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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연개소문淵蓋蘇文

by taeshik.kim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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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 실권자. 스스로 연못에서 태어났다 해서 성을 '淵'으로 삼았다 했으니, 당 고조 李淵과 휘가 같다해서 주로 중국기록에서는 뜻이 같은 '泉'으로 성씨를 바꿔쓰는 일이 많다.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는 표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대대로였다. 그 직을 물려받지 못하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그 동생 고장을 세우고는 죽을 때까지 정권을 오로지 했다. (설명보강) 

삼국사기 권제49 (열전 제9) 연개소문 열전 : 개소문(蓋蘇文)<또는 개금(蓋金)이라고도 하였다.>은 성은 연(淵)씨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동부는] 또는 서부(西部)라고도 하였다.> 대대로(大對盧)로 죽으니 개소문이 마땅히 계승하여야 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하여 미워하였으므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소문이 머리를 숙이고 뭇 사람에게 사죄하여 그 직을 임시로 맡기를 청하고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비록 버려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뭇 사람이 불쌍히 여겨 드디어 관직의 계승을 허락하였다.그러나 흉악하고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그를 죽이기로 몰래 의논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소문이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두 소집하여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여 술과 음식을 성의 남쪽에 성대히 차려놓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들이 이르자 모두 죽이니 무릇 그 수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 들어가 왕[영류왕]을 죽여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리고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았다.이에 원근에 호령하여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으며,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매양 말을 타거나 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의 장수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나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군대를 풀어서 앞에 인도하는 자가 긴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도망쳐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나라 태종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오로지 한다.’는 소리를 듣고 치고자 하니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하였다. “소문이 자기의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이 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지킬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짐짓 참아서 저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겨 더욱 그 악을 저지른 후에 나라를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황제가 이에 따랐다.소문이 왕에게 아뢰기를 “듣건대 중국에서는 [유불도] 삼교가 나란히 함께 행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도교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청컨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구하십시오!” 하였다. 왕이 표를 올려 청하니 당나라에서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인을 보내고 아울러 도덕경을 보내 주었다. 이에 불교의 절을 빼앗아 거주하게 하였다. 마침 그때 신라[인]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아뢰었다.“백제가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아 갔고 다시 고구려와 군대를 합쳐 입조하는 길을 막으려 하므로 소국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출병시켰으니 엎드려 빌건대 당나라 군사[天兵]의 구원을 바랍니다.”이에 태종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황제의 옥새를 찍은 글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명하였다.“신라는 우리에게 예물로서 경의를 표하며[委質] 조공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데,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둬라! 만약 다시 공격한다면 내년에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치겠다.”이보다 앞서 당나라의 [사신] 현장(玄奬)이 [고구려] 경내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소문을] 불러 이에 돌아왔다. 현장이 황제의 명을 전하자 소문이 말하였다.“지난 번 수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00리를 빼앗아 갔다. 이로부터 원한과 틈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우리에게 침략한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그만 둘 수 없다.”현장이 말하였다.“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말하리요? 지금 요동은 본래 모두가 중국의 군현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이를 문제삼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 옛 땅을 반드시 찾으려 하오?”그러나 소문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 이 말을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들을 죽이고 자기 백성을 잔학하게 대하였으며, 지금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사신 장엄(蔣儼)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이 끝내 조칙을 받들지 않고 이에 군사로 사신을 위협하였다. 굽히지 않자 드디어 굴 안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군사를 크게 징발하여 친히 정벌하였다. 이 일은 고구려 본기에 상세히 실었다. 소문이 건봉(乾封) 원년(보장왕 25: 666)에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20(고구려본기 제8)  영류왕 :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왕은 서부(西部) 대인(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해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케 했다.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은 것을 듣고,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명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케 했다.
