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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4)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조선시대 한성부의 인구 밀도를 생각하면 당시 토양이 기생충란에 오염이 많이 되어 있는 상태는 당연한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토양이 기생충란에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은 한성부에 살던 사람들이 그 기생충에 많이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기생충에 계속 반복적으로 감염되었을까? 조선시대 한성부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기생충 감염률이 높게 유지되는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까? 


현대 임상의학에서는 어떤 감염성 질환이 발생했을때 감염경로 및 감염원를 판단하기 위해 해당 환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데 이것을 역학조사 (epidemiological study) 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선시대 한성부 토양 시료에서 당시 사람들의 기생충 감염의 정확한 기전을 찾고자 할때 현대 임상의학에서 수행하는 역학조사를 실시하는것은 불가능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대의 질병이환 기전과 그 양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현전하는 역사적 문헌을 고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사실 우리나라 기생충학계는 60년대 이전 회충 편충 등 기생충 질환이 높은 감염률을 보였던 중요한 이유로 인분을 거름으로 이용하는 우리나라 전통 영농 방법과 채소를 생식하는 습관 등을 지적하였다 (이순형, 2007: 937-45).


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영농법이다. 인분을 농업비료로 사용한 기원을 살펴보면 그 시기가 훨씬 소급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러한 기법이 본격적으로 농업에 활용된 것은 대체적으로 宋代 이후 양자강 유역에서 전개된 집약적 농업기술 발전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기술은 이후 한국, 중국, 일본 등 농업에 보편적으로 적용 되어 각 국 농업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키며 성장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3국은 상업작물의 양산을 비롯한 고도의 농업생산이 요구되어 지력의 소모를 보완할 만한 비료원을 찾고 있었는데 이 때 선택된 것이 쉽게 다량으로 확보 가능한 인분이었다.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을 이해하는데 인분을 빼 놓을 수 없는 만큼 거름으로 사용되는 인분에 대한 역사학적 검토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서울 사대문안에서 수행한 고기생충학적 검사. A, B, C, D가 발굴현장에서 샘플이 수집된 지역이며 이 지역 조선시대 샘플 모두에서 기생충란이 검출되었다. 빨간색 선은 청계천과 그 지류. 



이러한 통설에 기반하여 보면 조선시대 한성부 사람들 사이에서 회충 감염률이 높게 유지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사대문 안에서 인분 수집

(2) 인분을 이용한 거름 만들기: 만들어진 거름에는 회충란이 포함되어 있다. 

(3) 채소밭에 뿌리기: 채소는 기생충란으로 오염된다. 

(4) 채소를 도성 내에 거주하는 소비자에 공급

(5) 날것으로 채소를 섭취: 기생충에 재감염

(6) 사람 체내에서 성충으로 성장한 기생충이 낳은 알이 인분과 함께 바깥으로 배출


이는 매우 논리적으로 추정한 정황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회충 감염이 조선시대 한성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 되지 않는 한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 




묘한 부조화의 연구팀. 가운데가 기호철 선생.




바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연구실은 장성에 은거하는 독거노인 한학자 기호철 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문헌 검토를 수행했다. 선생은 위에 기술한 각 단계에 해당하는 사건을 현전하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하나씩 찾아 직접 검증했다. 이때 선생이 사료에서 찾아 일일이 정리한 조선시대 한성부 내 회충 감염 구체적 과정 내역은 아래에 요약한 바와 같다. 







바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룬 우리 논문을 아래에 링크해 두었으니 일독을 권한다. 이 논문은 조선시대 회충, 편충이 도시민들 사이에 어떤 기전을 거쳐 감염되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역사학적 차원에서 접근한 최초의 논문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애착을 갖고 있는 의학사 논문이다.

**아래 조선시대 한성부와 그 주변에서 인분을 수집하고 이를 농민에게 판매하여 채소를 생산하여 도시민에게 재판매하는 리사이클링에 대한 기술은 이 논문에 근거한 것이다.    


기호철, 배재훈, 신동훈. 조선후기 한양도성내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원인에 대한 역사문헌학적 고찰. 의사학 2013; 22: 89-132


조선시대 사람들이 토양매개성 기생충에 빈번히 감염된 기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 논문에 자세하므로 여기서는 몇가지 인상적인 장면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기호철 선생은 조선시대 도성에서 성 안의 분뇨가 어떻게 모이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였는지에 대한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도성 내 왕궁, 민가 그리고 성내 거리 곳곳에는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한 인분 수집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화장실이 설치 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한성부 내 민가. 화장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표시되어 있다 (별표)




"측간을 만들 때에는 빈틈없게 하여, 개, 돼지 등 하찮은 것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 또한, 길가 많은 사람이 지나는 곳에 측간을 만드는데, 칸을 지어 4구획으로 만들어 전후로 방향을 달리한다. 그리고 대로변 행인이 왔다 갔다 지나는 곳에 측간을 만들어도 많은 똥을 모을 수 있다."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 


다음으로 기선생은 조선시대 분뇨처리업자 존재를 밝혔다. 


