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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by taeshik.kim 2018.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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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 이 글은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가 발간하는 소식지인 《박물관소식》 2002 3․4호에 ‘특별기고’ 형태로 투고한 글 전문이다.  

석굴암을 감도는 유령이 있다. 국가주의와 국민주의가 응결된 국민국가주의라는 망령이 그것이다. 한국인은 석굴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TV는 장중한 애국가를 들려주며 그 배경으로 석굴암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다만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 석굴암을 ‘반만년유구한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를 이제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경주 문무왕 대왕암


이러한 반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석굴암을 둘러싼 일연의 논쟁, 예컨대 현재의 석굴암 전실이 잘못 복원됐다느니, 전실 수호상이 원래는 몇 개였는데 지금은 몇 개라느니 하는 논쟁도 따지고 보면 국가주의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또 최근에는 석굴암 모형전시관 건립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경주시와 불국사가 중심이 돼 석굴암 모형전시관을 세우기로 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회의까지 통과한 상황에서 일부에서 환경파괴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난감해진 문화재청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문화재위원회를 통과하고 국가예산까지 배정돼 있음에도 사업자체를 재검토하려 하고 있다.

요컨대 석굴암과 관련한 이러한 각종 논쟁과 논란의 밑바닥에는 항상‘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유산을 이렇게 방치, 혹은 파괴할 수 있느냐’는 질타가 깔려 있다. 국사교과서나「한국사신론」을 비롯한 각종 한국사통론은 물론이려니와 이 분야 전문가라는 불교미술사학자들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도출되는 석굴암에 대한 등식 두 가지는‘신라의 호국사찰이자 왕실사찰’이라는 것이다. 아주 이름 높은 국내 어느 미술사학자가 쓴 글에서 뽑은 구절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성왕이며 항일정신이 투철하던 문무대왕은 평화로운 신라를 항상 노략질하는 왜구를 저주한 나머지 ‘내가 죽으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 부디 나의 뼈를 동해바다에 장사지내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애국심의 화신 같은 위인이었다...(중략)..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지극한 듯을 받들어 이 문무대왕릉을 중심으로 감은사, 석불사(=석굴암) 같은 큰 절들을 세워서 호국룡으로 화한 문무대왕의 힘과 불법(佛法)의 힘을 빌려 항상 바다로 침노해 오는 왜적들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석굴암은 바로 그러한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스며있는 국가적인 절이었으므로 이 절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신라 예술가들의 정성은 너무나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었다.】  


대왕암


1300년 전 신라시대에 항일정신이 웬말이며, 군주가 곧 나라이던 시대에 군주의 애국심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또한 석굴암이 신라인의 염원이 스며 있는 국가적인 절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석굴암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는 비단 고인이 된 불교사학자만이 아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석굴암이 실은 신라시대의 석굴암이 아니요, 더구나 김대성(金大成)이라는 한 개인의 사찰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석굴암은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태동한 근대 국민국가주의의 표상에 불과하다. 요컨대 석굴암은 껍데기였을 뿐이요, 학계는 석굴암이라는 고리를 통해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굴암이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신라 호국정신을 대표하는 불교유적으로 자리매김된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박정희 유신정권 시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무렵‘화랑의 순국무사 정신을 본받아 국민 총화단결을 이룩하며 민족주체성을 되살리며 조국근대화를 이룩하자’는 구호가 열병처럼 한국사회 전반을 휘감았다. 

경주 석굴암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 독재정권 시절에도 개인과 인권, 자유는 전체와 국익, 의무라는 구호에 질식했다. 이러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과 인권, 자유를 말살했을뿐만 아니라 석굴암 같은 문화유산 또한 짓눌렀다. 이 분야 종사자들은 못내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여러 학문 중에서도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은 문화재라는 고리를 통해 박정희 장권의 통치기반을 강화, 혹은 정당화시켜주는 일정 구실을 맡았다. 이와 관련된 다른 보기를 우리는 무령왕릉에서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1971년 7월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거기에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지 알려주는 지석 두 장이 발견됐다. 그 중 하나가 무령왕의 지석이었는데 첫 대목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 사마완(무령왕)께서 62세에 붕(崩)하셨다’ 중국천자에나 쓸 수 있는 ‘崩’으로 무령왕의 죽음을 표현한 사실을 발견한 학계는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다.  