삼국사기 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上 :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고하였다.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십시오.” 대왕(大王)은 매우 지당하다고 여겨서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청하니,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윤 6월에 당나라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 지금의 병력으로도 고구려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려고 하는데, 어떤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이 토벌할 것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아직 [그 계획을] 나타내지 않고 참고 계시면, 저들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고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므로, 그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황제가] 부절을 가진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책봉하고 조서를 내렸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것은 전대 제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대를 잇는 의리는 여러 왕대의 옛 규례이다. 고구려 국왕 장(臧)은 재능과 생각이 아름답고 민첩하고, 식견과 도량이 치밀하고 바르며, 일찍이 예교(禮敎)를 익혀 덕망과 의로움이 알려졌다. 처음 번방(藩邦)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성을 먼저 드러냈으므로,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예전의 사실을 인정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을 준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해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여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는데, 왕은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서 돌아왔다. 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은 [상리]현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라가]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했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느냐?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옛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느냐?”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 그 실상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ㆍ요주(饒州)ㆍ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ㆍ영주(營州) [2주] 도독의 병사와 거란ㆍ해(奚)ㆍ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했다.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輸使)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막리지는 백금을 당나라에 바쳤다. 저수량(遂良)이 말했다.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구이(九夷)가 용납할 수 없어 이제 그를 치려고 하는데, [그가] 금을 바치니 이것은 곡정(鼎)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사신이 또 말하였다. 막리지는 관인 50명을 들여 보내 숙위하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너희 무리는 모두 고무(高武)[영류왕]를 섬겨 관작을 얻었는데, 막리지가 [왕을] 죽였는데도 너희들은 복수를 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며 대국을 속이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느냐? 모두 처벌케 했다. 겨울 10월에 평양에 내린 눈 빛이 붉은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 곧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 것을 권했으나 황제가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달리는 일,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일, 가까운 것을 두고 먼 것을 택하는 일,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륙하고는 만족해 하므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북쪽으로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했다. 11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요동도는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지금은 수나라 때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고 말했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와 영협(嶺)의 군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과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했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ㆍ하주(河州)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했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중공(衆工)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에서 사다리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했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황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써 천하에 알렸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 실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이제 유주와 계주(州)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석으로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경비가 들지 않도록 하라.” 또 말했다. “예전에 수나라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는데, 고구려 왕은 그 백성들을 인자하게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편안하고 화목한 백성들을 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말해서, 필승의 길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써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냐?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로써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했다.4년(645)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3월에 [당나라] 황제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시중하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병했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으로써 이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안장 뒤에 비옷을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북쪽 양쪽에 담이 있는 길로 몰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왔다. 여름 4월에 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오니,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져서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가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함락시켜, 1만 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 석을 빼앗았으며, 그 땅을 개주(盖州)로 삼았다.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이세적이 나아와 요동성 밑에 이르고,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맞이했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멀리 와서 피곤할 터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황제를 맞이할 일인데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으므로,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강하왕(江夏王) 도종에게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았으며, 장군예는 목을 베었다. 황제가 몸소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가장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 위에 얹으니, 시종관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밑에 놓았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황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고 했다. 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충차(衝車)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 갑옷[金鎧]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당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황제가 [이]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포로된 자는 무적의 군사[勝兵]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 섬을 빼앗겼다. [황제가]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은]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황제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물건들을 전부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이세적은 황제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옷 입은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했다.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과 바꾸기 바란다.” 세적이 그제야 물러났다. 성 안 남녀 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앞서 요동성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황제는 그가 의리가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주고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황제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했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와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우리가]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말했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했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그것은] 모두 위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 명을 주십시요.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연수에게 보내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케 했다.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山)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대답하였다.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ㆍ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했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저희]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다다라서 저녁에는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험한 형세를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멈추었다.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서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도종이 발을 상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했다.“너의 죄는 마땅히 죽을 만하나, 다만 짐은 한(漢)나라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쓴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ㆍ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게 했다.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무릇 [고구려 정벌에서] 현도ㆍ횡산(橫山)ㆍ개모ㆍ마미(磨米)ㆍ요동ㆍ백암ㆍ비사ㆍ협곡(夾谷)ㆍ은산(銀山)ㆍ후황(後黃)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ㆍ개주ㆍ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ㆍ건안ㆍ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논한다. 당나라 태종은 뛰어나고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이다. 난을 다스린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ㆍ강왕(康王)과 비슷하다. 