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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춘추金春秋

by taeshik.kim 201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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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년 ~ 661년, 재위 654∼661년. 진지왕 손자이면서 아버지는 이찬(伊飡) 용수(龍樹)인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작은아버지 용춘(龍春)에게 입적됐다. 어머니는 진평왕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첫 부인 보라(寶羅)에게서 딸 고타소(古陀炤)를 두었으며, 이어 625년 무렵 김유신의 누이 문희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문무왕 김법민 이하 자식들을 둔다. 김유신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세력을 키운 그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씨가 마르자, 진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풍월주 출신인 그는 즉위 전에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약하면서 대중국 외교전을 수행했으며, 즉위한 뒤에는 당의 지원을 이끌어내숙적 백제를 멸망시킨다. 곧이어 고구려 정벌에도 나섰으나, 실패하고는 사망한다. 



舊唐書卷三 本紀第三 太宗下 : 22년…閏月…癸未에 新羅王이 그의 재상인 이찬천(伊贊千)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내조(來朝)케 했다.(二十二年…閏月…癸未, 新羅王遣其相伊贊千金春秋及其子文王來朝.)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ㆍ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고장(高臧)[보장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삼았다. 
 
舊唐書 권 제199上 列傳 제149上 東夷 新羅國 :  [貞觀] 22년(648. 新羅 眞德女王 2)에 眞德이 그의 아우 國相 伊贊干 金春秋[註026] 및 그의 아들 文王을 보내와 朝覲했다. 조서를 내려 春秋에게는 特進을 除授하고, 文王에게는 左武衛將軍을 除授했다. 春秋가 國學에 나아가 釋奠 및 講論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太宗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溫湯』ㆍ『晋祠碑』 및 新撰한『晋書』를 내렸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3品이상의 관원을 시켜 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했다. …[永徽]3년(652. 新羅 眞德女王 6)에 眞德이 卒하자, [高宗이] 擧哀했다. 詔書를 내려 春秋로 뒤를 이어 新羅王을 삼아서 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제수하고, 樂浪郡王에 封했다. [永徽] 6년(655. 新羅 武烈王 2)에 百濟가 高[句]麗ㆍ靺鞨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新羅의 北界를 침입해 3십여城을 함락시켰다. 春秋가 使臣을 보내어 表文을 올려 구원을 청했다. 顯慶 5년(660. 新羅 武烈王 7)에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熊津道大總管에 임명해 水軍과 陸軍 10만을 거느려 [出軍시켰다.] 이어서 [金]春秋를 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해 定方과 함께 百濟를 討平하게 하니, 그 나라의 王 扶餘義慈를 사로잡아 闕下에 바쳤다. 이로부터 新羅가 점차로 高[句]麗ㆍ百濟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은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龍朔 원년(661. 新羅 文武王 1)에 春秋가 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太府卿 法敏으로 뒤를 잇게 해, 開府儀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2년(648)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당에 조공케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물었다.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한]질허가 대답하였다.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기년(紀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태종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머물러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어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君解)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유신은 재상 이찬 알천(閼川)과 논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을 섬겨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特進)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12년(692) 봄에 대나무가 말랐다.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말로 전하였다.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거룩한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에게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이는]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야 할 것이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대답하였다. “저희 나라[小國]의 선왕 춘추의 시호(諡號)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제가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별세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존한 묘호(廟號)가 성조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엎드려 바라건대 사신께서 대궐의 뜰에서 복명할 때 이대로 아뢰어 주시오.” 그 후에 다시는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즉위년 조 :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것을 꾀하여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ㆍ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삼국사기 권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15년...8월에 왕이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아뢰었다.


삼국사기 권제33 (잡지 제2) 색복 : 신라 초기의 의복 제도는 색채를 상고할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의 복색의 존비(尊卑) 제도를 정하였지만, 아직도 오랑캐[夷]의 풍속 그대로였다. 진덕왕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태종(太宗)황제가 조서로써 이를 허가하고 아울러 옷과 띠[衣帶]를 주었다. 드디어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의 것으로 바꾸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진덕왕(眞德王)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 태종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왕위에 오른데다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 때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 일일 것이다). 당 황제(皇帝)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태종춘추공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며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앞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설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가 말했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ㆍ각간 문왕(文王)ㆍ각간 노차(老且)ㆍ각간 지경(智鏡)ㆍ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ㆍ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三斗)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러나 경신(庚申; 660)에 백제(百濟)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성안 물건값은 포목(布木) 한 필에 벼가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어서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불렀다.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武)王)의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 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백제百濟의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암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함)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는 사자수(泗차水; 부여扶餘에 있는 강 이름)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 봄 1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이 글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ㆍ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 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우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왕이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장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한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ㆍ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이곳에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蓮)ㆍ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ㆍ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泗차城)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임금에게 뵈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모두 비를 세워 주었다.7년 임술(壬戌; 662)에 당에서는 소정방을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平壤道)로 고쳐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藩)을 평정했다.건봉(乾封) 2년(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있는 글이다).<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호(文虎(武))왕이 즉위한 5년 을축(乙丑; 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順從)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殘暴)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地理)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을 업신여기니 황제(皇帝)는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宮室)과 주택(住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 없애어 뒷 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歸順)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전의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겨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종(始終)을 두텁게 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患亂)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만일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융隆 들을 당唐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扶餘王 융隆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융隆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문盟文에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ㆍ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ㆍ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後宮)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ㆍ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ㆍ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ㆍ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장춘랑(長春郞) 파랑(罷郞) :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 2 성덕왕(聖德王) :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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