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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분야에서 단연 압도적 두각을 드러낸 김유신은 선덕왕 말년에 발발한 비담의 난까지 계엄총사령관으로써 진압하는 한편, 그 작당 30명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최고실력자로 등극했으니, 진덕왕 재위기간(647~654)은 그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진덕이 과연 여주(女主)로서 어느 정도 지도력을 발휘했는지는 미지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는지, 아니면 바로 앞선 시대 그의 사촌언니 선덕이 그랬듯이 주체로써 국정 운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진덕왕 시대 신라는 소위 집단지도체제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는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음 《삼국유사》 기이편 '진덕왕(眞德王)' 다음 증언에서 비롯한다. 

 

왕이 즉위한 시대에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다)·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사람이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는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은 완력이 이처럼 세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모든 이는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 신라에는 네 곳 신령스런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 네 곳 중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 금강산(金剛山)이다. 


이로 보아 진덕은 야심 넘친 앞선 선덕과는 분명히 결이 달라,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국가 상징으로 시종일관한 재위 기간을 보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해 본다. 그 자리를 이들 대신이 짊어졌으니, 이 시대를 호령한 중신으로 알천(閼川)·림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렴장(廉長)·유신(庾信)의 여섯 명을 들었다. 이들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고, 국가중대사는 이들의 회의를 거쳐 결정한 듯하다. 이 그룹에 김춘추가 왜 들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들거니와, 나는 이 일이 진덕왕 초반기 사정을 증언하는 것으로 본다. 김춘추는 이때만 해도 정국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서서히 차기 주자로 떠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나서다. 이런 의문이 《화랑세기》에는 더욱 명백히 보이거니와, 폐위된 왕의 아들로 정우성 뺨치는 잘생긴 얼굴 빼고는 이렇다 할 이력이 없던 김춘추한테 김유신은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우지 못한다"면서 전폭적으로 밀어준다. 김춘추가 권력을 장악한 힘은 바로 군사력이었다. 풍월주가 됨으로써 그를 추종하는 군사집단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그에서 김유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데 《삼국유사》 저 대목이 《화랑세기》에도 14세 호림공(虎林公) 전에도 다음과 같이 보이니, 


(호림공은) 조정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렴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보종공(宝宗公)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노니니, 통일의 기초가 공 등에게서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고 한 증언이 그것이라, 《삼국유사》와 비교할 때 《화랑세기》에는 보종(宝宗)이 추가되고, 더구나 이들 일곱명이 북두칠성에 견주어 칠성우(七星友)를 결성했다는 점이 새롭다. 둘을 비교할 때 《화랑세기》가 더 생생하고 구체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데 우리네 역사학도, 특히 신라사학도들은 앞서 인용한 저 구절을 전연 엉뚱하게 해석하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저 회의체를 소위 화백회의로 보아, 신라사상을 왜곡확대 재생산하는 근거로 삼는가 하면, 등신이 아니고서는 저 구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을 알 터인데도 유독 저 친구들만 그것을 몰라 알천 중심으로 이해한다. 알천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완력이 셌고, 그가 저 회의를 주재했다 해서, 저 시대 최고 실력자로 알천을 거론한다. 


이는 마침 《삼국사기》 신라 무열왕본기 즉위년 조 다음 대목, 곧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가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는 구절과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켜, 알천이 진짜로 실력자였던 줄로 안다. 하지만 등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역사를 이리도 호도할 수 있는가? 


왕이 되라 권했는데도 "난 안 되니 춘추공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거 각본이란 사실 삼척동자도 안다. 김춘추로 정해진 마당에 쇼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  《삼국유사》에 뭐라 했는가? 알천이 힘이 세고, 아마도 가장 연장자라 회장을 했지만, 하지만 모든 이가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지 않는가 말이다. 알천은 꿔다논 보릿자루였고, 실제 권력은 이미 김유신한테 급격히 기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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