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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흠순(金欽純)

by taeshik.kim 201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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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681년. 일통삼한 전쟁기에 맹활약한 신라 장군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소생이며, 김유신에게는 동부동모 동생이면서, 태종무열왕비가 된 문명(문희)의 오빠다. 풍월주 출신이다. '欽春(흠춘)'이라고도 쓴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 ...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 ...여름 5월..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 2년(662) ...8월에 백제의 남은 적(賊)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모여 나쁜 짓을 행하므로 흠순(欽純)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여 깨뜨렸다.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사찬 여동(如冬)이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치고 비가 내렸으며 벼락이 쳐서 죽였는데, 그 몸에 수악당(須堂)<악()자는 뜻을 알 수 없다.>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3년(663)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을 목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070명을 목베었다. 8년(668) ...6월...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9년(669) ...여름 5월에...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했다. 10년(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1년(671) ...가을 7월에 대왕이 답서에서 말했다. "...함형(咸亨) 원년(670)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 한 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진덕왕(眞德王)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 태종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왕위에 오른데다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 때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 일일 것이다). 당 황제(皇帝)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 사람을 충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했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백제를 치게 하자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굴이 “예.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김유신(金庾信) : 호력(虎力) 이간(伊干)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가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니 어릴 적 이름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니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총장(總章) 무진(戊辰.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김흠춘(金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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