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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새벽이슬 터는 당신은 누구인가? 심약전(沈約傳)을 겸하여

by taeshik.kim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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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맞은 배추


수레에 몸을 실은 채 새벽길을 가다 한 때 나와 정분을 나눈 여인을 만났다. 그 몰골 보아 하니 영 말이 아니다. 간밤 외출할 때 곱게 찍어 바른 연지 분 자국 이제 얼룩덜룩하다. 기름기가 묻어 나온 까닭이다. 틀림없이 외박하고 돌아가는 길일 터. 어땠을까? 혹여 내가 버렸기 때문에 저 여인 지금과 같은 신세가 되진 않았을까?

 

남조 유송(劉宋)~양조(梁朝) 교체기를 살다간 연애시의 최고봉 심약(沈約). 그 姓으로 볼진댄 아마도 심봉사~심청이 부녀의 조상쯤 될 듯한데, 그의 입을 빌려 본다.


심약보다 반세기 이상을 뒤에 나타나 심약이 개척한 연애시를 완성한 서릉(徐陵)이란 사람이 편집한 중국 역대 연애시 앤솔로지  《옥대신영》(玉臺新詠) 맨마지막 권 제10에 ‘조행봉고인거중위증早行逢故人車中爲贈’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시다. 제목을 풀면 “이른 아침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옛 사람에게 수레에서 지어준 시”란 뜻이다. 이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후대 유교사회에서 익숙한 정조(貞操)라는 관념, 이 시대엔 통용되지 아니한다. 이혼은 많았고, 여성 또한 새로운 남편을 찾아가는 개가(改嫁)의 전통은 일반 도덕률이었다. 아울러 때가 되어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도 흔해 빠졌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등장하는 소위 자유분방한 것만 같은 신라사회의 남녀 관계를 학계 일부에서 문제를 삼으면서, 가짜론을 제기했거니와, 이 필사본이 진정 신라인의 저술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라도,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사 풍속사 문화사 전반에 대한 이해 없이는 《화랑세기》 아니라 《화랑세기》 필사본이 출현한데도 같은 반응일 것이다.

 

아! 새벽이슬 툴툴 터는 저 여인을 弔하며 哀하고 誄하리라. 

 

早行逢故人車中爲贈(이른 아침 길 나섰다가 우연히 옛 여자 만나 수레에서 지어준 시)


殘朱猶曖曖 남은 연지 자국 아직 흐릿흐릿하고  

餘粉上霏霏   남은 분 자국 여직 어지럽기만 하네

昨宵何處宿 간밤엔 어디에서 잠자리 하고는       

今晨拂露歸   지금 새벽이슬 털며 집으로 가는가


주석 : 두번째 구절 上은 尙의 잘못이거나 통가자다. 



옛 사랑이 못 살면, 가슴이 아프고 

옛 사랑이 잘 살면, 배가 아프며 

첫사랑과 살면, 골치가 아프다. (첫 두 구는 내 말이요, 마지막 구는 이채경 형 보탬이다)  


작자 심약(沈約)에 대하여(네이버 백과사전을 참조하여 윤문했다) 

 

441~513년. 字는 휴문(休文), 시호는 은(隱)이며 오흥(吳興) 무강(武康. 지금의 浙江省 武康) 사람이다. 南朝를 대표하는 史學家이자 文學家이며 정치가로서 양조(梁朝) 창업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어려서 빈곤했으나 공부에 힘써 시문은 당대와 희롱했다. 유송(劉宋)에 출사하려 했으나 이내 망하자 그것을 대신한 남제(南齊)에 출사했다. 소연(蕭衍)이 제위(帝位)를 찬탈하고 양(梁)을 건국하자 이를 도와 건창현후(建昌縣侯)에 책봉되어 현달을 거듭하다가 513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은(隱)이라는 시호로 인해 심은후(沈隱侯)라고도 잘 알려져 있으며, 남제(南齊)에서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까닭에 심동양(沈東陽)이라고는 부름 또한 익숙하다. 문재(文才)로 인해 이미 남제에서는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그 아우 경릉왕(竟陵王) 자량(子良)에게 총애를 듬뿍 입었다.

 

이 당시에 심약은 이미 문장의 임방(任昉)과 더불어 시의 최고봉으로 꼽혔다. 그는 염정(艶情)에 특히 뛰어나 이른바 남조시대 문단을 장악하게 되는 ‘궁체시’(宮體詩)’선구를 열었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음운(音韻)에도 밝아 사성(四聲)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시에서는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했다. 그의 음운설은 이른바 영명체(永明體)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고 근체시(近體詩) 성립에도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평가된다. 저술로는 음운학서 계열에 속하는 《사성보》(四聲譜)와 史書에 속하는 《진서》(晉書) 와 《송서》(宋書)와 《제기》(齊記)와 《송세문장지》(宋世文章志)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송서》만 현전한다. 문집 또한 10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겨우 《한위육조일백삼가집》(漢魏六朝一百三家集)에 실린 집일된 《심은후집》(沈隱侯集) 2권과 《한위육조명가집(漢魏六朝名家集)》에 채집된 《심휴문집》(沈休文集) 9권이 편린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심약 약전 補1

少時에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박통군적(博通群籍)했으며 시문에 뛰어났다(擅長詩文). 宋에 처음으로 출사하여 齊와 梁에 이르기까지 三朝를 섬겼다. 宋에서는 기실참군(記室參軍),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을 역임했고, 齊가 들어서자 저작랑(著作郞)과 상서좌승(尙書左丞)을 거쳐 표기사마장군(驃騎司馬將軍)에 이르렀다. 齊-梁 교체기에 소연(蕭衍)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梁朝가 들어서자 상서좌복야(尙書左伏射)에 제수되었다가 나중에 상서령(尙書令)으로 옮겼으며 영태자소부(領太子少傅)도 역임했다.

