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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추적, 한국사 그 순간 -5-] 수수께끼 신라 재상, 김양도

by taeshik.kim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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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염촉은 바로 이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말한다.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자 법흥왕과 이차돈이 벌인 게임, 다시 말해 이차돈이 스스로 목숨을 청해 잘려나간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골자를 이룬다.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이 전개한 불교 포교 사업을 소개한 글이 있다.

  

“법흥왕이 없어진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절을 세우고자 했다. 절이 낙성하자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가사를 걸치고는 궁궐 친척들을 절의 노비로 삼는 한편 임금은 그 절에 주석하면서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했다.”

  

중간에 일화가 삽입됐다. “이 절 노비들은 지금도 왕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뒷날 태종왕(太宗王) 때 이르러 재보(宰輔·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에 귀의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이름을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 하니, 이들은 자기 몸을 바쳐 절의 노비가 되었다.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 또한 몰입하여 절의 노예로 삼았다. 두 집안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세운 절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다. 그 터가 정확히 어딘지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경주 평야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부터 불교는 이미 신라사회에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암자 비슷한 포교당 혹은 미니 사찰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흥륜사야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래 왕실에서 처음으로 세운 거찰(巨刹)이었다. 그처럼 역사가 유구하기에 법흥왕은 일부 왕족을 절에 희사해 부처를 시봉하는 ‘노비’로 삼기도 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시대에는 재상을 역임한 김양도라는 사람의 두 딸까지 스스로 절에 들어가 노비가 됐던 것이다.

 

흥륜사 자리에서 나온 영묘사靈廟寺 기와

  

화보와 연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양도의 두 딸이 절의 노비가 되는 과정을 『삼국유사』는 ‘사신(捨身)’이라 표현했다. 다시 말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자발적으로 절의 노비, 다시 말해 부처님의 노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장·서화·중국어 능통한 팔방미인]

김양도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혁혁한 전과를 낸 전쟁 영웅이면서, 대(對) 중국 외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런 그의 두 딸이 자발적으로 흥륜사 노비가 된 과정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노비가 된 모척의 가족과는 사뭇 사례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모척은 누구인가? 앞선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643년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빌붙어 성문을 열어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 변경 백제와 맞서는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인 대야성, 즉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를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대야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와 내통한 모척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사로잡혀 능지처참됐다.

  

이런 모척이 느닷없이 흥륜사에서 부활했다. 물론 모척은 죽고 없었지만, 그의 자손들은 노비로 함몰되어 흥륜사에 배속되었던 것이다.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의 모척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흥륜사 노비로 사역되는 운명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김춘추의 유명(遺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양도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언급은 『삼국사기』 두어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권제44 열전 제4에 수록된 ‘김인문(金仁問) 열전’ 말미를 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장안에서 죽은 사실을 전하면서 “그 무렵 해찬(海飡) 양도(良圖)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46 열전 제6에도 흡사한 기록이 보인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의 순으로 3명의 전기를 정리해 싣고 있는데,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이다. 그 말미를 보면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정체불명의 문헌을 인용해 “문장으로는 강수(强首)와 제문(帝文)·수진(守眞)·양도(良圖)·풍훈(風訓)·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하나, 제문 이하 인물들은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고 돼있다.

  

두 곳 다 김양도를 언급하고 있다. 서경은 장안을 지칭한다. 파진찬(波珍飡) 혹은 파미간(破彌干)으로도 불렸던 해찬은 신라의 17개 관위(官位) 체계에서 네 번째 서열로,재상급이다. 그러나 수상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뒤져보면 열전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행적이 많이 나와있는데도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 열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물, 김양도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우선, 그는 당시 중국어 실력이 출충했던 대중국 외교관이자 문장가였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사절로 파견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당시 외교관의 절대 구비 조건이 문장력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문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양도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태종무열왕 8년(661)에 채 진압되지 않은 백제군이 사비성을 공격해 오자, 대아찬으로서 대장군 품일(品日)을 보좌한 장군이었다. 나아가 문무왕 2년(662)에는 고구려 평양성 공략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조달해 주는 군량 수송 작전에 대장군 김유신을 보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 이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한 문무왕 8년(668) 전쟁에는 역시 대아찬으로 대당총관에 임명돼 출전했다. 요컨대 김양도는 일통삼한기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 중 최상위층을 형성한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흥륜사 일대

 

그러나 신라와 당이 일촉즉발의 대결을 앞둔 문무왕 10년(670) 정사(正使)이면서 김유신의 동생인 흠순과 함께 부사(副使)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들어갔다가 억류됐다 끝내 옥사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서는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하라 하고 양도는 억류해 감옥에 가두니,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했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했던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통이라 해서 특사로 선발돼 사죄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변을 당하고만 것이다.

  

김양도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권제5 신주(神呪)편에 실린 ‘밀본이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密本?邪)’라는 제목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적에 벙어리였다. 요망한 귀신의 농간으로 벙어리가 됐으나 밀본법사라는 법력이 뛰어난 스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물리쳐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독실한 불교 신도가 되어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과 아미타불 존상, 그리고 좌우 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그 불당을 금색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김양도는 문장과 서화·외국어에 능통한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 일촉즉발의 상황]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진노한 당 황제에 의해 옥사했다는 대목에서, 당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와 당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전쟁의 기운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례상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한데 당은 힘을 믿고 신라 사신, 그것도 재상을 죽여 버렸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협상은 없으며, 오로지 굴복 혹은 무력 징벌의 협박만 남았음을 당나라는 신라에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신라 사회 내부에 미친 충격파가 어떠했는지는 증언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전쟁 양상을 보면 신라가 가진 당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감할 수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을 진격하고, 다음달 4일에는 당군 수중에 들어가 있던 말갈군을 개돈양(皆敦壤)에서 대파했다.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에 대한 신라의 반격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곧이어 신라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받아들여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던 금마저(金馬渚)에 그 유민들과 함께 안치한 다음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

  

신라는 또 백제 옛 땅에 대한 공격도 개시해 82개 성을 일시에 탈취했다. 당이 저버린 약속을 신라는 무력으로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나긴 전쟁에서 신라는 마침내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15일 매초성(買肖城)에서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군 20만을 대파하고, 이듬해 겨울 11월 기벌포(伎伐浦)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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