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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개국(開國)과 건복(建福), 진흥왕과 진평왕의 나이

by taeshik.kim 2018.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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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보면, 삼국 각왕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을 발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는 생일(生日)의 탄생과 밀접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누구나 기념하는 생일이 삼국시대 당시에는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으니, 개인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해 어느 날에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느 해 어느 달 며칠에 죽었느냐가 더욱 중요했으니, 이는 바로 기일(忌日) 때문이었다.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으되, 제삿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무령왕릉 묘권(墓卷)을 봐도, 무령왕이 죽을 때 62세였다는 사실만 적기했을 뿐, 정확히 몇월 며칠 몇시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반면, 죽은 시점은 정확히 기록했으니, 이 역시 기제사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중국사를 봐도 위진남북조시대 이전까지 황제 나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의외로 드물어, 한 고조 유방만 해도 언제 태어나 죽을 때 몇 살이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신라사를 볼 적에도 각 왕들의 정확한 생몰년이 없어 애를 먹는 일이 많으니, 그런 점에서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은 좀 묘하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의 생년을 추정하는 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 증언을 하거니와, 즉위할 때 나이에 대해 전자는 7살이라 하고, 후자는 15살이라 한다. 이걸 왜 밝혔느냐 하면, 7살이건 15살이건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는 하지 못하고, 이런 경우 대개 거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그 어머니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까닭이다. 법흥왕 외손자요 조카인 진흥은 외할아버지가 죽었을 적에 엎혀서 왕이 되었으니, 그 힘은 법흥왕 딸로서 삼촌한테 시집간 그의 어머니 지소부인에 있었다. 지소는 눈물 나는 권력투쟁에서 마침내 이겨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힌 것이다. 

저 두 가지 상이한 나이 중에서 《삼국사기》가 매우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나 역시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또 많은 지적이 있듯이, 나 역시 같은 이유를 달거니와, 그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본기 12년(551) 봄 정월에다가 저록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는 흔적 때문이다. 

왜 하필 이해에 신라는 연호를 바꾸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해에 진흥왕이 친정(親政) 체제에 비로소 돌입했기 때문이다. 7살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를 따를 때 이해에 진흥왕은 18살이 된 것이며, 이것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제왕이 성년이 되는 보편 나이다. 반면 15살을 따른다면, 이해에 진흥왕은 벌써 25살이나 된 시점이다. 

나아가 우리는 진흥이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개시한 시점이 그가 18살이 되는 해 정월이라는 점을 주시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선학들은 전연 주목하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서도 앞서 내가 말하는 생일이 이때까지만 해도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다는 내 추정은 다시금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진흥왕이 태어난 달이 정월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무래도 그가 18살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친정 개시 연도를 따랐다고 보는 편이 순리일 것이다. 

그의 손자 진평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기타 여느 문헌에도 즉위 당시 나이가 없다. 각종 인명사전에서 생몰년 중 몰년만 있고 생년은 항용 퀘스쳔 마크(?)를 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진흥왕한테서 그의 나이를 밝혀낸 바로 그 수법으로 진평왕 역시 나이를 추정할 근거가 있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 하나 확인할 사안이 있다. 진평왕은 어린 나이, 아마도 성년에 도달하기 전에 즉위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대해서는 번다하므로 자세한 논의는 略한다. 암튼 진평 역시 그의 할아버지 진흥이 그랬듯이 어린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즉위 초반 한동안은 그의 어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섭정했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 다음 진평왕본기 대목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6년(584) 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이를 진흥왕본기에 대입하면, 이때 진평왕 역시 18살에 도달해 친정을 개시하고, 그 상징 조치의 하나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에서 연호를 할아버지 진흥왕 때 이래 죽 쓰기 시작한 홍제(鴻濟)를 버리고 건복이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연호를 개정한 시점이 하필 2월이다. 물론 이 경우 정월에 개정한 진흥왕과 대비할 적에 한 달 차이는 있지만, 이는 두 가지 가능성도 합치를 꾀할 수 있다. 

첫째, 이 기간에 책력이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책력이 2월을 새해 첫 달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신라사를 보면 정월과 2월이 새해 첫 시작을 왔다리갔다리 하는 모습을 완연히 보인다는 점이다. 그 대표 사례가 새로운 왕이 즉위한 다음 그 이듬해 예외없이 신궁(神宮)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거니와, 2월인 경우가 많다. 이로써 본다면, 정월이건 2월이건 큰 차이는 없다. 정월이건 2월이건, 그달이 신라인들에게는 새해 시작으로 간주된 것이다. 아무튼 진흥왕에 대비되어 살핀다면, 생년을 알지 못하는 진평왕은 즉위할 때 13세였다가 18세가 된 즉위 6년째에 친정을 개시한 셈이다. 

한데 놀랍게도 《화랑세기》에는 이 점이 명확히 보인다. 22세 양도공(良圖公) 전에는 "진평제가 즉위할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치니 (할머니) 사도태후가 보명(寶明)과 미실(美室) (두 후궁한테) 제를 이끌도록[導] 했다."

이에서 보이는 '導했다'는 말은 섹스 양육을 말한다. 양기(陽氣)를 길러주도록 섹스 보모 노릇을 했다는 뜻이거니와, 어린 진평을 수청들면서 그에게 여자 맛을 알도록 가르쳤다는 뜻이다. 왜 어린 왕을 이리 양육해야 하는가? 후손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빨리 성에 눈이 뜨야, 왕자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진평은 딸만 두고 적통 왕자를 두지 못했으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상 이 이야기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김영사, 2002 중 제15장 '진평왕과 연호 건복'(356~368쪽)에 이미 상세히 다룬 것으로, 그것을 토대로 하되 몇 가지 새로운 항목을 보강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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