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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by taeshik.kim 201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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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인 김춘추(金春秋)가 죽어 얻은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를 합친 이름. 태종이 묘호이고, 무열왕이 시호다. 그의 생애 정리는 '김춘추(金春秋)' 참조.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을 섬겨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特進)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원년(654) 여름 4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살펴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가다듬어 정하게 하였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였다. 2년(655) 봄 정월에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고,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으므로,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에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白鹿]을 바쳤다.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이었다.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3년(656)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와 마침내 군주(軍主)에 임명되어 장산성(獐山城)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가을 7월에 아들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4년(657) 가을 7월에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의 땅이 불타더니 3년만에 꺼졌다. 흥륜사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그것을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5년(658) 봄 정월에 중시 문충(文忠)의 [벼슬을] 바꾸어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왕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6년(659)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이를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에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는데, 마치 앞서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신은 비록 백골[枯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기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그리고는] 말을 끝내자 사라졌다. 왕이 매우 놀랍고 이상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7년(660)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정방(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리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 정방(定方)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나라와 신라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아가는데,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3일에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 등의 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인을 노략질하였다. 26일에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泗城)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그와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어 이를 쳐 쫓았다. 적이 물러가 사비성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서 모여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 중에 배반하여 이에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왕에게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禮城)을 쳤다. 18일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5백 명을 목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여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였는데, 계금졸(衿卒) 선복(宣服)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軍師) 두질(豆迭)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 미지활(未知活), 보홍이(寶弘伊), 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을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8년(661)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서 군영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생각지도 않게 치니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 명을 목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5월 9일<또는 11일이라고도 하였다.>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가 공격하는데, 포차(抛車)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니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城主) 대사 동타천(冬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마소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압독주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고종이 [무열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간오(刊誤) : 선덕왕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인평(金仁平)이고, 진덕왕 남편은 갈문왕 김기안(金基安)이다. 무열왕(武烈王) 어머니는 선덕 동생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읍(邑)에 세보(世譜)가 있으니 그 전하는 바가 이와 같다. 여러 사서에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인문 열전 : 김인문(金仁問)은 자(字)가 인수(仁壽)이며 태종대왕 둘째 아들이다....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고종이 “바다를 건너 와 조회한 충성이 가상하다.”고 하여 특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영휘 4년(진덕왕 7년: 653) 황제의 허가를 받고 귀국하여 부모를 찾아 뵈니 태종대왕은 그에게 압독주(押督州)[현재의 경북 경산시] 총관(摠管)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니, 태종이 그 공을 포상하여 식읍 300호를 주었다. 신라가 여러 차례 백제의 침공을 받자,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고 숙위하러 가는 인문을 통하여 군사를 청하게 하였는데, 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神丘道) 대총관(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묻자,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제서(制書)를 내리어 [인문을] 신구도(神丘道) 부대총관(副大摠管)에 임명하고 군중(軍中)에 나갈 것을 명하였다. 드디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이르렀는데,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맞이하게 하였다. [당군이] 웅진구(熊津口: 금강 어구)에 이르니, 적군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등을 포로로 잡고 당으로 돌아갔다. 대왕이 인문의 이룬 공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각간으로 높여주었다. 그 후 곧 [인문은]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령윤 열전 : 김령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飡)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宰)로 삼았다. 윗 사람을 충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했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백제를 치게 하자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굴이 “예.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흠운 : 영휘(永徽) 6년(무열왕 2년.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밤을 틈타서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혼란을 타서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어 말하였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貴骨]으로서 대왕의 사위[半子]인데 만약 적군의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하는 바가 될 것이고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였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이 서로 더불어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步騎) 당주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으니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고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전투상황]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을까 걱정하여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하고 그 행동을 본 후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으며,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대문이 말하기를 『임금을 보좌하는 어진 인물과 충신이 이로부터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의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관창 열전 : 관창(官昌)<또는 관장(官狀)이라고도 하였다.>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로 모습이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 때 말 타고 활쏨에 능숙하였다. 대감(大監)인 어느 사람이 태종대왕에게 그를 천거하여 당나라 현경 5년 경신(태종무열왕 7: 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黃山)[현재의 충남 논산지역] 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자 아버지 품일이 말하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손가?” 