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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사유(斯由)

by taeshik.kim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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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국원왕 이름이다. 미천왕 태자로 즉위해 다스리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흐르는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즉위년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은 이름이 사유(斯由)<쇠(釗)라고도 했다>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국원왕(國原王)은 이름이 쇠(釗)인데 사유(斯由)라고도 하며 강상(岡上)이라 일컫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본기 :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본기 즉위년 : 근구수왕(近仇首王)<수(須)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쓰는 말[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의 서북에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여 말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말발굽 같이 틈이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사람들이 지금[고려]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고국원왕(故國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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