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S & MISCELLANIES

[추적, 한국사 그 순간 -6-] 황음무도해서 쫓겨난 진지왕

by taeshik.kim 2018. 1. 20.
반응형

사도태후, 권력욕에 눈멀어 아들 몰아내고 왕 노릇

[중앙선데이] 입력 2016.11.20 00:38 | 506호 23면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이 집적한 고대 삼국의 괴담 중에 제목이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인 에피소드가 있다. 도화녀와 비형랑은 모자지간이다. 어머니 도화녀는 글자 그대로는 복숭아꽃 같은 여인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렇게 일컬었을까? 반면 그가 낳은 아들 비형랑은 그 의미를 종잡기는 힘들지만 하필 이름에 ‘가시나무(荊)’가 들어갔으니 추상(秋霜) 같은 느낌도 없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형랑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그 실체는 이 이야기 첫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풀린다.

  

“(신라)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은 시호가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년(576)에 왕위에 올라(옛 책에는 11년 기해년(579)이라 하지만 잘못이다)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리다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야기가 사륜왕 얘기로 먼저 시작한 까닭은 그 시공간이 신라 진지왕(재위 576~ 579) 시대이며, 나아가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진지왕이기 때문이다. 진지와 도화녀, 그리고 비형랑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세 축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누구인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삼국시대 정사인 『삼국사기』 그의 본기를 본다.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으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과 사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왕자로는 둘째인 그가 왕위에 오른 이유는 태자로 책봉된 형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지는 즉위한 그해(576)에 이찬(伊飡) 거칠부(居柒夫)를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國事)를 위임하고, 이듬해(577)에는 봄 2월에 신궁(神宮)에 제사했으며,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자 이찬 세종(世宗)에게 군대를 주어 격퇴케 했다. 3년(578) 가을 7월에는 중국 남쪽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백제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빼앗았다. 재위 기간이 워낙 짧은 탓도 있지만 이외에 이렇다 할 공적은 없다. 그러다가 재위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죽고 만다. 그의 죽음을 적으면서 『삼국사기』는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진지왕본기에 적힌 그의 재위 기간 행적 전부다.

 

[즉위한 해 거칠부에게 국사 위임]

진지왕이 죽을 때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불과 일곱 살에 즉위한 아버지 진흥왕이 536년생이고, 형 동륜이 태자로 책봉된 시점이 566년인 점 등을 고려할 때, 40대를 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병이 아니었다면 쿠데타와 같은 이상 사태로 폐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에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대목이 진지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위임했다(委以國事)’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왕 노릇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아마도 거칠부로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농락당한 셈이다.

 

복사꽃. 흔히 미인을 복사꽃에 비겼다. 도화녀가 바로 그렇다.

  

진지왕의 퇴위 원인에 대해 『삼국사기』는 자연적인 죽음을, 『삼국유사』는 폐위를 각각 거론했다. 『삼국유사』에 따른다면 쿠데타로 쫓겨났다. 한데 그 이유가 황음무도(荒淫無道)다. 절제 없이 주색잡기 같은 음란한 짓을 함부로 일삼는다는 뜻이다. 이런 그를 몰아낸 주체를 국인(國人)이라 했다. 어느 특정한 개인을 우두머리로 내세우기 힘들 때 흔히 쓰는 표현이 국인이다.

  

이런 이유로 폐위된 금륜왕은 나중에 어찌되었을까?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에서는 “이 해에 왕이 폐위되어 죽었다(是年王見廢而崩)”고 한다. 그렇다면 진지왕은 쿠데타로 밀려나서 곧바로 자연적인 죽음을 맞았거나 혹은 쿠데타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셈이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그가 죽은 시점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579년을 거론한다.

  

한데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에는 말이 안 되는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니라 죽어 귀신이 된 그가 도화녀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맞아들여 사랑을 나누어 낳은 아들이 비형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주의)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한 백성에게 딸이 있었는데 자색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에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관계를 갖고자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비록 천자의 위엄이라도 남편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이겠다면 어찌 할 것이냐?’고 하니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다른 남자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왕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니 ‘그렇다면 가능합니다’고 했다. 왕은 그 여자를 놓아 보내주었다.”