▲ ‘崩’은 중국에서 황제에 한해서 쓰는 것이다. 백제에서 이 글자를 사용한 것은 역시 정치적으로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 지위를 가지고 중국황제나 대등한 태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로서 둘째로 들어야 할 것은 백제의 주체의식이 뚜렷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래 생각해온 것과 같이 백제를 사대주의 국가라고만 할 수가 없고 도리어 주체의식이 강한 국가였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믿는다. 

이런 말은 누군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학계 원로들이 버젓이 학술논문에서 뱉은 말이다. 이처럼 학계는 무령왕릉을 통해 민족주체성과 민족자주성을 부르짖었다.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들이 무령왕릉을 통해 외친 민족주체성이 실은 백제의 주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붕이라는 글자 한 글자를 쓰고 안 쓰고 했다는 점에서 그 나라가 자주적이었느니 종속적이었느니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 주체성이며 사대주의라는 개념은 근대 역사학의 창조물이다. 더욱 범위를 좁히자면 무령왕릉에서 찾아냈다고 요란을 떤 민족주체성은 실은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무렵 입만 열었다 하면 민족주체성 회복을 외쳤다. 이런 현상은 북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굴암


1500년 전에 축조된 무령왕릉을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제창하는 선전도구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학이 권력과 야합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제국주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19세기말에 태동한 근대 역사학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제국주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문화재는 그 집중 타깃이 되기에 이르렀다.

영국 출신 유대인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역사학의 이런 어용성을 갈파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권력이 요구하는 전통, 다시 말해 권력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석굴암 얘기로 돌아가면 석굴암이 호국 혹은 왕실 사찰이라는 근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석굴암은 김대성의 개인사찰이었으며 애국심과도 하등 관련이 없다. 설혹 그것이 왕실사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신라 애국심을 발로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항일정신과도 눈꼽만큼 연관이 없다.

더불어 우리는 석굴암의 원형이 어떠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겨우 20세기 초반에 찍거나 그린 사진이나 도판 몇 장을 찾았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석굴암 원형이 이러했는데 지금과는 다르다고 논의하는 것 자체도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석굴암은 처음 축조된 지 1천300년이나 흘렀다. 이 장구한 역사에서 어느 시점을 석굴암의 원형으로 삼을 것인지도 논의하지 않으면서 원형과 다르다, 틀린다고 말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사진이나 도판에 나타난 석굴암은 20세기 초반의 석굴암일 뿐이요, 그것이 신라 당대의 석굴암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망상이다. 석굴암 모형 전시관 건립을 극력 반대하는 어떤 학자는 석굴암이 완벽한 조각품이라고 외치면서 모형 전시관은 이러한 완벽성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석굴암은 인정하기 싫건 말건 상관없이 20세기 초반에 일본 건축가에 의해 재발견됐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석굴암은 몰골이 형편없다. 그것이 지금처럼 번듯하게 재단장된 것은 식민강점기였다. 그런데 지금 석굴암의 무에가 완벽하다는 말인가?

석굴암


문화유산 보존의 절대원칙은 지금 상태보다 더 파괴, 인멸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원형을 억지로 만들어 꿰맞추는 것도 안 된다. 더불어 완벽이라는 없는 개념을 억지로 만들어 석굴암은 완벽하다고 강변해서는 안 된다. 더더군다나 없는 이데올로기를 억지로 끌어내는 것 또한 그 문화유산은 물론이려니와 그 나라, 그 국민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령왕릉에서 어거지로 민족주체성을 찾아내고, 석굴암에서 없는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어거지로 창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어거지 창출이 우리가 그토록이나 비판하고 있는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의 사관과 본질적으로 무에가 다르다는 말인가, 우리는 억지로 쓰면서 누구를 욕한다는 말인가?

석굴암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문화재를 이제는 국가와 민족, 국민이라는 망령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문화재도 살고, 국민도 살며, 나라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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