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ho'sWho in Ancient Korea

김효종(金孝宗)

by taeshik.kim 2018. 3. 7.
반응형



삼국사기 권제12(신라본기 제12) 효공왕 : 6년(902) 봄 3월에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孝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효녀 지은 :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며[定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자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4일이 지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말하기를 “지난 날의 식사는 거칠었으나 밥 맛이 달았는데 지금 식사는 좋으나 맛이 옛 같지 않으며, 간장을 칼날로 찌르는 것 같으니 이 어쩐 일이냐?” 하였다. 이에 딸이 사실대로 아뢰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때 효종랑(孝宗郞)이 놀러 나갔다가 이를 보고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그의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租) 500섬, 집 한 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집에 곡식이 많았으므로 빼앗거나 훔쳐 가는 자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담당 관청에 명하여 군대를 보내 교대로 지키게 하였고 그 마을을 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이어서 표를 올려 그 아름다움을 당나라 황실에 올려 아뢰었다. 효종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 적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는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 형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 : 효종랑(孝宗郞)이 남산(南山) 포석정(포石亭․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입니다. 그가 눈 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먹고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糠粃)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난(色難)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郎)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은 김씨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아버지는 효종(孝宗) 이간(伊干)이니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봉됐다. 할아버지는 관=(官=) 각간이니  의흥대왕(懿興大王)에 추봉됐다. 어머니는 계아대후(桂娥大后)이니 헌강왕(憲康王) 딸이다. (정해년에 즉위해 8년을 다스렸다). 을미년 땅을 바치고 태조에게 귀부했다. 태평흥국(大平興國) 3년 무인년에 훙(薨)했다. 능은 --(□) 동쪽 골(洞)에 있다. 오봉(五鳳) 갑자년에서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도합 992년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응형

'Who'sWho in Ancient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목(神睦)  (0) 2018.03.07
효종(孝宗)  (0) 2018.03.07
지은(知恩)  (0) 2018.03.07
인경(仁慶)  (0) 2018.03.07
김인경(金仁慶)  (0) 2018.03.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