군사를 쓰는 데 이르러서는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에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적수가 없었는데,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요 비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 그 성명을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한 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이 사기에 그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5년(646) 봄 2월에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다 보며 물으니,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을 빼앗자고 한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며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는 것이 딱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 어머니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이전에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활집을 개소문에게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져서,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여도, 침략하고 업신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다시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삼국사기 권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 6년(647)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서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 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했다.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했다.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했다.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와 공격했다.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 우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신감의 복병이 나와 패했다.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할 것으로 여기고 명년에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요동 싸움에도 검남은 또 참여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가을 7월에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ㆍ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갈마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8년(649)에 당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 전쟁을 그만두게 했다. 논한다.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사변을 일으킬 때 간하는 사람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에서 군대를 돌이킨 후에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다시 정벌하려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상소하며 간했다. “노자(老子)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위명과 공덕은 이미 만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토지를 개척하고 강토를 넓혔으니 역시 그칠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 매양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에도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고 음악을 그치게 한 것은 인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없는 사졸들을 몰아 칼날 밑에 맡겨두어서 비참하게 죽게 하니, 그들만은 불쌍히 여길 만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예전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하고, 백성을 억압하고 못살게 했다면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죄목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해 복수한다고 하니, 어찌 보존되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착하게 되도록 허락하시고, 파도 가운데의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이(華夷)가 기뻐하여 의지할 것이며 먼 곳에서는 삼가하고 가까운 곳에서는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양공(梁公)이 죽을 때 한 말이 간곡하기가 이와 같았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려 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즐겨하여 먼 곳에서 싸우기에 힘썼다.』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 아닐까?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주필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여 사방 40리에 뻗치니 태종이 그것을 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또 이런 말이 있다.『6군이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병이 고하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비록 결국에는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두려워함이 그러하였는데 신ㆍ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남쪽으로 옮겨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13년(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했다. “마령(馬嶺) 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군대와 말갈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ㆍ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다. 여름 5월에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마주 싸웠다. 명진 등이 분발하여 [우리 군사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15년(656) 여름 5월에 서울에 쇠가 비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했다.17년(658) 여름 6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20년(661) 봄 정월에 당나라가 하남ㆍ하북ㆍ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ㆍ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蔚州) 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에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글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어름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25년(666) 왕은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 했다>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으로 순행하면서, 그 아우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애걸하였다. 6월에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글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해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金山)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우리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 여 명을 죽이고, 남소[성]ㆍ목저[성]ㆍ창암[성]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 군사와 합하였다. 곽대봉이 수군을 데리고 다른 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서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노하여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연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胡床) 위에 걸터 앉아서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 소상백(少常伯) 안륙(安陸)의 학처준(處俊)을 그 부장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함께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병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ㆍ독고경운(獨孤卿雲)ㆍ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또] 하북 여러 주의 조부(租賦)를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27년(668) 봄 정월에 [당나라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ㆍ김인문(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2월에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3천 명을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은 것을 이유로 말렸다. [설]인귀가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고, 마침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우리 군사와 싸워 이겨서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주(扶餘州)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므로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이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다투어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진실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며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은 거듭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위태하여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 거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연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어울려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필성(畢星)과 묘성(卯星)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許敬宗)이 “살별이 동북방에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가 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柵)에 다달았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연]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연]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왕을]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고, 중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이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보냈다.[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ㆍ자사ㆍ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이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ㆍ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고장(高臧)[보장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삼았다. 13년(644)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주어 말하였다.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둠이 좋을 것이다. 만일 또 다시 그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그러자 [연(淵)]개소문(蓋蘇文)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500리 땅을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이 전쟁을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다.현장이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거슬러 올라가 논할 것까지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유신(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겨 일곱 성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1) 김유신 상 : 춘추가 사간(沙干)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에 예방하러 갈 때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사간 두사지(豆斯支)가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었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천개소문(泉蓋蘇文)개금(蓋金)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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