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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근초고왕(近肖古王)

by taeshik.kim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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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24(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즉위년 :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2년(347) 봄 정월에 천신(天神)과 지신[地祇]에게 제사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21년(366) 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23년(368) 봄 3월 초하루 정사에 일식이 있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良馬] 두 필을 보냈다.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서울[都]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27년(372) 봄 정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8년(373) 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比流)의 둘째아들이다. 병오년에 즉위해 29년을 다스렸다. 신미년에 북한산(北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권제37(잡지 제6)  지리 :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니, 동명왕(東明王)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웅천(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울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 곧 의자왕 재위 20년(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庾信)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삼국사기 권제24(백제본기 제2) 근근수왕 즉위년 : 근구수왕(近仇首王)<수(須)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고국원왕]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중략...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은 근초고(近肖古)아들이다. 을해년에 즉위해 9년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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