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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경관은 만드는 것이지 자연이 주는 선물은 아니다

by taeshik.kim 2018.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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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설산 일대 풍경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하지만 이 구절이 들어간 애국가 가사와 곡조가 등장할 적에 한반도 삼천리는 화려한 강산과는 거리가 전연 멀어, 온통 천둥벌거숭이였으니, 그리하여 매양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곳곳은 사태(沙汰)로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고, 그것이 초래한 매몰에 인적·물적 희생이 다대했다. 사태는 강바닥 상승을 부르기 마련이라, 그만큼 물난리에 고통이 더 컸던 것이다. 김동인이 말한 '붉은산'이 그 무렵을 우뚝히 증언하는 말이었다.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70년대 온 산하가 그렇게 붉었으니, 산허리는 곳곳이 여드름 자국 잔뜩한 곰보 같았다. 


70년대를 회고하는 사람들한테 익숙한 다른 우리 주변 풍경에 백사장(白沙場)이 있다. 당장 내 고향 김천만 해도,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감천이라는 지류가 있어, 그것이 관통하는 김천 시내 그 강안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발달해, 소장이 섰는가 하면, 오일장에 즈음해서는 씨름대회가 열리곤 했으니, 그 시대 최고 씨름꾼 김성률은 바로 이런 김천이 낳은 스포츠스타였다. 


낭만으로 점철하는 그 백사장. 하지만 단군조선 이래 우리 산하가 줄곧 이런 백사장이 펼쳐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산림파괴가 준 선물이었으니, 직접으로는 헐벗을 대로 헐벗은 산에서 빗물에 씻긴 모래 사태가 준 환경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정겨운 고향 운운하며 백사장을 오버랩할지 모르나, 백사장은 홍수를 부르는 직접 동인이었다. 한강 역시 그러해, 지금이야 전두환 정권 최대 치적으로 꼽는 한강 치수사업이 마침내 성공하면서, 한강에 의한 직접 범람이 요새는 먼나라 얘기로 변해버렸지만,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강은 걸핏하면 범람을 일삼았으니, 그 범람이 부른 선물이 바로 드넓은 한강 백사장이었다. 


80년대 중반 김천 아포의 한 백사장



애국가 얘기 나온 김에, 나로서는 참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구절로 그 가사가 첨절하거니와, 당장 저 '화려강산'은 차치하고라도,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 했지만, 애국가 등장 무렵 남산에 소나무가 있기라도 했는지 적이 의뭉스럽다. 지금의 서울 시내 중심을 걸터앉은 남산 중에서도 한쪽 구역에 아름드리에 가까운 소나무 군락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애국가에 맞춘 남산 경관 조성 사업 일환으로 나중에 심고 가꾼 모습이다. 더불어 지금이야말로 온산이 수목으로 울창하니, 진짜로 애국가가 말한 금수강산이다. 


다만, 그 수식어 '삼천리'는 반토막이라, 휴전선을 건너면 전연 딴판인 경관이 펼쳐지니, 저 북녘 온국토는 우리가 70년대까지 익숙한 그 풍경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남북협력 사업이 본격화하거니와,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철도건설과 산림 녹화라는 사실은 삼림이 얼마나 중요한 당면 사업인지를 역설한다. 당장 내일 개막하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 평양편에 우리 정부 수행단으로 산림청장이 들어간 이유다. 


지금의 북한, 70년대 이전까지의 남한 산하, 다시 말해 백사장과 민둥산이 대표하는 그 경관은 흔적을 추적하면, 대체로 17세기 중반 이래 조선의 산림이 급격하게 황폐화하면서 생성된 것임을 짐작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대로 산림이 우거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불과 60~70년대 이전만 해도 화전(火田)이 광범위해서, 지금 우리가 보는 풍광과는 사뭇 달랐음이 틀림없다.


부여 능산리 절터



경관...랜스케입landscape은 자명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요 인위가 개입한 결과물임을 나는 여러 번 말했거니와, 이런 간단한 이해를만 있어도, 우리가 쉽게 말하는 자연(自然)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나 하는지, 나는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인위와 대비하는 의미에서 자연은 어쩌면 매우 폭력적이다. 그 폭력을 다스리고자 하는 인간의 간섭 행위를 인위라 한다면, 경관이란 자연히 주어지는 그 무엇도 있겠지만, 한반도에서 그 자연은 어쩌면 단군조선 이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그만큼 자연과 인위가 빚어내는 교향곡인 경관의 중요성이 새삼 중요해진다고 나는 본다. 


이런 경관으로 나는 우리 대표 고도들인 경주와 부여, 그리고 공주 세 곳을 들어 비교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경주가 여타 두 고도와 확연히 다른 점은 전자가 비교적 평화로운 왕권 교체 속에서 전 왕조 유산이 비교적 온전하게 살아남은데 견주어 후자 두 고도는 전자에 거점을 둔 왕조에 궤멸에 가까운 막대한 훼손을 보았다. 신라는 무력으로 백제를 정벌한 까닭에 그것을 멸할 무렵에 제1 수도 사비 부여와 제2 도읍 웅진 공주를 초토화했다. 그것이 멀리는 비슷한 고도임에도 작금에 이르는 왕청난 랜스케입 차이로 빚어지는 한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원초의 자산 차이와 관계없이 고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인위의 개입이 얼마나 경주되었는가는 두 지역 왕도의 랜스케입까지 왕청나게 갈라놓았다. 물론 공주와 부여에 이런 인위가 개입되지 않았다 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시대가 국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오늘날 우리한테 익숙한 경주를 만드는 바탕이요 남상이었다. 


경주 대릉원



공주를 보라. 공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는 공주 시내에서 백제 고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 유산을 대표한다는 무령왕릉도 규모가 코딱지인 데다, 동시대 신라무덤과는 달리 산중턱을 까고 들어가 무덤방을 만들고 이렇다 할 봉분 시설을 마련하지 않는 데다 철문까지 꽝꽝 닫아놓아 적어도 외양으로는 볼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무령왕릉 개방을 줄곧 주장하기도 한다. 


부여는 정림사지, 더욱 정확히는 그 석탑이 아니면 백제라고 느낄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여타 낙화암이며, 능산리고분이며, 부여나성을 들기도 하겠지만, 휑뎅그레한 기분은 씻을 길 없다. 


그런 공주와 부여가 최근 들어 급변하는 중이다. 공주의 경우 주로 제민천 일대 도시재생산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이 사업을 따라 도시 면모가 바뀌는 중이다. 부여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와 맞물려 이미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읍내에서는 전봇대가 사라졌으며, 곳곳에서 백제 고도 맛을 내는 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물론 그 내용 하나하나가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실제 그렇기도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경관은 인위가 개입한 결과이지, 결코 소위 자연 그대로 놔두어서는 주어질 수가 없다. 나는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연이 오직 숭고하기만 하다는 소위 원초론적 환경보호주의에 찬동하지 않는다. 민둥산을 없애고 수풀을 만들었듯이, 강바닥을 준설하고 둔치를 건설함으로써 백사장을 없앰으로써 범람을 퇴출했듯이, 그런 적극적인 인위가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공주 석장리박물관



랜스케입, 혹은 그 일환으로서의 고도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마른 하늘 제우스가 각중에 내리는 벼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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