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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어이쿠! 이거 다시 덮어야겠다

by taeshik.kim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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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09월 12일 월요일 제469호


어이쿠! 이거  다시  덮어야겠다

박정희 정권 때 경주 월성 내부를 판 적이 있다. 하지만 발굴 초기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지금은 월성 조사를 못한다’라고 판단해 다시 덮었다. 역설적으로 이 덕분에 월성은 ‘막무가내 발굴’을 피할 수 있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09월 12일 월요일 제469호



박근혜 정부가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신라의 천년 왕궁 월성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반달 모양의 지형이다. 그래서 ‘달 월(月)’자를 붙여 월성(月城)이라 부른 것이다. 이미 신라 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다만 보름달이 아니라 반달에 가까우므로, 조선 시대 이래 일각에서는 반월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듬해부터 실행에 들어간 바 있다. 월성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해 건물터를 노출시킨 다음, 1976년부터 ‘복원이 가능하면 복원한다’는 계획이었다.

박정희의 경주개발계획에서 양대 축은 신라 시대 문화재 조사 정비와 보문관광단지 개발이었다. 이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추진한 최초의 도시 개조 혹은 재생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古都)의 역사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적으로 탈바꿈시켜 궁극에는 관광 수익까지 증대하려는 장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지금의 경주,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리가 지금 보는 경주의 경관이 형성되었다. 영구 집권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박정희는 갔지만, 그가 구상한 경주는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리고 월성은 박정희가 개조하려 했던 경주의 핵심 구역 중 하나였다. 그가 김재규의 총격을 견뎌냈더라면 월성에서는 일찌감치 발굴 조사가 완료되었을지도 모른다. 저 천년 왕성 내부에 외국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오성급 호텔이 위용을 자랑하며 들어섰을 수도 있다. 조금 아찔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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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제공
지난해 3월 하늘에서 본 경주 월성의 모습. 1976년 일부 발굴 조사가 시도된 적이 있지만 곧 중단됐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인간의 계획대로 성사되지는 않는 법. 결론부터 말하자면 월성에 대한 박정희의 계획은,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사유지 매입과 내부 정비라는 경관 변화 말고는 큰 변모를 겪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월성은 개발 혹은 발굴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박정희 정권 때 월성에서 내부 조사가 있기는 했다. 다만 아주 짧은 시기였다. 이 조사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게 진행되다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의 경주개발계획이 집행되기 시작할 무렵, 문화재 조사와 정비를 전담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그 일환으로 고대 한반도 고분 가운데 가장 덩치 큰 지금의 대릉원 구역 황남대총 발굴 조사에 착수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발굴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 한국인만의 손으로 신라 시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어붙이는 권력의 힘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타협점을 찾았다. 부근에 있는 다른 작은 고분을 발굴해 경험을 쌓은 뒤 황남대총을 파기로 한 것이다. 이 작은 고분 혹은 ‘황남대총을 파기 위한 실험교재’가 바로 천마총이었다. 참고로, 경주개발계획이 착수된 1970년대 초반, 이 고분들은 따로 이름을 갖지 않았다. 당시 황남대총은 98호분, 천마총은 155호분으로 불렸다.

발굴팀은 155호분부터 파기 시작했다. 155호분 작업이 끝날 무렵 98호분에 손을 댔다. 하지만 실험재료 정도로 만만하게 생각했던 천마총이,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어버렸다. 금관과 천마도, 말다래(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 등 엄청난 유물들을 토해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황남대총 역시 덩치에 걸맞은 정도의 발굴 성과를 내놓았다. 이렇게 되자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박정희를 비롯한 권력층의 눈길 역시 일시에 경주의 고분에 쏠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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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경주개발계획이 착수된 1970년대 초반 ‘황남대총을 파기 위한 실험교재’가 바로 천마총이었다. 하지만 천마총은 예상을 뛰어넘어버렸다. 1976년 6월 천마총 내부를 둘러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

“30㎝만 팠는데 기와 더미가 잔뜩…”

1973년 4월 천마총 발굴로 시작한 고분 조사는 1975년 10월이 되어서야 황남대총 고분에서 대단원을 고했다.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다만 그 성과로 인해, 당초 책정된 경주개발계획 예산 가운데 문화재 발굴 조사 관련 비용은 모조리 155호분(천마총)과 98호분(황남대총)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되자 월성에 문제가 발생했다. 월성 정비와 조사에 써야 할 돈이 전부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6년 이전에 이뤄져야 했다. 이를 토대로 모형 전시관을 세우고, 나아가 왕궁까지 복원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이 예산 부족으로 틀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발굴단은 두 고분 조사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황룡사지 조사에 투입되었다.

1976년 4월, 황룡사지에 투입되어 있던 고고학 발굴단원 일부의 업무가 변경되었다. 그들은 월성으로 들어가 ‘역사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그렇다고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당시 월성 조사의 목적은 ‘권력’에게 “우리가 월성에도 신경 쓰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발굴단 일원인 최병현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 글쎄, 방법이 있나? 월성은 왜 놔두냐는 압박도 있고, 그렇다고 예산은 딴 데다 다 당겨썼으니, 무언가 우리도 한다는 모양은 보여야 할 거 아냐? 그래서 할 수 없이 파는 시늉만 했어.”

실제 월성 내부를 판 이는 나중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을 끝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퇴임한 윤근일씨다. 그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그렇다면 당시 발굴 조사가 어떠했기에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월성 북쪽 성벽 중간쯤, 그러니깐 인왕동 파출소에서 월성 내부로 들어가는 그 성벽에 조선 시대 석빙고(石氷庫)가 있잖아. 그 앞쪽에 시굴 트렌치 서너 개를 넣었어. 한데 표토(表土)를 걷어내고 30㎝ 정도 내려갔을까? 기와 더미가 잔뜩 깔려 나오는 거야. ‘어이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 트렌치 조사는 사나흘 했을 거야. 어떻게 해? 이러다간 큰일 날 거 같더라고. 이런 유적을 어떻게 조사해? 그래서 ‘지금 수준으로는 월성 조사를 못합니다’라고 위에 보고했어. 위에서는 그걸 받아들였고. 그래서 월성은 파는 시늉만 하다가 만 거야.” 

트렌치(trench) 조사란, 고고학 발굴 조사 단계에서 구덩이를 파서 땅속에 어떤 유적·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이런 조사로 땅속 사정을 대략 파악한 다음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한다. 즉, 월성 발굴은 트렌치 조사라는 초기 단계에서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단의 진정한 이유는, 조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거의 모든 예산을 고분에 쏟아부은 데다 황룡사지 발굴까지 시작했으니, 월성을 감당할 인력과 예산이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는, 이 덕분에 월성이 ‘막무가내 발굴’이라는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월성을 살린 것은 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황룡사지였다. 이 유물들의 희생으로 월성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월성이 넘어야 할 고비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무수한 난관이 월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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