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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10.3~1961.12.4(明治 6~昭和 36)


일본어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면 '쯔다 소우키치'다. 歷史學者. 본명은 津田親文이다. 기후현(岐阜縣) 米田東?井의 士族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7년(明治 20) 國民新聞 창간호의 田口卯吉 논설 「國を建つるの他は幾何ぞ」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나중에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敎) 방어정치과(邦語政治科)에 입학해 1891년(明治24)에 졸업한다. 澤柳政太郞에게 寄寓했다. 그 뒤 富山縣 本願寺 別院 部屬學敎 교수로 일하다가 상경해 시라토리 구라키치(백조고길<白鳥庫吉>) 후원을 받는다. 또 中等敎師를 군마현립중학(群馬縣立中學) 치바현립중학(千葉縣立中學) 宇都宮中學 치바중학교(千葉中學校) 교사, 독일협회중학교(獨逸協會中學學校) 교사 등으로 일한다. 교과서 『신찬동양사(新撰東洋史)』『국사교과서(國史敎科書)』 출판에 종사한 일도 있었다. 


1907년(明治40)에는 만선지리역사조사실(滿鮮地理歷史調査室) 연구원이 되어 본격적인 연구조사 생활을 시작하다가 1918년에 와세다대학 교수에 취임한다. 


1939년 東大法學部 東洋政治思想史講座에 출강했다가 황실 존엄성을 모독했다는 공격을 받고 이듬해인 1940년 「神代史の硏究」를 비롯한 4종 저서가 발매금지되고 出版法 위반으로 기소되고 법적 투쟁 끝에 1942년 有罪가 확정된다. 이에 불복한 그는 상고해 재판을 벌여 1944년 면소(免訴) 판결을 받는다. 


태평양전쟁 말엽에는 공습을 피해 平泉이란 곳으로 소개(疎開)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뒤인 1950에야 동경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1947년에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회원(우리의 대한민국학술원에 해당)이 되고 1949년에는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수훈(受勳)했다. 


1951년에는 문화공로상(文化功勞賞)을 수상했다. 실증주의적 사학에 기초해 신화를 부정하는 견해를 지녔으면서도 천황제에 대해서는 줄곧 옹호론을 제창해 마르크시즘 사관 학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는다. 사후에 津田左右吉全集이 발간됐다.


【학문 자취】 

1913년 고증학에 기초를 둔 「朝鮮歷史地理」를 출판한다. 이어 같은 해에 스승인 시라토리(白鳥)를 비판하는 형식을 띤 논문을 기초로 「神典の解釋」을 추진해 『神代史の新しい硏究』(1913)에 발표하고,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1919),이의 개정(改訂)판으로서 『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1924)를 간행했으며,『神代史の硏究』(1924)를 거쳐 『日本古典の硏究』를 보정(補正)했다. 물론 그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는 『神代史の新しい硏究』 속에 보인 주된 틀은 변함이 없으나 자기비판을 거듭 가하고 있다. 이런 업적은 학문적인 고증에 힘쓰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기기(記紀), 즉,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주된 텍스트로 삼아 황실(皇室) 유래를 추적한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기에는 정치적 작위가 감지되고,전설이나 민간설화로 윤색(潤飾)이 더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라토리(白鳥)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듯이 시라토리와는 견해가 다른 점이 많다. 그 중 하나로 『文學に現はれたる我が國民思想の硏究』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저작에서부터 『神代史の新しい硏究』가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쓰다사학(津田史學)의 지향(志向)】

쓰다(津田)의 지적이면서 정적(情的)인 관심은 고전적(古典的), 현대적 지식, 藝術의 흡수에 탐욕하는 것으로써,항상 개성적 비판력 육성에 힘써 문학청년적인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니며,광기(狂氣)와 풍아(風雅) 사이에서 살고 있다. 메이지(明治) 계몽사상가의 정신을 계승해 주체적 비판정신에 의해 정치비판적인 성향을 지니며,그것이 독자성을 지닌 요인이 되었다. 쓰다는 유신사(維新史)에 대한 관심 또한 매우 강해 친번(親藩)의 영지(領地)에서 태어난 본가인 佐幕派적인 사관에 서 있다. 따라서 유신사를 쓸 뜻을 계속 표명했다. 그의 국민사상 연구는 존왕(尊王) 사상은 결코 倒幕 사상은 아니었다고 단정한다. 그는 자아의 존중으로 나아가 자아를 바깥에서 규제하는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판,전근대적 도덕과 봉건사상에의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전제(專制) 관료주의 비판,절대주의적=비입헌적 정치 비판,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은 군국주의적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 성향을 지닌 것으로 나아가고,국민(國民) 민중(民衆)의 자주적 주체성의 입장에서 서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변화발전의 인식은 일본인 고유의 국민성을 부정하고 근대 서구문화의 수입수용을 意義 짓게 하며,사회문제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외래사상이라고 일괄해 傳하는 데 반대하고,취해야 할 점은 취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부인문제와 가족제도에 대해서도 오래된 것을 비판하고,인습적인 자연-예술관을 비판하고,일본의 전통예술에 대한 불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부정적 중국관(中國觀)과, 생활력이 약하다고 하는 조선관(朝鮮觀)을 지녔으며, 열등한 오키나와(忠繩)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또 기성 불교 교단에 대한 비판은 강하기는 하지만 종교사상에는 능통해 있다. 그런 입장에서 국민사상을 읽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쓰다사학의 의의】

쓰다는 천황제를 합리화하고 근대화해서 황실(皇室)의 존속을 염원하고 사회주의를 힘으로써 탄압하는 것을 반대한 자유주의적 역사가였다. 그는 마르크시즘에는 반대했으나 사상의 공존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사상의 고취를 비판하고,제정일치론(祭政一致論)을 비판하며,아시아주의에 비판적이었고 시국 편승을 경계했다. 그 결과 쓰다는 천황 불친정(不親政)이라는 고발을 받았다. 그의 天皇 不親政을 일본의 전통으로 삼는 견해를 대역(大逆) 사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대(古代)와 상대사(上代史)에 관한 저서를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다(皇室ノ尊嚴 冒瀆)」는 이유로 岩波茂雄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쓰다는 재판투쟁을 통해 자신은 불경(不敬)스럽기는커녕,天皇을 경애(敬愛)하고 있다고 힘써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전후가 되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쓰다 사학의 본령이다.


〔참고문헌〕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硏究』1972,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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