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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추적, 한국사 그 순간 -2-] 김유신의 김춘추 겁박

by taeshik.kim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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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가 임신한 문희와 혼인 미적거리자 “태워죽여라”
[중앙선데이] 입력 2016.07.24 00:44 | 489호 23면

김유신은 월경(月經)이라는 난관을 눈부신 ‘대타 작전’으로 돌파했다. 애초엔 큰 누이동생 보희(寶姬)를 김춘추와 짝지어줄 요량이었지만 ‘거사(巨事)’를 준비한 그날 보희가 월경 중임을 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누이 문희(文姬)를 찢긴 옷고름을 걸치고 바느질을 기다리는 김춘추가 있는 방으로 밀어 넣었다. 방에 들어설 때 문희 모습을 『삼국사기』는 “담백한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과 빛나는 요염함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淡粧輕服光艶炤人)”고 묘사했다.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22세 청년 김춘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김춘추가 “혼인하자고 해서 혼례식을 치르고 이내 임신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법민(法民)이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법민은 문무왕의 이름이다.


by 여송은



문무왕 법민은 혼전임신으로 태어나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김유신의 계략에 따라 방에 단둘이 같이 있게 된 김춘추와 문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연 언급이 없고, 그 모습을 보고는 춘추가 마음에 쏙 들어 혼인을 하고는 법민을 낳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민이 정식 혼인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란 점을 부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구성은 전후맥락으로 보아 얼토당토않다. 법민은 혼전 임신으로 태어난 아들이다. 하마터면 아비도 모르는 싱글맘의 아들이 될 처지였다. 아니 엄마 뱃속에서 그대로 어머니와 함께 장작불에 태워 죽임을 당할 뻔한 운명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과 그에 따른 혼전 임신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이 있고 생생하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이 문희를 자기가 있는 방으로 들이자 “춘추공은 유신의 의도를 알고 마침내 문희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이후 자주 유신 집을 왕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무엇을 하려는 속셈인지 간파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김춘추의 빈번한 왕래 끝에 마침내 문희는 임신을 하게 된다. 요즘 말로, 소위 싱글맘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by 여송은



한데 김춘추의 행동에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자기 씨를 밴 문희와의 혼인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미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춘추가 결혼을 회피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김유신이 그 시점에 저 유명한 장작불 쇼를 기획했다는 점에서 김춘추의 책임회피 행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신공은 누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꾸짖기를 ‘네가 부모님께 아뢰지도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하고는 이내 서울 안에다가 소문을 내기를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할 때를 기다려서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연기가 나게 하니, (남산에 행차한)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는 무슨 연기냐고 묻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기를 ‘아마 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불 태우려나 봅니다’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왕이 다시 묻기를 ‘이는 누구 짓이냐?’고 하니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하니 왕이 말하기를 ‘네 짓이구나. 빨리 가서 구하라’고 했다. 춘추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고는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에 세상에 드러내놓고 혼례를 올렸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내용에는 바로잡을 대목이 하나 있다.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기라는 기록과 달리 당시 왕은 진평이었고 그 딸인 선덕은 공주였다. 최근에 공개된 『화랑세기』는 문희를 구출케 한 선덕을 ‘공주’의 신분이라고 명확히 적고 있다.

김유신은 정말로 누이동생을 태워 죽이려 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장작을 쌓아놓고 연기를 피웠을까. 여기에 김유신과 김춘추,그리고 문희로 이어지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김유신이 기획·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은 1인3역 드라마였다. 김춘추와 문희의 결합이 순탄했다면 김유신이 이런 축국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유신이 화형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든 것은 김춘추를 향한 ‘최후통첩’이었다. 그것은 “내 동생을 데려가라”는 겁박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평생 혈맹을 방불하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하지만, 혼인 전 문희와 김춘추가 관계를 맺던 이 무렵에는 둘의 긴장 관계가 계속됐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은 혼전 임신까지 하게 된 여동생을 정식 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김춘추를 극단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유신이 기획한 ‘드라마’는 먹혀들었고 둘은 마침내 혼인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김법민이라는 일세의 영웅을 낳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by 여송은