도성 내 화장실에 저장된 인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치워야 했을 것이다. 특히 한성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적으로 농사를 짓던 사람이 아니므로 집 화장실에 모인 인분을 스스로 거름으로 만들 공간도,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성 내 화장실에 모인 인분은 어떤 방법으로 처리되었을까? 선생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예덕선생전(穢徳先生傳)」에 나오는 "엄행수"가 바로 조선후기 도성에 존재했던 전문적인 인분처리업자에 대한 기술이라고 생각하였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중요성을 감안하여 예덕선생전의 해당 부분을 모두 인용해 본다. 


"선귤자(蟬橘子 박지원)에게 예덕 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탑골공원 원각사지석탑)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어른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이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 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 〔箭串〕 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며 청파(青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이나 된다네."


기선생에 의하면 「예덕선생전」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당시 도성 내 상황을 명백히 반영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 기록이 당시 도성 내 인분 수거와 재활용에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은 매우 크다. 우선 주인공 엄행수는 마을 뒷간의 똥을 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며 수거한 인분 및 각종 똥을 한성부 주변의 밭에 팔아 해마다 막대한 이익을 남겼는데 그는 단순한 인분처리업자가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사이의 행수로 인분 수거와 판매를 하는 많은 조직원을 거느리는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러한 전문적 인분처리업자가 존재했다는 것은 인분을 사들여 거름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므로 이 시기에 이르면 인분을 거두어 비료로 공급하는 업자와 도성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 상업적 거래가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본다. 도성 내 똥을 적극 거둬들여 이를 거름의 재료로 농지에 공급하는 물류의 흐름이 조선후기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인분업자들이 도성내 변소를 치워 얻은 똥으로 만든 거름은 어느곳에 공급되었을까? 


이 부분 역시 우리 논문에 자세히 규명되었는데 도성 내에는 밭이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폐허가 된 광화문 안 경복궁 부지도 사람들이 밭 갈고 김을 매며 농사로 생계를 꾸리는 장소였고 경희궁은 왕궁의 기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소속 관서의 뜰에 개간한 밭이 많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궁궐이 이런 판국이었으므로 사대문 안 곳곳에 농사를 지었던 역사 기록이 많이 보인다. 도성 동북 지역에는 특히 논밭이 많았는데 현재의 명륜동 1가에 해당하는 흥덕동(興徳洞) 지역에는 논이 있었고 동대문 안쪽에는 왕실에 채소를 진상하는 관청인 내농포(内農圃)가 관리하는 미나리꽝이 있었다고 한다. 성 내외의 산은 산꼭대기까지 개간이 이루어져 만리현(萬里峴), 약점현(藥店峴), 무현(武峴), 와서현(瓦署峴), 서빙고(西氷庫) 등의 산에는 모두 개간된 농지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 노란색과 파란색 원이 밭이 존재한다고 문헌에서 확인되는 지역이다. 검은색 원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로 화장실과 유사한 분뇨처리시설이 발견된 곳이다.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도 왕십리의 무와 살곶이의 순무, 석교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이며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며 청파의 미나리와 이태인의 토란 등에 대한 언급이 있어 성 밖에도 광범하게 밭이 분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연서역(延曙驛)과 왕십리, 청파에는 분전(糞田)이 있어 양질의 전답이 존재했다고 하며 심지어 문묘(文廟)에서 이화정(梨花亭)에 이르는 길, 지금의 효제동에 해당하는 어의동(於義洞)에 이르는 길에도 밭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들 농지의 상당수가 공전(公田)이지만 사대문 안에는 관에 의해 잘 파악되지 않는 사전(私田)인 채소밭이 상당히 있었고 도성 밖 왕십리에도 채소밭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 광범한 영역에 걸친 도성 내외 밭 가운데 상당수가 지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인분 거름을 공급받고 있었다. 실제로 영조대 기록에 의하면 서울 근교에 있는 작물이 잘 자라는 좋은 전답치고 똥거름을 쓰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고 하며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도 엄 행수의 똥을 공급받는 지역의 밭이 가장 토질이 좋은 상상전(上上田)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분 거름을 사용한 밭의 평판이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한양성 내에서 수거한 인분은 예덕 선생과 같은 인분처리업자에 의해 일정 장소로 운반된 후 풀과 섞어 퇴비로 만들어 한양성 내외 여러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밭으로 운반되어 상품으로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본 조선시대 회충란




이렇게 인분을 공급받아 재배한 채소는 어떻게 소비되었을까? 


채소는 밭에서 사들여져 성내로 운반되어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업작물로 판매되었다. 상업 작물로서의 상추 등 채소의 특징은 원거리 수송이 매우 어려우며 보관이 어려워 다른 작물에 비해 빨리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산군 때에는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순나물, 파, 마늘, 상추를 바치게 하되 모든 채소는 뿌리째로 흙을 얹어서 마르지 않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서울 에 도착하였을 때 다 말라 바칠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해당 채소를 저자에서 구입해서 바쳤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채소류는 도성 내외에서 재배하여 빨리 소비될 수 있도록 유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하겠다. 


