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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4년 庚午(1570·선조 3) 3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임천(林川)에 임금님 태(胎)를 묻었다.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 조정 공론이 선대 전례에 따라 땅을 골라 태를 묻고자 하여 잠저(潛邸)에다가 태의 소재를 물어 그 동산 북편 숲 사이에서 찾아서는 그것을 묻을 곳을 가렸다. 강원도 춘천 땅에 묻으려고 산역(山役)을 거의 끝내고 정혈(正穴)을 살폈더니 그곳은 옛날 무덤이었다. 그래서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 지금의 금천(金川))으로 옮겨 터를 닦으니 정혈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힌 것을 발견해, 그곳도 옛날 무덤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이는 정혈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단지 작은 항아리뿐이요 다른 것은 없으니 이것 때문에 대역(大役)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고, 의논한 결과 그곳에 태를 묻기로 했다. 산역을 거의 마칠 무렵 조정에 이 소식이 알려져 헌부(憲府)에서는 구사맹을 아뢰지 아니한 죄로 논핵하여 파면하고, 또 대신들이 더럽혀진 곳에다 태를 묻을 수 없다 해서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옮긴 것이다. 그때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는데, 돌을 운반하느라 고생했다. 한번 임금의 태를 묻는 일로 세 도(道)가 피해를 보았으니 식자들이 탄식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그 숭고함이 이미 극에 이르러 있다. 때문에 신하된 이는 임금의 뜻대로 받들기만 하는 것을 존경이라 여기지 않고 좋은 일을 실행하도록 책망하는 것을 공손으로 여겨야 한다. 흉년을 당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진 때에 대신과 대간(臺諫)이 임금을 바로잡아 민생을 구제하는 데 급급하지 못하고, 태경(胎經)의 설(說)에 현혹되어 누차 임금의 태를 옮겨 삼도의 민력을 다하고도 가엾게 생각하지 않으니, 무어라 해야 하겠는가. 산릉(山陵)을 택하는 일이 태를 묻는 일보다 더 중요한데도 오히려 옛날 무덤을 피하지 않고 남의 분묘(墳墓)를 파내기까지 하는데, 태를 묻는 데만 옛 무덤을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국내의 봉만(峯巒)은 수효가 한정되고 임금의 역대(歷代)는 무궁할 것이니, 태 묻는 곳을 두 번 쓰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태 묻을 곳을 국외(國外)에서 구할 것인가, 이는 계승해 나갈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 藏胎於臨川。初 上卽位。朝議欲依 祖宗例擇地藏聖胎。求於潛邸。得之園北松間。乃擇地。將藏于江原之春川地。功役垂畢。審其正穴。是古藏也。乃移于黃海之江陰。開基之際。去正穴數十步外。有埋小甖者。或疑其古藏。觀察使具思孟曰。此非正穴。且只有小甖無他物。不可以此輕廢大役。衆議乃定。功役亦垂畢。朝廷聞其事。憲府論思孟不啓稟之罪罷之。大臣以爲不當藏于汙穢之處。仍移于忠州之林川。于時百姓飢饉。勞於運石。一藏聖胎。害遍三道。識者嘆之。

謹按。人君崇高已極。故人臣不以承奉爲敬。以責難爲恭。當凶荒生民塗炭之際。大臣臺諫不汲汲於匡 上救民。而惑於胎經之說。屢移聖胎。竭三道民力。而莫之恤。謂之何哉。山陵卜兆。重於藏胎。而猶不避古藏。至於掘人墳墓。而藏胎獨避古藏何歟。且國內峰巒。只有此數歷世無窮。藏胎不可再用。則抑求之境外乎。其非可繼之道明矣。


태를 묻는 일을 안태(安胎)라고 한다. 이에서 안은 안장 혹은 매장한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율곡의 증언이 아니라 해도, 그 행위는 여러 모로 임금님 시체를 묻는 매장 행위와 계속 비교되곤 했다. 선조는 독특하다. 그 내력이 도저히 임금이 될 자격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느닷없이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각중에 왕이 되어 용상에 앉았다. 그 이전 왕들은 장자가 아닌 일이 많았지만, 예외 없이 적통 왕자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왕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자마자 왕자의 예로써 태를 안장했다. 하지만 선조는 달랐으니, 자격이 없는 왕실 떨거지 상태에서 느닷없이 왕이 되니, 그 태를 도로 찾아내어 이젠 왕에 걸맞는 안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율곡은 이에서 그 과정을 정리한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듯, 초반기 두 군데 안태할 장소로 택한 곳이 묘하게도 이전에 쓴 무덤이 있던 곳이었다. 그것이 불길하고 불결하다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데 율곡은 이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폐를 백성들에게 끼쳤기 때문이다. 안태보다 더 중요한 의식인 왕릉 조성에는 남의 무덤이라 해서 자리를 피하지 않는데, 그보다 덜 중요한 안태를 하면서 왜 이런 지랄발광을 떠냐는 요지다. 

일반 사대부가에서는 태를 집안 어딘가에 묻었음을 추찰한다. 안태 의식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가장 확실한 출발은 김유신이거니와, 그의 열전에서 김유신 태는 출생지인 진천에다가 묻었다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서 이르거니와, 그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했으니, 김부식이 증언한 그의 태실은 지금도 엄존한다. 

기타 고려시대엔 안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그 가장 확실한 증좌가 마왕퇴 백서에 보인다. 그것이 생성된 연대는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중반이거니와, 이로써 잡는다면 태를 안장하는 의식은 중국에서는 적어도 서한시대 초기 이래에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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