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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고혜진高惠眞

by taeshik.kim 2018.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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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上 : 4년(645)…5월…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고]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와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우리가]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그가]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고]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군사]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그것은] 모두 위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장손]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 명을 주십시요.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山)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대답하였다.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저희]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다다라서 저녁에는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험한 형세를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멈추었다.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서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도종이 발을 상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너의 죄는 마땅히 죽을 만하나, 다만 짐은 한(漢)나라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쓴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게 하였다.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무릇 [고구려 정벌에서] 현도·횡산(橫山)·개모·마미(磨米)·요동·백암·비사·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건안·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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