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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반구대 암각화 건너편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는?

by taeshik.kim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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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울주 반구대 암각화 주변을 발굴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한 여지를 보이는 정자 흔적이 드러났다. 나는 이번 성과를 보면서 나올 만한 흔적, 아니, 언젠가는 드러나야 할 흔적이 나온 것으로 본다. 


반구대 암각화와 대곡천, 시굴조사 지점




현장을 본 사람이면 직감하겠지만, 반구대 일원은 대곡천이 산곡간을 흘러내리며 형성한 경관이 절경이어니와, 무엇보다 반구대 암각화가 위치한 곳,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 건너편 어딘가에는 정자가 분명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흔적이 기어이 이번에 발굴조사를 통해 편린을 보인 것이다. 


예서 관건은 정자가 존속한 기간이다. 이와 관련해 조사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출토 유물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자 존재가능성을 제시했다. 



2018년 상반기 조사지점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보존대책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주변 고고학적 자료 확보에 나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3년 조사에서는 암각화 아래 암반층에서 81개 이상에 달하는 공룡발자국 화석을 확인하고, 올해 상반기 조사에는 백악기 공룡 발자국 48개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주변유적 2차 발굴조사(문화재청 허가 제2018-0224호)'는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1천 일대 2만4천300㎡를 대상으로 삼았다. 11월 19일에 착수해 12월 14일까지 실조사일수는 20일에 지나지 않으니, 본격 발굴이 아니라 그 지하 문화층 분포양상이 어떤지를 탐침하는 시굴 트렌치 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조사지점은 암각화가 위치하는 대곡천 바로 건너편 지점, 그러니깐 현재는 암각화 관람대가 설치된 그 지점 강안 경사지점이다. 망원경이 설치된 그 아래 지점이다. 


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은 이 일대에 시굴트렌치 9개를 넣었다. 트렌치는 최고치 기준으로 폭 5m, 길이 25m, 깊이 3.5m였으니,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규모로 팠다. 


이 성과를 문화재청은 다음과 같은 보도자료로 정리해 공개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일대에서 신라 유적 확인

- 그동안 확인되지 않던 통일신라~조선 시대 걸친 건축시설 일부 확인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종덕)는 지난 11월 19일부터 국보 제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주변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를 한 결과, 그동안 이 일대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건축시설 일부를 확인했다. 


이번 시굴조사는 장마철과 태풍에 따른 사연댐 수위 상승으로 5개월 만에 착수한 재조사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주변 학술발굴조사는 지난 3월 8일부터 12월 14일까지 시행하였으며, 지난 상반기 조사에서는 국내에서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4족 보행 척추동물 발자국을 포함해 육식공룡과 초식공룡 발자국 48점을 보고한 바 있다. 



시굴트렌치 석렬



이번 조사는 고고물리탐사 결과와 지형조건을 참조하여 유적에 대한 잔존 가능성이 높은 곳에 총 9개의 탐색 구덩이를 설치했고 그 안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일부 지점에서 통일신라 시대 석렬(石列, 돌로 만든 경계)시설과 조선 시대 석렬, 집석 유구(돌무더기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석렬시설은 현재의 전망대가 자리한 구릉 서쪽 아래 퇴적층에서 확인되었다. 2~3줄로 늘어선 석렬은 모래 사구 위에 지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점토와 목탄, 굵은 모래 등을 섞어 다졌으며 그 위에 건축물의 기초시설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석렬시설이 구릉과 평행하게 돌아가는 점으로 미루어 낮은 구릉 가까이 있거나 정상부에 자리한 건축물을 보호하거나 경계 짓기 위한 기초시설로 추정된다. 


해당 구조물은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의 명문 등과 더불어 이 일대 신라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굴



이 외에도 구릉 정상부근에 확인된 집석 유구와 석렬 시설을 통해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해당되는 건축물이 자리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릉에 자리한 집석 유구 위에서 많은 기와들이 출토되었는데 위치상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위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신라 고식 막새인 6엽 연화문(연꽃무늬) 수막새, 통일신라 시대 8엽 연화문 수막새, 인화문 토기 조각(편), 다량의 기와 조각 등과 함께 분청사기 조각 등 고려와 조선 시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이번 조사 성과와 종합학술연구를 기초 자료로 체계화하여 국민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책임운영기관으로서 반구대 암각화의 학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뭐 간단하다. 이를 토대로 하는 전면 발굴이 이뤄지면, 이번에 추정한 문화층 정확한 분포양상이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허심하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일부 지점에서 통일신라 시대 석렬(石列)시설과 조선시대 석렬, 집석 유구를 확인함으로써 이 일대에 적어도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흔적이 확인되며, 더구나 그 흔적은 정자로 추정되고, 나아가 고식 신라시대 6엽 연화문(연꽃무늬) 수막새, 통일신라 시대 8엽 연화문 수막새, 인화문 토기 조각(편), 다량의 기와를 확인한 대목이다. 


너무나 성급한 판단이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통일신라, 혹은 더 올라가면 삼국통일 이전 신라시대에 저런 수막새를 쓴 고급 건축물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 건축물이 무엇일까?



막새류



이 역시 너무 성급하나, 입지 조건으로 볼 때, 정자이거나 혹은 대곡천과 관련 있는 강 관련 제사시설일 수밖에 없다. 


이번 시굴조사가 나한테 특히 더 중요한 까닭은 내가 일찍이, 그리고 여러 번 주장했듯이, 나는 반구대 암각화를 선사시대가 아니라 신라시대 혹은 그 이후 제작일 가능성에 무게중심으로 왕창 주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보는 한 저들 암각화는 청동기시대, 혹은 신석기시대 그림이 아니다. 신라시대 혹은 그 이후다. 



반구대 암각화




그 까닭을 다시금 이 자리서 결론만 간단히 말한다면, 저에서 보이는 모든 모티브가 실은 신라시대 유물에서 거의 다 보이는 반면, 신석기시대 혹은 청동기시대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번 시굴조사 결과가 그런 내 주장과는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땅 속 사정은 두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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