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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진성여왕(眞聖女王)

by taeshik.kim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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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887∼897년이다. 앞선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이은 실정과 문란한 생활이 농민반란을 불렀다 해서 헌강왕 서자인 요(嶢)한테 선위하고는 물러났다. 재위기간 중에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역사는 그의 문란한 행실 중 대표격으로 삼촌 위홍과의 애정 행각을 들었지만, 신라시대 근친간 결혼까지 흔했다는 점에서, 이는 후대 악의적인 평가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 :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으로, 헌강왕의 여동생이다.<최치원문집(崔致遠文集) 제2권 사추증표(謝追贈表)에 말하였다. 『신(臣) 탄(坦)은 말씀을 올립니다.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음에, 죽은 아버지 신 응(凝)[경문왕]을 추증하여 태사(太師)로 삼고 죽은 형 신 정(晸)을 태부(太傅)로 삼았습니다.』 또 납정절표(納旌節表)에서 말하였다. 『신의 큰 형인 국왕 정(晸)[헌강왕]은 지난 광계(光啓)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성스러운 시대를 버렸고, 신의 사내 조카 요(嶢)는 아직 돐도 되지 않았으므로 신의 둘째 형 황(晃)[정강왕]이 임시로 이 변방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또한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밝은 시대를 마다하고 멀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말하면 경문왕의 이름은 응(凝)인데 본기(本紀)에서는 경응(膺廉)이라 하고, 진성왕의 이름은 탄(坦)인데 본기에서는 만(曼)이라 하였다. 또한 정강왕 황(晃)은 광계(光啓)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었다고 말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두 모르겠다> 크게 사면하고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고 왕이 몸소 거둥하여 설법(說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2년(888) 봄 2월에 소량리(少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여 갔다. 왕은 평소 각간 위홍(魏弘)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이때 이르러서는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이에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모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책을 일러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이후에는 젊은 미남자 2∼3명을 몰래 끌어 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賞)과 벌(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그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당시의 정치를 거짓으로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회 들어가는 길에 붙혀 놓았다. 왕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찾아내게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는 문인(文人)으로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한 짓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이는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 거인(巨仁)이 아닐까 합니다.” 왕이 명하여 거인을 묶어서 서울의 감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집행하려고 하자, 거인(巨仁)이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도다. 지금 이내 가슴 속 깊이 품은 근심은 옛날과 비슷한데 하늘은 아무 말 없이 다만 푸르기만 하구나!』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왕이 두려워하여 거인(巨仁)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환이 들어, 죄수의 정상을 살펴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6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니 왕의 병이 나았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貢賦]를 보내오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堡壘)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목베고 나이 10여 세된 우련의 아들로 촌주의 직을 잇게 하였다. 4년(890) 봄 정월에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둘러졌다. 15일에 황룡사에 거둥하여 연등(燃燈)을 구경하였다. 5년(891) 겨울 10월에 북원(北原)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1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원의 동쪽 마을 및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6년(892)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그 주에 근거하여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 칭하였는데,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과 현이 항복하여 소속되었다. 7년(893)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하였으나 바다에서 빠져 익사하였다. 8년(894) 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궁예가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갔는데, 그 무리가 6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일컬었다. 9년(895) 가을 8월에 궁예가 저족군(猪足郡)과 성천군(川郡)의 두 군을 쳐서 빼앗았다. 그리고 한주 관내의 부약(夫若)과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깨뜨렸다. 겨울 10월에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嶢)를 태자로 삼았다. 일찍이 헌강왕이 놀며 사냥하러 가는 길가에서 한 여자를 보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왕이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였다. 이에 명을 내려 뒷수레에 태워 장막으로 만든 임시 궁전에 도착하여 야합(野合)하여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성장하자 체모가 우뚝 뛰어났으므로 이름을 요(嶢)라 하였다. 진성왕이 듣고서 대궐로 불러 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내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불룩하게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 이에 담당 관청에 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책봉하여 받들게 하였다. 10년(896)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은 색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 불렀다. 주현(州縣)을 무찔러 해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에까지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여 갔다. 11년(897) 여름 6월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근년 이래로 백성은 곤궁하고 도적들은 벌떼같이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 어진 이에게 자리를 비켜 왕위를 양보하고자 하는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이에 왕위를 태자 요(嶢)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아뢰었다. 『신(臣) 아무개는 말씀을 올립니다. 희중(羲仲)의 관직은 신의 본분이 아니고, 연릉(延陵)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곧 신의 좋은 방책입니다. 신의 사내 조카 요(嶢)는 신의 죽은 형 정(晸)의 자식인데, 나이가 거의 15세가 되었고 자질은 종사(宗社)를 일으킬 만하므로 밖에서 구하여 데려오지 않고 안에서 천거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이미 정치를 임시로 맡겨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재앙을 진정시켰습니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北宮)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김씨다.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곧 정강왕(定康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魏弘) 대각간이니, 혜성대왕(惠成大王)에 추봉됐다. 정미년에 즉위해 10년을 다스렸다. 정사년에 소자(小子) 효공왕(孝恭王)에게 양위하고는 12월에 붕했다. 화장해서 뼈를 흩어 뿌리니 모량(牟梁)의  서악(西岳)이란 곳인데, 미황산(未黃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잡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陁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살아나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거니,/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는 이러했다.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3, 4명의 총신(寵臣)을 말한 것이요,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이 왕 때의 아찬(阿飡) 량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량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한다. "나무 조각 50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각각 써서 물에 가라앉게 해서 제비를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이때 군사 중에 거타지(居陁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한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陁羅尼)의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 것이오.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거타는 말했다."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는 말한다.  "신라의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제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 : 효종랑(孝宗郞)이 남산(南山) 포석정(포石亭.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입니다. 그가 눈 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먹고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糠粃)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난(色難)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郎)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삼국유사 권 제5 효선(孝善) 제9 손순매아(孫順埋兒) :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632)에 즉위해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만(曼) ☞김만(金曼) ☞만헌(曼憲) ☞김만헌(金曼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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