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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공주 공산성의 옻칠갑옷

by taeshik.kim 2018.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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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이태희는 그의 주된 전공, 혹은 관심사가 온통 중국이라, 개중에서도 이른바 서역이 대표하는 변방 역사에 관심이 지대하다. 고려대 동양사학과를 가서  《당육전唐六典》을 역주한 김택민 교수 슬하에 들어가 내친 김에 대학원까지 입적해 중국사 공부에 투신한다. 2018년 연말 현재도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는지 아니했는지 알 수 없는 아리까리 학적學的 인생을 계속하는 바, 나를 포함해 주변에서 학위논문부터 쓰라는 닦달을 꿋꿋이 버티는 친구다. 





변새邊塞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그 화려한 당시단唐詩壇에서도 이른바 변새시邊塞詩를 대표하는 잠삼(岑參)에 환장한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들어갔지만, 아무리 봐도 넌 전공으로 볼 적에 국박으로 넘어가는 게 좋다는 말을 나도 한 적이 있지만, 마침 사내 커플이라, 이제 서로 머리가 커지니 부인과는 다른 궤적을 걸어야 할 법도 하다는 판단에서였는지, 기회가 나자 잽싸게 국박으로 튀어, 한동안 경주박물관 생활을 했다. 


경주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문집인지 문학작품인지에 나타난 경주 역사를 정리한 특별전을 주관한 적도 있거니와, 이 어려운 주제의 특별전을 아주 잘 만들었더라. 나는 요새도 국립경주어린이박물관 백팩을 하고 다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경주박물관 시절, 그를 통해 얻은 선물이라, 남들한테 부러움을 산다. (참고로 내가 이 백팩을 강탈할 적에 나는 풍찬노숙 시절이었으므로, 김영란법 적용대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해둔다!!!!!) 





경주박물관 시절 한동안 허리가 나가다시피하는 중상에 신음하는 모습을 안타까이 지켜보았거니와, 이젠 그 역시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중년이라, 언제나 동안일 듯한 그도 머리 모양이 나랑 진배없이 백두족白頭族을 방불한다. 이태희가 왜 변경사를 선택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중국사 전공자로서 중국 중심주의에 격렬한 반감이 있다는 것만은 내가 눈치를 챘다. 


그가 글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나, 적게 쓰는 글 하나하나는 무척이나 공을 들이며, 아무리 단문이라도 근거 없는 주장을 일삼지는 않는다. 이런 그가 느닷없이 언론지상에 등장했으니, 새해를 하루 앞둔 30일 우리 공장 문화부 박상현 기자가 공론화한 "공산성 출토 옻칠갑옷은 백제 아닌 당나라 제작품" 제하 기사가 그것이라, 나는 여직 이 논문 원본을 열람한 바 아니라, 박 기자 보도문을 통해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간단하다. 


2011년과 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공산성 옻칠 갑옷은 당 태종 연호인 '정관(貞觀) 19년'을 포함하는 붉은색 명문이 있거니와, 이태희는 이것이 종래에 주장된 이 갑옷이 광명개도 아니며, 더구나 백제인이 착장한 것도 아니며, 중국제로서 중국 장수가 입었다는 것이다. 


중앙박물관 기관지 '고고학지' 제24호 최신호에 발표한 '공산성 출토 칠갑(漆甲) 명문 재고'라는 투고문을 통해 이태희는 국내 학계가 주장한 이 갑옷의 백제 제작설을 조목조목 반박했거니와, 현재까지 확인한 갑옷 글자 약 40자를 다시금 분석하면서, 그 제작 시기야 종래대로 '645년 4월 21일'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서 보이는 내용은 도저히 백제일 수가 없고, 동시대 당나라 제품임은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 자세한 정보야, 저 앞에 링크한 기사 전문을 열독하거나, 혹은 그 잡지를 중박에서 원문 제공하니 그걸로 보라고 하고 싶다. 


이 주장을 접하면서 나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 앞에서 장황히 이태희를 증언했거니와,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신뢰를 보내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신중하면서도 하나하나 근거 대기를 좋아하는 고증학파인 그를 알기에 그의 판단을 존중하고 싶으며, 둘째, 저것이 백제산이 아니라 중국산이라는 주장은 적지 않게 제기된 까닭이기 때문이다. 


저 갑옷은 명문이 있다 해서, 나아가 옻칠 미늘 갑옷이라 해서 공개 당시에 이미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거니와, 이미 공개 당시에 중국산 아닌가 하는 의문 제기가 상당했다는 사실이다. 공개 현장에서 당장 기자들도 그에 의문을 품었다. 


저것이 중국산이라는 주장은 적지 않았다. 저 당시 백제는 무슨 왕 몇 년 이렇게 연대를 기록하거니와, 정관 몇 년이라는 연대는 그에서 벗어나며, 무엇보다 인명 등으로 보고된 것이 도저히 백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까닭이었다. 이런 새로운 백제 자료 출현에는 어케든 이름 하나, 그것도 가장 먼저 올리고 싶어하는 이도학 같은 이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문제의 갑옷관련 자료는 추가 발굴조사가 진행하면서 더욱 많은 실물이 수습되었으며, 이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존처리하면서 그 중간중간 그와 관련한 소식을 전했는가 하면, 정식 발굴보고서도 나오지 않았나 기억한다. 


저 발굴은 이 발굴을 주도한 공주대 교수 이남석 회심작이었다. 이 발굴소식을 접한 그의 생전 흥분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중국산 주장에 맞서 시종일관 백제산임을 주장했으니, 그 음성 지금도 뚜렷하다. 


저 자료 출현 소식을 언론공개 전에 접한 나는 이후 전개하는 일련의 사태 전개에 이렇다 할 판단을 하지 않았다. 내 관심권밖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관심권밖이다. 내가 아니래도 할 말이 많은 사람 천지인데, 언젠간 나도 한 마디 할 날이 있겠지 한다. 추후 이태희 논문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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