로는 청동을 제시했지만 철제도 드물지 않다. 저 생김이 흡사 북두칠성이라 그 생김이 흡사 청동다리미 단면도다. 그래서 다리미를 위두熨斗라 해서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斗자를 굳이 썼다. *** previous article *** 북두칠성 상징으로 다리미를 매장한 조영동 무덤 북두칠성 상징으로 다리미를 매장한 조영동 무덤아직은 불완전하다. 1988년 영남대박물관이 조사한 경산 조영동 E 2-1호분이다. 환두대도가 나온 걸로 보아 묻힌 사람은 남자로 본다. 축조연대는 오세기 후반으로 조사단이 봤다. 저 다리미가 칠historylibrary.net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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