하였다. 관창이 “예” 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백제의 원수(元帥) 계백의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그가 어리고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 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내었다. [아버지]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 하였다. 전군[三軍]이 이를 보고 용기를 내어 뜻을 세워 북을 요란하게 쳐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위계를 주고 예로서 장례를 지내주었고 그 집에 당나라 비단 30필, 20승포 30필과 곡식 100섬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취도 :  취도(驟徒)는 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기록에 그의 성이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이었는데 맏이는 부과(夫果), 가운데가 취도, 막내는 핍실(逼實)이었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도옥(道玉)이라는 이름으로 실제사(實際寺)에 머물고 있었다. 태종대왕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 오자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도옥은 그 무리에게 말하였다.“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로서 상등은 학업[道]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를 실천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데,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고 취할만한 한 가지 착한 일도 없으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낫겠다!”승복[法衣]를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생각컨대 이는 달려가서 보병[徒]이 되었다는 뜻인 듯하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군대를 따라 전선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賊)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필부 : 필부(匹夫)는 사량인으로 아버지는 아찬 존대(尊臺)이다. 태종대왕이 백제, 고구려, 말갈이 서로 가까워져 침탈을 함께 꾀하자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인재로서 그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자를 구하였는 데 필부로써 칠중성(七重城)에 달린 현령을 삼았다. 그 다음해 경신(태종 7년: 660) 가을 7월에 왕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는데 이때 고구려에서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출동시켜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필부가 이를 지키고 싸운 지 20여일이 되자 적의 장수가 우리의 병졸이 정성을 다하여 싸우며 뒤돌아다보지 않는 것을 알고서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여겨 문득 철수하고자 하였다. 반역의 신하 대나마 비삽(比)이 몰래 적에게 사람을 보내 알리기를 “성내의 식량이 다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공격하면 반드시 항복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적이 드디어 다시 공격하여 왔다. 필부가 이를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에 던지면서 군사에게 고하였다. “충신과 의로운 병사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판의 싸움에 달렸다.”이에 분연히 주먹을 쥐고 한번 외침에 병든 사람까지 모두 일어나 다투어 먼저 성에 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병사의 기운이 피로하고 지쳐 죽고 부상한 자가 절반이 넘었다. 적이 바람을 타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여 갑자기 쳐들어오니 필부는 상간(上干) 본숙(本宿), 모지(謀支), 미제(美齊)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아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하였다. 팔다리와 몸이 찢어지고 잘리어 흐르는 피가 뒤꿈치를 적실 정도였다. 이에 필부 등이 쓰러져 죽으니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피 통곡하고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3(열전 제3) 김유신 :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었다. 아들 다섯 사람을 낳으니, 맏이는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었다. 딸은 넷이고, 또 서자(庶子)로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후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 대왕이 부인에게 말하였다.“지금 중앙과 지방이 편안하고 군신이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곧 태대각간의 공이니, 생각컨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어 조심하고 훈계함이 짝하여 숨은 공이 컸으므로,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일찍이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남성(南城)의 조(租)를 매년 1천 섬씩 주겠소.” 후에 흥덕대왕이 공[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책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양 열전 : 김양(金陽)은 자가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세력있는 집안으로써 모두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공(法空) :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삼국사기 권 제35(잡지 제4) 지리 :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 하서량(河西良)<또는 하슬라(何瑟羅)라고도 썼다.>이었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의 북쪽 경계인 명주(溟州)는 대개 예(濊)의 옛 나라였다.』라고 하였으니, 전사(前史)에서 부여(扶餘)를 예의 땅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선덕왕 때에 소경(小京)으로 삼고 사신(仕臣)을 두었다. 태종왕 5년, 당나라 현경(顯慶) 3년(658)에 하슬라 땅이 말갈에 연접하였다고 하여, 경(京)을 폐지하고 주(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명주(溟州)로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이름이 법민(法敏)이니 태종(太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고 비는 자의(慈義)인데 눌왕후(訥王后)라고도 하니, 선품(善品) 해간(海干)의 딸이다. 신유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 능은 감은사(感恩寺) 동해 속에 있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7년(687) ... 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의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하였다. 대신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리고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계승하여 지킴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돌보심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訟事)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것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如在] 영혼 앞에 정성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을 없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를 갖추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넉넉한 것을 자손들에게 남겨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강수 열전 :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唐)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니, 그 글에서 이해되지 않는 데가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왕 앞에서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서로 늦게 만나게 됐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름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라고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 불러야겠다” 라고 하고는, 그에게 당 황제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했다. 글이 잘되고 뜻을 다 폈으므로 왕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했다. 강수는 일찍이 살 길을 도모하지 않아 집이 가난했으나 즐거워했다.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해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00섬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최치원 :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 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 황제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토벌하니 고구려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 지방의 전난 평정에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을 계속 짓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고구려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고는 개원(開元) 20년(발해 무왕 14: 732)에 중국을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칠 때 저희 왕 김모를 태위(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으나 깊은 겨울 눈이 많이 쌓이고 양국 군대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00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평화로우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유학의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표(表)를 받들고 이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함에 무릇 극도로 간청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하고자 합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무장사(䥐藏寺) 미타전(彌陀殿) :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䥐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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