한데 여기에도 궁금증은 남는다. 도대체 김춘추는 왜 문희와의 혼인을 차일피일 미뤘던 것일까. 적잖은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말할 때 항용 전가의 보물처럼 인용하는 도구, 곧 김유신이 가야계라는 혈통 출신이었다는 신분적 한계를 들고 나오곤 했다. 다시 말해 김유신과 문희가 가야계라는 점이 신라의 주류로 진입하려는 김유신과 그의 가문에는 결정적인 하자로 작용했으며, 그러한 집안 내력의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비록 폐위는 되긴 했지만 진지왕의 직계 손자로서 정통 신라왕족의 혈통인 김춘추에게는 대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가야계라 혼인 망설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설명도 자가당착을 면치 못한다. 김유신은 이미 그 조부인 무력(武力)이 혁혁한 전과를 세워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는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대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를 발판으로 관직 품계도 최고인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그 아들이자 김유신 아버지인 서현(舒玄) 또한 이미 진평왕 51년(629년) 8월에 벌어진 백제와의 낭비성 전투 때 관위가 이미 제3위 소판(蘇判)이었다. 신분이나 혈통으로 보아 김유신은 당대 신라 주류의 어느 정통 혈통에도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김서현은 신라 왕실 공주인 만명(萬明)과의 결합으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김유신에게는 신라 정통의 혈통, 그것도 가장 존귀하다는 정통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이나 혈통에서 김유신은 절대우위와 비교우위를 아울러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가야계라는 신분·혈통상 한계를 근거로 김춘추가 문희와의 혼인을 미적거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김춘추는 문희를 피하려고만 했을까.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의문이 1989년과 1995년에 각각 필사본 형태로 발견된 『화랑세기』가 공개됨으로써 드러나게 됐다. 『화랑세기』는 일제 강점기, 궁내청 사서로 일했던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붓으로 베낀 것이다. 한데 이 필사본이 이름만 전하던 신라사람 김대문(金大問)의 그 『화랑세기』를 베낀 것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진위(眞僞) 논란은 이 글에선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를 역임한 32명의 전기를 담고 있는 『화랑세기』에 우리의 의문을 명쾌히 풀어주는 단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8세 풍월주를 역임한 춘추공(春秋公) 열전에 실린 글이다.

“유신이 일부러 (춘추) 공의 치마(裙)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꿰매자고 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바느질을) 시키고자 했지만 병 때문에 할 수가 없어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해 주었다. 유신은 자리를 피하고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문희와) 사랑을 나누었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했다. 그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량 궁주(寶良宮主)는 (16세 풍월주인) 보종공(寶宗公)의 딸로서 아름답고, 공과 몹시 금슬이 좋아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공이 몹시도 사랑해서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부쳤다. 유신이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는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고 따져 물었다.”


by 여송은



일부일처제 신라, 조강지처 있어 혼인 고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할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이다. 축국 경기를 통해 김유신이 일부러 찢은 김춘추 옷이 치마이며, 그에 달린 옷고름을 찢었다는 대목도 그 중 하나다. 당시에는 남자도 치마를 걸쳤다. 나아가 누이동생을 춘추가 머무는 방에 밀어 넣고는 김유신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도 추가한다. 또한 김춘추와 문희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 1년쯤 지나 문희가 훗날의 문무왕 김법민을 임신했다는 대목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춘추가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도 비로소 드러나고 있다. 다름아닌 보량이라는 김춘추의 정실 부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금슬이 좋은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더구나 둘 사이에는 딸이 있었기에 자기 애를 밴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정식 부인은 한 명밖에 둘 수 없었으며, 나머지는 첩이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차마 김유신의 여동생을 첩으로 들일 수는 없어 번민했던 것이다.

욕망이 동해 몸을 섞고 임신까지 시켰으나, 조강지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김춘추 . 그런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장작불 태워 죽이기라는 칼을 빼든 것이다. 김유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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