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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금관 빨리 파라, 각하께 갖고 가게”

by taeshik.kim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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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제474호


“금관 빨리 파라, 각하께 갖고 가게”

최대 고분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실험용으로 삼았던 천마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다.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되자 청와대 경호실에서 금관을 가져오라는 연락이 왔다. 발굴 현장은 분주해졌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제474호



“1973년 7월인가 금관이 나왔을 때 신문에 나니깐 청와대에서 가져오라 그러더라고. 김정기 박사한테 가져갈 수 있느냐 물으니, 필요한 조사와 기록을 다 마친 뒤에 들어내어 가져갈 수 있다고 해요. 저녁에 출발했어요. 자동차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여서 차를 두 대 가져갔어요. 금관 실은 차 한 대, 호송차 한 대. 금관 실은 차가 대구쯤 오다 고장 났어요. 뒤에 오던 차에 (옮겨) 싣고 청와대에 들어가니 (오전) 8시가 안 되었어. 경호실 사람들도 출근하지 않았어. 들어가도 괜찮다고 해서 안에 들어가니 대통령 혼자 앉아 계셔요. 집무실에…. 금관을 내어놓고 설명했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중 문화재 부문 조사 정비를 전담한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정재훈 소장의 1973년 천마총 발굴 회고담이다. 천마총에서 그 희귀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다는데, 경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당시 조사보조원으로 참가한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의 회고도 들어볼 만하다.

“금관이 나왔잖아? 그 소식이 보도된 직후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람이 와서 그러더라고. ‘빨리 파라, 갖고 가게.’ 그래서 현장에서 난리가 난 거야. 이제 막 노출됐는데 실측이나 사진도 안 찍고 어떻게 보내? (발굴단장) 김정기 박사가 박 대통령한테 많은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천마총 발굴은 정말로 발굴 원론대로 하려고 했어. 그래서 청와대 가는 것보다 조사가 우선이라고 한 거야.”

ⓒ연합뉴스
천마도 발굴 현장 모습. 문화재위원회는 제155호분의 이름을 천마총으로 바꾸었다.

이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그림이 대충 그려진다. 1973년 7월 어느 날, 천마총에서 금관이 출토된다. 발굴단 측은 당일 낮에 금관에 대한 실측, 사진 촬영 등 조사를 완료했다. 그 덕분에 금관은 그날 저녁 차량에 실려 청와대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정재훈 소장이 다음 날 아침 금관을 청와대로 갖고 들어갔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금관은 서울 어디선가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다. 금관에 대한 ‘비공식’이자 최초인 발굴 설명회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렸다. 정 소장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대통령 집무실에서 박정희를 만나) 지금까지 나온 금관의 여러 가지 특성이라든가, 이런 유형의 금관이 고고학적으로는 어느 지역에서 출토되었는지 등, 쿠르간 묘 출토품, 유라시아 지역과 러시아 고고학까지, 비슷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신라의 금관처럼 대륜(臺輪)과 관식(冠飾)이 있는 금관은 중국과 로마, 그 외 다른 데도 없는 거라고, 그렇게 설명을 해드리니 대통령이 김종필 국무총리, 근혜, 근령, 김정렴 비서실장 등을 오라 했어. 그날 다. 아침에 대통령이 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한 15분 사이에 다 오더라고.”

ⓒ연합뉴스
천마총 내부의 유물을 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주의할 것은, 금관을 청와대로 가져가 대통령에게 설명한 사람이 발굴단장 김정기 박사가 아니라 정재훈 소장이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문화재관리국장을 맡게 되는 정재훈 소장은 김정기 박사와 더불어 경주 개발 문화재 부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인물이다. 행정관료 출신인 정 소장은 ‘한국 전통 조경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놀랍게도 독학으로 조경학을 공부해서 그 경지에 이르렀다. 박학다식의 대명사인 그는 문화재 분야에도 통달했다. 정재훈 생전에 자주 만났으며 그의 성정을 조금은 안다고 자부하는 필자가 추정하건대, 정재훈은 금관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자료를 섭렵한 뒤에 박정희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만큼 정열적이었다.

ⓒ연합뉴스
정재훈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위).

신라사를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천마총은 당초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한 일종의 교보재(중심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실험용 작업)로 선택된 곳이었다. 천마총 동쪽에 굼벵이처럼 길게 드러누운 황남대총은 한반도 최대의 고분이다. 황남대총의 성공적 발굴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천마총에서 쌓으려 했다. 문화재관리국이 천마총 발굴을 완료한 이듬해에 발간한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 가운데 김정기 박사가 쓴 글의 일부를 살펴보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르는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1기의 고분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기초로 이 지구의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한 표형분(瓢形墳:표주박 모양 무덤)인 제98호분을 발굴한 후 복원하여 그 내부를 내외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시책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제98호분은 규모도 거대하지만 또 지금까지 이만한 완형분(完形墳)을 발굴한 예가 없어서 처음부터 제98호분을 발굴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먼저 좀 작은 고분을 발굴하여 그 내용과 결과를 알고 경험도 쌓아 제98호분의 발굴에 착수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어 1973년 3월19일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제98호분과는 서로 동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며 같은 지구의 고분군 중 최북단에 위치한 제155호분이 선정되었다.”

여기서 제98호분은 황남대총, 제155호분은 천마총을 말한다. 경주 분지에 산포한 신라 시대 고분들(모두 155기)에 일련번호(제98호분 등)를 붙인 것은 조선총독부다. 박정희 정권의 경주 개발 계획 당시에도 같은 일련번호로 불렸다. 제155호분에 천마총이란 근사한 이름이 붙은 것은, 1973년 4월의 위령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까지 8개월간의 발굴조사가 완료된 이후다. 출토 유물 가운데 천마도(天馬圖)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면서, 1974년 9월 문화재위원회 의결을 거쳐 제155호분이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현재 천마총은 신라 시대 적석목곽분 가운데 내부가 공개된 유일한 유적이다.

문화재관리국이 발굴 완료 1년 만에(1974년)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를 발간한 것 역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무려 469쪽의 특대형 호화판 보고서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발굴조사 보고서가 이토록 빨리 나온 적이 없다.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유적이 더 많았을 정도다. 이는 아마 천마총에 대한 관심이 워낙 뜨거웠기 때문일 터이다. 정재훈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천마총은, 그 발굴 보고서가 신속하게 나옴으로써 국내외 학계에서 인용되기 시작했으며, 신라사를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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