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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복신(福信)

by taeshik.kim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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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의 조카로서, 백제가 멸망하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운동을 일으켜 왜국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무왕 : 28년(627) 가을 8월에 왕의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은 [백제가]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서로 빈번히 침략·토벌한다라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왕이 대대로 군장(君長)이 되어 동쪽 번병[東蕃]을 위무하고 있다. 바다 귀퉁이[海隅]가 멀고멀며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지만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서로 잇따르고, 더욱이 [경의] 아름다운 꾀를 생각하니 심히 기쁘고 위로가 되도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寵命]을 받들어 강토에 군림하고 정도(正道)를 넓히려고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천성과 천명[性命]을 이루어 모두로 하여금 또한 평안하게 하고 있다.신라 왕 김진평(金眞平)은 짐의 번국의 신하요 왕의 이웃 나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를 믿고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은 바라는 바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신라의 사신에 대해 함께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하여 모두 화목하겠끔 하였다. 왕은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이웃 나라와의 정을 함께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그치라.』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실제로 서로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원(仁願)을 도성(都城: 사비성)에서 포위하였다.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起用)하고,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便道]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 인원(仁願)을 구하게 하였다. 인궤가 기뻐서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 한다.”고 말하고는 당나라의 책력(冊曆)과 묘휘(廟諱)를 요청하여 가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내가 동이(東夷)를 평정하여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고 정연하게 통솔하고 싸우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熊津江) 어구에 두 목책을 세우고 막았다. 인궤가 신라 군사와 합쳐 이를 치니 우리 군사는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져 죽거나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복신 등은 이에 사비성[都城]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와 임존성(任存城)을 보전하였고, 신라 사람도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용삭(龍朔) 원년(661)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들을 불러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떨쳤다.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듣건대 당나라[大唐]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 인궤가 글월을 지어 화와 복[禍福]을 자세히 말하고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外館]에 두고 업신여기면서 대답하였다. “사자의 관등이 낮다. 나는 바로 일국의 대장이니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 [도침은] 서한에 답하지 않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인원과 군사를 합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표를 올려 신라와 세력을 합하여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신라 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얼마 아니하여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풍(豊)은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복신 등은 인원(仁願) 등이 고립된 성에서 원병이 없으므로 사자를 보내 위로하여 말하였다. “대사(大使)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별하여 보내겠노라[餞送].” 용삭 2년(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인원이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아뢰어 청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치주(淄州)· 청주(靑州)· 내주(萊州)· 해주(海州)의 군사 7천 명을 일으키게 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유인원의 군사를 증원케 하였다. 이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로지 하면서 부여풍(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에서 이를 맞아 쳐서 깨뜨리고는 드디어 인원의 군사와 합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향하여 갈 곳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가림성(加林城)은 수륙의 요충이니 이를 먼저 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였다.“병법에는 ‘실(實)을 피하고 허(虛)를 치라.’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면 군사를 상하게 할 것이고, 지키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지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것을 쳐 이기면 여러 성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이에 인사(仁師)와 인원(仁願) 및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다.[그리고] 유인궤 및 별장(別將) 두상(杜爽)과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도중에] 백강(白江) 어귀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다 물도 빨개졌다.왕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亡散]들을 불러모으니 10일 사이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仁軌)가 [상지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하도록 하고는 곧 갑옷과 무기와 군량을 주었다. 인사(仁師)가 말하기를 “[그들의] 야심(野心)은 믿기 어려운 데 만일 무기와 군량을 얻는다면 도적의 편의를 도와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다. 기회를 타서 공을 세운다면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리요.”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仁師) 등이 군대의 위세를 떨치며 돌아가니 [고종은] 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더미와 같았다.인궤가 비로소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청의 장을 임명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다리를 놓고 제언(堤堰)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진휼(賑恤)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각기 제자리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고종[皇帝]이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옛 원한을 풀고 유민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1년(671)…가을 7월에 대왕이 답서에서 말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이르러…선왕께서는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상의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역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후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웅진]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에워싸 지키니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현경<顯慶> 6년(661)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가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공격하러 갔다가 적에게 격파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패한 이후 웅진에서 군사를 청함이 밤낮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신라에는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청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러 갔으나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달려와 공격하여 많은 군사와 말을 잃고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니, 남쪽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싸니 이로써 웅진은 길이 끊겨서 성 안에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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