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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미진부(未珍夫)

by taeshik.kim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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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미진부공 전 : 미진부공(未珍夫公)은 아시공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니 법흥대왕 딸이다. 꿈에 백학을 보고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총애했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법흥대왕의 옥진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이 즉위하기 어렵다 하면서, 삼엽과 함께 아시공이 태후를 지지했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三葉)과 공을 총애했다. 태후가 정치를 맡게 되자 공을 폐신(嬖臣)으로 삼으니 그 때 공은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앞서 삼산공(三山公)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어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 딸인 남모공주(南毛公主)는 백제 보과공주(寶果公主) 소생인데, 또한 뛰어난 미인으로 공과 도탑게 사랑했다. 태후가 공을 총애해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자리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게 했다. 그러므로 준정(俊貞)이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됨을 막고자 했다. 태후는 비록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繼夫)로 삼기는 했으나 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해  물러나게 했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함을 염려해 위화공 낭도를 속하게 함으로써   더해 주었다. 준정(俊貞)이 투기했다. 이에 술로 꼬득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것을 폭로했다.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 했다. 위화공(魏花公)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를 잃은 이후에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後宮)인 묘도부인(妙道夫人)과 사통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태후가 알고 허락했다. 공은 이에 묘도를 아내로 맞아 미실낭주(美室娘主)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미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태후를 섬겨 충성을 다하다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고자 해서 낭도를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미실이 총애를 얻게 되자, 작(爵)이 각간(角干)에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妙道) 또한 궁주(宮主)에 이르러 대원신통(大元神統)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찬한다 : 색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 했다. 용맹스러움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했다. 부인 묘도는 위화랑공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를 낳으니 천도(天道)는 아득하고 오래도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6년 을축(545)에는 왕명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였고 파진찬으로 승진하였다.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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