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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이 정답일까

by taeshik.kim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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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09월 08일 목요일 제468호


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이  정답일까

박근혜 정부의 대규모 경주 개발 프로젝트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은 월성에서 시작되었다. 월성은 900년간 신라의 왕성으로 한국 고고학계의 성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신중한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09월 08일 목요일제468호



지금 경주는 파헤쳐지고 있다. ‘천년 왕성(王城)’이라는 월성(月城)도 마찬가지다. 기록적이라는 무더위 와중에서도 삽질은 멈출 기미가 없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하는 월성 발굴 조사 현장에 동원되는 인부만 매일 100~150명을 헤아릴 정도니, 그 발굴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월성 같은 이른바 ‘관급’ 발굴 현장에서는 하루 노임(8시간 기준)이 5만4000원이다. 인부들을 감독하는 발굴반장은 5만9000원. 굴삭기를 쓰는 데는 하루 40만원이 든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월성 현장에만 노임과 굴삭기 비용으로 하루 700만원 안팎이 지출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대규모 경주 개발 프로젝트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라는 기관차는 이미 월성에서 기적을 울리며 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최종 계획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역사 도시 경주를 개조하기 위한 움직임에서 월성 발굴은 여러모로 상징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월성은 한국 고고학계의 성지 같은 곳이다.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월성을 파보고 싶어 했지만, 섣불리 삽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천년 왕성이라는 역사의 무게가 막강했다. 다른 모든 유적이 발굴의 손길을 피해 가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월성만은 손 한번 타지 않은 황무지 같은 곳으로 남아 있었다. 주의해서 신중하게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사를 완료하는 데만 50년이 걸린다고 했다. 어떤 고고학도는 100년을 두고 하나씩 파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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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제공
1979년 4월12일 경주시 보문관광단지를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던 박근혜 대통령. 부녀 모두 경주 문화재에 관심이 컸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월성에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라는 계획이 입안되기가 무섭게 발굴 인부를 투입해서 성지를 파헤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지하에 문화재가 분포하는 양상을 점검하는 수준의 시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2016년 8월 현재 전체 22만2528㎡에 달하는 월성 내부 구역 중 이미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뒤집고 말았다. 이 정도의 속도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박근혜 대통령 임기 안에 ‘월성 발굴이 완료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적중할 듯하다.
도대체 이 속도전의 정체는 뭘까?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기간 문화재 전문기자로 일한 나 역시 모르겠다. 

그렇다면 월성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대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조에 따르면, 이 임금 재위 “22년(서기 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했다. (그해)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라고 했다. 신라사 중간에 부침과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이후 월성은 신라 멸망에 이르기까지 좀 더 정확히는 900여 년간이나 굳건히 왕성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신라 천년 왕성’이라 불린다. 한마디로 월성은 천년 왕국 신라를 증언하는 지역이다.
이런 월성이기에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 역시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주변만 몇 군데 파보았을 뿐이다.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면, 일제의 병탄 직후인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는 성벽을 시범 조사한 끝에 그 하부에 있는 토층 5개를 확인했다. 또한 뼈로 만든 화살촉과 숯으로 변한 곡물, 그리고 토기 조각 등을 수습했다. 이것이 첫 조사다. 이후 박정희 시대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확정된 이후, 1979년부터 이듬해까지 동문 터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해 그 흔적을 확인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에는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모양의 방어 시설인 해자에 대한 집중 조사를 벌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그 해자를 복원해놓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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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지난 3월30일 공개된 경주 월성 정밀 발굴 조사 현장. 8월 현재 기준 전체 월성 구역 중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 파헤쳐졌다.

월성 개발 계획의 ‘데자뷔’ 

물론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려는 계획은 꾸준히 나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미술사학도 출신 유홍준 문화재청장 주도로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기로 계획한 바 있다. 2007년 2월 초, 유홍준 당시 청장은 월정교(月精橋:원효 대사가 요석 공주를 만나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 복원, 쪽샘지구(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 정비 등과 함께 월성 내부 발굴 조사를 시행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경주뿐 아니라 공주·익산 등 고대 왕국의 다른 도시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입안 단계에서 끝나고 말았다.

좀 더 멀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월성 발굴은 물론 복원까지 추진하려고 계획했다. 1971년 수립되어 그 이듬해 개시된 이 계획에 따르면, 월성에 대해서는 “경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를 노출시키고, 보도를 개수하고, 잔디를 심고, 주위 토성에 나무를 보식(補植)하며, 화장실을 개축하고, 궁전의 규모를 연구하여 모형을 전시하며, 남천(南川)에 석교(石橋)를 복원”하기로 했다. 나아가 “1976년 이후에 월성의 궁전 구조물을 연구하여 복원이 가능하면 복원한다”라는 방향도 확정했다. 그러나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고 궁전 건물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박정희 집권기에도 시도하지 못했다.

주의할 점은 박정희 시대에 제시된 월성 개조 계획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박근혜 정부의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과 겹친다는 사실이다. 우선 월성 남쪽 성벽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흐르다가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남천에 석교를 복원하기로 했는데, 이는 신라 시대의 일정교(日精橋:밤마다 연인을 찾아가는 과부 어머니를 위해 아들 칠 형제가 놓았다는 돌다리)와 월정교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특히 월정교는 복원이 사실상 완료된 상태다. 나아가 월성 내부를 발굴하고, 장기적으로 신라 시대 궁궐을 복원한다는 발상 역시 박정희·박근혜 시대의 경주 개조 계획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 아버지가 계획만 세웠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한 월성 내부 발굴 조사와 왕궁 복원 계획을 실제로 밀어붙이고 있다. 결정적으로 부녀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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