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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정호(鄭澔, 1648~1736) 〈식영정 중수기(息影亭重修記)〉

by taeshik.kim 2019.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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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獨居翁 기호철이 교열하고, 해제하며 옮기다. 



지금은 전남 담양군 광주호 변 경승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한 누정樓亭인 식영정은 앞선 자료들을 봤듯이 임진왜란 발발 이전인 1560년 무렵에 지었다가 이후 언제인지 폐허가 된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공업자이면서 땅 주인인 김성원(金成遠, 1525~1597)과 그가 이를 지어 짜웅한 그의 장인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죽으면서 이내 폐허 상태로 방치되지 않았나 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어느 시점이 되겠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그렇게 폐허가 된 그 터에다가 송강 정철 후손인 정민하(鄭敏河)가 그 땅을 사들이고는 경종 3년(1723) 무렵, 식영정을 재건한 사정을 정리한다. 중건기를 쓴 사람은 같은 정철 후손인 정호(鄭澔, 1648~1736)다. 중건 시공업자인 정민하한테 정호는 아재비 항렬이다. 


우리한테 익숙한 식영정이란 정자는 이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면 된다. 



녹음에 쌓인 식영정




정호(鄭澔, 1648~1736) 〈식영정 중수기(鄭澔息影亭重修記)〉



息影亭重修記



息影亭,即故林石川遺址也。石川當明廟乙巳,知士禍將作,絶意遊宦,退歸南中,搆一小亭於昌平星山之下,扁以‘息影’,作記以見志。亭之北,有棲霞堂舊基,又有芳草洲、紫薇灘、鷺鷀巖、琴軒、月戶等諸勝景,與河西、霽峯及我松江先祖,杖屨相從於一洞之中,其遺蹟歷歷。至今人能傳誦,《松江遺稿》中亦載〈息影亭雜詠〉,有“身藏子眞谷,手理卲平瓜。”及“萬古蒼苔石,山翁作臥床。”等句,其高風遠操之意,可以想像矣。今其子姓零替,只有外裔若干人,不能保守舊業,轉輾爲他人物。余族姪敏河,惜其前賢遺址沒爲田父野老之居,遂買取而重修之,邀余作記。余謂:“爾能慕前賢之遺躅,占舊址而修葺之,其志可尙。然但知愛其泉石園林之勝,而不慕其諸賢文章德業之懿,則不幾於取其末而遺其本乎?地靈人傑,古語可徵,山川旣無古今之異,則人材豈有今昔之殊?今爾亦能延訪一時修行之士,講服以友輔仁之訓。居古人之所居,行古人之所行,使吾文章德業,播詠於後人之口,亦猶今之視昔,則豈不休哉?豈不偉哉?


崇禎後癸卯季春上浣,薪島病累識。




식영정중수기





[번역] 


식영정(息影亭) 중수기(重修記)


식영정은 바로 고인(故人)이신 임 석천(林石川)의 유지(遺址)이다. 석천은 명종 을사년(1545)을 당하여 사화가 장차 일어날 것을 알고 출사(出仕)에 뜻을 끊고 벼슬을 사양하고서 고향 호남에 돌아와 창평(昌平) 성산(星山) 아래에 작은 정자 하나를 지어 ‘식영(息影)’으로 편액(扁額)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자신의 뜻을 표명하였다.


식영정 북쪽에는 서하당(棲霞堂) 옛터가 있고 방초주(芳草洲), 자미탄(紫薇灘), 노자암(鸕鷀巖), 금헌(琴軒), 월호(月戶) 등 많은 뛰어난 경치가 있어, 김 하서(金河西), 고 제봉(高霽峯), 그리고 우리 송강(松江) 선조와 더불어 한 골짝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서로 친하게 지냈으니, 그 유적이 환히 알 수 있을 만큼 또렷하다. 지금도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외는 《송강유고(松江遺稿)》에도 실린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에 “정자진이 은거한 곡구에 몸을 숨기고, 소평이 심었다던 오이를 손수 심었네.[身藏子真谷 手理邵平瓜]”라는 구절과 “먼먼 옛날부터 푸른 이끼 덮인 바위, 산속 늙은이가 평상 삼아 누웠어라.[萬古蒼苔石 山翁作臥床]” 등의 구절이 있어 그분들의 고상하고 심원한 풍조(風操)를 지키려는 뜻을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 석천 자손이 쇠락하여 외손 몇 사람만 있어 구업(舊業)을 지키지 못하고 주인이 바뀌고 바뀌다가 남의 소유물이 되었다. 내 족질(族姪)인 민하(敏河)가 전현(前賢)의 유지(遺址)가 농사꾼이나 시골 노인들 거처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하다가 마침내 사들여 이를 중수(重修)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달라 요구했다.


내가 말해주기를,


“그대가 전현(前賢)의 유적지를 우러러 받들 줄 알아서 옛터를 차지하여 이를 수리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천석(泉石)과 원림(原林)의 아름다움만을 소중한 줄 알고 당시 여러 현인의 문장과 덕업의 아름다움을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면 말단을 취하고 근본은 잃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지세가 빼어나면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地靈人傑〕’는 옛말은 징험할 수 있거늘 산천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면 인재의 배출은 어찌 지금과 이전이 다르겠는가. 이제 그대도 한 시대의 학문을 닦은 선비들을 초빙하여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보강한다[以友輔仁]’라는 가르침을 좇아 강론할 수 있게 되었다. 옛사람이 살았던 곳에서 살면서 옛사람의 행했던 바를 행하여 우리의 문장과 덕업이 후세 사람의 입에서 널리 읊어지게 하는 것이 또한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 했다.


숭정(崇禎) 기원후 계묘년(1723, 경종3) 3월 상순에 신지도(薪智島)에서 병루(病累)가 쓰다.





[해설]


이 중수기는 1723년(경종3) 3월에 정철의 5세손으로 식영정을 중수한 정민하의 요청으로 당시 강진(康津) 신지도(薪智島)에 유배 중이던 정철의 현손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은 것이다. 


정호 문집인 《장암집(丈巖集)》 권24에도 수록되었는데, 본문만 세어도 문집은 334자이고 현판은 354자로 현판이 20글자가 더 많고 고친 글자도 여럿이다. 현판은 당시 정호의 수본(手本)을 판각한 것이고, 이후 표현을 고치고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여 문집에 수록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정호는 자가 중순(仲淳)이고, 호가 장암(丈巖)이다. 정종명(鄭宗溟)의 증손으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매우 촉망받은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675년(숙종1), 송시열이 귀양 가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쓰다가 형제들 권유로 과거에 응시해 1682년 생원, 168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이후 그는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면서 정국 변화에 따라 출사와 유배를 반복했다. 


1721년(경종1)에는 이조판서에 올랐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훗날 영조인 연잉군(延礽君)의 세제 책봉과 대리(代理)를 주장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과 함께 파직되어 1722년 10월 강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1725년(영조1) 귀양에서 풀려나 삼정승에 차례로 올랐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시문과 글씨 모두 뛰어났다.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중수기는 그가 76세 때에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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