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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흠운(金欽運)

by taeshik.kim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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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운(金歆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김운(金運)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는 金欽運 혹은 金歆運에서 중간 글자가 탈락된 데서 빚어진 결락으로 판단된다. 두 표기가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나밀왕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이다. 어려서 화랑 문노의 유파에서 심신을 수련하면서 특히 목숨을 불사하는 군인의 길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영휘(永徽) 6년(무열왕 2년, 655),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를 기려 태종대왕은 일길찬을 추증했다. 죽으면서 남긴 말이 "신라 귀골(貴骨)로 대왕의 반자(半子)"라 했으니, 태종대왕 사위임을 알 수 있지만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28년 뒤인 신문왕 3년(683)에 그의 작은 딸이 신문왕비가 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신문왕비는 두 명이다. 원비인 소판 흠돌(欽突)의 딸이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 데다 아버지가 반란에 연루되어 출궁당하자, 차비로 받아들인 이가 김흠운의 딸 신목(神穆王后)이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3년(683) 봄 2월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먼저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케 하니, 예물로 보낸 비단이 15수레이고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여름 4월에 평지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5월7일에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해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손문(孫文)·아찬 좌야(坐耶)·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량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 두 부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게 했다. 부인이 탄 수레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과 부녀자가 매우 많았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효소왕 :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리홍(理洪)<공(恭)으로도 썼다>이고 신문왕 태자이다. 어머니는 성이 김씨로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니,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운<雲>이라고도 한다> 딸이다.


cf. 김흠운(金歆運)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은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 문하에서 놀았는데 당시 무리가 아무개는 전사해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격동해 그와 같이 되려 하니 같은 문하 승려인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군사를 출동케 할 때 흠운을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했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해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니 백제인들이 밤을 틈타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혼란을 틈타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 귀골(貴骨)로 대왕의 반자(半子)인데 만약 적군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하는 바가 될 것이고 우리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라고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자고 했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이 함께 전사했다. 보기당주(步騎幢主)인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으니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고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전투상황]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을까 걱정하여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하고 그 행동을 본 후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으며,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대문이 말하기를 『임금을 보좌하는 어진 인물과 충신이 이로부터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의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김씨다.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다. 아버지는 문호왕(文虎王)이고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이다. 비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니 김운공(金運公)의 딸이다. 신사년에 즉위해 11년을 다스렸다.


☞김흠운(金歆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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