조선시대 도성 사람들이 채소류를 소비하는 방식은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양반과 평민층 등 도성 안팎 사람들도 자신의 텃밭에 채소를 길러 스스로 소비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도성 내에서 필요한 채소류 전부를 자급자족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도성 내외 곳곳에서 사람들이 채소를 팔았던 기록이 있다. 성 밖 왕십리에는 상당한 규모의 채소밭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딸린 채소 판매상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고, 도성 내에도 경모궁(景慕宮) 근처 등에는 채소를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정부로부터 등록된 물종을 취급할 수 있는 전매권을 인정받고 있는 시전과 이러한 관의 특혜와 관리에서 벗어난 난전이 있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정조대에 시전 상인이 국가로부터 권리를 인정받는 대가로 납부하는 돈의 명세를 기록한 「시민전화산대별단(市民錢貨散貸別單)」을 보면 채소를 판매하던 상인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적어도 시전에서는 공식적으로 채소가 취급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채소는 백성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깊은 품목이라고 하여 시전에서 취급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는 아마도 난전에서 취급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판매되던 채소를 한성부 사람들은 구입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섭취했는데 이 과정 전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에서 빨간색 선이 대변이 수집되고 거름으로 만들어 진 다음 채소밭에서 뿌려지고 이렇게 길러진 채소가 성내에서 판매되어 다시 사람에 섭취되는 과정을 가리킨 것이다. 


여기서 검정색 선을 보자. 이 검정색 선은 대변--> 거름 --> 채소로 옮겨가며 사람에게 다시 감염되는 기생충의 생활사이다. 


기생충의 생활사가 인분이 거름으로 재활용하는 과정을 따라 완벽한 사이클을 형성하며 사람에게 재감염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한, 인분 거름을 써서 키운 채소를 먹는 한 조선시대 한성부 사람들은 결코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인분 리사이클링 시스템은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모두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그 역할에 대해서는 도시폐기물과 그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측면에 착안하여 에도 시대 대도시를 대상으로 일본에서 활발히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요약하면 에도 시대 일본 대도시의 경우에도 인분의 처리와 관련하여 도시 주변의 농촌과 몇 가지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 할 부분이 생겨났다.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막대한 양의 인분이 매일 같이 발생하였는데 이 인분은 대도시 주변에서 경작하던 농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肥料源이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자신이 경작하는 농지에서 도시 지역에 상품으로서 판매할 수 있을 정도의 풍부한 농산물 작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마다 지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농지에 施肥할 막대한 거름 수요가 있었다. 이는 물론 해당하는 농촌 마을 단독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십만의 인구가 몰려있는 대도시에서 배출하는 인분을 거름 재료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생산물로 간단히 사례하고 도시에서 인분을 거둬갔던 것이 그 수요가 급증하자 인분을 가져갈 때 오히려 농민이나 그 대리자가 도시민에게 대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심지어 인분 가격이 폭등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기까지 하였다. 


결국 근세 일본에서도 인분-거름 리사이클링이 우리와 큰 차이 없이 진행되었고 이를 미루어 보면 일본 역시 20세기 이전 우리와 같이 높은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에 시달릴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 근세의 인분 비료 리사이클링 개념도. 조선후기의 인분 리사이클링과 거의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인분리사이클링은 중세 도시민에게 기생충감염이라는 위해를 가하므로 그 자체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농민들이 인분을 도시에서 경쟁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이러한 상황은 도시민으로 하여금 특별한 조치 없이도 인분을 정기적으로 도시 밖으로 운반해 낼 수 있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낳았다


도시 자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분이 비료 원료로서의 가치 때문에 큰 비용 소요 없이도 도시 밖으로 치워질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 대도시는 보다 쾌적한 상태의 대규모의 도시민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 주변의 농민에게 공급된 인분은 그 채마밭에 비료로 시비되었으며 이는 채소의 형태로 다시 도시민에게 공급되었다. 인분은 대도시의 흥기와 도시시민사회의 성장, 상업적 농경의 발달 등 사회적 변화의 와중에 가장 쉽게다량으로 얻을 수 있는 거름의 원료라는 측면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를 순환하였던 것이다.


인분을 거름으로 쓰면 당시 집약농경으로 매년 고갈되어 가는 지력을 단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보충하여 높은 생산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고도의 인구 밀집도를 보이던 17세기 동아시아 대도시를 유지할 수 있는 배후의 저력이 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인분은 농민에 의해 효율적으로 재활용되어 도시를 오염과 질병으로부터 구하였고 이로부터 생산된 채소는 도시민을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인류역사에서 가장 잘 기획되고 유지된 리사이클링 사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 사이에 왜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률을 매우 높게 유지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기생충 감염률은 60년대 이전까지도 매우 높았으며 그 이유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인분의 재활용을 지적한 의학자들이 많았다. 인분을 거름으로 활용하여 농산물을 재배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다시 식재료로 공급하는 리사이클링은 일견하여 매우 비위생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분이야 말로 그 질과 양의 측면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경제성 높은 거름의 재료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볼때 많은 인구를 효과적으로 부양 가능 한 농업생산력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인분의 재활용은 농업생산력 제고의 측면에서 그 자체 긍정적 측면이 매우 높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토양 매개성 기생충의 감염(heavy infection)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상대적으로 사소한 부작용에 머무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