 

20여 세에 시작한 《晉書》 120권을 20여 년 만에 완성했으며, 487년에는 奉詔하여 《宋書》를 수찬하니 이는 1년 만에 완성했다.

 

심약 약전 補2

그의 아버지는 심박(沈璞)이니, 宋 文帝 元嘉 末年에 일어난 皇族간 帝位 쟁탈전에서 피살되었다. 이런 까닭에 沈約은 어린 시절에 집안이 몹시도 가난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劉宋 시대에 채흥종(蔡興宗)의 기실(記室)이 되었으며 입조하여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이 되었다. 齊가 들어선 초기에 문혜태자(文惠太子) 소장무(蕭長懋)의 가령(家令)이 되어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는 다시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 문하에 들어가 이른바 “경릉8우”(竟陵八友) 중 한 명이 되었다. 


隆昌 원년(494), 외직으로 나아가 동양태수(東陽太守)가 되었다. 제(齊) 명제(明帝) 소란(蕭鸞)이 즉위하자 오부상서(五兵尙書)가 되었다가 나중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옮겼다. 齊 말기에 소연(蕭衍)에 적극 협력해 왕조 찬탈 작업을 했으며 나아가 蕭衍에게 양위하는 詔書를 대신 쓰기도 했다. 蕭衍 즉위와 더불어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려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고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고 나중에 상서령(尙書令), 영태자소부(領太子少傅)로 옮겼다. 사후 은(隱)이란 시호를 받으니 이런 까닭에 후인들이 그를 "은후(隱侯)"라 부른다.

 

沈約은 시사에서는 성률聲律을 강조하는 “영명체永明體”를 창시한 주역 중 한 명이다. 齊~梁 시대에 漢語 음운학은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 와중에 沈約은 平上去入 四聲을 詩의 格律에 이용했으며, 나아가 비교적 完整한 詩歌聲律論을 제기했으니 《宋書》 謝靈運傳에 부친 論에서 말한 “夫五色相宣, 八音協暢, 由乎玄黃律呂, 各適物宜. 欲使宮羽相變, 低昻互節, 若前有浮聲, 則後須切響, 一簡之內, 音韻盡殊, 兩句之中, 輕重悉異”라는 말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四聲說 외에도 그는 팔병설(八病說)을 제기했으니, “平頭ㆍ上尾ㆍ蜂腰ㆍ鶴膝ㆍ大韻ㆍ小韻ㆍ旁紐ㆍ正紐”이란 八種 聲律의 毛病이라는 것이다. 한데 팔병(八病)이란 말이 唐朝 시대 기록에 처음으로 보인다 해서 이것이 심약이 제기한 설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郭紹虞가 考訂한 바에 근거할 때, 唐朝에서 八病說을 제기한 이로 沈約을 인식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 ‘八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이 분분하나 대체로 詩歌聲律에서 금지하는 각종 禁忌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규정이 너무 가혹하고 沈約 자신도 이에 철저하지 못했다.


심약은 워낙 문장으로 유명했기에 齊梁 兩朝에서 생산된 중요한 詔誥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고 보아 대과가 없다. 그의 詩文 또한 수량이 엄청나 《梁書 沈約傳》과 《남사 심약전(南史沈約傳)》에는 그의 글로써 모두 100卷을 거론한다. 엄가균(嚴可均)은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에서 그의 글을 집일하면서 8卷을 만들었는데 공문(公文)을 제외한 대량의 賦ㆍ論ㆍ碑ㆍ銘을 모으면서 “高才博洽”고 평했다.

 

그가 남긴 각석(刻石)으로 《제고안륙소왕비문(齊故安陸昭王碑文)》이 있으니 이는 文辭가 典雅하다. 《양서 심약전(梁書沈約傳)》에 수록된 《교거부(郊居賦)》는 洋洋灑灑하며, 以矯情掩蓋牢騷하다. 《고송부(高松賦)》ㆍ《여인부(麗人賦)》 또한 저명하다. 《여서면서(與徐勉書)》에서는 자기 자신의 늙은 모습을 “百日數旬, 革帶常應移孔﹔以手握臂, 率計月小半分”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沈郞腰瘦”이란 성어가 생기기도 했다.

  

沈約은 佛典에도 조예가 깊어 《광홍명집(廣弘明集)》에는 그와 관련된 적지 않은 문장이 수록됐다. 그의 작품은 張溥가 집일해서 《심은후집(沈隱侯集)》라는 이름으로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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