  

이를 보면, 도화랑은 당시 유부녀였다. 그러다가 왕이 폐위되어 죽는 일이 생기고 그 2년 뒤에는 도화랑의 남편도 죽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지 열흘 뒤 갑자기 밤중에 왕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 방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그러면서 귀신이 된 진지는 “이제는 네 남편이 없으니 괜찮겠느냐?”고 해서 마침내 도화랑의 허락을 얻어 합방하게 된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7일 뒤에 홀연히 왕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는 이로 인해 태기가 있고 달이 차서 해산을 하려는데 천지가 진동하면서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이렇게 태어났기에 그랬는지 비형은 늘 귀신과 놀면서 그들을 부리니, 심지어 그들을 동원해 개천에다가 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길달(吉達)이라는 휘하 귀신을 왕의 근신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다른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인 일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귀신들이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서 달아났다”고 한다. 이후 비형은 당연히 귀신들을 물리치는 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악령이 출몰하는 나무? 비형랑은 악귀의 우두머리였다.

 

진지와 비형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른 까닭은 김춘추 때문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다. 진지왕에게는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이라 하는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춘추 아버지다. 종래에는 용수와 용춘이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표기로 알았지만, 『화랑세기』를 통해 형제로 밝혀졌다. 용수가 형이다. 한데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난 더 재미난 사실은 김춘추는 본래 용수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죽자 그 아내가 동생인 용춘의 부인이 되면서 용춘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는 습속이 있었다.

 

[비형랑은 김춘추 아버지의 이복형제]

비형랑은 용수-용춘 형제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이었다.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서제(庶弟)인 비형랑이 힘써 낭도(郎徒)를 모아서 형인 용춘을 도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지는 도대체 어떠했기에 황음무도하다 해서 쿠데타의 희생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귀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이 비밀을 우리는 오래도록 풀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일거에 사정이 변했다. 13세 용춘공 열전에 의하면, 폐위되어 궁궐에서 3년간 유폐 생활을 더 하다가 죽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어 귀신이 된 지 2년 만에 진지왕이 도화녀라는 여인과 관계해서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괴담’을 비로소 이해한다. 다시 말해, 비형랑은 왕위에서 쫓겨난 진지왕이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에 도화녀와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었다.

 

[진지왕, 형 죽자 형수를 황후로 삼아]

한데 용춘공 전에는 더 이상한 대목이 있다. “지도가 처음에는 동(銅) 태자(동륜 태자) 궁에 들어갔다. 태자가 아직 죽기 전이었을 때 (지도는) 금륜왕(金輪王=진지왕)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그러다 동륜 태자가 죽고, 금륜이 즉위하게 되자 (지도를) 황후로 삼아 (용춘)공을 낳았다.”

  

이로 보아 지도는 애초에는 진흥왕 큰아들이자 태자였던 동륜에게 시집갔지만, 그 상태에서 동륜 태자 동생인 금륜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그러다가 동륜이 죽는 일이 발생하고, 금륜이 태자가 되고, 보위에까지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금륜왕이 황음(荒淫)한 짓을 일삼아 폐위되어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붕어(崩御)”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유궁이란 갇힌 궁궐이라는 뜻이라, 유폐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정말로 황음무도했을까? 『화랑세기』에도 이런 표현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앞에서 본 용춘공전 말고도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 열전에도 “진지대왕은 미실(美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도 호색방탕(好色放蕩)해 (어머니이자 진흥왕 왕비인) 사도태후가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도태후가 미실과 의논해서 진지왕을 폐위하기로 하고, 실제 그 일을 지도의 오빠인 노리부(努里夫)한테 맡겼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진지왕은 그 자신이 호색 방탕한 습성이 있었던 듯하고, 그래서 어머니 사도와 왕비 지도, 왕비의 오빠 노리부, 그리고 미실이 합세한 세력에 밀려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친위 쿠데타로 쫓겨난 것이다.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손위처남에게까지 ‘찍혀서’ 폐출된 것이다.

  

다른 데를 보면, 쿠데타 가담자가 더 있었다. 미실의 정식 남편인 세종(世宗), 그리고 미실의 남동생인 미생(美生)도 한 패가 되어 진지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진지왕의 어머니 사도 태후의 행보다. 『화랑세기』를 보면 그녀가 “태자를 왕위에 올려놓고는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면서 신왕(新王)을 통제하고, 말보(末寶)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을 상대등으로 삼아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황종공이란 거칠부를 말한다.

  

『삼국사기』에서 진지왕이 즉위하자마자 국사를 맡겼다는 그 거칠부다. 사도태후는 아들을 몰아내고 그 자신이 몸소 왕 노릇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운 엄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권력욕에 눈이 먼 여인, 자꾸만 작금의 대한민국 누군가와 오버랩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