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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창조리(倉助利)

by taeshik.kim 201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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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봉상왕~미천왕 시대 국상이다. 남부 대사자 출신으로, 봉상왕에 의해 국상으로 발탁됐다. 모용씨 침입에 고구려가 시달리자 고노자를 발탁해 막았으며, 봉상왕 말년에는 잇단 재해에도 왕이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자 간했자다 말을 듣지 않자, 다른 사람들과 모의해 왕을 몰아내 자살케 하고 을불, 곧 미천왕을 맞아들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창조리 전 :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는데 그때 모용외(慕容)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의 군사가 강하여 여러 차례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는 어질고도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그를 신성(新城)태수로 삼았다. 그 후로 모용외가 다시 침범하지 않았다. 9년(292) 가을 8월에 왕이 국내의 나이 15세 이상 장정 남자를 동원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이 식량 부족과 부역에 시달려 이로 인해 유망하게 되니 창조리가 간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길을 잃어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고 어린이와 늙은이는 구렁텅이에 뒹구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 공사에 시달리게 하니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이웃에는 강한 적이 있어 우리의 피폐함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국가와 백성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왕이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의 중함을 보여 주겠는가? 지금 상국(相國)이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창]조리가 말하였다.“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어진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니 감히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합니까? 바라건대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였다. 조리가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위할 것을 모의하니 왕이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해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니,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해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했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으니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 9년(30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8월에 왕은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인 자들을 징발해 궁실을 수리하니,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서 그 때문에 도망쳐 흩어졌다. 창조리가 간했다. “재난이 거듭 닥쳐 곡식이 자라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려,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구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을 몰아 토목 일로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부모된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왕은 화내며 말했.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가로채려고 하는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국상의 자리를 잠시 채우고 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가로채겠습니까?” 왕은 웃으며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겠느냐? 다시는 말하지 않기 바란다.”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두려워, 물러나와서 여러 신하와 모의해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봉산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왕이라 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 원년 :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봉상)왕을 폐하려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니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음을 발견했다. 용모 비록 초췌하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하며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니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 해서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했습니다”. 을불이 믿지 못하고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했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라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왕손을 매우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나가자, 국상 창조리가 따라가며 여러 사람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하고, 갈대잎을 관에 꽂으니 여러 사람이 모두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음을 알고, 마침내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어 군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는, 이윽고 왕손을 맞이해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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