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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지수신(遲受信)

by taeshik.kim 2018.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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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백제인으로, 임존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용삭 2년(662) 7월에…왕인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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