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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만리장성에서 온 편지(A Letter from the Great Wall) :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

by taeshik.kim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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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대 말기 남조의 대표적인 시인인 서릉(徐陵)이 편찬한 연애시 앤쏠로지 <<옥대신영>>(玉臺新詠) 중 권제1에는 작자를 진림(陳琳)이라 했다. 진림에 대해서는 시 아래에 첨부한 그의 행적을 보라. 아래 시를 읽으면 어째 기분이 쏴 하다.

 

 

飮馬長城窟行一首

飮馬長城窟  장성굴에서 말에게 물 먹이니

水寒傷馬骨 물은 차가워 말이 뼈 속까지 어네

往謂長城吏  장성 관리에게 가서 부탁하기를

愼莫稽留太原卒 부디 태원 출신 졸병은 잡아두지 마오

官作自有程  관청일이란 정해진 길이 있는 법

擧築諧汝聲 달구 들어 네 노랫소리에 맞추어라

男兒甯當格鬬死 사내라면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何能怫鬱築長城 어찌 찌질하게 장성만 쌓고 있으리오

長城何連連  장성은 어찌나 끝없이 이어지는지

連連三千里 끝없이 이어져 3천리라네

邊城多健少  변경엔 젊고 건장한 사내 많고

內舍多寡婦 집안엔 과부만 넘쳐나네

作書與內舍  편지 적어 집으로 보내기를

便嫁莫留住 딴 데로 시집가오 홀로 살지 마오

善事新姑章  새 시부모 잘 모시되

時時念我故夫子 때론 이 옛날 남편도 생각해 주오

報書往邊地  변방으로 온 답장에 이르기를

君今出語一何鄙 당신 지금 하신 말 어찌 그리 막 되었소

身在禍難中 나야 화난에 처해 있지만

何爲稽留他家子 어찌 다른 집 여자를 잡아 둘 수 있겠소

生男愼勿擧  사내를 낳거든 제발 떠들지 말고

生女哺用脯 딸을 낳거들랑 고기 먹어 키우소서

君獨不見長城下 그대만 보지 못했소? 장성 아래

死人骸骨相撐拄 죽은 이 해골이 서로 받친 모습을

結髮行事君  머리 올리고 당신 섬긴 이래

慊慊心意關 울적한 마음엔 온통 변방 관문뿐

明知邊地苦 변경의 어려움 잘 알면서도

賤妾何能久自全 천첩만 어찌 홀로 온전하리오

 

陳琳(진림)

(?~217), 漢魏 연간을 산 文學家이다. “建安七子” 중 한 명이다. 字는 공장(孔璋)이며 광릉(廣陵) 사양(射陽. 지금의 江蘇 淮安縣 東南) 사람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건안칠자” 중 비교적 나이가 많았으며 대략 공융(孔融)과 비슷하다고 추측된다. 漢 靈帝 末年에 大將軍 하진(何進)의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何進이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사방 변장(邊將)들을 수도 낙양(洛陽)으로 들어오라고 소집하자 그에게 간하여 저지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하진은 피살되었다. 董卓이 낙양을 어지럽히자 陳琳는 기주(冀州)로 피난해 원소(袁紹)의 막부로 들어가니 袁紹는 그에게 문장(文章)을 담당케 하니 軍中에서 나온 문서는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爲袁紹檄豫州文》이 있으니, 이 글에서 진림은 曹操의 罪狀을 열거하고 나아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비난했는데 그 문장이 자못 선동적이었다. 建安 5년(200)에 관도(官渡) 一戰에서 袁紹가 대패하자, 陳琳은 조조에게 포로가 되었다. 曹操가 그의 재주를 아껴 司空軍師祭酒로 삼아 記室을 맡겼다. 나중에는 丞相門下督이 되었다. 建安 22년(217), 劉楨, 應瑒, 徐幹 등과 함께 역질에 걸려 죽었다. 陳琳이 남긴 저작은 《隋書 經籍志》에 근거할 때 문집 10권이 있었으나 이미 망실되었다고 했다. 明代 張溥는 《陳記室集》을 집일해 《漢魏六朝百三家集》(漢魏六朝百三家集)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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