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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위홍(魏弘)

by taeshik.kim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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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인 헌강왕~진성여왕 시대 정국을 좌우한 신료다. 헌강왕 즉위와 더불어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올랐고, 이후 각간으로 진급하고, 진성여왕 시대에는 왕과 농밀한 관계를 발판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이런 그를 어떤 기록에서는 진성왕의 남편이라 했다. 진성여왕 시대에는 승려 대구와 더불어 향가집인 삼대목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가 죽자 진성여왕은 혜성대왕에 추봉했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헌강왕 : 헌강왕(憲康王)이 왕위에 올랐다...즉위하여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 :  2년(888) 봄 2월에 소량리(少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여 갔다. 왕은 평소 각간 위홍(魏弘)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이때 이르러서는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이에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모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책을 일러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이후에는 젊은 미남자 2∼3명을 몰래 끌어 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賞)과 벌(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김씨다.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곧 정강왕(定康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魏弘) 대각간이니, 혜성대왕(惠成大王)에 추봉됐다. 정미년에 즉위해 10년을 다스렸다. 정사년에 소자(小子) 효공왕(孝恭王)에게 양위하고는 12월에 붕했다. 화장해서 뼈를 흩어 뿌리니 모량(牟梁)의 서악(西岳)이란 곳인데, 미황산(未黃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잡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陁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살아나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거니,/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는 이러했다.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3, 4명의 총신(寵臣)을 말한 것이요,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이 왕 때의 아찬(阿飡) 량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량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한다. "나무 조각 50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각각 써서 물에 가라앉게 해서 제비를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이때 군사 중에 거타지(居陁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한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陁羅尼)의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 것이오.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거타는 말했다."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는 말한다.  "신라의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혜성대왕(惠成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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